[김태우 칼럼] 이순신 제독 탄신 474 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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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5.02 09:58:43
  • 최종수정 2019.05.03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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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모두 기억하고 기려야 할 한민족의 영웅 이순신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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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28일은 왜군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을 구해 낸 이순신 장군의 474주년 탄신일이었다. ‘김일성 역사’로 황칠이 되어 있는 북한에서는 태양절을 지내느라 법석을 떨지만, 4월은 한반도가 분단되지 않았던 조선 시절인 서기 1545년에 이순신 제독이 탄생한 달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 한성에서 태어났으나 빈곤으로 인해 어려서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했고, 28세가 되던 1572년에 무관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4년 뒤인 1576년에 비로소 무과에 합격하여 32세라는 늦은 나이에 북방의 말단 수비장교로 무인생활을 시작했다. 이순신은 정읍 현감을 거쳐 1591년 영의정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될 때 까지만 해도 평범하게 공직생활을 해온 무관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위국헌신(爲國獻身)의 무인(武人)로서의 그의 자질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순신은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수군의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확충하였으며, 거북선, 판옥선 등의 함선을 건조하고 현자총통 등의 무기를 제작하고 전투식량을 비축했다. 당시 조선의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날을 지새우고 있었지만,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인 1592년 4월 12일까지도 거북선을 점검하고 화기를 실험한 것으로 적혀 있다. 이후 7년간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온통 쑥대밭이 된다. 4월 13일 부산성 전투와 다대포 전투를 거쳐 부산지역에 상륙한 15만 왜군은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 등을 통해 경상도와 충청도를 유린했고, 한강 전투, 용인 전투, 여주 전투 등을 거치면서 5월초에 한성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했다. 1953년에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거느리는 지원군이 참전하여 평양을 되찾고 한성으로 진격하지만 이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일본이 재침할 때까지 지루한 강화회담이 지속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조선에서 치러진 전투는 총 70회가 넘으며 여기에는 30여 회의 해전도 포함된다. 이순신은 자신의 지휘 하에 치른 23회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23전 23승이라는 불후의 신화를 남기는데, 해전사에 길이 남아야 할 전투들을 들자면 그의 첫 해전이었던 옥포 해전을 비롯하여, 사천 해전, 당포 해전, 한산 대첩, 부산포 해전, 명량 해전, 노량 해전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 그리고 노량 해전은 이순신의 3대 대첩이라 불린다. 이 3개의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은 적은 수의 함선으로 엄청난 양적 우세를 가진 왜군을 격파했다.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한산 대첩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조선 수군을 지휘한 이순신 제독은 학날개 전법을 사용했다. 이는 수적으로 열세인 아군의 함선들로 학날개 모양의 반타원을 만들어 적들을 그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격파하는 포위 섬멸 전술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때마다 물길의 시간과 때를 파악하여, 왜군의 배들이 좁은 해협을 통과하기를 기다렸다가 길목에 배치한 함선으로 공격하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이 전술은 한산 대첩에서 큰 효과를 발했다. 이순신은 한산 대첩 직후에 한산도에 운주당이라는 건물을 지어 작전을 토의하고 부하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본거지로 삼았는데, 요즘으로 치면 해군 작전본부인 셈이다.

이후 이순신은 정치적 모함을 받아 1597년 2월 삼도수군통제사 직위를 박탈당하고 죄인의 신분으로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위기에까지 몰렸다가 방면되어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그동안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된 원균은 정유재란으로 다시 조선을 침공한 왜군과 맞붙어 1597년 7월 칠전량 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한다. 이후 조선 수군에게 남겨진 것은 판옥선 12척뿐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4년동안 구축해 놓은 조선 수군이 와해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수군통제사에 보임했고, 1597년 10월 25일 이순신은 12척의 함선으로 133척의 왜군과 맞서 싸워 승리하는데, 이것이 명량 해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바다로 조류가 빠른 울돌목으로 왜군 함선들을 유인하여 대파하는 명장으로서의 기지를 발휘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으려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라는 이 말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 대첩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한 훈시였다.

이후 이순신은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는데,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1598년 2월에 이순신이 8,000여 명의 병력과 53척의 판옥선을 거느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1598년 8월 18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 왜군은 철군을 서두르게 되는데,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 함대가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왜군과 벌인 마지막 해전이자 조선 수군이 승리한 최대 규모의 해전이 노량 해전이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적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다. 이순신 장군은 아군의 동요를 염려하여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1598년 12월 16일부로 생을 마감했다.

이순신 장군은 숱한 전투를 치르면서도 많은 모함을 받아 세 번에 걸쳐 파직되고 감옥에 두 번 갔으며 두 번에 걸쳐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 선조 임금은 이순신이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했다고 치하하면서 그에게 사후(死後) 우의정직을 내렸고 그리고 6년 후 좌의정 겸 1등 공신으로 책정했으며, 이후 광해군 임금은 영의정직을 내렸다. 이순신 장군은 사후 45년에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조선조를 통틀어 이 시호를 받은 사람은 11명뿐이었다.

이렇듯 이순신은 무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54세의 나이로 노량 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우국충정 명장으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그의 생애, 리더십, 살신성인, 나라사랑, 멸사봉공, 위국헌신 등은 오늘날에도 후세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세계의 전사가들은 이순신의 한산대첩을 트라팔가르 해전,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등과 함께 세계 4대 해전으로 평가한다. 트라팔가르 해전은 1805년 10월 21일 영국 해군과 프랑스 및 스페인 연합합대가 벌인 전투로, 넬슨이 이끄는 영국함대가 연합함대를 격멸하고 나폴레옹을 패망으로 몰고 간 역사적 해전이었다. 이순신의 눈부신 승리 역시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패망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진실로, 이순신 장군은 남북한 모두가 기억하고 기려야 할 한민족의 영웅이었다. 광화문 광장에 우뚝 선 이순신의 동상은 오늘도 충정어린 눈빛으로 서울을 내려다보고 있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전 통일연구원장, 전 국방선진화위원회 소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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