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

북한은 지난 1월 23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를 통해 4월 25일이던 조선인민군 창건일(소위 건군절)을 2월 8일로 공식 지정했다면서 건군절을 기념하기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다.

북의 3대 세습 군주 김정은은 이미 “올해가 인민군 창설 일흔 돌이 되는 해이니 기념식을 성대히 치르라”는 교시를 내렸다. 올림픽 개막식 전날, 새로 지정한 건군절을 맞아 대규모 열병식과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기 위해 수만 명의 병력과 장비가 대대적으로 동원되고 있고, 전투기를 동원한 축하비행 연습까지 진행 중인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하필이면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전야제가 열리는 날이 바로 2월 8일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평창 동계올림픽에 재를 뿌리는 거창한 군사 퍼레이드를 벌이려고 작정을 한 셈이다.

원래 북한 역사에 의하면 조선인민군 창건일은 1948년 2월 8일이었다. 이날을 주요 국가 명절 중 하나인 ‘건군절’로 30년 동안 기념해왔는데, 1978년 들어 느닷없이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에 내가 조직한 항일 빨치산 부대가 진짜 조선인민군 창설일”이라면서 인민군 창설 일자를 16년이나 앞당겨버렸다.

이번에 또 다시 김정은이가 자기 할아버지가 바꿨던 인민군 창건일을 4월 25일에서 2월 8일로 원위치 하는 바람에 조선인민군 창건일은 날짜 변경은 물론이요 창건연도가 무려 16년이나 앞당겨지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대체 인민군 창건일을 둘러싼 이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인민군은 북한에서 정부 수립이 선포되기 7개월 전인 1948년 2월 8일 공식 창건되었다. 이날 조선인민군은 소련이 제공한 각종 무기와 소련군정이 만들어준 군복을 착용하고 평양역 광장에서 조선인민군 창설식을 거행했다. 정부가 공식으로 수립되기 전에 군대가 먼저 창설된 것은 세계 역사상 극히 드문 사례다.

이처럼 군대를 먼저 창설해야 하는 긴박한 이유가 있었다. 이 무렵 38선 이남에는 유엔 결의로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도착해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 인구는 900만, 남한 인구는 2,100만이었다. 남쪽보다 인구가 절반밖에 안 되니 유엔 결의에 따라 인구 비례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구성할 경우 공산당 집권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소련은 선거 실시를 위해 입북하려던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봉쇄했다.

●조선인민군의 노동절 퍼레이드에 김구·김규식 초청

소련은 유엔이 주관하는 선거에 의해 남한에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인민군을 창설하여 그 위용을 과시함으로써 남한에 있는 공산당원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반(反)이승만 정치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인민군 창설을 서두른 것이다. 그러한 회유에 김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좌우합작파 인사들이 넘어가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게 된다.

인민군 창설 후 최초로 맞은 1948년 5월 1일 노동절(메이데이) 때는 인민군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소련제 최신식 기관총, 박격포, 대전차포, 고사기관총, 곡사포 등을 갖춘 인민군 2만 5,000명 등 총 30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대규모 열병 분열식을 실시했다. 때마침 남북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일명 남북협상)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에 올라와 있던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측 대표자들이 대거 초청되어 연단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3시간 넘게 진행된 인민군의 행진과 사열, 신무기 소개 등을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인민군의 위용과 현대화 된 정비에 놀란 김구가 김일성에게 “남한에는 경찰대 수준의 경비대가 있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북한은 이런 군대를 만들었는가?” 하고 질문하자 김일성은 “한국이 독립되는 날 일본 제국주의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김일성은 195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설 10주년 기념으로 제324군부대에서 행한 연설에서 “우리 인민군대는 영광스러운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이다.… 우리 인민군대가 항일유격대의 후계자라는 것은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선언했다. 이날 처음으로 김일성은 인민군이 만주에서 전개했던 자신의 빨치산 항일투쟁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밝혔다.

1972년에는 “조선인민혁명군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고 이 부대를 영도하여 반일 민족해방전선을 이끌었으며, 해방 후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군으로 확대 발전시켜 조선인민군을 창건했다”고 한걸음 더 나갔다. 급기야 1978년이 되자 1948년 2월 8일에 창설된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인민군이 사실은 1932년 4월 25일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가 조직된 그날 창설되었다면서 인민군 창설 일자를 16년이나 앞당기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문제는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이 소속되어 활동했다는 항일 빨치산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의 성격이다. 이 부대는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만주군을 중국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게릴라 부대였다. 사실 김성주가 이 부대 소속원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 당국은 김성주가 동북항일연군 소속이었다고 주장하니 이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보자. 동북항일연군은 부대 결성 과정에서 자신들의 활동목표와 행동강령을 발표했는데, 그 핵심 내용은 “중화조국 옹호, 실지(失地) 동북(東北·만주)의 회복, 항일구중국(抗日救中國·항일운동을 통해 중국을 구원한다)”이었다.

