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 탐험기] 박정희 시절 추진되었던 자주국방 비화(祕話)
[박정희 시대 탐험기] 박정희 시절 추진되었던 자주국방 비화(祕話)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이 게릴라를 침투시키거나 우리 국민에게 위해를 가하면 보복공격을 철저히 수행했습니다.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 정확히 말씀드리긴 곤란합니다만 그들의 도발에 대해 강력한 보복공격을 하여 공산당의 기를 꺾었어요. 김일성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박 대통령에게 철저하게 당했기 때문입니다.”
6·25의 전쟁영웅 이병형 예비역 육군중장은 한국 방위산업의 창안자다. 1926년 함북 북청 출신의 이 장군은 1947년 육사(4기)를 졸업하고 6·25에서 용맹을 떨쳤던 수도사단 18연대(백골부대)의 연대부관, 18연대 1대대장, 보병 제8연대장으로 참전하여 130회의 부대 단위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고 승리를 기록했다. 전후엔 제1사단장, 5군단장, 합참본부장, 제2군사령관 등을 지내며 자주국방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2003년 작고했는데, 기자는 1997년 박정희 시절 추진되었던 방위산업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이 장군의 오랜 친구인 이석제 전 감사원장의 추천으로 이병형 장군을 만나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방위산업 비화를 들었다. 적의 원자폭탄과 미사일 도발을 멀쩡하게 구경만 하고 있는 군과 국가 지도부 인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뜻에서, 그리고 박정희 시절에 추진되었던 방위산업 건설과 자주국방의 의지를 전하기 위해 관련 내용을 대담 형식으로 정리하여 소개한다. 
한국군 방위산업의 창시자인 이병형 장군.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우리 기술로 국산 병기 개발을 건의하여 105mm 야포 개발에 돌입하면서 방위산업이 시작되었다.
한국군 방위산업의 창시자인 이병형 장군.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우리 기술로 국산 병기 개발을 건의하여 105mm 야포 개발에 돌입하면서 방위산업이 시작되었다.

한국 최초의 방위산업 작품은 서치라이트 개발

이병형 예비역 육군중장은 오늘날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기초를 다진 주인공이다. 그는 방위산업을 신라통일 이후 1300년 만의 재무장으로 이해했다. 이 장군이 방위산업에 눈을 뜨게 된 것은 6·25 전쟁 기간 중이었다. 작전지도 한 장 없는 상황에서 어렵게 전투를 치르며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흔히들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은 1969년 닉슨 독트린이 발표되고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병형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그보다 2년 전인 1967년부터 본격적인 방위산업 건설의 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병형 장군은 1967년 7월 하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엔 해안을 통해 북한 간첩과 게릴라들이 무시로 침투를 거듭하던 때였다. 해안으로 침투하는 간첩을 잡기 위해서는 서치라이트가 필수불가결한 장비였지만 미군은 이 장비를 보급해 주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이병형 장군은 국내 기술로 서치라이트를 개발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연구개발에 착수했다.
마침 일본 요코하마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서치라이트를 만들던 회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들에게 일제시대 때 쓰던 설계도를 얻어다 국산 서치라이트를 개발한 것이 군사장비 국산화의 시초였다.
자신을 얻은 우리 군 지휘부는 다음 과제로 낙하산 국산화에 도전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낙하산 정도는 일개 중소기업이 만드는 물건 정도로 이해되지만, 당시 국내 기술로는 엄두를 내기 힘든 제품이었다. 만약 제때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군인의 소중한 생명이 희생되는, 품질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강조되는 제품이 낙하산이었다.

공수특전단의 공수낙하 장면. 한국군의 방위산업은 서치라이트, 낙하산 국산화 개발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국산 낙하산의 품질에 대한 신뢰도 문제로 아무도 낙하하려 하지 않자, 이병형 장군이 1호로 국산 낙하산을 이용하여 공수 낙하했다.(연합뉴스 제공)
공수특전단의 공수낙하 장면. 한국군의 방위산업은 서치라이트, 낙하산 국산화 개발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국산 낙하산의 품질에 대한 신뢰도 문제로 아무도 낙하하려 하지 않자, 이병형 장군이 1호로 국산 낙하산을 이용하여 공수 낙하했다.(연합뉴스 제공)

당시 육군 작전참모부에서는 우리 국군의 전투능력 강화를 위해 1개 사단을 적 후방에 공수 낙하하는 능력을 가진 부대로 전환할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 필요한 낙하산 1만 5,000개를 미군 측에 요구하자 “낙하산은 공격용 장비라 제공할 수 없다”는 답변이 왔다.
그래서 이 기회에 낙하산을 국산화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도전하게 된 것이다. 이 장군은 정병주 당시 공수특전단장을 찾아가 “우리 기술로 낙하산을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미군이 제공한 미국제 낙하산 하나를 완전 분해하여 설계도를 그려보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공학 분야에서는 역설계, 혹은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이라고 한다. 후발국이 선발국을 추격할 때 흔히 사용하는 방법론이 바로 리버스 엔지니어링이다.
간단해 보이는 낙하산을 분해해 보니 모두 180여 개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것을 모두 분해하여 설계도를 완성한 다음 알미늄 합금으로 된 부품은 영등포의 합금공장에서 제작토록 했고, 낙하산 천은 방직협회 도움으로 미국에 수출하는 회사의 것을 얻어다 낙하산을 만들었다.
국산 낙하산이 완성되었지만, 미국 제품에 익숙해 있던 공수부대원들 중 어느 누구도 국산의 품질을 신뢰하지 않았다. 시제품 1호가 완성되었을 때 이병형 장군은 자기가 가장 먼저 국산 낙하산을 메고 고공으로 날아올라 국산 낙하산 공수 낙하 1호 인물이 되었다. 그 후 100회 이상의 낙하 시험을 한 결과 국산 낙하산의 품질이 미제보다 성능이 우수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오늘날 한국이 최고급 낙하산 수출국으로 부상한 것이다.

