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칼럼] 사회적 기억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나라, 대한민국
[남정욱 칼럼] 사회적 기억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나라,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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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인간의 생물학적 기억력은 40대 중반을 정점으로 감퇴하기 시작한다. 물론 많이 웃고, 많이 걷고,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지 않으면 그 시기가 늦춰진다. 반대로 잠을 제대로 못자고, 화를 많이 내며 입에 욕을 달고 살면 30대 중반에도 기억력의 급속한 감퇴를 달성할 수 있다. 여기에 폭음과 흡연까지 더하면 금상첨화다. 사회적 기억은 생물학적 기억과 다르다. 기억의 방식이 자연발생적이 아니라 인위적이고 집단적이다. 당연히 권력관계나 정치역학에도 크게 좌우된다. 그래서 사안에 따라 일 년에 끝나는 사회적 기억도 있고 십 년 이상을 가는 경우도 있다. 여기에도 조건은 있다. 아무리 사회적 기억을 강제하려는 사람이나 세력이 발버둥을 쳐도 그 일과 몸으로 엮인 사람들이 세상을 뜨면 사회적 기억의 힘은 약해진다. 아버지가 당한 분한 일은 자식에게도 역시 분하다. 그러나 증조할아버지가 당한 억울한 일은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가슴이 안 움직인다. 슬슬 남의 일이 되는 중이고 고조할아버지의 사연 정도면,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 인데?가 된다. 사회적 기억은 그때부터는 역사로 넘어간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사회적 기억은 해방과 6ㆍ25전쟁이다. 둘 다 지정학의 결과(지정학은 지리에 정치를 더한 개념)로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각축장이었으며(러일전쟁), 공산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충돌한 무대였다. 그 일로 우리에게는 사회적 기억으로 두 가지 키워드가 남게 된다. 하나는 ‘친일’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빨갱이’다. 공산주의자를 비하하는 용어인 빨갱이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다. 빨치산에서 왔다는 설도 있고 공산 제국의 깃발이 붉은 색이라 그렇게 불렀다는 주장도 있다. 뭐 중요한 건 아니다. 문제는 이 두 개의 단어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빨갱이가 건재한 것은 우리의 머리 위에 어쨌거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이 존재하며 남쪽에도 이를 추종하는 무리가 다수 있는 까닭이다. 일면 타당성 있는 사회적 기억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친일은 좀 이상하다. 해방된 게 벌써 74년 전 일이다. 일정 시대를 실제 겪었으며 신민지라는 개념을 어렴풋하게나 이해하는 연령대를 10대 중반으로 가정했을 때 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아흔 살이 된다. 그 시기를 몸으로 체험한 세대가 최소 아흔 살인데도 그 사회적 기억이 여전히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꿔 말하면 누군가 계속 군불을 때면서 이 사회적 기억을 연장시키려고 노력 중이라는 말씀이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소생술을 펼치고 있는 것일까.

자기 분열증에 가까운 대통령의 연설

대통령의 3ㆍ1절 기념 연설은 웃기면서도 슬프다. 웃기는 건 역사 인식도, 논리도 완벽하게 실종된 채 횡설수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슬픈 건 이런 소리를 앞으로 2년도 넘게 더 듣고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각자 분발하여 정신 건강 수호에 만전을 기하는 수밖에 없겠다. 기념 연설을 보면 대통령의 관심사는 적폐에서 생활적폐로, 다시 친일잔재로 넘어가고 있다. 여전히, 또 청산이다. 원래 유능한 사람은 조직을 맡으면 그 조직이 뭘 잘하지를 먼저 파악한다. 그리고 잘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무능한 사람은 그 조직의 문제가 무엇인지부터 파악한다. 그리고 그걸 시정해보겠다고 매달린다. 조직의 운명은 확연히 갈린다. 후자의 경우 문제는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거 해결하는 동안 기회란 기회는 다 달아난다. 대통령이 딱 후자다. 기회는 날아가고 조직은 침체된다. 어쩌랴, 국민의 40%가 좋다고 그런 인물을 뽑은 것을.

잘하는 것 대신 청산에 매진하는 거야 능력이 거기까지니까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런데 그 논리가 참 뜬금없다. 빨갱이라는 단어가 ‘민족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까지 모든 독립 운동가를 낙인찍는 말’이었고 ‘일제가 민족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친일청산의 대상이란다. 대체 이 분은 어디서 이런 비역사적인 것만 골라서 배우는지 모르겠다. 연설에서 빨갱이보다 심각한 부분이 반일이다. 앞부분을 조금만 옮기자.