바로 이것이 역사적 진실이다. 김성주는 중국 국적을 취득한 중국인 국적자로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공산당 간부의 지시를 받아 싸웠다. 다시 말하면 그는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무장투쟁을 한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공산당 간부의 지시를 받아 “중화조국을 옹호하고, 빼앗긴 만주를 되찾으며, 항일운동을 통해 중국을 구하는” 싸움에 나선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어떻게 자기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했다고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목사가 될 수도 있었던 인물

고민에 빠진 김일성(김성주)이 뭔가 역사적으로 영광이 되고 주체사상에도 부합되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을 했다고 우겨대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대기 시작했다. 지구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부대를 가공으로 꾸며서 내세운 것이 소위 말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이다.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 만주에서 벌어진 항일투쟁사에서 김성주가 조직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이란 부대는 어떤 역사 서적이나 자료, 증언에도 등장하지 않는 유령 부대로 결론이 났다. 이제 김일성과 북한 당국이 ‘조선인민군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유령부대인 ‘조선인민혁명군’의 실체를 추적해 본다.

본명이 김성주인 김일성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아버지 김형직이 가짜 세브란스의전 졸업장을 앞세워 돌팔이 의사 행세를 하여 그들 식구는 장백현 일대에서 부유한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김형직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테러를 당해 그 후유증으로 사망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됐다.

당시 김형직은 강반석과 결혼하여 세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장남이 김성주), 강반석은 어린 세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중국 공안경찰대장에게 재가를 가게 된다. 김일성 연구가였던 고(故) 이명영 교수는 자신의 저서 『김일성열전』에서 “만약 강반석이 중국인에게 재가하지 않고 평양의 친정으로 돌아왔다면, 그 집안 내력으로 볼 때 장남 김성주는 목사나 성직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강반석 집안은 평양 일대에서 유명한 열렬한 기독교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급작스런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중국 공안대장에게 재가, 자신은 중국인 양아버지의 학비 지원으로 길림 육문중학 입학…. 이런 어두운 가정사가 사춘기 소년 김성주의 심성을 크게 엇나가게 만들었다. 그는 길림 육문중학에서 공산주의 서클에 가담했다가 체포령이 내려 도주하면서 인생사가 복잡하게 꼬이게 된다.

김성주는 마골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폭력집단에 가담하게 된다. 마골은 공산혁명을 한답시고 돈푼깨나 있는 집을 반동분자의 집이라 하여 털고, 사람을 해치고 다녔다. 가정형편 때문에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마땅히 할 일도 없던 김성주는 마골 패거리에 가담하여 잔심부름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소년 김성주는 폭력을 숭상하게 되었고, ‘공산혁명’이란 구호만 내세우면 모든 약탈과 살상이 합리화된다는 불순한 논리에 눈을 뜨게 된다. 당시 조선의 민족주의 계열 단체인 정의부는 마골의 패악질이 심해지자 이를 징벌하기 위해 이종락을 파견하여 마골 일당을 평정하던 중 나이 어린 소년 김성주를 발견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김성주는 이종락 패거리의 말단 조직원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조선인민혁명군’이란 명칭은 이종락이 조직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에서 그 근원이 발견된다. 이종락 일당은 군자금 마련을 위해 장춘의 한 부호의 집에 들어가 강도 행각을 벌이다가 대원들은 사살되고, 대장 이종락은 체포되어 조선총독부에 넘겨졌다. 이종락은 재판을 받고 신의주 감옥에 수감됐다. 이로써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약탈과 강도, 살인을 일삼던 이종락 일파의 극좌 테러조직은 소멸되었다.

이종락의 체포 소식을 들은 김성주는 오가자의 한인들이 사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돈을 갈취하여 마적들에게 권총을 몇 자루 구입한 후 도주했다. 김성주가 오가자 일대에서 이종락 부대의 말단 부대원으로 활동했던 1930년 여름부터 1931년 초까지의 행적에 대해 북한 역사책은 “조선혁명에 관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적 혁명노선을 제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무장조직인 조선혁명군을 조직했고 길동(吉東)지역에서 공산조직을 지도, 고유수, 오가자, 돈화, 안도 지방의 농민 대중 속에서 활동하면서 농촌 청소년 속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고 그럴 듯하게 미화하고 있다. 또 이종락이 김성주의 부하였다고 사실 관계를 정반대로 기술하고 있다(백봉,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무장 강도 생활