105㎜ 야포 개발 秘話

이병형 장군은 1968년 육분 작전참모부 산하에 전쟁물자(방산제품) 개발과 전쟁 교리(敎理) 개발을 목적으로 한 ‘전투발전사령부’를 창설했다. 이때부터 미국 측에서 집요하고 끈질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 태평양사령부 책임자가 이 장군을 찾아와 “한국의 전투발전사령부에 미군 군사고문단을 배치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다. 한국의 방위산업을 감시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 장군은 미군들에게 의심을 사면서까지 고문관을 물리칠 수 없어 그들의 의견을 수용했다.
전투발전사령부의 첫 작품이 105㎜ 야포의 국산화였다. 이 장군은 당시 한국의 기계공업 수준으로 야포 생산이 가능한지를 파악하기 위해 40여 명의 장교를 동원하여 4개월 동안 우리 기계공업 분야를 샅샅이 조사했다. 한편에선 105㎜야포 1문을 완전 분해하여 리버스 엔지니어링 방식으로 설계도를 만들었다. 이처럼 한국 방위산업의 설계는 미군 장비를 분해한 다음 그것을 토대로 설계도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야포 국산화 작업이 추진되던 중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정부는 북한 게릴라 부대에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기습을 당하는 등 국가안보에 허점을 노출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의 계획과 관료들의 사고를 국가의 전시(戰時)소요계획과 일치시키자는 뜻에서 을지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을지연습은 처음에는 정부 내 주요 관련기관이 참가하여 비정규전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 향상을 위해 시작되었다. 1970년부터는 북한의 전면남침 상황에 대응하는 훈련으로 확대되었고, 1972년에는 수도권 방어계획과 연계하여 실제훈련이 병행 실시되었으며, 1976년에는 군사연습과 통합 실시함으로써 범정부적 차원의 훈련으로 발전되었다. 1984년부터는 전후방 동시 전장화 상황에 대비하여 대응태세를 검토하면서 종합적인 정부연습으로 정착되었다.
때마침 을지연습 기간 중에 박정희 대통령이 작전참모부를 방문했다. 이 장군은 이 기회에 육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방위산업의 개요를 브리핑했다. “방위산업”이란 말이 나오자 박 대통령의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105㎜ 야포 국산화계획을 설명하고, 우리의 경제성장 속도로 볼 때 자주국방을 목표로 방위산업을 착수해야 할 시점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방위산업이 태동하게 된 첫 번째 계기였다. 이병형 장군에게 보고를 받은 박정희는 대단히 흡족한 표정으로 “이 장군, 정말 우리 기술로 105㎜ 야포를 만들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이 장군은 “포신과 포경(砲鏡·포신을 표적을 향하도록 하거나 우회 수평각을 측정하는데 사용되는 기재)을 만드는 기술을 제외한 87%는 우리 기술로 제작이 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 문제만 해결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라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장군에게 “회사를 하나 정해 보게. 야포 생산을 위해서는 돈이 많이 들 거야. 그 비용은 정부 예산으로 지원해서 운영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지시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다섯 가지로 나뉘어 있던 국방비 항목에 방위비 항목을 더 만들자”는 의견까지 내놓았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105㎜ 야포 국산화 계획을 보고한 후 이 장군은 우리의 경제능력, 북한의 군사력과 우리 군사력의 강약점을 샅샅이 연구한 다음 ‘군사력 건설계획’이란 방위산업 육성계획안을 만들어 박정희 대통령에게 여섯 시간에 걸쳐 보고했다. 이것이 오늘날 추진되고 있는 방위산업의 출발이었다. 이병형 장군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10억 원의 국가재산을 지키기 위해 9억 원을 투자하면 1억 원이 남는다. 그러나 9억 원을 투자하는 것이 아까워서 5억 원만 썼다가 국가재산을 지키는 데 실패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국방과학연구소(ADD) 출범

