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 탐험기] 박범진 前의원, “인혁당은 조작이 아니라 실재했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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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3.26 10:14:57
  • 최종수정 2019.03.2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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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계엄사태가 났던 1964년, 그때 학생데모 배후세력을 조사하다가 중앙정보부가 적발하여 검찰에 송치했던 사건입니다. 그때는 중앙정보부가 적발은 했으나 물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해서 본인들의 진술만을 증거로 검찰에 송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검찰에 가서 피의자들이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검사들이 공소유지를 하기 어려웠습니다.
박범진 전 의원이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라 실재했던 사건"이라고 증언한 "박정희 시대를 회고한다".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발행했다.
박범진 전 의원이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 아니라 실재했던 사건"이라고 증언한 "박정희 시대를 회고한다".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발행했다.

필자는 지난 3월 15일 '박정희 시대의 공안사건은 모두 조작이었나?'란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이 글은 그 후속편에 해당한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제1차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 아니라 실재했던 사건이란 증언을 독자 여러분에게 보다 확실하게 전하기 위해서다. 그 증언자는 박범진 전 국회의원이다.

박범진 씨는 조선일보 기자,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지내다가 정치계에 진출하여 14~15대 의원을 지냈다. 그는 대학 재학 시절 제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중앙정보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아 석방된 전력이 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과거사 사위)는 2005년 12월, 제1차 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5·16 군사쿠데타로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이 전면 금지된 상황에서 혁신계 청년들이 통합을 논의해오던 활동이 드러난 것으로, 반국가단체로 실재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 관련자였던 박 전 의원은  인민혁명당이 실제로 존재하는 조직이었다고 증언했다. 박 전 의원은 “젊은 날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유혹에 빠졌던 일은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라면서 “1980년대 친북좌파에 휩쓸렸던 많은 후배들이 자기고백을 하는데 선배 가운데 누구도 과거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아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정부 당국이 객관화하는 데 실패해서 조작 사건처럼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데 대해 그 때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괴로웠다”며 “과거가 있는 사람이 침묵을 한다는 것이 괴로워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 증언을 토대로 할 경우 박정희 정부 시절 발생하여 처벌한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나 검찰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실을 조작하여 처벌한 것이 아니다. 실재했던 사건이었으나 사법당국이 관련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국가보안법으로 기소하지 못하고 반공법으로 기소하게 된 사건이었음을  수 있다. 이처럼 명백한 증언들이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 진영에서는 이승, 박정희, 전두환 정부 시절 간첩단 사건이나 시국 공안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들이 넘쳐나고 있다.

나아가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사위는 이들 사건을 조작된 사건, 혹은 고문에 의한 날조사건이라는 발표를 근거로 재심을 청구하여 무죄를 선고받고, 이를 근거로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하여 막대한 배상금을 타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간첩단 사건, 시국공안사건 등의 재심은 거의 대부분 간첩단 사건의 진실성 여부를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수사 과정에서의 강압행위나 가혹행위를 문제 삼았다. 즉 강압이나 가혹행위,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행위로 취득한 증거를 토대로 한 유죄는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시국사건은 이러한 패턴을 따라 무죄를 선고받고, 막대한 국가 배상금 수령, 관련자들은 '민주화 인사'로 격상 등의 절차를 밟고 있다.

박범진 전 의원의 양심고백 증언은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가 발간한 『박정희 시대를 회고한다』라는 자료집에 실려 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박 전 의원의 인혁당 관련 증언을 소개한다(이지수 엮음, 『박정희 시대를 회고한다』, 선인, 2010, 31~34쪽).

