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현대사 추적]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건일로 바꾼다고?
[김용삼의 현대사 추적]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건일로 바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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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날은 38선 이북 지역으로 북진을 개시한 10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것. 즉, 국군의 북진을 통해 북한 지역을 수복하여 통일대한민국 수립이라는 열망이 담겨 있는 날이 10월 1일이다. 만약 국군의 날이 광복군 창설일로 변경되면 북한 지역 수복을 통한 통일대한민국 건설 열망을 수장(水葬)시키는 행위가 될 것
지난해 국군의 날에서 경례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여당은 38선 넘어 북진을 개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한 10월 1일을 광복군 창건일로 바꾸겠다고 나섰다.(연합뉴스 제공)
지난해 국군의 날에서 경례를 하는 문재인 대통령. 여당은 38선 넘어 북진을 개시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국군의 날(10월 1일)을 폐지하고 광복군 창건일(9월 17일)을 국군의 날로 바꾸겠다고 나섰다.(연합뉴스 제공)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인 4월 1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을 국군의 날 및 국경일로 격상해서 기념하겠다고 나섰다. 임시정부 수립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로 바꾸려는 시도는 대단히 심각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국군의 날은 1950년 10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국군이 북진을 개시한 날이다. 1950년 9월 28일,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진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서울 환도 기념식이 끝난 후 이승만은 맥아더 장군에게 도주하는 적을 추격·격멸한 후 통일 대한민국 수립을 위해 유엔군을 38선 이북 지역으로 북진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맥아더 장군은 “유엔이 나에게 38선을 넘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면서 난색을 표시했다.

국군의 날에 담긴 통일 열망

당시 유엔은 공산군이 38선을 월경하여 침략했으니, 봉쇄정책에 의해 적을 38선 위쪽으로 격퇴시킨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38선 부근에서 전 병력의 진격을 멈추도록 명령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9월 30일, 대한민국 국군통수권자로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대한민국 국군은 북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10월 1일 오전 11시 25분, 국군 수도사단 23연대가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다. 양양에서 북진을 개시한 국군 1군단 소속의 2개 사단은 38선에서부터 200㎞를 열흘 만에 주파하여 10월 10일 원산을 점령했다.
이승만의 명령으로 국군이 단독으로 북진을 개시하자 10월 3일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는 “유엔군은 10월 3일 0시를 기해 38선 이북의 북한에 작전을 연장한다”는 일반명령 제2호를 발표했다.
상황이 복잡하게 변하자 유엔총회는 10월 7일, “침략군의 무력을 분쇄하여 북한 인민들이 자유롭게 선거에 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유엔군의 38선 이북 북진을 허락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워커 8군사령관이 정식 북진명령을 받은 것은 10월 7일이었고, 미군 주력부대인 1군단이 38선을 넘은 것은 이틀 뒤인 10월 9일이었다.
현재의 국군의 날은 38선 이북 지역으로 북진을 개시한 10월 1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다. 즉, 국군의 북진을 통해 북한 지역을 수복하여 통일대한민국 수립이라는 열망이 담겨 있는 날이 10월 1일이다. 만약 국군의 날이 광복군 창설일로 변경되면 북한 지역 수복을 통한 통일대한민국 건설 열망을 수장(水葬)시키는 행위로 해석될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 인사들이 오매불망 그리는 광복군의 실상은 어떠했는가를 알아보자.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4월 8일 경교장에서 열린 당 회의에서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가 의병, 독립군으로 발전해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으로 이어졌다”면서 “이것이 바로 국군의 뿌리”라고 발언했다. 그러니 광복군 창설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하고, 국경일로 격상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에서 광복군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임정은 광복군을 유지 운영할 만한 재정적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 1941년 11월 19일 임정은 중국 정부와 협상 끝에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을 체결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중국 정부로부터 광복군의 중국 영토 내에서의 활동을 승인받고, 광복군의 훈련과 무기·장비·급여 및 경비 일체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도록 한 것이다.