박 대통령은 중요한 정책 하나가 구상되면 밤낮으로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골똘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의 인물이었다. 방위산업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누구와 만나든 방위산업을 화제로 올렸다. 그 결과가 ADD, 즉 국방과학연구소의 출범이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박 대통령 생전에는 국방부에 소속된 대통령 직속기구였습니다. 대통령의 직접 관장 하에 방위산업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이었죠. 성능이 우수한 무기와 장비를 개발해 군의 전력을 최고로 유지하는 것이 국군 최고통수권자의 책임이자 의무라는 사실을 대통령이 인식했던 겁니다.”
박 대통령은 단순한 무기 국산화 차원이 아니라, 국가 산업구조를 방위산업이 가능한 구조로 개편하는 혁명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청와대에 방위산업담당 비서관을 신설했고, 중공업과 기계공업 육성을 위해 창원공업단지라는 기계공업의 핵심공장을 통째로 건설했다. 방위산업에 소요되는 예산을 지원하기 위해 방위세를 신설했고, 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각 도(道)마다 기계공고를 설립하는 등 원대한 계획들이 속속 추진되었다.
이 장군은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보면서 “이 나라가 운이 있어 박 대통령 같은 지도자를 만난 모양이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국가 지도부가 국민을 잘 먹이고 입히는 것은 둘째 과제라고 하셨습니다. 국가의 생존이 첫째 과제라는 겁니다. 아무리 잘 먹이고 잘 입혀도 나라가 망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뜻이었죠. 그 분은 자내깨나 자주국방, 국가안보를 통치의 최우선과제로 삼았습니다.”
ADD가 본격가동된 것은 1972년 5월이었다. 이 장군이 합참본부장으로 부임했을 때 꿈에 그리던 105㎜ 국산 야포가 생산되어 해병대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사격과정에서 포신이 파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건이 청와대까지 보고되어 ADD 소장인 신현택 박사가 호된 꾸중을 들어야 했다.
정밀조사 결과 주퇴복좌기(Run-out cylinder·사격을 했을 때 포가 뒤로 후퇴하는 부분)에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그 원인을 해결할 기술도, 경험도 없었다. 신현택 박사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녔지만 결과는 허탕이었다.
“105㎜ 야포를 생산하는 회사에 부탁해서 미국인 기술자 두 명을 초빙했는데, 6개월 동안 월급만 받아먹고는 아무런 조언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일본 자위대에 문의했더니 ‘군복 입은 사람은 와도 좋지만 기술자는 안 된다’고 클레임을 거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방위산업이란 권총 설계도 한 장 보여주지 않는 것이 국제관례란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거죠.”

1970년대 초 악전고투끝에 105mm 곡사포 국산화 개발을 시작한 한국의 방위산업은 이제 전차, 탄도미사일 수직 발사가 가능한 3000톤급 잠수함, 초음속 전투기까지 개발 생산하는 단계에 올랐다. 사진은  K-9 자주포 발사 장면.(연합뉴스 제공)
1970년대 초 악전고투끝에 105mm 곡사포 국산화 개발을 시작한 한국의 방위산업은 이제 전차, 탄도미사일 수직 발사가 가능한 3000톤급 잠수함, 초음속 전투기까지 개발 생산하는 단계에 올랐다. 사진은 K-9 자주포 발사 장면.(연합뉴스 제공)

결국 죽기 살기로 ADD 기술진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포 사격을 할 때 포신이 뒤로 후퇴하는 속도를 조정하는 것은 유압장치의 기름을 조절하는 구멍의 크기와 관계가 있었다. 기술진은 기름구멍 크기가 서로 다른 주퇴복좌기를 여러 개 만들어 각각의 포에 장착한 후 5군단 사격장에서 수천 발 시험사격을 했다. 여기서 주퇴복좌가 가장 우수한 것을 설계에 채택한 것이다.

전쟁물자와 장비 100% 국산화가 방위산업의 목표였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된 국산 105㎜ 야포는 미국제보다 명중률이 높았다. 개발 과정에서 포신을 좀 더 늘이고, 후퇴 압력을 줄이기 위해 소염기를 다는 등 여러 부분을 우리 지형에 맞도록 개량했기 때문이다.
-이 장군께서 구상하신 방위산업의 철학은 무엇이었습니까.
“방위산업의 핵심은 군사장비나 물자의 자급자족입니다. 전시에는 각국이 정치적 영향을 받아 물자나 장비공급이 중단될 위험이 큽니다. 따라서 국가안보에 필요한 병기와 전쟁물자는 우리 기술로 자급자족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정치권 일부에서 방위산업에 대한 회의론이 일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던데요. 그런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자주국방에 대한 투자와 노력을 아까워하다가 막상 전쟁이 나면 국가의 안전은 끝입니다. 국민들이 안이한 생각을 가진다면 국가 지도부가 나서서 국민에게 안보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올바른 사고라고 봅니다.”
-당시 자주국방의 원칙을 세웠던 방위산업이 오늘날에는 그 목표가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외국제 첨단무기 도입이 주된 목적이 되어 자주국방 의지가 퇴색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데요.
“최근의 방위산업 추진현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만, 박정희 대통령 생존 시보다 위축된 것만은 사실이라고 봅니다. 외국제 무기를 사다 쓰는 것은 너무 안이한 발상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어요. 의지만 있다면 우리의 능력이나 기술수준으로 첨단 과학무기 생산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박 대통령이 미국과 마찰을 빚은 것도 위한 방위산업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미국의 압력이 어느 정도였는지요.
“아마 박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없었다면 방위산업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우리 방위산업이 본 궤도에 오르자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압력이 오더군요. 그들은 기회만 나면 주한미군 철수, 원조중단 등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만, 박 대통령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회에 자주국방을 하지 않으면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의지로 버틴 겁니다.”

