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스탈린,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회장과 같은 20세기의 산업군주들을 도열시킨다면, 한국의 산업지휘관(박정희) 역시 그 반열에 마땅히 속할 것이다”(브루스 커밍스)

박정희를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회장과 같은 20세기의 산업군주들과 같은 대열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한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박정희를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회장과 같은 20세기의 산업군주들과 같은 대열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한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의 일부 학자들은 한국을 ‘손발 잘린 병신’으로 묘사했다. 제임스 몰리(James W.Morley)가 그 본보기 되는 학자일 것이다. 그의 눈에 비친 남한은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는 바닥을 기는 상태였다. 몰리는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원조가 남한 국방예산의 거의 75%, 일반 예산의 50%, 가용 와환 총액의 거의 80%를 차지하는 반면, 북한은 급속하게 성장하고 산업화되고 있으며, 북한의 인민은 어느 때보다 더 잘 먹고 더 좋은 주택에서 산다고 분석했다.

참담한 한국의 각종 지표나 분석 예측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놀라운 기적의 가능성을 예상한 학자도 적지 않다. 『경제성장의 단계들(The Stages of Economic Growth)』이란 저서로 유명세를 탄 월터 로스토우(Walter W. Rostow)와, 그의 동료 로버트 코머(Robert Komer)가 대표일 것이다.

두 사람은 한국의 각종 경제 산업 지표와 상황을 분석한 후 “한국에는 아직 제대로 활용되지 않은 대단한 자원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한국인’이라는 인적자원”이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한국이 분단 고립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인적자원을 보유하고 있어 수출용 경공업에 더없이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가진 한계를 잘 극복하고, 가능성을 활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낼 리더 집단이 등장하기만 하면 한국은 폭발적 성장이 가능하리라고 예상한 것이다.

미국은 제3세계 개도국에서 가장 조직화·과학화·선진화 된 집단인 군부가 사회 전면에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이를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1950년대 말~60년대 초 제3세계를 휩쓸었던 군사 쿠데타 도미노는 미국의 영향력 때문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군부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나라들 모두가 산업화·민주화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오직 한국만이 제대로 된 성공의 길을 걸었다. 한국은 예외 중의 예외인 나라가 되었는데, 대체 왜 다른 제3세계 국가들은 실패한 반면 한국만 유일하게 성공했을까?

누가 쿠데타를 부추겼나?

사실 5·16 군사쿠데타가 성공한 이유를 정밀 분석해 보면 박정희가 잘해서라기보다는 민주당 정부의 무능과 분열, 미국의 기회주의적 태도, 지식인과 언론의 쿠데타 선동의 합작품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장면 총리는 사전에 적어도 네 차례 군부 쿠데타 움직임을 보고받고도 “설마” 하며 적극 대처하지 않았다. 막상 쿠데타가 발생하자 장면 총리는 수녀원으로 도주했고,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진압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국은 군부 쿠데타를 부추기는 ‘콜론보고서(Colon Report)’를 「사상계」 잡지에 제공하여 보도하도록 함으로써 한국의 청년 장교들을 자극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주동이 된 쿠데타와 관련한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하고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함석헌·장준하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은 틈만 나면 장교와 장군들에게 “지금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군부는 뭐하고 있는 거냐” 면서 노골적으로 쿠데타를 선동했다. 이런 모습을 종합하면 박정희 쿠데타 성공은 역사적 필연이었던 셈이다.

박정희는 만주와 일본에서 사관학교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만주군 복무 과정에서 일본의 엘리트 장교집단과 기술 관료들이 옥수수나 경작하던 만주를 거대한 산업국가로 변모시키는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의 놀라운 변화를 지켜보았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군부가 이끌고 기술관료와 재벌이 합작하여 초고속 산업화를 추진하는 만주식 모델을 도입하여 한국의 변혁에 나섰다.

