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nN수첩/홍준표] 북한을 '내재적 관점'으로 이해하자고?
[PenN수첩/홍준표] 북한을 '내재적 관점'으로 이해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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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PenN 산업경제부 기자
홍준표 PenN 기자

요즘 북한이 이슈다. 친북성향 세력들의 오랜 고질병이자 아킬레스건이다. 그들이 신나게 얻어 맞고도 자기 자신을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핵심은 북한을 이해하려고 지독히도 애쓰는 내재적(內在的) 관점에 있다고 본다.

주사파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386세대야 아직까지 '민족'이란 울렁거리는 감정이 친북 성향을 구축하는데 핵심을 담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2030세대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 친북세력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이는 이유는 내재적 접근을 통해 자연스레 베인 연민의 감정, 그리고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그럴듯한 믿음의 사치 정도일 뿐이다.

올해 서른 살인 기자보다 이전의 선배 세대들은 지긋지긋한 직접적인 경험이 누적되어 자연스레 북한에 대한 반감이 생겨났겠지만, 2030세대는 이를 북한을 대하는 방법의 갈림길 정도로 인식하는 듯 하다. 물론 대다수가 김정은을 욕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그것은 뚜렷한 주관이 없는 너무나도 감정적인 표출 뿐이라서 '평화적 해결'이라는, 선함을 가장한 악마의 방법론에 쉽게 넘어 가기도 한다.

'내재적 접근' 이라는 악마의 속삭임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그럴듯한 방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내재적 접근의 위험성은 흉악한 범죄자에 대해서도 그러한 연민의 감정에 이끌린 동치를 통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케한다.

더군다나 북한은 그런 속삭임의 달인이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종교 활동의 1인자다. 내재적 관점을 주요 꼬드김의 기반으로 삼는 것과 더불어 근대사를 해석해냄에 있어 '반일·반미' 감정을 통해 정교하게 날조된 그들의 부르짖음은 또 다시 새로운 세대들을 악마에게 넘기려는 시도라는 것을 2030세대는 깨달아야한다. 나팔수 노릇은 이제 지겹다.

내재적 관점의 형성은 새로운 세대들로 하여금 북한의 이중적인 모습에 대한 경각심이 없기에 교육·문화라는 요소로부터 서서히 시작된다. 때문에 종교적 세뇌를 통해 누적된 '반미·반일' 감정과 더불어 '박종철'을 모티브로 한 '1987' 같은 영화들로 근대사를 왜곡하는 행태가 가장 우려스럽다. 지난 경험을 통해 일말의 남은 철 지나고 유아적이라고 생각했던 대북관이 내재적 관점을 태반삼아 새로 잉태되는 2030 세대들의 사고를 또 다시 현혹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문화와 교육은 오랜 기간 인내심이 필요하기에 한 번 형성되면 바꾸기 어렵다. 여러 광장에서 외쳐대는 교조적인 무의식의 장악이 2030세대들의 정신을 서서히 갉아 먹고 끝내는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의 토대를 만드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민족끼리', '광장·인민·숙의 민주주의'같은 진보를 가장한 사회주의·친북 이념은 '촛불'이란 이름으로 세련되게 포장되어 새로이 한 발짝을 내딛어야할 세대들에게 뒤로 가자는 나팔질을 해대고 있다. 그동안 이런 비스무리한 외침들이 아주 잘 먹혀왔고 그들에 대한 단죄도 없었기에 딱히 경계심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론 여자 단일 아이스하키팀 이슈를 통해 안보·대북관이 2030세대들의 강력한 통합점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시사했다. 북한으로부터 우리의 자유가 제한되는 사태를 목격하며 '자유주의'라는 강력한 구심점의 가능성을 비췄다.