김일성 연구가인 허동찬은 김일성이 1930년 7월 6일 길림성 이통현 고유수에서 조선혁명군을 결성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7월 초순 이종락의 조선혁명군에 입대했다는 뜻이라고 지적한다(허동찬, 『김일성평전-허구와 실상』, 북한연구소, 1988). 『김일성열전』의 저자 이명영 교수는 “실제로 있었던 남의 단체 이름 도용하기, 남의 단체와 유사한 이름을 창작해내어 그 조직자나 책임자로 김성주를 앉히는 방법이 북한의 유일혁명전통을 조작해 낸 기본 수법”이라고 지적했다.

권총을 소지하고 무송에 나타난 김성주는 또래의 불량 청년들을 모아 작당한 다음 중국인들의 집을 털고 다니는 무장 강도 생활을 시작했다. 1932년 2월 무렵, 무송 일대에서 조선인 소년 비적들이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약탈 강도 행위가 연이어 벌어지면서 조선 사람들에 대한 악감정이 폭발 일보 직전이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혁명군 지도부(총사령 양세봉)는 조선인 소년 비적단을 체포하기 위해 고동뢰 소대장을 책임자로 하여 8명의 무장대원을 무송에 파견했다. 자신들을 체포하기 위해 진압대원이 출동한 사실을 알게 된 김성주 패거리는 무송에 도착하여 잠을 자고 있던 고동뢰 일행의 숙소를 습격하여 이들을 전원 몰살하고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빼앗아 달아났다.

김성주는 돈화현 부이하(富爾河)란 조선인 농촌 마을에서 머슴 노릇을 하는 등 여기저기 숨어 지내다가 더 이상 숨어 지내기 힘들어지자 1932년 여름 조선혁명군 본부에 투항해 왔다. 조선혁명군 지도부는 자신들의 대원 8명을 살해한 김성주 일당을 총살에 처하려 했으나 총사령 양세봉은 “항복한 자는 죽이지 않는다(降者不殺)”면서 김성주 일당을 사면했다. 김성주는 조선혁명군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어느 날 종적을 감추었다. 그의 나이 20세 때의 일이다.

조선혁명군 본부에 나타났다가 종적을 감춘 이후 김성주의 행적은 오리무중이다. 양세봉의 조선혁명군에서 종적을 감춘 김성주는 1932년 10월 초 안도현 양강구(兩江口)에서 10여 명이 모였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항일투쟁에 참여하는 것이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 항일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동만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북한의 김일성 전기는 이때의 모임을 ‘양강구 회의’라고 설명한다.

김성주 일당 10여 명은 1933년 9월 22일, 중국 구국군 오의성(吳義成) 부대와 동만 공산유격대의 왕청유격대(대장 梁成龍)가 합동으로 진행한 동령현성 전투에 양성룡 부대의 일개 소대로 참가했다고 주장하는 일부 연구자들의 주장이 있다. 물론, 그런 전투에 참여했다는 확실한 물증이나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무렵 김성주의 활동상황을 일지 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2년 2월 : 자신들을 체포하러 온 고동뢰 소대원 몰살하고 안도현 부이하로 도주.
▲3월 : 어머니 강반석이 살고 있던 안도현 소사하로 피신.
▲5월 : 안도현성에서 중국 구국군 우 사령 만나 입대 간청했다 거절당함.
▲8월 : 양세봉 총사령의 조선혁명군에 투항했다가 이탈 잠적.
▲10월 : 양강구로 가서 반만(反滿)항일운동 참여 결정.
▲1933년 9월 : 동만 공산유격대 양성룡 부대에 참여. 중국 구국군 오의성 부대와 합동으로 동령현성 전투 참여설.

●조선인민군은 살인범 집단의 후예?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했다고 주장하는 1932년 4월 25일은 김성주가 고동뢰 소대원 일당을 몰살하고 모친 강반석이 살고 있던 안도현 소사하에서 체포를 피해 숨어 있던 시절이다. 이 무렵에 김성주가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한 것으로 날조하기 위해 1983년 발행된 북한의 김일성 공식 전기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전기(1)』는 다음과 같이 김성주의 활동 기록을 창작해냈다.

