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칼럼] 1945년의 일본과 2019년의 한국, 누가 더 한심할까
[남정욱 칼럼] 1945년의 일본과 2019년의 한국, 누가 더 한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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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1945년, 일본에 최악의 달은 언제였을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게 8월 6일과 8월 9일이니 당연히 8월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은 3월이다. 시작은 3월 9일 밤에 시작되어 다음 날 새벽 5시에 끝난 도쿄 공습이었다. 8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5만 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여기에 행방불명자까지 합치면 거의 2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그날 지옥을 구경했거나 아예 천국으로 가버렸다. 도쿄의 밤하늘을 헤집고 다닌 B-29에서 떨어뜨린 폭탄은 일반 고성능 폭탄이 아닌 젤리 모양의 새로운 휘발유 혼합물인 네이팜탄이었다. 용도가 달랐다. 고성능 폭탄이 폭파가 목적이라면 네이팜탄은 태우는 게 목적이다. 죄다 나무와 종이로 이루어진 도쿄라는 도시의 약점을 노린 것이다. 불과 불이 만나면 덧셈이 아니라 곱셈이 된다. 화재 현장의 상승기류가 만들어낸 용오름 현상을 화재선풍(fire devil 혹은 fire whirl)이라고 하는데 이 초고온의 불기둥은 도시를 내달리며 가옥을 집어삼키는 동안 주변의 산소를 빨아들이면서 온도는 계속 올라가고 풍속은 더욱 강해진다. 섭씨 885도의 불기둥이 시속 100킬로미터 가까운 속도로 질주하며 사방에서 죽음의 춤을 추는 것이다. 불기둥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살을 태우고 지나갔다. 가까스로 화마를 피한 사람들은 질식으로 죽었다. 콘크리트 건물은 좀 나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건물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뜨거운 찜 냄비에 들어갈 꼴이었다. 강물로 뛰어든 사람들의 처지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네이팜탄은 물에서도 쉽게 꺼지지 않았고 화재선풍의 열기로 강물은 펄펄 끓고 있었다. 타죽고 쪄죽고 삶겨서 죽었다. 운 좋게 이를 다 피해간 사람들도 심각한 수준의 화상을 감수해야 했다. 고통은 오랫동안 길게 이어졌고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부러워하는 지옥도가 펼쳐졌다. 네이팜탄이 보병의 화염방사기에 사용된 적은 있었지만 폭격에서 사용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무리 진주만에서 기습적으로 맞았다지만 민간인 폭격은 너무 한 것 아니었냐고? 공습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 소장은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라는 어록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폭격 직전 민간인 대상 공습이란 말에 찜찜한 표정을 짓는 부하들에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의 도시란 게 이런 식이다. 공장이 있다. 그 옆에 민간인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서 조그만 부품들을 만든다. 가내 수공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스즈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는 65호, 63호 너트, 아니면 그 사이에 끼는 모든 개스킷을 만드는 식이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키타가와가 손수레를 끌고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순서대로 부품들을 모아서 가는 거다.”

스즈키, 하루노보, 키타가와 같은 일본인 이름까지 집어넣어 논리를 만들었으니 설득을 위해 연구를 꽤 많이 한 모양이다. 덕분에 부하들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B-29에 올라탈 수 있었다.