정치를 못한다는 비판은 아마 이런 좋은 여건을 가지고도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는 능력일테다. 북한을 내재적으로 접근하려는 자들의 목소리가 영향받지 않게 확실한 논리로, 선제적으로 제압해야 한다. 이는 그들이 구축한 교육·문화적 노력을 단기간에 허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북한 같은 살인 집단을 살인으로 처벌·비난 하지 못하고 이해와 설득으로 문제의 방점을 찍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확실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살인자를 살인으로 비난하지 않는 순간 살인이 판을 치게되고, 살인을 이해의 범주에 끼워넣는 순간 그들이 자행했던 모든 죄에 대해 면죄를 받게되며,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포섭 당하게 되는 악마와의 동조 현상이 나타난다.

그들이 언젠간 바뀔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과 기대는 북한에 대한 '신뢰'의 문제로 압축, 귀결된다. 이 일말의 희망에 따른 북한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말도 안되는지는 역사적인 추적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2030세대들이 다시 한 번 상기해야할 것은 그 '신뢰'의 대상이 할아버지 때부터 3대에 걸쳐 일생을 체제 완성에 노력했던 자들이란 사실이다. 더군다나 북한같이 오랜 세월동안 굳혀진 사상과 체재는 한 개인이 변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절대자 주변엔 그런 사상으로 무장된 간부들만 득실되며 온갖 정보들은 그들을 거쳐 파생된다.

굳이 하나 하나씩 언급하지 않아도 조선 말기를 겪어보지 못해 오해되는 하나의 문제들처럼, 잘못 주입된 교육·문화는 북한에 대한 주관이 뚜렷치 못한 세대들로 하여금 그런 자들에 대한 헛된 기대와 희망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평생을 세계적인 핍박을 받으며 체제구축에 힘써온 자들이 우리와 몇마디 대화 주고 받는 다고, 올림픽 초대해서 한반도기 쓴다고, 돈 갖다 바친다고 어느날 갑자기 돌변하여 "우리가 졌소"하며 절대 백기 투항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2030세대는 교육·문화가 아니어도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본능으로 직시해야한다.

안보에 대한 2030세대들의 암묵적인 동의로 당선됐지만 문재인 정부는 이를 교묘한 말장난을 통해 순진한 그들을 아직까지 울타리 안에 가두고 있다. 평화적 해결방식. 이 얼마나 또 순진하고도 교묘한 말장난인가. 그들을 이해하는 차원에서 요구를 들어주고, 손해를 감수하고도 무슨 이득이 있길래 그 같은 방법에 동조하는 것인가. 여자 단일 아이스하키팀에 분노하고도 '평화'라는 미명하에 형성되는 내재적 접근의 대북관은 동일한 분노의 연장선상이라는 점을 깨달아야한다.

그들을 이해하고, 요구를 수용하면 평화가 찾아온다고 정녕 생각하는 것인가?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집단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다지 감성적이거나 기적적이지 않다. 평화를 보장한다고 개과천선한 사도 바울 마냥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띄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2030세대가 북한을 지독히도 싫어하긴 해도 '1987' 같은 영화가 흥행하는 모습을 보며 씁슬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공산주의'를 옹호했던 자들의 진면은 뒤로 숨긴 채, 잘못 경도된 민주주의와 근대사는 또 다시 '평화'라는 그럴듯한 단어에 가려져 잘못된 방법론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흡수되고 있다. 그에 반하는 모든 것들은 극우로 치부되기 일쑤다.

지금까지도 우린 북한과 한 몸이었던 세대를 공유하고 있는 역사적, 세대적 교집합이 있는 국가이지만 직접적으로 '민족'을 부르짖는 것은 2030에게 먹히지 않기에 다르구나 싶었다. 그러나 내재적 접근을 통한 북한에 대한 신뢰, 나아가 평화의 외침에 동조하는 몇몇 2030세대 모습을 보며 또다시 '그들에게 문화·역사는 정치의 도구요 반복이구나' 라는 좌절 내지 패배감을 느끼게 한다.

홍준표 기자 junpyo@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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