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근자에 과거를 돌아보는 렌즈가 흐려지거나 굴절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문재인 종북좌파 정권 집권의 원인을 거의 전적으로 재작년 탄핵과정에서 찾는 식으로. 그래서, 과거를 긴 호흡으로, 정확히 기억해야 현 상황과 다가올 미래에 대해 대처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깨놓고 말하면 보수가, 나라가 이 지경까지 이른 데에 대한 ‘기득권층’으로서 자신들의 책임 부분을 확실히 자각해야, 앞으로 좌파의 재집권을 막을 노력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내가 살아 온 현대사를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이 글의 내용은 펜앤드마이크 독자들이 대부분 몸소 경험했거나 들어서 아는 내용이고, 사실 필자는 한국문학 전공자나 한국사회학자도 아니고 사회 현실에 매우 늦게 눈을 떠서 통찰이 매우 불완전함을 감안하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한(恨)의 민족이 투쟁의 민족으로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 민족은 ‘한’의 민족, 수난의 민족이었다. ‘한’은 우리 민족의 너무나 확고한 정체성으로서 천년이 흐르더라도 변함없을, 우리 민족의 타고난 배냇점(birthmark) 같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내가 20대에 해외 배포용으로 한국 문학에 대한 해설이나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과 심리에 대한 해설을 쓰려면 ‘한’을 어떻게 옮기느냐가 큰 고민이었다. 많은 어른들은 ‘한’이란 한민족이 아니면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는 민족의 유산이자 멍에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너무나 놀랍게도, 1960년대~70년대의 경제성장으로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산업화와 함께 ‘인권’이라는 개념이 확산되면서 ‘한’의 정서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산업화와 함께 입주 가사도우미나 일용노동자 같은 사람들이 공장노동자가 되면서 그들의 억울함을 ‘노동쟁의’로 해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에 대한 논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가 80년대에 들어서는 희미한 추억이 되고 말았다.

‘한’의 정서를 많은 사람들은 원망, 회한, 심지어 원한의 정서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한’에는 체념의 요소가 절대적이었다고 본다. 한민족은 이 땅에서의 4천년 경험을 통해서 인생은 모진 것이고 생존의 대가는 억압과 박탈과 굴욕이라는 진리를 터득했다. 그 영원불변한 인생의 조건에 대해 항거하면 더욱 큰 상처를 입고, 더욱 더 인생이 망가지기 때문에 ‘한’에 대해서는 체념이 슬기요 생존전략이었다. 그러나 경제발전과 함께 개인의 힘이 강해지고 법률이 일반 국민도 이용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되면서 ‘한’이라는 자학적 체념 보다는 당당한 자기 권리 찾기가 더 현명한 생존전략이 되었다.

경제성장과 독재의 병행

우리나라의 1960년대-70년대는 경제개발의 시기인 동시에 ‘군사독재’의 시대로 규정되고 있는데, ‘독재’ 시절에 인권이 성장했다는 것이 패러독스로 들릴 수 있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1960년대는 나의 중,고교와 대학 시절이었는데 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독재’를 당한다고 느낀 일이 별로 없다. 반면에, 우리 집 경제사정은 나아지지 않았지만 통학 길에서 보는 새로운 건물들만으로도 나라 경제가 성장하고 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라디오 뉴스나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리버티 뉴스에서 귀가 따갑게 들려오는 현란한 경제성장의 소식은 먼 나라 일로 들렸지만.