중국군의 명령과 지휘 받은 광복군

이날 임시정부가 체결한 행동준승에 의해 한국 광복군은 중국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하며(1항), 임시정부는 단지 명의상으로만 광복군의 통수권을 갖게 되었다(2항). 이때부터 광복군은 중국 정부의 군사원조에 대한 대가로 총사령부 내 참모장, 참모처장 등 요직을 중국군 장교들에게 내주었다. 그 결과 독자적인 군사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충칭에서 창설된 광복군. 광복군은 이상은 드높았으나 현실 여건은 참혹했다. 중국 정부로부터 무기와 재정, 운영비 일체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중국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했고, 임시정부는 명의상으로만 광복군의 통수권을 갖게 되었다. 광복군의 모든 요직은 중국군이 차지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광복군의 민낯이었다.(연합뉴스 제공)
충칭에서 창설된 광복군. 광복군은 이상은 드높았으나 현실 여건은 참혹했다. 중국 정부로부터 무기와 재정, 운영비 일체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중국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아야 했고, 임시정부는 명의상으로만 광복군의 통수권을 갖게 되었다. 광복군의 모든 요직은 중국군이 차지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광복군의 민낯이었다.(연합뉴스 제공)

광복군은 의병전쟁과 독립군의 전쟁노선을 계승하여 조국 해방의 전위부대를 자처했지만, 현실은 소수의 병력으로 훈련·첩보·선전활동에 종사하는 보조군의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거창했던 창군 당시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1945년 4월 광복군의 규모는 541명(중국인 장교 65명), 종전 시점에도 682명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김구는 중국 정부와 교섭을 하여 1945년 5월 1일 ‘원조한국광복군판법(判法)’을 체결했다. 광복군은 한국의 광복을 위해 투쟁하며, 광복군에 소요되는 비용은 중국이 차관 형식으로 임시정부에 제공하되 한국이 독립한 후 정산한다, 포로 중에 조선인이 있으면 광복군에게 인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광복군의 민낯이다. 광복군의 이상은 숭고하고 화려하고 거창했으나 현실이 이상을 따라주지 않았다. 만약 국군의 날을 10월 1일에서 광복군 창건일로 바꾸면 우리는 미군의 작전지휘를 받는 국군에서, 중국군의 작전지휘를 받는 국군으로의 회귀를 뜻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북한도 조선인민군 창건일을 변경한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조선인민군은 북한에서 정부 수립이 선포되기 7개월 전인 1948년 2월 8일 창건되었다. 이날평양역전 광장에서 40만 인파의 환호 속에 소련제 최신무기로 무장한 조선인민군이 창건을 선포하고 열병식을 거행했다.
인민군 창설 선언 후 최초로 맞은 1948년 5월 1일 노동절(메이데이), 남북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일명 남북협상)에 참석차 평양에 올라와 있던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측 대표자들에게 인민군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김일성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거창하게 조선인민군의 열병 분열식을 실시했다.
이날 평양에 올라가 남북협상을 추진했던 남측 대표자들은 3시간 넘게 진행된 인민군의 행진과 사열, 신무기 소개 등을 보면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김구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것은 이날 인민군의 무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차피 무력 대결에서 남한은 승산이 없으니 건국해봤자 곧 적화통일 될 것이 확실하다. 무엇 때문에 수고롭게 남한에 정부를 수립하는가. 이것이 김구의 속내였다는 사실은 자유중국 총영사 유어만(劉馭万)과의 대화록에서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조선인민군 창건일 변경 쇼

그런데 김일성은 1978년 2월, 1932년 4월 25일 김일성의 빨치산 부대인 조선인민혁명군이 조직된 날이 진짜 인민군 창설일이라면서, 느닷없이 인민군 창설 일자를 16년이나 앞당겨 이날을 ‘건군절’이라고 선언했다. 이날자 「로동신문」은 ‘김일성 수령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한 날을 기념하여 혁명무력의 정통성을 더욱 뚜렷이 하기 위해 1932년 4월 25일을 인민군 창건기념일로 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을 사설을 실었다.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사를 연구한 수많은 학자들이 조선인민혁명군의 존재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김일성이 조직했다는 이 부대는 어떤 역사 서적이나 자료, 증언에도 등장하지 않는, 실존하지 않는 유령 부대로 결론이 났다.   
더 웃기는 일은 지난 2018년 1월 22일 벌어졌다. 북한의 3대 세습 군주 김정은은 “인민군 창건일은 1948년 2월 8일이 맞다”면서 자기 할아버지가 제정했던 4월 25일을 무시하고 원래 창건일인 2월 8일로 회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2월 8일이 평창올림픽 개막 전야제가 열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평화의 제전에 재를 뿌리기 위해 인민군 창건일 변경 쇼를 벌인 것이다.
여당이여. 이런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건일로 변경하겠는가? 대체 무엇을 위해 국군의 날을 이토록 괴롭히는가?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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