박정희 재임 시절 일본이 방위산업 공동개발 제안

-미국이 우리의 방위산업에 제동을 건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1968~69년 무렵 일본에서 한일 공동으로 방위산업을 육성하자는 제안이 왔습니다. 일본이 기술을 제공하고 우리가 생산을 맡아 량국의 수요를 충당하고 해외시장에 수출하자는 내용이었죠. 박 대통령은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 분은 자주국방을 못하면 자주독립국이 아니라는 철학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방위산업은 자립적 기틀을 갖추어야 한다는 철학이었죠.
방위산업의 자주성을 상실하면 국가주권을 침해받을 위험이 큽니다. 또 박 대통령은 정밀무기 가공기술로 산업발전을 이룬다는 계산까지 이미 하셨던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우리 방위산업에 대단히 냉담합니다. 자기들의 방위산업권 내에 우리를 편입시켜 미국이 무기를 대주면 살고, 공급을 중단하면 망하는 생사여탈권을 쥐려는 목적이죠. 우리가 자주국방을 달성하면 통제하기 어려우니까 국산무기 개발을 방해하는 겁니다.”
-개발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개발비가 많이 드는 무기는 외국에서 도입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 아니냐 하는 의견을 제시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얼마 전 일본에서 나오는 『국방(國防)』이란 잡지를 보니 민간회사 회장들이 공군용 수송기 개발을 주장하는 내용이 소개되었더군요. 이 비행기를 외국에서 사오는 것보다 개발비가 열 배나 더 드는 사실을 알면서도 개발한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유사시 국제간의 정치적 압력에 의해 무기도입이 금지될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죠.”
이병형 장군은 육군 출신이지만 방위력 건설 과정에서 해군과 공군의 중요성을 적극 강조했고, 해·공군 전력증강을 위한 전투기, 군함 독자개발을 위해 무진 노력을 다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현대전에서 해·공군의 중요성을 주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이병형 장군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공군은 장거리 작전이 가능한 융통성 있는 전력입니다. 요즘엔 미사일이 공군의 임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만, 미사일이 항공기를 필적하기는 어렵습니다. 미사일에 날개를 단 것이 비행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미사일은 한 번 날아가 목표물에 부딪쳐 폭발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회수가 가능하기 때문에 가격이 싼 폭탄을 목표물에 투하한 다음 다시 회수하여 지속적인 재사용이 가능하죠.”

국산 잠수함과 전폭기 개발 비화

이 장군은 공군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현대 육군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힘듭니다. 그만큼 항공기 성능이 발달했기 때문이죠. F-4 팬텀 전폭기는 2차 대전 당시 용맹을 떨쳤던 B-29 폭격기보다 더 많은 폭탄을 적재할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폭탄을 투하한 다음엔 전투기로서 훌륭하게 공중전을 수행할 수 있어요.”
-해군전력 강화를 위해서도 애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우리는 3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방어에 유리한 지형입니다. 적이 한국을 침공하려면 상륙작전이라는 복잡한 상황을 감안해야 합니다. 우리는 수중전력을 강화해 적의 항만 입구에 숨어 있다가 공격하여 우리 해안에 접근을 못하도록 한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울러 대(對)잠수함 전력 강화를 위해 구축함 건조계획도 수립했죠.”
초기에는 기술이 없어 미군에 잠수함 도입을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모간 주한 미 해군사령관은 “잠수함은 공격용 무기이기 때문에 원조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잠수함 도입 요청을 거절당한 이 장군은 잠수함 설계기술을 지원해줄 사람을 은밀히 물색했다. 그 때 주영 대사관 무관부에서 은퇴한 영국 잠수함 기술자와 접촉하여 그를 한국에 초청했다.
그런데 영국의 잠수함 기술자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주한 영국대사관에서 요원이 나와 그를 납치하다시피 모셔 갔다. 우리 기술진과 만나는 장소마다 주한 영국 대사관 측의 감시자가 동석했고, 숙소는 대사관 내부에 정해 두어 우리 측과의 접근을 원천봉쇄했다.
사정을 알아보니 합참과 주영 한국대사관 사이에 오고간 비밀 전문을 미국이 모두 도청하여 영국 정보부에 통보한 것이다. 이 사실을 영국 대사관측에 항의하자 이런 답변이 날아왔다고 한다.
“영국 국내법에 의하면 방위산업에 종사했던 기술자는 보안감시 대상이다. 이들이 해외여행 시 영국 정부는 신변안전을 도모할 책임이 있다.”
결국 잠수함 설계 기술자 초청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공군 능력 강화를 위한 박정희 정부의 계획들을 질문하자 이병형 장군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제가 합참본부장 시절 국방부에 ‘국산 전폭기 개발’을 제의했습니다. 그러자 선배 장성들이  ‘우리가 무슨 기술로 전폭기를 만드느냐’ 며 말도 못 꺼내게 하더군요. 저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선진국은 태어날 때부터 비행기 기술을 타고난 것이 아닙니다. 되든 안 되든 만들어보자는 의지가 중요한 거죠.
합참과 국방부가 전폭기 개발문제로 대립한다는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이병형 장군의 손을 들어주었다. 박 대통령이 국방부에 “앞으로 몇 년 안에 고성능 전폭기를 생산하라”는 특별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 결과 F-5 전투기를 국내에서 조립생산한 후 우리 기술로 부품을 개발해 완전 국산화한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하지만 이 계획은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에 상당 부분 수정되었다고 한다.