나의 눈에 보인 ‘독재’는 장발단속, 미니스커트 단속 정도였는데 나는 당시에 장발이나 미니스커트를 ‘자유’ 보다는 ‘방종’의 영역처럼 생각했고 그래서 별로 분개하지 않았다. 장발단속과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 아마 고교 1학년 때 기하를 담당하셨던 여선생님이, “머리를 얼만큼 짧게 잘라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면 규정을 위반하는 사람도 없을텐데 공연한 규정이 있어서 애맨 학생들을 규칙위반자로 만든다”는, 당시의 나로서는 선뜻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촉발했던 말씀이다. 그 말씀은 100% 이해는 안 되는 대로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는데, 나는 한심하게 그 말씀을 뒤집어서 ‘반독재 운동을 안 하면 탄압도 안 받을텐데’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언니 둘이 차례로 유학을 떠나고 고등학교 때 부터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았기 때문에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얻어 듣는 것도 없고 물어 볼 사람도 없어서 세상사에 대해서 진공상태에서 존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1965년도에 대학에 입학해서 을씨년스런 캠퍼스의 봄에 어렵게 적응하자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열렸다. 학생서클 같은 데도 가입하지 않았던 나는 한일회담이 왜 열리는지, 학생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무언지 몰라서 답답하고 막연히 불안하기만 했다.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보릿고개가 사라진 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력 때문인 것은 대부분 국민들이 인정하는 것 같았는데 일부 국민은 박대통령을 독재자로 부르며 원수처럼 미워하니 왠지 알 수 없었다. 또한 박정권의 소위 ‘반체제’인사들에 대한 (나의 생각으로는) 잔인한 과잉대응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60년대 막바지가 되니 뉴스에 비치는 박대통령의 얼굴만 봐도 그가 변질되어간다는 느낌이 들었고, 72년의 10월 유신은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에 완전히 한 트럭분의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었다. 영구집권을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거듭거듭 약속하고는 결국 영구집권을 하는 박대통령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70년대의 정치판이 매일 한국이 병들고 있음을 선언했고, 눈뜨기 시작했던 사회의식이 경제성장을 마냥 축복으로 느낄 수만은 없게 했다.

문학의 반체제 투쟁, 학원의 반체제 데모

70년대의 문인들은 자신들을 예전 왕조시대에 목숨을 걸고 직언을 하던 선비들의 후예로 자처하고 ‘반독재’ 문학을 집필했다. 김지하 시인의 ‘오적시’가 나온 것이 1970년으로 아는데, 이로 인해 사형을 선고받고 여러 해 수감생활을 한 김지하 시인의 고난과 영광은 모든 문인이 두려워하면서 일변 선망하는 바였다. 사실, 70년대의 문학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한탄조 문학보다 주제의식이 뚜렷하고 문학의 시대적, 국가적 사명에 대한 신념도 강했으나 그 주제를 소화하는 방법이 너무 직설적이어서 예술적 묘미나 세련됨은 매우 부족한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70~80년대에 번성했던 ‘고발문학’은 공권력의 횡포, 기층민들의 열악한 생존조건, 사회부조리에 기생하는 어둠의 세력 등이 주제였다. 이 시대에 또한 이념문학, 분단문학이 등장했고 80년대 후반에는 월북작가의 작품들이 해금되었다. 이념 논의에 대한 금기가 무너지고 금서가 풀리기까지의 상황전개를 당시엔 모두 긍정적인 변화로서 우리 사회의 이념대립이 완화되고 봉합될 수 있는 정지작업으로 생각했는데 반대로 이념대립을 무한대로 키우는 밑거름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사회고발 문학은 사회의 불의를 시정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동시에 권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엘리트 계급, 사회지도층에 대한 반감을 유발하고 고착시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작품들은 대부분 예술성으로 평가받지 않고 내용이 얼마나 강하냐, 즉 쓰고 발표하는데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느냐로 평가 받았던 것 같다. 그 시대에는 ‘민주투사’가 일종의 아이돌의 위치를 점하기도 했다. 필자 역시 자력으로는 의미 있는 저항을 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위장취업 등을 통해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며 수배를 당하고 피신하다가 검거되어 형을 사는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나를 대신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며 미안하고 안쓰럽게 느꼈다. 그러다가 박대통령의 서거가 몰고 온 ‘서울의 봄’을 겪으면서 4.19 이후 제2 공화국의 극도의 무질서를 상기하고 그 소요사태가 영구 고착될까봐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연이은 5.18 광주사태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죽었다는 절망감을 주었고, 많은 국민이 오래 원죄의식에 시달리게 되었다.