▲1932년 3월 : 김성주가 안도에서 소규모 유격대 조직. 이들이 무장할 무기 획득투쟁을 위해 중국인 지주의 집이나 자위단을 기습하여 총을 빼앗아 오기도(142쪽).
▲4월 25일 : 안도현 소사하 토기점골에서 ‘반일 인민유격대’ 창설하고 창군식 거행. 이때 김일성은 무장대오를 사열하고 역사적인 연설(147쪽).
▲5월 1일 : 반일 유격대 이끌고 붉은 기 휘날리며 안도 시내 시가행진. 이날 안도시가에는 반일 인민유격대 창건을 축하하는 환호와 만세 소리 메아리쳐.
▲5월 : 소사하에서 간부회의 소집, 반일 인민유격대 남만으로 이동 결정.
▲6월 하순 : 남만의 통화에 도착하여 조선혁명군 양세봉 사령관 만나.
▲8월 : 통화에서 사업 마치고 안도현 양강구로 이동.
▲1933년 9월 : 오의성 부대와 함께 김일성이 총지휘하여 동령현성 전투 치러.
▲1934년 3월 :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201쪽).

김성주의 당시 행적을 확인해 보면 일부는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인위적으로 꾸며낸 것이다. 확실한 팩트(fact)는 고동뢰 소대를 잡아 죽인 김성주가 체포를 피해 여기저기 도망 다니면서 10여 명 미만의 불량 패거리들을 모아 작당한 사실이다. 이것이 훗날 거창하게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뻥튀기 되었고, 급기야 조선인민군의 모체로까지 승격되었다.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오늘날 북한이 자랑하는 조선인민군은 만주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 독립 무장부대 소대원 10여 명을 몰살시킨 살인범의 후예라는 점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다.

이 시기 김성주의 행적에 대한 북한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은폐, 기만, 날조, 왜곡, 새치기하기 위해 시기마다 변화무쌍하게 이력이 달라진다. 북한이 주장하는 20세 이후의 김성주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해방 후 초기 : 김성주가 재만(在滿) 중국공산당 유격대였던 동북인민혁명군(후에 동북항일연군)에서 대장(隊長) 노릇을 했다고 기록(북조선예술총연맹 편, 해방 1주년 기념 김일성 장군 찬양특집, 『우리의 태양』).
▲1950년대 전반기 : 만주사변 직후 동북인민혁명군과 관계없는 항일 무장 유격대를 조직해서 그것으로 해방 때까지 싸웠다고 수정(조선사 편찬위원회 편, 『조선민족해방투쟁사』).
▲1958년 무렵 : 만주사변 직후가 아니라 1932년 초에 안도현에서 항일 유격대의 최초 부대를 조직했다가, 그것을 기초로 1934년 초에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해방 때까지 싸웠다고 수정(이나영 저, 『조선민족해방투쟁사』).
▲1968년 무렵 : 안도현에서 최초의 항일유격대를 조직한 것이 1932년 4월 25일로, 조선인민혁명군 조직은 1934년 초가 아니라 1936년 2월이라고 수정(백봉,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

●조선인민혁명군은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유령부대

흥미로운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어떤 기록을 뒤져봐도 김성주가 조직했다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항일 독립 무장부대는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유령 부대’였다는 사실이다. 김성주가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소사하(小沙河) 토기점(土器店)골에서 조직했다고 주장하는 ‘반일 인민유격대’의 실상은 시골 마을 주민들을 등쳐먹는 테러 집단인 ‘개잡이대’였다. ‘개잡이대’란 주민들 속에서 군벌정권의 주구(走狗)와 지주, 반공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찾아내 개처럼 때려잡는다는 뜻에서 붙여진 공산주의 테러 조직을 뜻한다.

문제의 이 유격대가 토기점골에서 결성되었다는 주장은 1972년에 처음 등장하고, 그 유격대의 명칭이 ‘반일 유격대’였다는 주장은 훨씬 뒤인 1981년에 가서야 등장한다. ‘반일 인민유격대’를 조직하는데 9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성주가 그 엄혹한 시절에 양성룡 부대의 일원으로서 동령현성 전투에 참여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물론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나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의미 있는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시기마다 활동 내용이 달라지고, 사실관계를 구질구질하고 복잡하게 꾸며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역사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1932년 초에 조직된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은 그해 11월에 20세의 대장인 김일성 휘하에 6,000명의 대원을 결성했다. 동만주에 근거지(사령부)를 둔 김일성 휘하의 조선인민혁명군은 만주대륙의 거의 전 지역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15년간에 걸쳐 10만여 회에 달하는 전투를 진행했으며, 그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고, 6만여 명의 적을 살상 내지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한다(<로동신문>, 1976년 8월 9일자).

이 수치를 분석하면 15년 간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평균 20회의 전투를 벌여 매번 승리하고, 매일 10.9명의 적을 살상 내지 포로로 잡아야 이 수치가 나온다. 이것이 김일성이 주장했던 “인민군 창건일 4월 25일”의 진상이다.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전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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