군사력은 정치적 협상의 배경

-방위산업은 자주국방을 통한 군사력의 강화로 귀결됩니다. 세계화 시대의 국제환경에서 군사력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군사력은 협상의 배경이자 정치력의 백 그라운드이며 국가의 생존능력입니다. 세계무대에서는 군사력이 강한 국가만이 자존을 인정받습니다.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해 전쟁을 예방하는 결과도 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육해공군의 균형적 발전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사시 육군이 언제 전차를 타고 베이징(北京)이나 도쿄(東京)까지 가겠습니까. 그러나 공군 전투기는 몇십 분이면 가능합니다. 육군만 가지고는 상대국이 높은 전력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병형 장군께서 처음 방위산업을 구상할 때 통일 이후의 국제정세까지를 염두에 두었다는 뜻입니까.
“국방력 발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북한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의 군사력 전개까지를 염두에 두고 전략목표를 연구합니다. 우리가 통일이 되든 안 되든 일본·중국·러시아 등 주변강국은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근 국회의 국정감사에서 박 대통령 시절 핵무기 개발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방위산업 의지 속에 핵무장도 포함된 것이 사실입니까.
“국가안보를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자세히 말씀드리기 곤란하군요.”
-방위산업은 군의 필요에 의해 민간산업체가 생산을 담당하는 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군과 민간 산업체간의 원활한 협조체제가 중요한데요.
“방위산업은 정부와 민간과 군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 범국가적인 위기관리능력, 협조체제 등을 완벽하게 갖추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사례를 보고 배워야죠.”
이 장군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기뢰 공격을 당해 수송로가 거의 끊길 뻔했던 영국이 민·관·군(民官軍)의 신속한 대응으로 피해를 막았던 사례를 소개했다.
2차 대전 당시 독일은 영국  안 봉쇄를 위해 침전기뢰를 개발해 비행기로 영국 해안선과 항만 입구에 투하했다. 이 기뢰로 인해 영국 해군과 전쟁물자를 운반하는 상선대가 심한 피해를 당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 정부는 즉각 기술동원위원회를 소집해 독일제 기뢰의 대응방법 연구를 지시했다. 기술진은 선박 밑창에 두 줄의 아연봉을 매달면 침전기뢰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24시간 만에 아연봉 제작도면까지 완성했다.
다음 단계로 즉각 산업동원위원회가 소집되었다. 이 위원회는 민간회사에 아연 원료 제공, 생산, 운반, 설치, 공급 등의 임무를 부여했다. 즉시 아연봉이 대량으로 생산돼 해군과 선박회사에 제공됨으로써 독일의 침전기뢰를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전쟁기념관의 B-52 전략폭격기는 한미 혈맹관계의 상징

-방위산업을 구상하면서 항공모함 계획을 검토한 적이 있는지요.
“대양해군 건설은 해양적 조건이 중요합니다. 우리 주변의 바다는 대양적 성격이 아니라 폐쇄된 성격이기 때문에 대형 함정이나 항공모함 운영에는 불리합니다. 전술적으로 설명하면 항공모함이나 대형함정이 상대국의 감제관측 하에, 즉 뻔히 보이는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전력보존이나 발휘, 투자대비 효과 측면에서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봅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해상수송로의 확보와 방어를 위해서는 대양해군의 필요성이 절실하다는 주장들이 있는데요.
“군사력은 경제적으로 운영되어야 합니다. 해상수송로 확보를 대양해군 건설로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동맹관계를 통해 해결할 것인지 국가적인 대전략 하에서 연구 검토할 과제라고 봅니다.”
이 장군은 월등한 군사력과 엄청난 인구, 세계 일류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주변국 사이에서 생존하려면 강력한 경제력의 뒷받침을 받는 국방국가로 남을 수밖에 없다며, 강력한 국방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세계 최고수준의 정보력, 방위산업 육성, 그리고 적절한 동맹관계이 유지 등 세 가지 요소가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무대에서 동맹관계는 더없이 중요한 국가전략의 하나라고 한다. 그러나 동맹국은 우리의 존재가 유용한 가치가 있을 때만 동맹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국제관계의 현실이라고 한다.
이 장군은 전쟁기념관에 전시중인 B-52 전략폭격기가 미국과 군사동맹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역사상 현역에서 활약 중인 B-52를 제공한 것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 폭격기는 전쟁기념사업회장을 맡았던 이 장군의 노력으로 도입된 것이다.
“저는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상징하기 위해 B-52를 얻어올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리스카시 미8군 사령관을 만나 그를 설득했어요. 미국이 세계전략 수행에 있어 한국은 유럽의 영국, 중동의 이스라엘과 같이 대단히 중요한 존재다. 따라서 한국의 전쟁기념관에 미국 군사력의 상징인 B-52를 전시하여 우리 국민에게 미국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죠.
미국에서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는데 소련이 민감하게 대응하더군요. 마침 소련이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소련에 ‘한국에 B-52를 제공하는 문제에 대해 한 달 이내에 회신이 없으면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통보하고 우리에게 이 폭격기를 제공한 겁니다.”