5.18 광주사태의 여파로 1980년대의 캠퍼스는 나날이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교수들은 강의와 학사처리 이외에 학생들이 데모를 하지 않게 ‘지도’할 의무가 있었는데 수행 불가능한 의무였다. 매 학기마다 교수들의 근심은 중간고사를 보기 전에 휴교를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중간고사를 보기 전에 휴교를 하면 그 학기 성적을 산출할 근거가 없어서 학점을 줄 수 없고 그러면 모든 학생이 유급을 하게 되기 때문에. 더구나 그 때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학교를 1년 더 다닐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었고 대부분은 빨리 졸업을 해서 가족의 생계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운동권 문화와 운동권의 유산

80년대에 학생들의 상당수가 ‘운동권’이 되는 것은 불가피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공부하라’는 소리만 지긋지긋하게 들으며 ‘점수 따는 기계’로 키워진 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해서 운동권의 손짓을 받아서 갑자기 시야가 민족의 미래와 세계사적 흐름으로 확대되고 ‘민족을 구원할 이념’을 주입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었겠는가. 게다가 80년대 까지만 해도 남학생과 여학생이 캐주얼하게 말을 걸거나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풍토가 전혀 아니었는데 그 쑥스럽고 어려운 숙제가 ‘동지’로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다니 얼마나 황홀한 일이었겠는가. 물론, 운동권 내에서는 사적인 감정이나 관계가 금지사항이라서 이성으로서의 교제가 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접촉할 기회가 풍성해 지는 것은 틀림없었다. 운동권 내에서는 혼숙 따위의 문화가 팽배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내 자신 운동권동아리 활동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기회는 없었지만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운동권의 결속을 높이고 배신을 불가능하게 하기 위한 장치로 혼숙이 사용되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운동권 서클에 가입한다는 것이 새로운 정체성의 획득을 의미했고 성큼 성인이 되었다는 자부심을 부여했기 때문에 운동권 서클의 매력은 엄청나게 컸다. 반면 ‘빡센’ 사상학습과—그 때의 ‘의식화 교육’ 내용을 회고해 보면서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운동권출신들이 얼마나 될까?--시위참가의 위험 부담, 그리고 그들이 부르짖었던 ‘민주’와는 멀어도 너무 먼 서열적 조직 문화에 대한 거부감, 염증 등 때문에 운동권을 경원시하거나 중도에서 실망하고 탈퇴했던 학생도 많았다. (사실 핵심 운동권은 전체 학생 중 소수였고 대다수는 시위 등에 단순 가담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운동권’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느냐가 80년대 학생들의 압도적 고민거리였음은 엄연한 사실이고 아직도 80년대 학번의 대부분은 운동권에 대한 부채감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운동권’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서 그들을‘자중자애’하도록 유도하고 그들의 신념의 허황된 부분, 현실적 대안이 결코 될 수 없는 이유를 깨닫게 하려 노력해 본 교수들은 극심한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나의 경험으로 보면 학생들의 의식이 너무나 교조적이어서 아예 절벽과 대화하는 듯, 학생들로부터는 명백한 현실에 대한 인정도 기본적인 상식에 대한 동의도 이끌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그들이 얼른 졸업해서 사회인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갖게 되면 그들의 극단적인 체제반감이 순치될 수 있을 것으로 희망했다. 그리고 80년대의 경제호황에 힘입어 웬만큼 학생운동을 했더라도 ‘전과’ 딱지만 붙지 않았으면 대학졸업자들은 좋은 기업체나 기관에 취직할 수 있었고 조금만 노력하면 승진과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파처럼 살아도 좌파의 이념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었다. 한 고려대학교 80년대 학번들의 homecoming day에 초대를 받아서 가 보았는데 초장부터 운동권 노래가 흘러나오고 중간에 그 시절의 운동권 가수가 무대에 올라가 그 넓은 홀의 천명 가까운 청중을 휘어잡았고, 졸업생들은 비장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대다수의 80년대 학번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경제각료를 잘 기용했던 덕분에 단군 이래 최고의 경제호황을 타고 승승장구하면서 대한민국 국민 된 혜택을 알짜로 누려왔는데 그러면서도 마르크스 사상을 논했던 대학 시절에 대한 향수를 첫 사랑의 추억처럼 마음 한구석에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편, 좌파를 본능적으로 싫어해서 ‘비 운동권’을 택했던 (당시 그들은 ‘이념주의자’와 대립되는 개념으로‘기능주의자’로 불렸다) 다수들 또한 운동권들의 고난에 대해 죄책감과 부채감을 느꼈고 지난 촛불시위나 대선과 같은 미묘한 분위기에서는 좌파 쪽에 힘을 보태주지 않았나 싶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보수 쪽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할 50대들인데, 그들이 학창시절에 그렇게 격렬하게 때리고 ‘박살’내도 대한민국은 굳건히 버텼기 때문에 좌파가 집권해도 나라는 건재할 것으로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보수의 약점, 그 반작용

