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윤용준] 미국은 왜 공산화 되지 않았나?
[특별기고/윤용준] 미국은 왜 공산화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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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준 美조지메이슨대 교수
윤용준 美조지메이슨대 교수

트럼프-김정은 하노이 회담은 결렬되었다(2019.2.28). 대한민국 적화는 일단 물 건너 간 것이라고 안도의 숨을 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민이 염려하는 공산화를 문재인 대통령이 여전히 획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 아직 넘어야 할 산, 건너야 할 강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공산혁명 이후, 유럽은 사회주의 사상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특히 지식인(intelligentsia)들이. 더구나 1930년대의 세계대공황을 겪으면서 자본주의(capitalism)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에 대한 신념이 흔들릴 때였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은 사회주의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러면, “미국은 왜 공산화 되지 않았나?”

이 질문을 가지고 나는 뷰캐넌(James M. Buchanan, 1919-2013)과 함께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이십년 전 어느 오후 한가한 때였다. 여기서 독자들에게 뷰캐넌을 잠깐 소개하려한다. 그는1986에 노벨(Nobel)경제학상을 받은 분으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Friedrich Hayek), 밀턴 프리드만(Milton Friedman)과 함께 탁월한 고전적 자유주의(classical liberalism) 경제학자였다. 공공선택(public choice)이란 경제학의 한 분야를 시작하신 분으로, 공공선택은 “정치는 로망스가 아니다”라고 요약하였다. 또한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다음 선거에 이기기 위한 포석이다”고 본다.

이것을 한국에 적용하여 보면, 민주당과 문(文)정권은 뇌물형 복지와 야권분열에 치중할 것이다. 한국에도 이 분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계시다. 펜앤에도 글을 쓰는 김행범 교수 또 황수연 교수도 있다.

뷰캐넌 자신도 20대에는 사회주의자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낭만적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시카고(Chicago) 대학에서 프랭크 나이트(Frank Knight)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6주 만에 사회주의의 망상을 완전히 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분 말씀이, 생각해보면 사회주의는 참 멍청한(silly) 아이디어란 것이다. 좌파 정부를 지지하려면 이 점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좌파정부를 지지하려면 이 점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뷰캐넌의 답

미국이 사회주의에 물들지 않은 이유로 뷰캐넌은 두 가지를 들었다. 미국민의 실용주의(pragmatism)와 미국 사회의 제도(institutions)란 것이다. 동양의 실사구시 (實事求是)와 한국의 보수 언론인들이 강조하는 “사실관계”(facts and logic) 보도는 실용주의에 속한다. 실용주의의 반대 개념은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평화”와 “민족공조” 등 애매한 이념적 것들이다. 강규형교수가 말한, KBS의 “사실 보도가 아닌 정의(正義) 보도”도 여기에 속한다. 관념적 언어는 정치인들의 선전선동의 도구가 되는 위험이 항상 따른다.

미국사회에는 헌법에 기초한 강하고 건전한 제도가 있다. 무엇보다도 헌법과 헌법정신(constitutionalism)이 있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을 믿는 사람이 곧 미국인 (American)이라고도 한다. 또 사법부의 독립과 국민들의 존경이 있는데 이 때문에 미국의 판사는 종신제이다. 그리고 자유 언론이 있다. 마지막으로 공정한 선거제도를 말할 수 있다. 미국언론이 다소 좌경화되었다고도 하지만, 그들은 애국적 비판(loyal criticism)을 말하며, 한국에서 말하는 좌경화와는 뜻이 다르다. 무엇보다, ‘사실 보도’라는 언론의 직업윤리를 지킨다. 우수한 보수 언론으로 워싱턴 타임스(Washington Times)와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이 있다.

미국에서 놀라운 것은 일반시민들의 군(軍)에 대한 존경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군의 간부가 있는 것처럼 군의 정치적 중립이 확립되어 있다.

미국의 정부구조는 그야 말로 견제와 균형(check and balance)이다. 국회는 행정부 즉 대통령을 견제한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국내정치에서는 권력이 제한되어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이나 필리핀의 대통령의 권력이 훨씬 크다.

“뷰캐넌의 답”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한국으로 옮겨보자. 한국은 1948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건국 후 “뷰캐넌의 답”을 열심히 따라왔었다. 때로는 그게 부족한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러했었다. 그래서 결국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나라가 되었다.

내가 아는 분으로 1900년 이전 구한말에 미국선교사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해온 분의 후손이 있다. 이 분은 스탠포드대학을 졸업하여 NASA에 근무하다 은퇴한 여자 분이다. 외양은 올데갈데없는 한국 할머니인데 속은 한국을 전혀 느낄 수없는 완전한 미국인이다. 이 분이 난생 처음 3년 전 한국을 방문하여 엄청난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 Fantastic country! 그래서 미국에 돌아와서 형제들에게 “너희들이 죽기 전에 꼭 한국을 한번 가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국이 더 이상 망가져서 이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탄핵사태 및 문재인 정부 시작 이후, 한국은 줄곧 헌법적 위기 (constitutional crisis) 상태에 있다.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문재인의 종북 좌파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 현재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에 기대를 걸어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은 공산화될 수도 혹은 베네수엘라처럼 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비관적 정치 현실을 직시할 것을 역설하시는 분에 류근일 씨, 노재봉 전 총리 및 이인호 교수가 계시다.

둘째, 현 정부의 정체를 국민들이 과연 정확히 이해하는가이다. 여기서, “뷰캐넌의 답”을 문재인 정부에 적용해 보자.