66개 도시가 잿더미가 된 그 해 3월에서 7월까지

네이팜탄 학살은 그 날 하루로 끝나지 않았다. 3월 11일에는 나고야, 13일에는 오사카, 16일에는 고베 그리고 18일에는 또 다시 나고야가 불의 지옥을 경험했다. 우리로 치면 서울, 부산, 대구, 대전이 열흘 새 재로 변한 셈이다. 8월보다 3월이 더 최악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다. 공습이 끝난 것은 폭탄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폭탄을 만드는 동안에는 일본 항만에 1만 개 이상의 수뢰를 깔았다. 기아 작전(Operation Starvation)이라 불린 해상봉쇄로 300여 척의 선박이 가라앉았고 음식, 석유, 석탄, 철광이 바닥났다. 일본 전역에서 민간인 30여 만 명이 굶어죽었다(보수적으로 잡은 수치). 폭탄이 공급되자 요코하마를 시작으로 다시 폭격이 시작됐다. 6월 초에는 일본의 대도시들이 전부 불구덩이로 변했고 얼마 후에는 인구 30만 명 미만인 중간규모 도시까지 폭격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7월까지 미국이 일본에 쏟아 부은 폭탄은 거의 9만 톤에 가까웠다. 66개 도시가 형체를 잃었고 건물 250만 동이 사라졌다. 살아남은 대도시는 교토 하나밖에 없었다. 문화유산이 많다는 이유로 폭격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8월 9일까지 폐허로 변한 면적은 178제곱 마일로 워싱턴 DC의 세 배였다. 이 중 불과 3.5%만이 두 차례 원폭에 의한 것이었으니 1945년 봄부터 여름까지 이어진 공습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이루어졌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 동안 일본 정부는 뭘 했냐고? 바빴다. 거친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외교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각종 ‘삽질’을 하느라 너무 바빴다. 그리고 그 중심에 1941년 체결한 일소불가침 조약이 있었다.

외교에 순진과 바보의 차이는 없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일본은 경악한다. 어느 한쪽이 제 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다른 한쪽은 그 제 3국을 지원하지 않으며 쌍방 모두 양쪽을 직, 간접의 적으로 삼는 국가집단에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약 내용은 소련이 남하를 할 경우 일본 혼자서 소련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럴 경우 일본이 침을 흘리는 동아시아로 병력을 빼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이미 러시아와 한 차례 혹독한 전쟁을 치러본 일본은 단독으로 소련과 붙어 싸워 이길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때부터 일본의 소련에 대한 구애가 시작되고 매달리고 매달린 끝에 가까스로 얻어낸 것이 일소불가침 조약이었다. 드디어 마음 놓고 동남아 출정을 시작했지만 일본의 봄날은 길지 않았다.

시작하기는 쉬워도 끝내기는 어려운 게 전쟁이다. 패색의 기미가 보이던 1944년 말 일본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추축국 독일에 대한 신뢰는 여전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세계 대전의 마스터키는 소련이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운 외교 전략이 독일과 소련을 화해시켜 소련을 추축국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었다. 단지 자기들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다는 사실 하나에 근거해서. 정말이지 리얼리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발상이었지만 사람이든 국가든 맛이 갈 때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법이다. 1945년 4월 일본의 희망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필리핀에 이어 오키나와에도 미군이 상륙했다. 독일은 베를린을 두고 소련과 마지막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건 1945년 4월 5일이다. 소련 외무상 몰로토프가 사토 대사에게 일소불가침조약의 폐기를 통보한 것이다. 불가침 조약을 맺을 때 폐기 시 1년 전 통고 항목이 들어있었으니 어쨌거나 외교적인 절차는 밟은 셈이다. 폐기 통고의 의미를 일본은 제대로 읽었어야 했다. 그러나 일본은 여기서 또 다시 어이없는 실수를 한다. 일소불가침조약이 5년 기한이니 앞으로 1년 동안은 아직 유효하다는 의미라고 제 멋대로 해석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관동군 전력을 태평양 전선으로 빼내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북쪽이 텅 비어버린 것이다. 시계 바늘은 바쁘게 돌아갔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하고 5월 8일, 독일이 항복한다. 승패는 이미 결정 났고 어떻게 지느냐의 선택만 남아 있던 상황에서 일본은 또 다시 기가 막힌 외교 전략을 수립한다. 소련을 호의적인 중립으로 만든 뒤 종전 협상에서 일본에 유리한 중개자가 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었는데 망상도 이쯤 되면 예술이다. 소련은 미국의 도움으로 독일과의 전쟁을 하는 동안에도 미국과 싸우는 일본에 물자를 지원했던 나라다. 국가 이익이라면 못 할 짓이 없는 소련의 대체 어딜 보고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동상삼몽同床三夢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했다. 소련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참전해야 했다. 두 나라 모두 알고 있었다. 원자폭탄이 전쟁을 끝낼 것이며 그 시간이 임박했다는 것을. 그 와중에 일본은 소련의 ‘양심적인 호의’를 기반으로 본토에서 미군과 싸워 유익한 종전 협상을 끌어내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소련이 등을 돌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일소불가침 조약에 대한 맹신은 현실에서 눈을 멀게 했다. 일본은 주일 소련 대사 말릭을 찾아가 비굴 수준의 아양을 떨었으며 그게 잘 안 되자 7월에는 아예 특사를 모스크바로 파견했다. 소련이 가장 우려했던 상황은 자기들이 참전하기도 전에 일본은 덜컥 항복을 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기를 자기들 일정에 맞춰 조절할 수 있도록 당사자가 먼저 손을 내미니 얼마나 기뻤을까. 소련은 이렇다 할 확답 없이 시간을 끌며 포츠담 회담에 집중했다. 그렇게 7월이 가고 일본은 그나마 나은 조건에서 항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발로 차버렸다. 이렇게 아까운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B-29는 신나게 일본 상공을 누비며 불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었으니 대체 그 나라 국민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처음부터 미국은 아예 협상 대상에서 배제한 채 소련만 바라본 죄로 일본은 원자폭탄을 때려 맞았고 소련에게는 뒤통수를 맞았다. 외교 실패는 이렇게 한 국가를 처절하게 무너뜨린다.