자위목적의 선제공격은 정보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

-한국군은 방어위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북한과 전쟁이 벌어져도 우리는 급소를 기습당한 후 반격하는 것으로 시나리오가 짜여져 있다고 합니다. 만약 북한의 도발징후가 확실할 때 기습당하고 싸울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선제공격을 할 것인가는 국가의 존망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선제 기습공격이 가능하려면 정보체계가 확실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기습 선제공격으로 승리한 것도 정보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기습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정확한 정보가 있을 때 북한을 공격하면 자위적인 선제공격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정보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선제공격을 하게 되면 침략이 되죠. 우리 군에서도 자위적 목적의 선제공격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으며, 그런 프로그램도 전력계획에 이미 반영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는 전쟁에 있어 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란넨베르그 대회전을 소개했다.
“힌덴부르그 장군과 루덴돌프 작전참모가 지휘한 독일 8군이 소련의 제1·2 야전군을 격파한 전투가 란넨부르그 대회전입니다. 독일군이 전투에서 승리한 요인은 통신감청부대였습니다. 독일군은 각 사단마다 감청부대가 있어 소련군의 모든 통신을 감청하고 대응공격을 했기 때문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죠.”
-박 대통령 시절에는 북한이 도발을 계속하자 대통령이 나서서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경고를 했습니다. 공산당과의 협상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최근 우리 정부의 대북협상은 북한에 질질 끌려 다니고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라는 불만이 많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이 게릴라를 침투시키거나 우리 국민에게 위해를 가하면 보복공격을 철저히 수행했습니다. 비밀에 관한 사항이라 정확히 말씀드리긴 곤란합니다만 그들의 도발에 대해 강력한 보복공격을 하여 공산당의 기를 꺾었어요. 김일성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박 대통령에게 철저하게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군은 5군단장 시절, 금화 지역에서 인민군이 무반동총으로 우리 대북 방송용 스피커를 공격한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는 보복공격을 지시, 휴전 이후 처음으로 155㎜ 포 400여 발을 인민군 진지에 퍼부어 초토화시켰다면서, 북한을 상대할 때는 전쟁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방위산업을 추진하면서 느낀 교훈이 여러 가지였을 텐데요.
“저는 방위산업을 통해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저력을 실감나게 체험했습니다. 서울올림픽이 폐막한 후 미국 언론인이 쓴 칼럼을 감명 깊게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그는 ‘한국인은 자기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른다. 올림픽을 치르고 나서야 자기들이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썼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극동의 약소국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선철 제철능력은 1000만 톤을 넘어섰습니다. 일본이 2차 대전을 시작할 때의 제철능력이 370만 톤이었습니다. 수치상으로 봐도 자동차 세계 6위, 조선 세계 2위, 반도체 메모리 분야 세계 1위입니다. 우리는 지도자가 국정을 잘 펼치기만 하면 어떤 일도 불가능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한 교훈이라고 봅니다.”
이 장군은 방위산업을 설명하며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대단히 말을 아꼈다. 적들이 이 인터뷰 기사를 읽고 대비책을 세울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혁명은 엘리트의 급속한 교체

이병형 장군은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역전의 명장이다. 그는 군의 정치개입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을 명백히 하면서도 “5·16은 필연이었지만 5공화국 탄생은 지금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5·16과 5공 탄생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군이 정치에 참여하는 계기가 된 5·16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혁명이란 ‘엘리트의 급속한 교체’입니다. 엘리트란 국가의 장래를 예측해서 그것을 해결하는 쪽으로 이끄는 능력을 가진 집단입니다. 의지와 능력을 가진 엘리트 집단이 과격하고 급속한 방법으로 무능한 구시대 엘리트를 몰아내고 국가 지도부를 형성하는 것이 혁명입니다. 저는 박정희라는 지도자와 군인들이 빈곤의 수렁에 빠진 국가를 살려냈다는 측면에서 5·16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습니까.
“그 분과 한 부대에 근무한 적은 없지만 1960년에 1군 작전참모를 할 때 그 분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었기 때문에 자주 만나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분이 대통령이 되신 후에는 제가 작전참모부장을 하면서 김신조 사건, 울진·삼척 게릴라 침투사건 등으로 자주 찾아뵙고 작전계획을 보고 드린 적이 있습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인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 분은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분이었죠. 어떤 내용에 대해 발언을 하면, 그것은 행동이 임박해 있거나,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 장군께서는 혁명주체들과도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혁명주체로 참여하라는 권유는 없었습니까.
“5·16이 나고 20일쯤 후에 귀국해서 1군사령부에 있을 때였습니다. 국가재건최고희의 법사위원장을 하던 이석제 대령(총무처장관, 감사원장 역임)에게 전화가 왔어요. 대뜸 저보고 혁명재판소장을 맡아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군에 남는 것이 좋겠소’ 라고 했더니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알겠습니다’ 하고 물러서더군요. 그 때 제가 혁명재판소장을 맡았다면 직속상관이었던 이한림 장군을 재판하는 입장에 서게 됐을 겁니다.”

