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좌파, 좌편향 세력들이 집요하게 친일파를 공격하는 것은 식민시대의 그들 행위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 후 대한민국 건립에서 그들의 지대한 공헌을 증오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드디어는 김일성 주도하의 적화통일이 완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2월 26일 오전 역사상 최초로 서울 용산구 백범 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친일청산" 의지를 밝혔다.(연합뉴스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2월 26일 오전 역사상 최초로 서울 용산구 백범 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친일청산" 의지를 밝혔다.(연합뉴스 제공)

문재인 대통령의 ‘친일청산’ 관련 발언이 레드 라인(red line)을 넘었다.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백범 김구 기념관에서 국무회의를 열지를 않나, “친일을 청산하고, 독립운동을 제대로 예우하는 것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정의로운 나라로 나아가는 출발”이라고 발언했다. 임시정부 출범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하려다가 여론이 너무 좋지 않자 슬그머니 폐기했다.
심지어 지난 2월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가정보원·검찰·경찰 개혁 전략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일제강점기 검사와 경찰은 강압적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며 “올해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비뚤어진 권력기관의 그림자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원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정경희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일제강점기’란 용어는 북한이 만든 것이다. 북한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기준으로 그 이전의 일제시기를 ‘일제강점기’로, 그 이후를 ‘미제강점기’라 부른다. 일본의 악행을 강조하기 위해 북한 용어를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등장시키더니, 어느덧 공식석상에서 대통령의 입에서까지 등장한 것이다.
검사와 경찰이 강압적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기관이었다? 그 시대는 일본 통치시대로서 조선총독부의 통치를 받았고,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일본 국적을 부여받았다. 이런 상황이었는데 그 시절 검사와 경찰은 이미 망해 없어진 조선 조정을 위해 일했어야 한다는 뜻인가?
3·1절 기념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인구의 10%나 되는 202만 명이 만세 시위에 참여했고 7,500명이 살해됐다”고 연설했다. 열흘 전 국사편찬위원회는 3·1운동 참여자는 최대 103만 명, 사망자는 900여 명이라고 발표했다. 전문가들의 학문적 연구에 의해 국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표한 통계수치보다 시위 참가자는 2배, 희생자는 8배나 부풀려 연설한 것이다.
1980년대 주사파 운동권들의 팸플릿에서나 등장할 법한 발언들이 대통령의 입에서 마구 튀어나온다. 친일 망령 때려잡고 항일 독립운동 추켜세우기에 올인한 결과 없는 사실 날조하기, 있었던 사실 부풀리기에 대통령이 가세했다. 과거사 망령에 발목이 단단히 잡혀 나라 전체가 거의 합리적 이성을 상실한 모습이다.
국정의 사령탑인 대통령과 청와대가 곳곳에서 이런 류의 발언을 반복한다는 것은 곧 그와 관련된 정책이 집행될 것임을 암시하는 봉화다. 정부 차원에서 친일 재산 환수 등 친일 잔재 청산 작업이 곧 시작될 것이라는 관측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고 있다.

분할통치 수법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운동권 집단은 대중을 항일·친일로 편을 갈라 자신들은 항일의 도덕적 주도권을 주고 적대세력을 친일로 몰아 영원히 도태·격리·폐기처분하겠다는 ‘친일 프레임’ 선전포고를 했다. 이것이 소수의 지배세력이 다수의 군중을 통치하기 위해 써먹는 고전적인 분할통치(devide and rule) 수법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군중심리를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다. 이 나라 국민들에게 있어 ‘친일’은 잠들었던 민족감정을 번쩍 깨우는 무소불위의 힘과 권위,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친일’ 낙인이 찍히면 인민재판에 가까운 비난이 쏟아져 생존 확률이 희박해진다. 친일의 쌍도끼를 휘둘러 대한민국 지도층의 도덕적 권위를 학살하면 할수록 ‘항일 무장투쟁’을 했다는 세력의 권위는 위엄을 발휘한다.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섰던 지도층과 그 후예들을 친일 프레임으로 무장해제 시키는 이면에는 좌파·좌익·민족세력·평화통일 세력, 그리고 백두혈통의 빛나는 지도자 김일성이 존재하고 있다. 자신들은 ‘일제강점기’에 만주벌판을 누비며 무장 항일투쟁을 한 전력이 있으니 민족사적 정당성과 정통성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의 영혼 속에는 해방공간과 그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자신들은 혁명세력, 곧 선(善)의 잡단이요, 분단된 대한민국을 세운 집단은 반혁명세력, 즉 악(惡)의 세력으로 각인되어 있다. 양 세력의 성격에 대해 그들은 다음과 같은 가공의 등식을 사이비 종교처럼 신봉한다.

