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영 객원 칼럼니스트
김인영 객원 칼럼니스트

거꾸로 가는 대한민국의 시계(時計)

대한민국의 국정 어디에도 21세기를 선도하는 미래지향 어젠다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구촌 경제를 이끄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가운데 대한민국 시계만 거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정부가 과거 지향적이고 수구적이라서 그런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자. 1945년 일제로부터 광복되었으니 광복 74년이나 되었는데도 정부는 개념도 모호한 ‘친일 행위’를 적폐로 단죄하고 있다. 아직도 항일 투쟁을 강조하며 마치 나라를 빼앗긴 망명정부처럼 행동하고 있다. 또 1987년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넘어 32년이나 지났건만 노조는 자신들의 투쟁을 민주화 운동과 동일 선상에 두고 민주화 투사처럼 행동하고 있다. 노조가 경영 참여까지 얻어내었으니 더 이상 얻을 것이 없게 된 때문일 것이거나, 노동운동이 추구하는 바가 노조가 주도하는 세상, 또는 사민당 정권, 또는 인민민주주의의 세상일 수도 있어 그런 것처럼 보인다. 2016년 광화문 촛불시위를 주도한 노조의 특징적 모습이다. TV 뉴스를 가끔 보면 마치 양대 ‘노조 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노조의 본산 유럽 국가들에서 노조 가입율은 떨어졌고, 투쟁도 줄었고, 활동도 뜸하다.

외교와 국민 감정도 거꾸로 가고 있다. 세계화 시대의 도래가 언제적 이야기인데 유독 우리만 지금도 반일(反日) 민족 감정을 외치고, 영화화 하고, 드라마로 만들어 과거 항일 독립운동 시기로 되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인다. 친일은 적폐 청산 1호의 죄목이 되어 친일로 낙인찍힌 작가들의 글은 교과서에서 들어내졌고, 친일 작곡가가 만든 교가(校歌)가 교체된다고 하고, 누가 심은 지도 모르는 벚꽃나무가 친일의 죄목으로 잘려나가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추진하는 ‘관제(官製) 반일 민족주의’의 결과들이다.

하지만 정부와 일부 시민단체가 과거의 일제(日帝)가 아니라 현재의 일본(日本)을 ‘악마화’하고 있음에도 2018년 한 해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이 754만 명이나 된다고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은 중국인의 일본 방문자 숫자가 838만 명으로 1위이고 2위가 한국인 방문객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에서 보면 일본 돈까스 집, 라멘 집, 이자카야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듯하다. 더구나 일본 라멘 집과 이자카야는 소녀상 동상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일본말로 간판을 달고 있다. 그래야 장사가 되는가 보다. 한마디로 현실에서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관제 반일 민족주의’와 우리 국민의 속마음 태도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양국이 서로에게 3대 교역국가라는 사실도 내내 변하지 않고 있다.

‘관제 반일 민족주의’와 ‘우리 민족끼리’의 조합

우리 정부의 ‘관제 반일 민족주의’에 북한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북한식 민족주의로 대응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이 잘 되어 가는 것처럼 보일 때는 미국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떠들다가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에 실패하고 나서 문재인 정부에게 “남조선당국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제정신을 가지고 (미국에) 자신이 할 소리는 당당히 하라”고 사실상 친북노선을 강요하고 훈계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두려운 것은 우리의 ‘관제 반일 민족주의’가 북한의 ‘우리 민족끼리’에 화답하고 깊숙이 연대하는 모습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 연대의 모습을 2019년 3·1절 기념사에서 이미 명확히 언급하셨다.

“우리 마음에 그어진 '38선'은 우리 안을 갈라놓은 이념의 적대를 지울 때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차이를 인정하며... 호혜적 관계를 만들면 그것이 바로 통일입니다. ‘신한반도체제’로... 통일을 준비해 나가겠습니다. ‘신한반도체제’는 이념과 진영의 시대를 끝낸, 새로운 경제협력공동체입니다.” (밑줄은 필자가 친 것입니다.)

3·1절 기념사의 핵심은 북한을 ‘빨갱이’라는 이념의 관점에서 보지 말고 민족공동체로 하나가 되어 경제적 번영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남과 북이 이념을 넘어 경제적 호혜관계로 하나 되는 통일을 이루자는 선언을 이미 했던 것이다. 세간에 널리 알려진 문재인 대통령의 “체제를 달리하는 연방제 통일론”의 구체적 설명이다. 기저에 깔린 논리는 ‘한반도 평화경제론’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지원으로 평화를 사겠다는 논리다.