운동권들에게 보수, 즉 기득권층은 이기적이고 사악한, 무산계급을 착취하는 무리로서 모든 사회 부조리와 불의, 불평등의 근원이라는 것은 기본전제였을 것이다. 한국이 당시에 후진국이었으므로 특권층의 횡포도 다분히 후진국적 행태를 띄었을 것이다. 또, 그 때 재벌기업들이 쑥쑥 성장했던 것은 노동자에게 저임금을 지불했기--운동권의 용어로는 임금착취를 했기--때문에 가능했던 것도 상당 부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모든 가진 자가 사악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 중 다수가 이기적이고 배려심이 부족하고 자기들의 파이를 나누려고하기보다 움켜쥐려고 했던 것도 사실일 것 같다. 지금은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갑질’같은 행위가 고발도 당하고 소송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 때는 권력과 금력이 있는 소수의 갑질에 대해 피고용인이나 하급자가 저항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큰 일이었다. 직접적인 횡포가 아니라도 소문으로 들리는 재벌 2세들의 사치와 방탕 행태 등이 서민에게 큰 위화감을 주기도 했다.

1980년대, 1인당 GDP가 1,700불에서 6,500불로 증가한 그 10년간, 대다수의 국민이 필사적으로 발버둥쳐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났던 그 때, 앞서 나간 자들의 오만과 자기과시로 인해 기층민들의 기아 탈출의 기쁨이 낙오자의 슬픔과 분노가 되기도 했다. 졸부들은 국내적으로 약자들에게 횡포를 부렸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일을 하러 온 외국인노동자들을 학대, 착취하고 중국이 처음 개방되었을 때 중국에 가서 참으로 부끄러운 졸부 행태를 연출했다. 한민족의 지긋지긋한 유산인 가난을 마침내 벗어 던진 감격을 그렇게 유치한 행태로 경축해야했을까? 이런 행태들이 계층 간의 골을 건너지 못할 심연으로 만들었다.

이런 사회적 병리현상이 만연했기 때문에 (물론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해서 전 재산을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부한 아름답고 감동적인 스토리도 많았지만) 좌파들의 선전, 선동이 잘 먹혀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좌파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전교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대한민국을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나라도 아닌 ‘정부’에 불과하다고 가르치며 학생들을 균형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인간의 성장과 성숙에 반드시 필요한 ‘회의(懷疑)’를 할 줄 모르는, 이념‘전사(戰士)’로 키워냈다. 전교조 교사들이 참여해서 쓰고 전교조 교사들이 사회나 국사 교과서로 채택한 교과서의 이념 편향은 소름끼치는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우리 자녀들이 학습한 ‘검인정’교과서들은 다소의 정도차이가 있을 뿐 모조리 불그죽죽한 ‘반(反) 대한민국’불온문서이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북한을 자신의 정신적 조국으로 생각하고 위대한 항일투사 김일성을 ‘사모’하도록 양육했고, 자유대한민국을 기회주의자들이 탈취한 가건물로 인식시켰다. 그리고 북한 대신 증오할 상대로 ‘친일파’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래서 ‘친일’은 모든 비루함과 위선, 악덕의 집합명사가 되었고 우리나라를 친일프레임에 결박 지어놓는 족쇄가 되었다.

그러니까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게 된 직접적 원인은 부풀리고 왜곡된 최순실 스토리 때문이었지만 해방 이후에 누적되어온 이념상황이 근본 원인이다. 6.25 동란 중 ‘빨갱이’들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이 ‘빨갱이’들을 공포와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었기에 그들의 살육에서 살아남은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굳건한, 맹렬한 반공주의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좌익사상과 세력이 살금살금 그러다가 맹렬하게 자라서 대한민국이 2019년에 좌파의 독무대가 될 줄이야! 어느 사회나 불만세력이 발붙일 땅은 있고 그 불만세력을 키울 거름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세계 어느 나라에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불평등이, 그를 이용해서 이 나라를 짓밟으려는 세력의 도구가 되어서 온 국민 피땀의 결실을 파괴하게 되다니. 그들의 성급한 평등의 요구가 아직 혜택을 못 누린 사람이 늦게나마 혜택을 입을 가능성을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빈곤에 남겨졌던 마지막 그룹의 빈곤탈출의 길을 폭격으로 끊어서 영원히 빈곤에서 탈출할 수 없게 했고, 나머지 국민도 빈곤으로 함몰시킬 폭약을 방방곡곡에 매설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 이유는 이 정권 고위 경제정책 실세(實勢)인가의 저서에 나온다는, 국민이 자기 집도 없고 가난해야 정부에 순응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북한과 수준을 맞추어서 통일을 쉽게 하기위한 정지작업이라는 설도 상당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 정권 이후는?

