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우리 경제는 2019년 1/4분기에 전기 대비 마이너스 0.3% 역(逆)성장을 했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대 폭의 마이너스 성장이다. 투자와 수출이 전기 대비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구체적으로 설비투자는 전기 대비 마이너스 10.8%, 수출은 마이너스 2.6% 역성장 했다. 투자부진은 미래에 대한 전망이 밝지 않음을, 수출부진은 수출산업의 경쟁력 저하를 반영하고 있다.

최근 한국경제의 저성장은 ‘구조화’되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2018년 한국의 경제성장률(2.66%)이 오히려 미국(2.89%) 보다 낮았다는 것이다. IMF외환위기, 메르츠 사태 등 외부요인에 의하지 않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우리 성장률이 미국보다 낮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한·미간의 성장률 역전은 충격적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친(親)시장·감세정책과 반(反)시장·증세정책이 가른 역전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정부는 반대의 길을 갔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12월 증세를 단행했다. 조세저항을 완화하기 위해 ‘수퍼 리치에 대한 핀셋증세’라는 정치적 수사(修辭)가 동원됐다. 반면 미국은 2017년 12월 대규모 감세를 단행했다.

증세로 우리나라의 최고소득세율은 42%(5억원이상)로 증가했다. 소득세율의 10%를 지방세로 할증 과세(surcharge) 하는 것 까지 감안하면 총 최고 소득세율은 46.2%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5%로 2018년 현재 OECD 국가 중 7위이다. 2007년 이후 OECD 35개국 중 20개국이 법인세를 낮췄지만 한국은 역주행 했다. 한국의 법인세율은 OECD 평균 법인세율 21.5%를 웃돌고 있다. 반면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1986년 레이건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 이후 31년 만에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크게 낮췄다.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낮췄고, 개인소득세 최고세율도 ‘2025년까지’ 라는 단서를 달아 39.6%에서 37%로 내렸다. 이에 따라 한국은 미국보다 더 높은 소득세와 법인세를 부담하고 있다.

세계 각국이 사실상의 세율인하(tax cut)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이유는 간명하다. 세수 결손 이상의 긍정적 효과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법인세율이 낮아지면 근로자에 대해 급여를 올려줄 수 있고 주주에 대한 배당 여력도 커진다. 협력업체에게 납품단가를 넉넉하게 쳐준다면 협력업체 직원의 급여도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법인세를 낮춰주면 해외로 나갔던 기업들이 본국으로 돌아오는 reshoring이 일어날 수 있다. 법인세를 높이면 반대 현상이 벌어진다. 소득세 인하는 직접적으로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증가시킨다. 감세는 생산된 국민소득 중 ‘정부의 몫’을 줄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 민간부문으로 소득이 환류 된다. 가계의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은 논리적으로 보면 감세 기조 하에서 작동하게 돼있다. 따라서 가계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 소득의 선순환을 꾀하겠다면서 한편으론 증세를 꾀한 문재인 정부의 정책 행태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증세를 통해 복지지출을 늘리겠다면 이는 전형적인 ‘케인즈적 접근’이다. 그렇다면 ‘소득주도성장’ 대신 ‘재정주도성장’이라는 제 이름을 찾아가는 것이 순리다.  최근의 한·미 간 성장률 역전은 돌발적인 현상이 아니다. 증세와 감세 그리고 친시장과 반시장 정책의 효과가 누적되면서 나타난 예측가능한 결과다. 

임금주도성장(wage led growth)을 소득주도성장으로 비틀었다

한국은 여전히 소득주도성장의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책은 ‘과학적 지식과 실증적 증거’에 기초해 신중하게 추진돼야 한다. 국가 정책은 기업 전략과 차원이 다르다. 기업 전략은 다소 위험이 따르더라도 큰 성공보수를 기대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실패하더라도 ‘국지적 실패’로 그 범위가 좁혀진다. 그러나 국가정책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남들이 안 간 길보다 다져진 길’을 가는 것이 정석이다. 문재인 정부가 전대미답(前代未踏)의 ‘소득주도성장’을 주창할 때 많은 비판적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정책으로 채택하기 전에 ‘그 이론적 근거가 무엇이며 외국의 성공사례’가 있었는지 성찰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확신편향에 빠진 그들이 이러한 충고를 들을 리 없다.