“3월 1일부터 두 달 동안 남·북한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전국 220개 시, 군 중 211개 시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만세의 함성은 5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의 10%나 되는 202만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했습니다. 7,500여 명의 조선인이 살해됐고 16,000여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체포·구금된 수는 무려 46,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최대 참극은 평안남도 맹산에서 벌어졌습니다. 3월 10일, 체포, 구금된 교사의 석방을 요구하러 간 주민 54명을 일제는 헌병 분견소 안에서 학살했습니다.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에서도 교회에 주민들을 가두고 불을 질러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29명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이 이어졌습니다.”

대외적으로 내용이 공표되는 이런 행사의 연설은 3ㆍ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되새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냥 1919년의 한민족이 얼마나 멋졌는지 이야기하면 된다. 그런데 몇 명이 죽었고, 어떻게 죽었고, 굳이 어린아이까지 불태워 죽였다고 세세하게 읊어대고 있다. 대통령의 언어는 일반인들의 말과 다르다. 대통령의 언어는 외교와 직접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교적 언어는 중의적이며 은유적이다. 가령 어떤 주제를 놓고 긴 애기를 나누었다고 하면 결론을 못 냈다는 얘기다.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고 하면 거의 명패를 들고 싸웠다는 의미다. 대통령의 구체적인 3ㆍ1운동 피해 사례 나열은 일본에 대한 외교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어지는 연설은 그래서 황당하다.

“이제 와서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 분열을 일으키거나 이웃 나라와의 외교에서 갈등 요인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친일잔재 청산도, 외교도 미래 지향적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이 발언은 사람을 죽기 직전 위기 상황까지 몰아넣고 가까스로 살아나오면 “장난이야”하는 말과 다르지 않다. 입으로 성적 희롱을 신나게 해 놓고 “농담이야”라고 말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그렇게 헤집어 놓고 ‘이제 와서 갈등요인을 만들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니 듣는 사람이 혼란스럽다.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유체이탈 화법보다 더 심각하고 위태로운 자기분열증적 화법이다. 물론 연설문 작성자의 지적(知的) 수준과 안목에도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설문의 최종 책임자이자 감수자는 연설자 자신이다. 같은 수준의 안목과 생각이 있으니 이런 연설문을 태연하게 읽어댄 것이다.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였다면 우리 국민들을 향해서는 또 다시 반일과 친일잔재 청산을 일깨우며 거기에 동의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으로 국민을 분열시키고 있다. 동의하는 사람들은 ‘진실’과 ‘정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경제도, 안보도 이들에게는 하나도 안 중요하다. 이런 사람들에겐 지정학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국제 관계에서도 정의가 통한다고 확신하는 이상주의자들의 주장이 어떻게 그 민족과 국가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는지는 역사에서 숱하게 목격된다. 현실과 이상이 크레바스 수준으로 간격으로 벌어져 있는 것이 인류의 역사다. 대통령의 연설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사실 정도는 알고 세상을 바라본다.

사과라는 하수(下手)의 어리광

대한민국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국민이 열심히 일해서 오늘의 번영을 이루었다고 말한다면 역시 지정학 시험에서 100% 낙제다. 근면과 노력이 번영의 이유라면 세상에 못 살 나라가 없다. 대한민국의 현재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냉전이라는 토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잘 사는 나라 옆에 있어야 잘 산다. 주변이 죄다 못 사는 나라라면 잘 살기는 불가능하다. 너나 할 것 없이 못 사는데 도움을 줄 수도, 영감을 줄 리도 만무하다. 그냥 그렇게 통으로, 다발로, 떼로 못 사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이해하고(인정이 아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설정해야 한다. 그게 대일관계의 기본이다. 경제와 안보에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바라봐야 한다. 피해자가 당했던 과거사를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과이고 하나는 넘어섬을 통한 설욕이다. 사과는 하수(下手)의 자기만족이다(마스터베이션으로 쓸까 잠시 망설였다). 설욕은 고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중급 이상의 판단과 선택이다. 사과만 받으면 끝나는가. 아무 것도 없다. 베트남이 한국에게 민간인 학살을 놓고 사과 요구를 한 적이 있나. 없다. 물론 게릴라전에서 민간인 학살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베트남은 자신들의 마을이 불타고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을 명시해가며 한국을 자극한 적이 없다. 베트남이 ‘등신’이라서? 아니다. 그들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며 경제발전이라는 설욕으로 준비 중일 뿐이다. 수많은 베트남 며느리들이 폭행과 인권유린으로 멍들어 갈 때도 베트남은 ‘사돈의 나라’라며 대한민국에게 웃는 낯을 했다. 나는 그래서 가끔 베트남이 무섭다.

