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서언

인공지능(AI)은 우리 삶 속으로 점점 깊이 스며든다. 인공지능의 진화가 가속되므로, 우리 삶의 변화도 점점 커진다. 실은 사회의 구성원리와 작동 방식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느껴진다. 나아가서, 인공지능의 출현은 인류만이 아니라 지구 생태계의 수준에서도 중대한 사건이다. 인공지능이 새로운 종(種)으로 진화할 가능성은 점점 커진다.

이처럼 현기증 나는 현상이 뜻하는 것들은 파악하기 어렵고, 자연히, 우리가 느끼는 혼란과 두려움은 점점 커진다. 인공지능으로 크게 성공한 기업가들인 일론 머스크(Elon Musk)와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가 ‘인류에 대한 인공지능의 위협’이라는 주제를 놓고 거센 논쟁을 벌인 것은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한 사람은 인공지능이 인류에 대한 궁극적 위험이므로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사람은 그런 생각이 그르다고 반박한다.

인공지능에 대해 잘 아는 사람 둘이 그렇게 맞서니, 보통 사람들로선 더욱 막막해진다. 그래서 그들의 논쟁은 상황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 인공지능의 성격과 그것이 제기하는 위협에 대해 알아보려는 의지를 꺾는 듯하다.

그러나 인공지능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고 그렇게 몰라도 별 불편이 없는 보통 사람들도 이제는 인공지능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해야 한다. 위에서 얘기한 대로, 인공지능은 우리 삶 속으로 점점 깊이 스며들고 우리 삶을 점점 크게 바꾼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배우면, 그만큼 세상을 잘 이해하게 되고 불편을 덜 겪게 된다. 사회적으로도, 시민들이 인공지능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보다 나은 정책들이 나올 수 있다.

머스크와 저커버그의 논쟁을 얘기했으니, 그들의 주장을 먼저 살피는 것도 좋을 터이다. 두 전문가들 가운데 누가 옳은가? 물론 누구도 확실한 판정을 내릴 수 없다. 어쩌면 둘 다 옳을 수도 있고 둘 다 그를 수도 있다. 그들이 대화한 내용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둘이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해 얘기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저커버그는 인공지능이 단기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전망을 강조한 듯하다. 반면에, 머스크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지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출현에 주목한 듯하다.

저커버크의 낙관적 전망은 단기적으로는 분명히 옳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이 짧은 시간에 확고하게 자리잡은 데서 그 점이 드러난다. 지능을 갖춘 기계들의 출현은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머스크의 비관적 전망도 정당성을 얻는다. 인공지능에 관해 지식과 통찰을 아울러 갖춘 전문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인공지능이 사람의 지능을 뛰어넘는 초지능(super-intelligence)으로 진화하리라고 예상한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초지능이 그리 멀지 않는 장래에 출현하리라고 본다. 일단 초지능이 출현하면, 인류는 엄청난 지식과 판단력을 지닌 존재로부터 실존적 위협을 받게 된다. 그래서 머스크는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통제해서 초지능의 가능성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머스크의 진단과 처방이 본질적으로 인간중심적(anthropocentric)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cism)가 우리에게 아무리 자연스러워도, 그것이 너무 좁은 바탕과 시야를 지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근년에 우리는 인류가 지구 생태계의 한 부분이며 지배적 종의 책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자연히, 인간중심주의는 적절치 못한 진단과 처방을 낳는다. 아쉽게도, 그런 인식은 널리 퍼지지 못했다.

머스크의 비관적 전망은 그것이 인간중심적이라는 사실에서 비롯했다. 인공지능이 인류에 대한 위협을 제기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공지능이 지구생태계 자체를 위협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인류가 스스로 합리적 판단과 행동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초지능은 지구생태계를 인류의 무지와 탐욕으로부터 보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난은 인공지능을 지구 생태계의 맥락에서 살필 것이다. 그런 고찰은 일단 매체의 특질과는 잘 맞지 않는다. 펜엔마이크는 주로 한국 사회에서 당장 시급한 정치적 문제들을 다룬다. 자연히, 시야가 제약되었고 시평(time-horizon)은 길어도 다음 대통령 선거일까지다. 모든 생명체들의 모든 문제들을 40억년의 역사와 아득한 미래를 아울러 품은 시평에서 철학적으로 다루는 이 글과는 너무 대척적이다.

그래도 시야를 넓히고 시평을 늘리는 것은 사고와 논의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당장 시급한 정치적 문제들에 몰입한 독자들이 긴 시평을 지닌 철학적 글을 음미하면서 잠시 여유를 즐기기를 희망할 따름이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작가·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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