문재인 정부는 ‘포스트 케인지안’의 임금주도성장(wage led growth)을 차용하면서, 자영업자를 의식해 작명만 ‘소득주도성장’으로 비틀었기 때문에 소득주도성장은 태생적으로 논리적 정합성을 가질 수 없었다. 임의적 비틀음이 원죄(原罪)인 것이다. 논리적 취약함에도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에 너무나 많은 것(all-in)을 걸었다. 소득주도성장은 문재인 정부의 명실상부한 ‘정책 플랫폼’으로 기능했다. 소득주도성장이 무너지면 여기에 연계된 모든 정책이 자동적으로 와해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최악의 경우 소득주도성장은 모든 정책오류의 원천 즉 ‘근원적 오류’(mother fallacy)가 될 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같은 우려가 현실화 되고 있다. 그 방증이 2018년 한미간 경제성장률 역전이고 또한 2019년 1/4분기 역성장이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에 목을 맨 것은 운명적이다. 그들의 편협한 ‘좌파 세계관’이 그들을 그 길로 밀어 넣었다. 그들은 시장실패를 단정했고 낙수효과를 부정했으며 양극화를 과장했다. 국가가 적극 개입하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불평등으로 붕괴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리고 ‘분배를 통한 성장’의 정책 사고를 굳게 견지했다. 소득주도성장이 바로 ‘분배를 통한 성장전략’인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이 인기를 끈 이유

이론적으로 족보가 없고 실증적으로 성공사례가 없음에도 소득주도성장은 정치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안에 ‘대중이 반길만한 것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은 소득주도성장을 통해 그동안 들어왔던 ‘생산이 먼저이고 분배가 나중’이라는 통념이 뒤집히는 것을 목도했다. ‘분배를 통해 성장을 꾀하겠다’는 데 대중이 반기지 않을 리 없다. 근로자의 착각도 인기에 일조(一助)했다. 근로자들은 최저임금이 오르더라도 “높아진 최저임금에서 자신의 일자리가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임금이 높아지면 당연히 해고 위험도 높아지지만 근로자는 보고 싶은 것만 봤다. 그들은 실직 가능성을 일부러 외면했다. 소득주도성장은 인기를 등에 없고 거침없이 ‘정책의 옷’을 입었다. 이것이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하지만 구호가 실체일 수는 없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렇다면 “성장을 이끌 분배할 그 소득은 누가 어떻게 생산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지만 함구하고 있다. 어딘 가에 분배할 그 무엇이 숨겨져 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결국 소득주도성장의 논리 전개는,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고 해(解)를 먼저 제시하고 거기에 맞춰 문제를 내는 식”이다.

소득주도성장의 주장은 간명하다. 가계가처분소득을 높여 가계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해줘야 소비가 늘고 경제가 선순환 한다는 것이다. 소득주도성장을 격발시키는 방아쇠는 가계소득 증가다. ‘최저임금 인상’은 소득주도성장의 가장 중요한 정책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계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하는 데 최저임금 인상만큼 더 좋은 대안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집권하고 바로 2018년 최저임금을 전년 대비 16.4%, 금액으론 1060원 오른 7530원으로 정했다. 최저임금인상은 당연선(當然善)으로 ‘성역시’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2019년 최저임금을 전년대비 10.9% 인상해, 8350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되었던 주휴수당(주당 소정의 근로를 제공한 경우 1주일에 하루 유급휴가를 주는 제도)을 수면(水面) 위로 끌어올려 법제화했다. 이로써 주휴수당까지 포함하면 최저임금은 거의 1만원이 되었다. 이 정도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이면 ‘긴급 경제명령’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정책을 빙자한 ‘폭거’가 아닐 수 없다. 시장에서 결정되어야 할 생산요소 가격을 정부가 정치적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참담했다. 최저임금인상 발(發) ‘고용절벽과 소득분배 악화’가 그것이다.  