“전쟁기념관 지어 달라” 노태우 대통령이 부탁

-5·16이 필연의 결과였다면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었다고 보는데요.
“저는 군인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습니다. 군인은 야전에서 군인답게 싸우다 죽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야전을 모르고 정치권에서만 맴도는 군인들을 과거엔 ‘국방대령’이라고 불렀어요. 그러한 군인들에게 부대지휘를 맡기면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정치군인이 전쟁을 그르친 예로 러일전쟁 당시 동해해전을 지휘했던 러시아의 로제스트 윈스키 제독의 사례를 설명했다.
“로제스트 윈스키 제독은 니콜라이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장교였습니다. 그는 중위 시절부터 궁중 근위대장, 시종무관장까지 지낸 정치군인의 표본이었어요. 정치적 센스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실전경험이 전무해 일본 연합함대에 대패한 겁니다.”
-12·12와 5공 탄생은 어떻게 보십니까.
“저는 지금도 5공화국 탄생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국가의 안위가 아니라 사적인 감정과 개인의 영달을 목적으로 군사행동을 하고 정치에 참여한 것을 이해도 못하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에는 화제를 전쟁기념관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이 장군께서는 진쟁기념사업회장을 맡아 용산 전쟁기념관을 건설한 주역이었습니다. 전쟁기념관 건설을 책임지게 된 배경을 설명해주시죠.
“전쟁기념관은 1988년 노태우 대통령 당시에 결정된 겁니다. 어느 날 노태우 대통령께서 저에게 전쟁기념관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시더군요. 그때 저는 전쟁기념관이 왜 필요한지 개념조차 몰랐습니다만 노태우 대통령의 설명을 들으며 감명을 받았습니다.”
-노태우 대통령과는 군 시절에 어떤 인연이 있었습니까.
“제가 군단장 시절 노태우 대통령이 연대장으로 근무한 인연이 있습니다. 저는 전쟁기념관에 대한 안목이 전혀 없어 정중히 거절했죠.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은 제가 적격자라면서 간곡히 부탁하더군요.”
-세계 각국은 전쟁을 기념하는 전시관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기념관을 통해 무엇을 전하려는 것일까요.
“영국의 전쟁기념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쪽 책임자가 한국이 전쟁기념관을 만들려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6·25가 끝난 지도 오래 되어 전쟁을 체험한 국민이 줄고 있다. 우리 국민에게 전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분 말씀이 ‘전쟁은 전쟁을 할 자격이 있는 국가와 민족만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더군요.”
-이 장군께서는 전쟁기념관에 어떤 철학을 담으려고 하셨는지요.
“국가정책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달라’고 요구하는 정책입니다. 국가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그러한 부탁을 하려면 사회정의가 바로 서고,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가 선두에 서야 합니다. 또,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서 희생된 국민을 진실로 고맙게 생각하고 그 업적과 공적을 눈으로 확인시켜 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을 전쟁기념관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본 야스쿠니 신사의 교훈

이 장군은 전쟁기념관 연구를 위해 일본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야스쿠니 신사 내부에 약 4,000여 평짜리 호국관(護國官)이란 건물이 있는데, 그곳에 일본 전쟁영웅들의 업적을 기록한 전쟁기념관이었습니다. 한구석에 11명의 여자 교환수 얼굴이 걸려 있더군요. 사할린에서 일본군이 철수할 때 마지막까지 교환수로 활약하다 소련군이 교환대 문을 부수고 들어오자 독약을 먹고 자결하여 많은 일본군을 구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이러한 전쟁기념관을 언제 구상했습니까.
“메이지유신 이후 처음 수행한 외국과의 전쟁이 청일전쟁이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전의 전쟁은 사무라이들의 싸움이었지만, 청일전쟁은 국민개병제에 의한 근대적인 전쟁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은 사무라이 제도를 폐지했습니다. 일부 사무라이는 사범학교를 통해 교사가 되었고, 나머지는 사관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사들은 국민을 징집하여 군대를 조직했죠.
그러나 국민개병제하의 군대는 사무라이들로 구성된 군대와 비교할 때 여러 문제점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지휘관들의 구상대로 원활하게 움직이지 못했고, 군대의 사기도 기대 이하였어요. 그래서 착안한 것이 야스쿠니 신사입니다. 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만들어 전쟁에서 전사(戰死)한 평민의 자제에게 천황이 머리 숙여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 결과 전쟁의 가치를 높이는 데 성공했고, 국민들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전통을 세운 겁니다.”
-우리는 야스쿠니 신사를 우익집단의 망령쯤으로 혹평하지만 일본 국민으로 볼 때는 의미 있는 성지(聖地)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우리 국민도 이제는 일본을 감정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훌륭한 점을 인정하고 배워야 할 때라고 봅니다. 호주는 일본과의 전쟁 50주년 기념일에 일본 전몰장병을 위한 추도식을 거행했습니다. 비록 적이었지만 상대방 죽음의 정당성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것이 기사도의 본질입니다.”
-전쟁기념관을 건설할 때 정치권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전쟁기념관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씨 등 정치 지도자들이 찬성하여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저는 건립 책임자로서 마스터플랜이 확정된 후 노태우 대통령과 세 분 정치 지도자를 찾아뵙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김대중 씨는 예산이 얼마나 드는지 깊은 관심을 표시했고, 김영삼 당시 민주당 총재는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런 건물을 짓는 것이 다행’이라면서 야당도 전쟁기념관 건립을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전쟁기념관 빼앗기 위한 청와대의 압력