박정희는 국가건설을 위해 실물경제의 주역인 기업과 손을 잡고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기획 및 계획은 국가지도자와 정부 관료들이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겨 공장을 짓고, 생산 제품을 해외에 내다 파는 과업은 기업이 담당하는 관료와 기업의 발전동맹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경제기획원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관료·기업 동맹체제가 달성해야 할 목표와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국제개발처(AID)의 한국단장 조엘 번스타인(Joel Bernstein)은 “한국의 계획들은 너무 낙관적”이라고 불평했지만, 이는 한국인 특유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식 일하기 능력을 간과한 발언이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개차반이 된 중국에서 “연착하는 사회주의 기차가 정시에 도착하는 자본주의 기차보다 더 낫다”라는 마오(毛)주의 격언이 유행할 때 한국에서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지도자, 관료, 기업인, 상인, 농민이 함께 땀흘리며 뛰었다. 가히 국가 총력전을 전개한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분석에 의하면 1960년대 초반 한국으로 이전하는 미국 기업은 25배의 노동비용 절감을 누릴 수 있었다. 한국 노동자들의 임금이 미국 임금의 10분의 1이었으나 생산성은 2.5배 높았기 때문이다(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비, 2016, 440~441쪽).

그 당시 한국이 임금이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생산성이 높았을까? 한국인들이 ‘미다스의 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미국이나 일본의 공장들보다 기계를 더 빨리 돌리고, 노동자들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속도에 맞춰 다른 나라보다 훨씬 강도가 높은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3교대 24시간 풀 가동 체제, '빨리빨리'로 대변되는 속도전은 한국이 가진 최고의 강점이었다. 이러한 속도전과 생산성을 바탕으로 미국·일본에서 사양길에 접어든 섬유·신발·가발·흑백TV 등을 생산하여 해외에 수출하여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주제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차관, 즉 외채의 도입이었다.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드라이브로 막대한 투자자금이 필요했던 한국은 해외에서 막대한 외채를 빌렸다. 그 시절 해외 금융기관에는 유가가 네 배로 급등한 덕에 어마어마한 오일 달러가 넘쳐나고 있었다. 은행들은 “제발 우리 은행 돈 좀 써 달라”고 애걸하는 상황이었다.

가발·의류 수출하던 나라가 자동차 반도체 수출국으로

한국은 이러한 호기를 적극 활용했다. 1967~79년 사이 한국의 외채는 15배로 늘어나 저개발 국가 전체 외채율의 2배를 기록했다. 1976~79년 한국의 해외 차관은 멕시코, 브라질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었다. 언론들과 야당 정치인,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쥐뿔도 모르는 책상물림 학자 나부랭이들이 앵무새처럼 “외채망국론”을 외쳤다.

이처럼 엄청난 외채를 빌려다 무엇을 했는가? 다른 개도국들이 지도자 우상화, 포퓰리즘을 위한 리조트 건설, 비생산적 놀고먹는 부분에 차관을 낭비할 동안 한국은 중화학공업에 풀 배팅을 했다. 아무에게나 차관 자금을 제공한 것이 아니다. 시중 금리가 20%선을 넘나드는 고금리 시대에, 정부는 장기 저리 차관을 들여다 수출을 많이 하는 기업 순으로 1~2%의 저리 자금을 지원하여, 최신 기술과 첨단 설비로 구성된 풀 세트의 중화학공업 시설을 건설하도록 독려했다.

포항제철의 철강 생산능력은 1973년 연간 100만 톤, 1976년 260만 톤, 1978년 550만 톤, 1981년 850만 톤으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박정희가 포항에 일관제철소 건설을 결정했을 때 한국의 교수·학자·정치인·언론 할 것 없이 결사 반대 기조였다. 한국에 파견되었던 미국의 경제 고문관들, IMF, IBRD 같은 기관의 전문가들도 같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가발·신발·합판이나 만들어 파는 나라가 아니라 철강·자동차·선박·기계를 수출해서 먹고 사는 나라를 원했다. 그가 포항제철을 숙원사업으로 선정하여 국력을 총동원하여 건설해낸 것은 자주국방을 위한 병기 생산을 위해, 그리고 자동차·선박·기계를 연간 100억 달러 이상 수출하는 나라로 만든다는 국가 목표가 확고하게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출을 열심히 하는 기업들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기업 활동 및 국가 지원에 관한 한 ‘풍요로운 낙원’이었다. 기업들에게 ‘풍요로운 낙원’을 만들어주기 위해 박정희는 ‘제2의 이완용’이라는 비난을 감수해가며 전 국민이 거국적으로 반대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루었다. 일본의 원조자금으로 1973년 포항제철이 건설되었을 때, 이 제철소는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일관생산 제철소로 명성을 날렸다.

