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집권세력에 야합한 바른미래당...자살선언-좌경화 선택-與2중대 자인
한국정치와 한반도 정치에서 '중간'은 허위이자 허구
한반도 싸움은 보수-진보 싸움 아니라 '자유'냐 '전체주의'냐의 싸움
내년 총선에서 자유인들이 개헌저지선 확보 못하면 대한민국 종막의 시작
한국인들, 나라 운명에 대한 각자의 책임 절감하고 선택해야

류근일 언론인

바른미래당 지도부가 12대 11로 운동권 집권 측의 ‘패스트 트랙’을 지지해 그것을 실현시키기로 결정했다. 바미당의 자살 선언이자 좌경화 선택이자 2중대 자인(自認)이었다. 결국 한국정치와 한반도 정치에서 ‘중간’이라는 것은 그럴듯한 허위이자 허구라는 것이 다시 한 확인된 셈이다.

한반도에선 이승만이냐 김일성이냐, 미국 등 해양 세력과 한 편이 되느냐 중국-러시아 등 대륙 세력과 한 편이 되느냐, 그래서 대한민국 건국 노선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 둘 중 하나이지 그도 저도 아닌 ‘중간’은 없다는 이야기다.

‘중간’ 노선이란 가설을 세워볼 수는 있다. 많은 정치가-사상가들이 8. 15 해방공간 이래 그런 가설을 세워 여러 차례 실험한 바도 있다. 그러나 실험 결과 거의 모두가 실패로 드러났다. 왜? 그들의 가설이 치명적인 인식착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싸움은 보수-진보 싸움이라기보다는 자유냐 전체주의냐 싸움이다. 자유 체제 내부의 보수-진보 싸움이라면 ’중간(centrist)‘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유냐 전체주위냐 싸움에선 ’중간‘이 있을 수 없다. ’중도적 전체주의‘나 ’반(半)전체주의적 자유‘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정-분배정의-사회복지를 둘러싼 보수-진보 논쟁 이전에, 그보다 훨씬 더 절실한 것이 자유냐 전체주의냐의 선택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정치가-사상가들이 한반도 싸움을 그저 보수-진보, 우익-좌익, 민족주의-비(非)민족주의 싸움이라 전제하고서 “그렇다면 나는 ’중간‘을 하겠다”면서 미국과 소련, 이승만과 김일성 중간에서 우왕좌왕 헤엄치다 결국은 이승만을 배척하고 김일성과 합작해 버렸다. 이들은 6. 25 남침 후 대거 납북(拉北)돼 대남방송이나 하다가 끝내는 수용소 병상에서 쓸쓸하게 타계했다. 전체주의 하에서 ’중간‘은 통일전선 초기에는 마치 1대 1의 파트너인양 거짓 대접을 받지만, 공산당이 완전한 패권을 장악한 후에는 여지없이 박살나게 돼 있다. 이걸 모르고 스스로 죽을 길로 들어갔으니...

오늘의 한국 정계에 등판한 ’중간‘은 “나는 대한민국 체제를 지지하는 중도개혁 노선이다”라고 할지 모른다. 물론 그렇다. 그래서 그들을 전체주의와 합작할 ’중간‘ 이라고 전제하진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이 극좌 전체주의 혁명 집단에 맞서 치열하게 논쟁하는 모습은 충분히 본 적도 없고 인상 깊게 접한 바도 없다. 오히려 그들 상당수는 “나도 학생 때 데모 했어” “나도 나름대로 진보적이야” 운운하며 운동권에 아첨하고 그에 대한 콤플렉스를 드러내 보이곤 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사례도 물론 있기야 하겠지만.

한 가지 웃기는 것은 이런 강남좌파 ’중간‘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가당치도 않게 ’중도‘라고 자처한다는 사실이다. 중도란 부처님 공자님 같은 인류의 스승들과 철인(哲人)들이 오랜 세월 설파해 온 심오하고 감동적인 우주의 정도(正道)다. 그것을 여기서 길게 파고들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짤막하게 요약한 한 구절의 해설에 주목할 따름이다. “중도는 어설프고 어정쩡하고 양다리 걸치는 ’기계적 중간‘이 아니라 매순간의 최적(適最)”이란 설명이 그것이다.

자막(子莫)이란 전국(戰國)시대 사람이 매사 ’최적‘ 아닌 ’중간‘을 고집했다 해서 자막집중(子莫執中)이란 말까지 생겼다. 중도라는 고상한 말은 그래서 안철수 유승민 손학규 식 생각과 처신과 행보를 정당화 시켜주기 위해 생겨난 말이 아니다. 중도는 자막집중도 아니고 기회주의도 아니고 재승박덕(才勝薄德) 수재들의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곡예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른바 ’중도 유권자‘라는 스펙트럼도 실은 중도가 아니라 ’왔다 갔다 대중‘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현실정치에서 이들의 표를 의식하는 것을 나무랄 순 없다. 그러나 유동(流動) 층이라고 부르면 모를까, 이들을 중도라고 ’격상(格上)시켜‘ 부르는 건 적절치 않다. 이벤트 하나에 혹해 수시로 변덕부리는 ’여론‘ 유형을 과연 중도라고 불러줘야 하나?

11명의 손학규 바미당 지도부는 이젠 ’중간‘도 아닌 좌(左)로 갔다. 그들은 민평당과 어울려 더불어 민주당과 한 패가 돼 움직일 것이다. 이들이 운동권 집권 측의 공수처 신설에 동참하는 것은 한 마디로, 무서운 ’혁명의 칼날‘을 새로 만드는 데 협조한 것이다. 모든 역사상 혁명정권 또는 반혁명 정권들은 다 잔인한 ’혁명의 칼날‘과 ’반혁명의 칼날‘을 하나씩 가졌다. 영국 절대왕정의 성실청(星室廳, Star Chamber), 중세기 종교재판소, 프랑스 혁명기 자코뱅당의 공안위원회, 스탈린의 NKVD, 히틀러의 게슈타포, 동독의 슈타지 등이 그것이다.

한국 운동권의 공수처를 이와 100 % 똑같은 것으로 단정할 경우 그것은 과장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공수처가 집권 측의 공안권력 장악력 강화에 사용당할 수 있다는 우려만은 완전히 불식할 수 없다. 야당과 자유시민이라면 이를 당연히 경계하고 견제하려 할 수밖에 없다. 이럼에도, 스스로 ’진보성‘이 있다고 자임해 온 손학규 바미당 지도부 12명이 이를 선거제도 개혁과 솔선 엿 바꿔 먹은 ’배신(?)‘은 그래서, 그들이 비판해 마지않는 왕년의 ’수구세력‘을 그대로 닮아버린 비천한 작태였다. 이제 이런 종류의 ’중간‘이란 이름의 기회주의는 붕괴돼야 한다. 아니 붕괴하고 있다.

오늘의 한반도 정치와 한국 정치의 일관된 주제는 ’자유 한반도‘를 위한 싸움이다. 이 절체절명의 주제에 모든 한반도인(人)들은 예스 아니면 노로 답해야 한다. ’중간‘은 없다. 2020년 총선에서 자유인들이 개헌저지선을 확보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종막의 시작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자유 한반도‘ 대신 ’전체주의 한반도‘가 예고될 것이다. 체제 붕괴는 ’설마‘가 아니다. 모든 체제가 국민의 혼돈과 안일로 인해 급속히 망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나라의 운명에 대한 각자 개개인의 책임을 절감하고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류근일(언론인)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