소련군정, 민족세력 말살 위해 “친일파 숙청” 지령

그렇다면 이 땅의 망령이나 다름없는 친일 프레임의 근원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해방 후 ‘친일’을 강력한 무기로 등장시킨 것은 소련이었다. 38선 이북 지역을 점령한 소련은 북한에 자신들을 추종하는 공산 위성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그리고 남한을 적화시켜 전 한반도를 ‘민주기지’로 만들기 위해 민족세력 파괴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소련공산당은 가공한 살상력을 가진 ‘친일’을 신무기로 동원했다.
1945년 9월 10일 평양주둔 소련군정 사령부는 각 지역 위수사령부에 ‘독립 조선의 인민정부 수립 요강’ 6개 항을 지령했다. “친일 분자는 철저히 소탕하고 각 분야의 불순분자를 엄정하게 숙청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이것이 바로 소련공산당이 북한에서 민족세력을 말살하고 소비에트화 혁명을 진행하기 위해 꺼내든 비장의 카드였다.
북한에 소련식 공산국가(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민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일본 잔재 사상과 친일 인물을 철저히 소탕한다. 그들을 적폐세력으로 몰아 숙청한 후 일제에 저항하며 희생적으로 투쟁해 온 혁명세력과, 일제의 착취 대상이었던 노동자·농민을 정치 일선에 내세우라는 것이 ‘독립 조선의 인민정부 수립 요강’의 핵심이다.
1945년 10월 환국한 이승만의 정치적 목표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로 표출된 ‘대동단결, 자주독립’이었다. 그런데 소련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박헌영이 이승만의 노선에 재를 뿌렸다.
박헌영은 10월 30일 “조선에는 아직도 일제의 잔재세력이 남아 있다. 친일파를 근절시킨 다음 옥석을 완전하게 가려놓고 순전한 애국자,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만을 한데 뭉쳐 통일해야 한다”면서 이승만의 대동단결 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이승만이 11월 7일 공산당이 자기에게 부여한 인공의 주석 직을 사퇴한다고 선언하자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은 이승만을 친일 프레임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우익진영은 찬탁을 외치는 조선공산당을 “외세에 의존한 매국적 괴뢰집단”이라고 공격했다. 공산당과 좌익은 반탁을 주장하는 우익을 향해 “민족감정을 이용하여 친일 전력과 반동적 성격을 은폐하려는 정상배들”이라고 비난했다.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공산당은 소련을 조국으로 하는 자들이니 너희 조국으로 가라”는 요지의 성명을 냈다. 그러자 공산당도 “당신은 미국에 금발 벽안의 미인이 기다리니 미국으로 가라”, “돈암장은 돈 많은 친일파의 소굴”이라는 성명을 싣고 비라를 뿌렸다.
북한은 해방 후 친일파를 철저히 청산하여 민족정기를 회복했기 때문에 민족사의 정통성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북한에서 진행된 친일 청산은 체계적인 법령은 물론, 청산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 허구였다.
북한의 친일 청산은 완전 사기다. 북한의 ‘친일 청산’은 진짜로 일제 시절 반민족행위를 한 자들을 가려내 이들을 말살한 것이 아니다. 단지 공산정권 출범에 비협조적이고 반공적 태도를 보인 사람들을 ‘친일분자’로 낙인찍어 숙청한 것이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다. 공산주의 체제를 만들기 위해 반공주의자나 혹은 민족주의 세력을 탄압하고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재산을 빼앗는 과정에서 갖다 붙인 ‘친일’ 혹은 ‘민족반역자’라는 딱지와, 이들을 축출하기 위한 자의적인 인민재판이 있었을 뿐이다.