그때의 일본이 지금의 한국을 본다면

대한민국 외교도 만만치 않다. 그간의 외교성과를 보면 친구와는 멀어지고 친구처럼 지내야 할 나라하고는 수시로 얼굴을 붉히고 친구만 없으면 한 대 때려줬을 거라는 옛날 상전에게는 비굴한, 참으로 해괴한 짓을 한 게 전부다. 친구처럼 지내야 할 나라에게는 아예 시비를 걸고 있다. 신일본제철 압류 판결,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사무 용품에 ‘일본 전범 기업이 생산한 제품입니다’ 스티커 붙이기 같은 건 대한민국이 선진문명 국가인지를 의심하게 만든다. 민망하기 짝이 없는 두 사건은 한국이 세상의 중심이고 우리끼리만 즐겁다면 내 멋대로 해도 된다는 유아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74년 전 일본이 그랬다. 항상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이었고 자기들의 계획대로 세상이 굴러갈 줄 알았다. 그래서 독일과 소련을 화해시겠다는 놀라운 발상을 했던 것이다. 중재자니 운전자니 하는 표현도 그

유아적 발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중재는 힘 있는 놈이 하는 것이다. 운전석는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앉는 자리다. 자기 자리도 아니면서 계속 그게 제 자리라고 하니까 심지어 북한마저 당신네는 중재자가 아니라고 알려주는 일이 벌어졌다. 남북한이 ‘우리끼리’ 할 수 있는 일은 적고 대한민국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그보다 더 적다. 그게 하노이의 교훈이다. 74년 전 일본과 하노이가 공유하는 교훈도 있다. 외교 채널은 한쪽만 봐서는 안 되고 가능한 한 넓게 열어놔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이익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누가, 언제 도움이 될지 모르는 게 국제 관계다. 도와줄 건 별로 없지만 방해하기로 마음 먹으면 가진 힘의 열 배를 발휘할 수 있는 게 세상 이치다. 국제 관계라고 다를 게 없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한 달이 지나는 동안 우리 정부는 손 놓고 시간만 보내고 있다. 당연하다. 제대로 된 상황판단이 안 되니 할 일이 없는 것이다. 5월에는 트럼프와 아베의 밀담이 예정되어 있다. 당장 우리가 접촉해야 할 나라가 어디인지는 너무나 명확하지만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 역시 너무나 명확하다. 특정 국가에 대한 외교를 민족의 ‘취향’으로 대체하는 나라가 지구상에 우리 말고 또 있을까. 1945년의 일본이 지금의 우리를 본다면 자기들보다 더 어이없는 나라가 또 있다며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이 나라가 3년 안에 망하는데 내 돈 전부와 내 손모가지를 걸지.” 혹시 베팅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독자 여러분의 선택은? 나는, 차마, 말 못하겠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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