한편, 사과에는 뒤탈이 따른다. 사과를 하면 사과한 쪽에 앙금이 생긴다. “다음 세대에 사죄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다”며 반발한 아베의 발언은 이런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 힘없는 자가 힘 있는 자에게 요구하는 사과가 하수의 어리광이라면 중급의 선택은 미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국가’는 절대 미안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전략의 타깃은 가해국의 국민들이다. 그 국민들로 하여금 정부를 압박하게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외교적 지력과 국민의 수준으로 이게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가장 고수는 당연히 가해자를 넘어서는 것이다. 사과하지 말래도 사과하겠다고 나서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괜찮아요. 절대 사과하지 마세요.”라고 쿨~하게 말해주는 것보다 멋진 설욕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런데 이 지점에서는 피해자의 심리에 변화가 생긴다. 힘이 생겼으니 때려주겠다는 의욕 대신 너그러움이 발생한다. 힘으로 넘어섰다고 가해자를 때리면 결국 같은 수준으로 전락한다. 근대화 조금 일찍 했다고 문화와 문명을 전해준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한심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일본의 국민 작가 시바 료타로는 한일병합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욕심 많은 농사꾼이 이웃 논을 약탈하듯이 그저 조선반도를 집어삼킨 것뿐이었습니다.” 힘이 생겼다고 약탈국가가 될 수 는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때릴 수 있지만 안 때리는 것이, 그리고 그 사실을 상대가 인지하여 공포에 떠는 것을 보는 것이 더 큰 만족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면 그게 우리 민족의 창건 이념인 홍익인간이다. 널리, 같이 잘 사는 것이다. 뭐 여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단군 할아버지도 너희들 수준에서는 어려울 텐데? 고개를 갸웃 하실 것이다. 돌 맞을 소리겠지만 이게 대한민국 국민 지력에 대한 솔직한 나의 생각이다.

반일을 외치는 자가 진짜 친일파

사과를 안 한다고 지은 죄를 모르는 건 아니다. 일본이 가장 두려운 게 통일한국의 내셔널리즘이다. 동아시아 국제 관계 전문가인 사무엘 킴 교수는 ‘냉전 이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다중 지배적 접근’이라는 논문에서 통일한국의 민족주의가 일본에 대한 가공할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논문의 결론은 한반도의 분단이 일본의 국가 전략이라는 것이었다. 키신저의 발언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은 통일 한국이 정치, 경제적으로 고집스러운 경쟁자가 될 것이기에 한국의 통일을 실어하며 싫어하며 조총련의 대북 송금을 허용하여 북한의 경제적 연명을 도왔다는 것이다. 냉전이 끝나자 일본은 1990년부터 북일 수교 협상에 돌입했다. 납북자 문제와 핵과 관련된 미국의 문제 제기로 틀어지긴 했지만 수교와 동시에 100억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했던 일본의 의도는 명확하다. 분단 고착이다. 1959년에도 일본은 10만 여명의 재일교포 북송을 통해 노동력, 기술, 자산 등을 북한에 지원한 바 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애물단지가 된 재일 한국인을 인종 청소해 버리는 꿩 먹고 알 먹고 전략이었다. 그만큼 일본의 한반도 분단 유지 욕구는 절실하고 현실적이다. 대한민국이 대외적으로는 반일, 내부적으로는 친일 문제로 갈라지면 누가 제일 행복할까. 당연히 일본이다. 한국이 사과를 요구하며 난리를 피울 때마다 짜증나는 듯 반응하지만 일본의 속내는 다르다. 좋아 죽는다. 반일 감정이 국민정서로 확산되면서 한국과 동행할 이유가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다. 청하지는 못하나 원래부터 몹시 바라던 바라는 뜻의 고소원불감청(固所願不敢請)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 친일의 사회적 기억은 가물가물해지는 중이다. 그런데도 그 퇴색한 친일을 끌어내 국민을 쪼개고 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역설적으로 ‘최악의 친일분자’다. 친일로 국론이 나눠지고 이게 반일로 이어지는, 일본이 그토록 바라는 일을 제 발로 앞장서서 하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얘기다. 실은 복잡하게 얘기할 것도 없다. 작년 한 해만 일본을 여행한 한국인이 750만 명이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일본 가정식, 라멘 집, 이자카야는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익숙해진 우리 삶의 일부다. 이런 상황이 반일과 어울리는가. 이미 젊은 세대는 증조할아버지 세대의 기억을 털어 버린 지 오래다. 그런데도 그걸 또 살려내 기억을 강요하는 인간들의 사악함은 집요하기로 기네스북 등재감이다. 더는 국민이 속으면 안 된다. 친일 잔재 어쩌구 하며 사회적 기억을 연장하려 할 때, 이제 지겹다고, 그만 입 닫으시라고 해야 한다. 반일을 꺼내면 제 정신이냐고 면박을 줘야 한다. 과거를 정권 지지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인간들의 구질구질한 입을 틀어막을 때 비로소 극일도, 더 나아가 상생도 가능해진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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