박범진 전 의원의 양심선언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꼭 이야기할 게 한 가지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가슴에 묻어두고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바로 인혁당과 관련된 겁니다. 사실 4·19 이후에 이미 대학에서 친북좌파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학년에 입학했을 때 대학 내에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신진회란 서클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참여할 생각이 없냐고 해서 저는 연구회니까 참여한다고 했어요.
그때 1학년이 2~3명 참여했던 것 같아요. 그때 거의 매주 일요일마다 모여서 빈 강의실에서 토론을 해요. 그런데 거기 들어가보니깐 주요 멤버들이 민족통일연맹을 주도했던 주축멤버들이었습니다. 윤식, 이영일 전 국회의원, 유세희 전 한양대 부총장, 이수정 전 문화부장관, 그런데 전 깜짝 놀란 것이 좌·우파 대립이 격렬한 거예요. 우파는 카우츠키, 베른슈타인 얘기를 많이 하고, 좌파 쪽에서는 레닌, 모택동, 김일성 얘기를 많이 하는 거예요. 좌파 쪽에 3~4명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김정강 씨였습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세상이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6·3 사태 때 데모 배후세력을 조사할 때 불꽃회를 조직했다고 해서 구속되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대표적인 좌파였어요. 저는 대학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사회주의 좌파, 우파를 얘기하며 싸우고 논쟁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래서 그때 관심을 가지고 사회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김정강 씨가 2학년이고 우리는 1학년이니까 오리엔테이션을 한다고 우리 1학년 강의실에 들어 온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인민복 입고 레닌 모자 쓰고 들어와서 노골적으로 김일성을 수령 동지라고 호칭하는 거예요. 그때는 그런 소리를 해도 잡아가는 사람이 없고 자유스러웠어요 그러다가 5』16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선진회도 해체되고 말았지만, 제가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관심을 가지다 보니 4학년 봄에는 논란이 많았던 인혁당 사건에 관여를 하게 됐어요.
젊은날 한때 잘못된 생각으로 잘못된 유혹에 빠졌던 일은 제 일생에 씻을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동안에는 공직생활을 하고 신문기자를 하느라 예기기가 곤란했어요. 80년대에 친북좌파에 휩쓸렸던 많은 후배들이 잘못을 깨닫고 글이나 토론을 통해 자기고백을 하면서 새로운 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배들 가운데는 누구도 자기 과거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이 없어요. 선배로서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앙정보부가 적발했으나 물증 확보에 실패
그래서 언젠가 사실 제가 관여했던 인혁당에 관해 “인혁당에 대한 회상”이란 제목으로 자기고백을 하는 칼럼을 쓰려고 했는데, 얼마 전에 인혁당 사건에 대해 과거사진상위원회에서도 다루고, 법원에서 재심해서 무죄선고까지 나고, 거기에 관련된 분이 8명이나 처형도 당하고 해서 너무나 예민한 문제라 칼럼을 쓸 수 없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는 현대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실을 증언하고자 합니다. 인혁당은 두 번 논란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6·3 계엄사태가 났던 1964년, 그때 학생데모 배후세력을 조사하다가 중앙정보부가 적발하여 검찰에 송치했던 사건입니다. 그때는 중앙정보부가 적발은 했으나 물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해서 본인들의 진술만을 증거로 검찰에 송치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검찰에 가서 피의자들이 고문에 의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결과 검사들이 공소유지를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일부 검사들이 기소를 거부하고 사퇴를 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를 하려다가 그냥 이념서클 정도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해 주모자들은 최고 2년 정도의 징역형으로 끝냈습니다. 저는 맨 말단이었기 때문에 기소되지 않고 공소보류상태로 가벼운 감기 지나가듯이 살짝 지나가서 조선일보에 복직되어 기자생활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실제로 존재했던 지하당입니다. 제가 입당할 때 문서로 된 당의 강령과 규약이라는 것을 직접 봤고, 북한산에 올라가서 오른 손을 들고 입당선서도 한 뒤에 참여를 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재학생으로는 5명이 참여했습니다. 지금은 다 생각을 바꾸어 정상적으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름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첫 번째 인혁당 사건(제1차 인혁당 사건)은 제 자신의 체험으로 볼 때 실재했던 사건이었으나 정부당국이 객관화하는 데 실패해서 조작사건처럼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데에 대해 그때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을 했던 사람으로 국가에 충성을 해야 하는데, 과거가 있는 사람이 침묵을 한다는 것이 괴로워 언젠가는 이야ㅐ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글을 써야겠다고도 생각했으나 글을 쓰지 못하고, 오늘 이야기를 해야게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민전 핵심이 찾아와 "함께 하자" 권유
제 친구 가운데도 자꾸 조작이라고 이야기하는 친구가 있으면 불러서 조작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10년쯤 지났으니 북한을 지지하는 세력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사람들의 선택이 옳았던 글렀던 그런 사람들도 생길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왔습니다. 1차는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나중에 보니깐 그중에 일부는 68년에 발표됐던 통일혁명당, 거기에 참여했더라고요. 또 일부는 76년에 생겼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에 참여했습니다. 사실 남민전이 생길 때는 제가 조선일보에 있다가 언론자유문제로 퇴사해서 종소기업에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때 남민전을 만드는 핵심이 찾아와서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상을 정리한 지 오래되었고, 또 우선 성공하기도 어렵교, 후배들 고생시키는 일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만 세 번이나 찾아온 거예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첫발을 잘못 디딘 것이 몇 십 년이나 가는 거예요. 인민혁명당이라는 이름은 저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과거 월남에 월남민족해방전선이 있지 않았습니까? 월남민족해방전선은 남쪽 월남의 통일전선체로 통일전선체를 구성한 핵심 공산당이 인민혁명당이었어요. 거기서 힌트를 얻어서 당명을 정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74년에 발표된 두 번 째 사건인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도 있지만 실제로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실 친북좌파 학생운동은 80년대 들어서 확산되었으나 그 싹은 4·19 학생혁명 직후인 60년대 초반부터 트기 시작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사실 그 사건들 간에 연계는 없지만 대학가의 분위기상 쭉 전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따라서 책임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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