나는 이 염치도 없고 생각도 없는 정권이 5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지리라고 본다. 너무나 끊임없는, 너무나 초대형 실정(失政)으로 인해서 그들의지지 세력인 서민층의 삶이 너무나 힘들게 되어서 민중들로부터 배척을 받기 시작했고 하루하루 더욱 더 배척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보수진영에서 일단 정권을 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혹자는 좌파의 실정이 더욱 심해져서 우리 경제가 완전히 붕괴해야 온 국민이 좌파이념이 옳지 않음을 깨닫게 될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야 한다지만 나는 이 정권이 이대로 1년만 더 가도 민생이 완전히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무너져 내릴 것이므로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적화통일에 의해서 우리 국민이 김정은의 수용소에 보내 질 위험이 긴박하지 않은가?) 어쨌든, 좌파가 몰락하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그로서 좌파의 생명이 끝나고 그들이 다시는 나라를 흔들만한 세력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필자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면 절망스러운 이유이다.

노무현 정권의 무수한 실정으로 인해서 이명박 대통령이 사상 최고의 득표율로 정권을 잡았지만 좌파의 세력이 다시 쑥쑥 자라서 나라를 장악할 수 있었지 않았는가? 이제, 언제든 문재인 정부가 무너지더라도, 제대로 권력의 맛을 보았고 어떻게 하면 사회불안정을 조성하고 음모를 확산시킬 수 있는 지를 제대로 연습해 본 좌파들이 그들의 실정과 전횡을 반성하며 앞으로는 정도(正道)만 걷겠다고 맹세하겠는가? 좌파의 세를 꺾기 위해서는 차기 보수 정권이 이 정부만큼 살벌하고 잔인한 ‘적폐청산’으로 사악한 좌파들을 모조리 단죄해야하는데, 심약한 보수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를 이성으로 설득하거나 감성으로 감동시켜서 좌파이념을 버리게라도 해야할텐데 게으르고 안이한 보수들에게서 그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실 이번에 제대로 겪어 보니까 좌파는 이성도 없고 염치도 없고 증오와 탐욕 밖에 없어서 그들에게서는 반성을 유도할 수도 없고 진정한 포용도 받아들일 수 없는 집단이다. 보수는 밸도 없고 결단력도 없으니 이런 걸 기막힌 상호보완이라고 해야하는 건지 . . .

단 하나의 희망은 이념 중립적인, 좌파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오만과 독단에 경악한 대다수 국민들에게 보수의 진정한 가치와 우월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보수가 성숙하고 책임 있고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좌파의 우민화정책의 피해자가 된 자라나는 새싹들을 이념 편향적 교육에서 해방시켜서 수월성을 지향한 신나는 공부, 나의 가슴 벅찬 앞날을 설계하게 해줄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보수가 환골탈태해서 보수의 가치를 부르짖지만 말고 스스로 체화해서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뒷받침해서 국민이 흥겹게 일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한 열매를 풍성히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갑질’이나 위력에 의한 성폭력 등의 비리가 절대 발생할 수 없도록 자신과 주위를 확실히 단속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몇 년 지나면 이 좌파 치하의 해괴한 일들의 기억이 흐려지고 좌파의 음험하고 악랄한 심리전술에 국민이 다시 현혹되어 국가 파괴의 굿판이 다시 펼쳐 질 것이다. 그러니까 나라의 장래, 우리 다음세대의 미래는 보수가 자신의 정신적 게으름과 도덕적 해이를 쇄신하고, 좌파가 발붙이고 기생할 수 있는 토양을 완전히 갈아엎어서 성분변경을 할 수 있는가가 판가름 할 것이다. 보수의 각성을 염원한다.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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