하지만 우리는 북한에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시장경제가 먼저 도입되지 않는다면 어떠한 경제적 지원도 북한의 경제번영이나 한반도 평화로 연결되지 않을 것임을 경험했다. 과거 햇볕정책의 결과가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 파악하기도 힘든 숫자의 핵무기 개발과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임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강산 관광을 다시 시작하고 개성공단을 다시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또 국민 세금으로 북한철도를 전면적으로 개보수 해준다고 하더라도 북한 비핵화는 얻어낼 수 없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햇볕정책에서 배운 오직 한 가지는 평화는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돈으로 평화를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다. 돈으로 평화를 사려는 외교는 항상 실패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초에 ‘한반도 평화경제’란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핵무기로 수호해야 할 김씨 일가의 무한 세습통치만 있을 뿐이다.

역대 정권의 관제 반일 민족주의

사실 ‘관제 반일 민족주의’는 이명박 정부에서도 박근혜 정부에서도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말 낮은 국정 지지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2012년 8월 10일 헌정사상 최초로 독도를 방문했었다. 하지만 의도했던 국정 지지도는 오르지 않았고, 일본과의 외교관계는 나빠졌고 그 때부터 혐한 서적들이 일본 서점에 깔리기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외교적으로, 안보상 필요 때문에 일본과의 협력이 필수적임에도 박근혜 대통령 역시 취임 초기부터 ‘과거사 문제’로 일본의 더 강도 높은 사과를 요구하며 2년이나 일본과의 외교 관계 진행을 멈추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후 2년 동안이나 일본에게 과거사 사과를 요구하며 중국으로 기울었지만 결과로 돌아온 것은 유치한 ‘사드 보복’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대일 외교의 실패는 민족주의 감성을 국익(國益) 위에 존치시킨 때문이다. ‘관제 반일 민족주의’가 결과한 외교적 실패가 국가의 안위(安危)를 위협했던 시기였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반일 민족주의가 ‘빨갱이’ 색깔론, 그리고 보수 적폐론과 결합되었다. 문 대통령은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 잔재’로 ‘빨갱이’라는 용어를 들었다. ‘빨갱이’라는 용어는 일제가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하며 이 과정에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 났으며, 그 ‘빨갱이’라는 용어를 보수세력이 이용했으니 친일세력과 보수세력 모두 청산되어야 마땅하다는 지적이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친일파와 보수 세력은 하나로 연계되고, 결국 친일파 청산과 보수세력은 동시에 함께 청산되어야만 한다. ‘관제 반일 민족주의’로 친일 청산과 보수 청산이 한꺼번에 되는 정치적 효과를 가져 오게 된 것이다. 역사가 정치화되는 순간이었다.

민족주의의 철학적 빈곤함

민족주의 이론의 대가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민족’(nation)을 고대로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실재적 집단이 아니라 근대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사회적 산물’(a socially constructed community, imagined by the people who perceive themselves as part of that group)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민족주의(nationalism)를 ‘상상(想像)의 정치 공동체 의식(意識)’이라고 했다. 앤더슨 주장의 핵심은 민족 의식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는 상상 속의 의식이며, 철학적 빈곤함(philosophical poverty)과 모순성(incoherence)을 그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상상의 공동체 의식이 정치적 목적 때문에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 재현되어, ‘국민 의식’과 섞여 살아 숨 쉬며 작동하고 있음도 역시 사실이기도 하다.

문제는 민족주의가 공동체를 대내적으로 단결시키기 위해 – 앤더슨은 올림픽 게임과 같은 이벤트를 들고 있다 –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측면과 동시에 ‘민족’의 과잉이 초래하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 침해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일본의 야마토(大和) 관제 민족주의가 일본 군부를 태평양 전쟁으로 이끌었으며, 그 우익 민족주의가 일본의 민주주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다른 관제 민족주의의 극단은 과잉 독일 민족주의다. 그 독일 민족주의의 과잉이 히틀러의 등장과 유태인 학살을 초래했으며 결국 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어졌음 역사는 가르치고 있다.

극복해야 할 ‘관제 반일 민족주의’

민족주의의 문제는 타민족에 대한 적대성을 부각시키며 자신의 민족을 순진한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더 나아가 어린 학생들과 일반인들에게 인지 갈등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이제 성숙한 국민의 의식으로 편협한 ‘관제(官製) 반일 민족주의’를 극복할 때가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에게 가한 아픈 과거를 잊어서도 안 되지만 그러한 아픔을 초래한 조선 국왕의 무능과 당시 지도자들의 부패도 함께 기억하고 반성하자는 것이다. 사실 진정한 극일(克日)은 일본보다 더 부강하고 더 민주적이고 더 성숙한 국가를 만들 때 가능할 것이다,

이웃을 ‘악마화’하는 일은 대한민국의 외교와 안보라는 국익(national interest)에 바람직하지 않다. 또 이웃 나라와 함께 살아야 할 후세에게도 좋지 않다. 관제 반일(反日)은 해 볼만큼 해보았다. 이제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반일’을 외치더라도 국민이 스스로 극복할 때가 되었다. 한 해 754만 명이 넘게 일본을 방문하는 것을 보면 국민 감성은 이미 반일을 넘어섰고, “Enough is enough!”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김인영 객원 칼럼니스트(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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