-김영삼 정부 출범 초기 전쟁기념관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용하기 위해 말썽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왜 약속을 어기고 전쟁기념관 사업을 방해하려 했을까요.
“문민정부 출범 후 어느 날인가 청와대 비서관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분 말씀이 ‘전쟁기념관에 전시할 물건이 없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전시물도 없는 기념관을 왜 지었겠소’ 하고 돌려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 비사관이 돌아간 후 모 언론에서 전쟁기념관을 백지화하라는 보도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이미 건물이 완성단계였어요. 이제 와서 성스러운 기념관이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현실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쟁기념관을 백지화하기 위해 외압이 심했다고 하던데요.
“한번은 모 기관의 요원이 찾아왔더군요. 전쟁기념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내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기념관을 둘러보다가 6·25 때 전사자 명부에서 자신의 가족 이름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달라져 돌아갔습니다.”
여론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하루는 상이용사 한 분이 휠체어를 타고 이 장군을 찾아왔다. 그는  ‘전쟁기념관을 백지화하라’는 기사를 읽고 흥분하여 그 기사를 게재한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항의하고 오는 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 사회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참전용사에게 너무 심한 학대를 합니다. 우리가 왜 팔과 다리를 국가에 바쳤는지를 증명해 주는 기념관을 세운다고 해서 이제나 저제나 문을 열 그날만을 기다라고 있었는데 전쟁기념관을 백지화하라니요. 김영삼 대통령은 전쟁기념관이 그렇게도 못마땅하다는 말입니까. 이 기념관은 상이군인들이 생명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장군님께서도 최선을 다해 기념관을 지어 주십시오.”
이 장군은 혀를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세계 어느 나라나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치거나 부상당한 사람은 국가가 따스하게 포용합니다. 제가 1953년 미 육군 보병학교에 유학을 갔는데, 그 학교 안에 병원이 있더군요. 입원환자 대부분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포슈(Ferdinand Foch) 장군 아래서 싸우다 부상당한 상이군인들이었습니다. 35년 전에 부상한 사람들을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피는 것을 보며 국가란 무엇인가,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어요.”
-전쟁기념관이 완공되기 3개월 전에 사임을 하셨는데요. 김영삼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습니까.
“저는 임명 때부터 기념관 완공 즉시 물러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설과정에는 무리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완성된 기념관은 합리적 운영이 필요합니다. 건물을 만든 사람이 합리적인 운영을 하기는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에 개관식 3개월 전에 청와대에 사임 의사를 알렸습니다.”

정치인 수준 4·19 시절이나 똑같아

-후임 관장으로 부임한 이재전 장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 분은 육군참모총장을 해야 할 분인데 불행한 사건(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당시 이재전 장군은 청와대 경호실 차장으로 근무했다)으로 군복을 벗게 됐죠. 저는 그 분이 전쟁기념관을 훌륭한 민족의 성지로 만들 것으로 믿습니다.”
-전쟁기념관 건립 당시에 숱한 일화들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우리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에게 너무 무관심했다는 뼈저린 각성을 하게 됐습니다. 각 군 본부에 6·25 전사자 명부가 제대로 정리된 것이 없더군요. 국가 행정력을 총동원하여 2년여에 걸쳐 6·25 때 산화한 호국영령들의 명단을 겨우 정리했어요.”
-군의 최고통수권자는 대통령입니다. 전쟁기념관을 방문해 보니 군 최고통수권자에 대한 소개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습니다.
“저도 군 최고통수권자 차원에서 대통령 기념관을 별도로 만들고 싶었습니다만, 정치권 인사나 국민들이 너무 감정을 앞세우고 자신감이 없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전쟁기념관에 왜 독재자 전시관을 만드냐고 싸움을 걸어왔어요. 우리는 아직 전쟁기념관에 대통령을 모실 자격이 없는 국민이라는 각성과 함께 후세의 과제로 남겨 두기로 했습니다.”
-우리 정치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민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국민 전체의 책임이 아니라 정치인의 책임입니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보세요. 같은 땅이 이어진 곳인데 한쪽은 빈곤과 불결, 외채로 신음하고 한쪽은 질서와 부강의 세계 강국입니다. 그것은 곧 정치인의 자질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의 자질에 관한 한 4.19 시절이나 오늘이나 별다른 개선이나 발전이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은 국민생활에 배한 배려는 뒷전이고, 북한의 평화통일 공세에 국가안보가 심히 걱정되는 상황에서도 정파 간 헤게모니 쟁탈전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정치인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순신 장군, 박정희 대통령 가장 존경

-평생을 통해 전술전략연구를 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전략가는 누구입니까.
“저는 이순신 장군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분은 연구개발에 뛰어난 창의력이 있고, 함대 운영에 있어 통찰력이 뛰어나더군요. 그분은 적이 무엇을 원하며 어떤 전략을 운영할 것인가를 정확히 예측하고 그곳에 방어력을 집중시켜 승전을 거듭한 겁니다.”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우리 역사에서 박정희 대통령만큼 국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만든 분은 없다고 봅니다. 영웅 나폴레옹도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객관적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우리도 세월이 더 흐르면 박정희라는 영웅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하게 될 날이 올 것으로 믿습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주로 작전부서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북한군의 전력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북한군 전력을 어느 정도로 평가하십니까.
“지금 북한은 굉장한 동요와 불안에 처해 있다고 봅니다. 국민을 제대로 먹이지도 못할 정도로 주눅이 들어 있기 때문이죠. 또 국가 지도부가 노쇠하여 패기도 줄었다고 봅니다. 군사력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가 담보되지 않습니다.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굳건한 국민의식과 정신력이 있어야 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저는 북한군 전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이 장군은 강행군과도 같은 인터뷰 내내 지도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2000년 전, 자주국방을 통해 국가의 위엄과 개인의 존엄을 지켜야 한다는 중국 후한 말의 전략가 순열(荀悅)의 주장에 저는 감명합니다. 자주국방 능력이 없으면 국가로서의 위신이 서질 않습니다. 선진국은 전쟁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장 멸시합니다. 그들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전쟁을 두려워하고 피하면 나라를 지도할 자격이 없어요.”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군사문화를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국가 지도부와 정치인들이 과연 전쟁을 결심할 수 있을까. 이병형 장군과의 대담을 통해 기자는 전쟁과 평화, 국가와 애국심, 군의 중요성에 대해 자문자답하며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역사가 이병형 장군, 그와 함께 자주국방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박정희 같은 지도자를 만난 것이 큰 행운이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