정책교정능력 상실한 문재인 정부

무릇 모든 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 ‘예기치 못한 결과의 가설’(the hypothesis of unintended  consequences)이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정책의 실패 조짐이 보이면 이를 인정하고 궤도를 수정하면 된다. 정책실패를 인정하는 것도 용기이다. 그만큼 정책교정 능력이 중요하다.

문제는 청와대의 현실인식이다. 2018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우리 경제 체질을 바꾸는 의미 있는 결정”이라고 자평했다. 여당은 “한계기업이 조정되고, 자영업자·소상공인 부담에 대한 정부 대책이 일정 효과가 있다면 일자리가 많아지고 소득성장을 주도할 것”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이 경제체질을 바꾸는 유효한 전략일 수는 없다. “각종 정부대책이 제대로 효과를 낸다면” 소득주도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란 논평은 ‘가정법’이다. 정책이 ‘희망사항’일 수 없으며 경제논리가 ‘가정법’에 근거할 수는 없다.

김동연 부총리 후임으로 부임한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소득주도성장 감싸기에 여념이 없다. 그의 소득주도성장 옹호는 과유불급이다. 2019년 2월 22일 정부 서울청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해 "문제가 되는 정책은 보완해나가야 하지만, 더 강화해야 할 정책은 속도를 내서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득주도성장이 꼭 최저임금 인상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최저임금인상=소득주도성장’의 정책 사고를 신주 모시듯이 한 그들이다. 아니었다면 ‘왜 최저임금인상’에 그토록 목숨을 걸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이 저소득층의 사회안전망을 보강하는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견강부회가 아닐 수 없다. 사회안전망 강화와 소득주도성장은 층위(層位)가 다른 문제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사회안전망 강화를 위해 정책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정책 어젠다였기 때문이다. ‘소득주도성장’을 위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한다는 것은 억지가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임금을 확보하게 하고 저소득층의 생계비를 경감시키는 것”도 소득주도성장의 일환이라는 주장도 설득적이지 않다.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저소득층의 생계비 부담을 완화시키는 것은 공적부조 차원의 재정의 기능과 역할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모든 것이 소득주도성장의 수단인 것이다. 청와대와 홍남기 부총리의 논리에 절망하는 것은, 정책피드백이 전혀 작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정책은 그 자체가 ‘언제 어디서나’ 작동되는 ‘상수(常數)’가 아니며 또한 사전에 설계된 또는 예측된 효과를 가져 오는 ‘요술지팡이’가 아니다. 따라서 정책은 늘 실시간으로 그 효과를 점검하고 아니다 싶으면 폐기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 정부는 소득주도성장에 관해서는 ‘눈먼 봉사’와 다름없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확신편향이 그 이유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정책실패를 수용하는 데 정직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상업 세계는 복잡계이다. 최저임금이 올라갈 때, 현재 고용되어 있는 근로자를 그대로 승계해 인상된 최저임금을 주는 고용주는 없다. 근로자 입장에서도 최저임금이 올라가면 그만큼 내 직장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정부와 근로자는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임금만 올라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 아닌 가 의심이 갈 정도다. 최저임금인상에 따른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가 연속 2년간 매년 3조원의 일자리 안정자금을 마련한 것은,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소득주도성장이 자기 완결적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2015년 기준 한국 취업자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31.8달러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6.6달러보다 14.8달러 낮다. 최저임금을 높일 것이 아니라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그러려면 혁신이 필요하다. 규제완화와 경쟁을 통해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임금이 생산성을 넘어설 수 없다. 우리는 생산성 제고에 대한 고민 없이 최저임금을 올리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면, 우리의 경제지력(經濟知力)을 심히 의심해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은 홍 부총리가 주장한 ‘보완과 강화’가 아니라 ‘폐기’가 정답이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이 일자리를 초토화시켜 고용절벽을 가져왔고 동시에 최악의 소득분배 악화를 초래했다. 잘못된 것을 붙들려다 보니, 덕지덕지 패치(patch)를 붙였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한·미간에 경제성장률 역전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로의 초대”인 것이다. 정권은 짧고 정치는 길다.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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