한국의 중화학공업 투자자금 확보를 위한 또 하나의 길이 열렸다. 한국군 전투부대 증파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브라운 비망록(Brown Memorandum)에 의해 10억 달러를 지원받은 것이다. 미국 정부 지원금은 1966~69년 한국의 연간 국내총생산(GDP)의 7~8%, 총 외화수입의 19%를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박정희의 마지막 숙원사업은 창원에 기계공업을 위한 전문도시를 통째로 건설하는 것이었다. 창원이란 신도시가 탄생되기 전까지 한국은 기계공업 불모지였다. 1970년 한국은 공작기계의 86%를 미국이나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야 하는 나라였다. 하지만 1977년 100개 이상의 기계공업 공장이 창원에 건설되면서 한국은 공작기계를 해외에 수출하는 나라로 변신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고해성사

한국 사회를 좌파 이데올로기로 분탕질하는 앞잡이 역할을 했던 브루스 커밍스는 “동남아, 중국까지 보편화 된 ‘한국식 모델’은 북한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발전모델로서 스탈린주의의 허리를 분질러놓았다”고 토로했다(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비, 2016, 458쪽).

브루스 커밍스가 언급한 ‘한국식 모델’이란 박정희 방식, 즉 정부(관료)와 기업의 발전연합체제, 박정희가 젊은 시절 만주에서 보고 배웠던 ‘군부가 이끄는 초고속 산업화’의 패러다임이었다.

브루스 커밍스가 놀란 것은 86%의 해외의존도를 지닌 한국이 제국주의적 경쟁이 판치는 세계경제하에서 산업적 자립을 쟁취해냈다는 사실이다. 커밍스는 “중공업 추진정책 이후 남한은 계속 전진하여 포괄적인 산업구조를 개발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 중공업 추진정책은 멋진 성공인 동시에, 한국의 독립선언이었다. 그때부터 줄곧 한국인들은 어깨를 바로 펴고 자신 있게 걸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는 독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후 한국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도자로 남아 있다”고 분석했다(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비, 2016, 459쪽).

브루스 커밍스는 박정희에 대해서는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스탈린,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회장과 같은 20세기의 산업군주들을 도열시킨다면, 한국의 산업지휘관 역시 그 반열에 마땅히 속할 것”이라고 실토했다.

더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커밍스가 박정희 시대에 생산직 노동자와 기술자, 기술관료, 자동차 영업사원, 기업 오너와 중소기업 사장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중공업 추진정책의 득을 보았다고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진정한 동반성장 아니었는가.

하지만 이처럼 참다운 의미의 동반성장정책에 결사반대하고 서민과 중소기업이 혜택을 받는 대중경제론을 실현해야 한다며 박정희를 공격한 사람이 ‘민주화의 성자(聖者)’를 자처한 김대중이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해외 수출시장이 아니라 국내시장을 무대로, 대기업이 아니라 농업과 중소기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켜 농민과 서민, 자영업자에게 우선적으로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주장의 극치였다.

또 외자는 필요악이며, 개방정책을 지양하고 상대적인 자급자족 체제를 주장했다. 정유·화학섬유·자동차조립·전자공업 등 외자에 기초한 대기업 중심의 공업육성은 사치적 낭비적 공업이니 더 이상 투자해서는 안 된다는 논지를 펼쳤다.

김대중이 주장한 내수 위주, 농업 우선, 중소기업 위주, 폐쇄적 자급자족 시스템, 대기업 중심의 공업 육성 반대, 노조의 경영 참여는 북한이나 유고슬라비아가 채택했다가 폭망한 발전방식이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김대중식 대중경제론으로 국가 체질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했다는 말인가? 중화학공업 건설이 아니라 농사나 짓고, 대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중소기업이나 도와주고, 수출은 개뿔 내수에 만족하고, 정유, 자동차, 전자, 화학공업은 낭비이니 건설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이 집권했다면 지금쯤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후진농업국으로 북한 짝 났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좌파·좌익·사회주의 추종세력들은 그 시절 박정희가 아니라 어느 누가 집권했어도, 즉 김대중이 집권했어도 한강의 기적은 가능했다고 강변한다. 거짓말을 해도 이쯤 되면 가히 천재급에 속한다. 이처럼 왜곡·날조·거짓말로 도배질 된 변태 자학사관 내용이 초중고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다. 중고교 교과서에 박정희가 피땀으로 이룩한 ‘한강의 기적’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김일성과 같은 반열의 독재자로만 기록되어 있다. 

정권을 좌파가 장악하면 몇십년 전의 생상한 현대사를 이처럼 무지막지하에 날조할 수도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인데, 바로 그들의 정신적, 학문적 스승이었던 브루스 커밍스는 박정희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 파라독스란 말인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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