문 정권은 결코 실용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통령이 직접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을 묵살하고 국민을 오도 선동한다. 헌법에 의해 설립된 헌법적 제도를 계속 파괴하고 있다. 국회와 야당이 문의 청와대 정치를 견제하지 못하고 있다. 법원을 정치화하고 좌경화하고 한다. 군을 무력화하고 정치화하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공영방송을 노조원을 이용해 접수하고, 정부의 선전 나팔수로 만들었다. 이것이 그의 독재를 가능케도 하지만, 이 때문에 유튜브가 새로운 언론매체로 등장하게 만들었다.

드루킹과 문 정권은 댓글 조작으로 민주주의의 근본인 여론을 조작하여 왔다. 1960년 자유당 시절의 부정선거 악몽을 연상시킨다. 불길한 징조이다.

이렇게, 문재인은 “뷰캐넌의 답”과는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국가와 사회의 중추기관인 언론, 법원, 국회 및 군(軍)을 무력화시켜, 문재인의 종북 주사파 정부의 정치도구로 사용한다. 소련의 공산혁명,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와 헝가리의 오르반 (Viktor Orban)등의 반(反)자유민주주의, 가짜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fake democracy)의 수법이다.

미국 조야에서는 이 문제를 예사롭게 보지 않는다. 지난 해(2018.12월) 워싱턴의 미국기업연구소(American Enterprise Institute)에서 한국에 관한 세미나 토론이 있었다. “열린사회의 적들 – 한국의 경우”란 주제로, 발표자들은 한국이 좌파 독재국가로 진행 중이라고 경고하였다. 과거의 군사 개발독재는 경제발전과 안보는 확실히 하였다. 이 점이 지금의 문정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문재인은 한 국가의 CEO로서 치명적 결함이 있다. 그는 경제와 헌법을 모른다. 좌파들의 바이블이라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Das Kapital)을 보자. 부(wealth)는 노동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틀린 말이다. 부는 기업가(entrepreneur)와 기술 (technology)로부터 나온다. 경제는 관념의 놀이가 아니라 현실이다. 문과 그의 경제팀은 남대문 시장의 상인들과 국밥 파는 할머니에게서 경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애덤 스미드는 경제의 기본을 자연적 자유(natural liberty)라고 보았다. 이언주 국회의원이 이런 관점에서 문재인의 경제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한국이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문정권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문 지지자를 포함한 모든 국민이 분명 알아야 한다. 지난 2년 간 문의 행보는 세 가지 관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경제, 안보, 그리고 국가에 대한 인식 곧 즉 국가정체성(national identity)에 관해 대강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문 정권은 경제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 또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안보를 허물어, 2018.9.19 남북군사합의서로 북한에 의한 적화통일로의 신호탄 같은 것을 올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국가에 대한 인식의 혼란을 조장하여 좌익적 선동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고 있다. 이것은 장기적으로 대한민국 발전에 큰 장해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이제 문정부의 정체를 권력욕(장기집권)과 이데올로기(ideology)로 알아보자.

이데올로기와 권력욕

문의 목적은 연방제 통일(confederation)이라고 한다. 언뜻 보면 북한과 적대시하느니 우호 협력하는 이웃되자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원칙은 지켜야 한다: “튼튼한 울타리가 좋은 이웃을 만든다.” 그러려면, 북이 핵을 가지면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 문은 한국 헌법을 사회주의 헌법으로 바꾸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려면 문은 김정은에게 북의 헌법과 노동당규약에 자유민주주의 헌법의 몇 조항을 넣으라고 요구하여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빠진 연방제는 사기극이다.

문재인과 김정은이 작성한 9.19 군사합의서를 읽고 이마의 피가 거꾸로 흐름을 느낀 사람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김정은은 대한민국 국민을 좀비로 보고 있을까? 문재인은 자기의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 국민을 보호할 각오가 되어 있을까? 한국 사람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문의 정체를 권력욕으로 읽으면 이렇게 이해가 된다. 북한의 핵을 인정하고 DMZ를 열어줌으로써 문은 맹수조련사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맹수를 가두어 놓은 우리의 빗장을 약간 열어둔다. 맹수가 뛰쳐나오려 하면 조련사는 우리 쪽으로 고기 덩어리를 던져서 맹수를 우리로 들어가게 한다. 이렇게 되면 맹수가 있는 한,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조련사는 마을의 장기 집권자가 된다. 국민은 인질이 된다.

여기에 위험이 따른다. 마을 사람들이 눈치를 채고 분개하여 조련사에게 몰매질을 가할 수도 있다. 혹은 그가 실수하여 국민이 맹수 밥이 될 수도 있다. 그의 지난 2년 언동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국민은 자기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집권자의 의도를, 후회를 가장 줄이는(minimum regret) 관점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정당방위의 권리가 있다.

문정부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분석하기엔 나의 지식이 부족하지만 나는 그들이 천형(天刑: 문둥병)을 앓고 있는 불치병 환자란 생각을 한다.

악몽

브레이크 없는 버스가 내리막을 달려 내려간다. 면허증도 없고, 자전거도 탈줄 모르는 사람이 만원버스 운전수다. 운전수는 모자를 눌러쓰고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하고 있다. 어떤 승객들은 ‘설마’라는 자세로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진정한 해결책은 승객들이 모두 달려들어 핸들을 꺾고 작은 사고를 내어서라도 차를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다 죽는 참극을 면한다. 나는 이것이 오늘의 한국의 상황이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사람이 사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종교를 믿는 것이 한 길이다. 혹 불자가 된다면 현재의 고난은 과거의 업보(karma)라며 수용할 것이다. 혹은, 주는 대로 받아먹고 순응하며 각자 도생하는 백성이 되어 사는 길이다. 끝으로, 비록 그런 기억이 흐릿하지만, 우리의 선배들처럼, 국민이 주권자요 나라의 주인이라는 믿음 속에서 자유와 생명을 헌법대로 되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윤용준(미국 조지메이슨대 경제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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