스탈린이 헌법, 국호, 국회의원, 장·차관 명단 정해줘

북한은 친일파 청산을 공산혁명 투쟁의 도구로 삼았다. 때문에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친일파라도 북한 공산정권 수립에 적극 찬성하고 동조하면 묻지도, 따지지 않고 등용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제 하에서 도의원을 지낸 강양욱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서기장을 역임한 것이다. 김일성의 친동생 김영주는 만주에서 일본 관동군 통역이었고, 만주에서 검사장을 했던 한낙규는 북한 검찰총장, 일본 제국군대의 파일럿 출신인 이활은 인민군 공군사령관에 올랐다.
반면에 대한민국 초대 내각 구성원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상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이시영(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신익희(임시정부 내무총장) 등 19명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북한은 완벽하게 스탈린의, 스탈린에 의한, 스탈린을 위한 공산국가가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범 과정을 보면 그 과정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장·차관에 해당하는 상(相)·부상(副相) 임명 과정을 보자. 평양의 소련군정 사령부는 소련공산당에 충성하는 자들의 명단을 모스크바에 보고한다. 스탈린이 이 명단을 재가하면 김일성에게 넘겨 상·부상에 임명했다는 사실이 소련 측 문서에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뿐만이 아니다.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북한 헌법도, 우리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도 모두 소련공산당이 정해주었다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 스탈린의 심복인 스티코프의 비망록(일기), 레베데프 비망록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를 대한민국의 출범과정과 비교해 보자. 대한민국 초대 내각 진용을 미 국무장관이 인섢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재가하여 정하고, 제헌헌법을 미국이 만들어주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도 미군정이 정해주었다면 이것을 나라라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그를 추종하는 한국의 주사파 종북 세력들은 “북한은 자주성 있는 나라이고 한국은 미제(美帝)가 만든 식민지”라고 날조된 주장을 미친개처럼 반복해서 짖는다.
1949년에는 남로당 요원들과 북한 간첩에게 포섭된 국회의원들이 대한민국 전복을 위해 활동한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체포된 의원 가운데 주동자인 김약수·노일환·이문원 등이 반민법 제정을 주도하고 반민특위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것은 반민법과 반민특위가 남로당과 북한 공산집단의 사주에 의해 만들어지고 활동했음을 시사하는 증거다.
이제 만주에서 행했다는 항일 무장투쟁의 역사적 사실을 들여다볼 차례다. 19세기 중엽 한국인들이 기아와 빈곤, 폭정과 가혹한 세금을 견디다 못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로 이주해 갔다. 특히 1869~1871년 사이 함경도와 평안도 지역에 대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강을 건넜다.
1909년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된 간도협약에 의해 한인들은 간도에서의 토지와 재산에 대해서는 중국인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간도를 제외한 만주지역에서 한인들은 중국에 귀화하지 않는 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다.
일본 측 조사 자료에 의하면 1936년 현재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 교민은 총 87만여 명이었다. 간도 지역 전체 농가 중 농토가 없어 소작으로 연명하거나, 자소작 겸업 농가 호수가 3만 6,327호였는데, 그 중 한인 농가가 차지하는 비율이 93.3%였다.

대체 만주에서 어떤 항일 투쟁이 벌어졌나?

만주로 건너간 조선 농민 대부분은 호구지책을 위해 중국인 지주의 소작인이 되었고, 중국인 지주들로부터 혹독한 착취를 당했다. 나라를 빼앗긴 유랑민 신세에다가, 극빈 농민의 최하층 생활이란 사회 여건은 공산주의 약발이 제대로 먹히는 온상이 되었다.
만주에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첨예하게 갈등하면서 민족혁명(한국의 독립)이니 사회혁명(계급의 타파)이니 하는 공산주의 슬로건이 가슴 떨리는 복음처럼 다가왔다. 만주 이주 한국인들은 공산주의가 뭔지, 사회주의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진지한 고민이나 이론적 학습 없이 혁명 구호를 앞세우는 청년동맹이나 농민동맹 조직에 가입했다. 그들은 약소민족을 후원한다는 중국공산당, 소련공산당과 연계하여 조국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뜨거운 믿음을 갖고 공산당 활동에 앞장섰다. 1925년 이후 만주 지역에서 퍼져나간 중국공산당원의 85%는 한국인이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 본토로부터 동북지역을 분리시켜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출범시켰다. 만주 일대에서 반만항일 투쟁이 계속되자 일제는 만주국 군대를 창설했다. 이에 필요한 인재 확충을 위해 1933년 4월, 봉천군관학교를 설립하고 한국의 젊은 인재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일제하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뜻을 펴지 못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젊은이들 신분상승을 위해, 입신양명을 위해 신천지로 떠오른 만주국으로 가서 상업을 하고, 공무원이 되고, 군인과 장교가 되었다.
그 결과 만주라는 공간은 한민족 현대사에서 의미심장한 두 개의 그룹을 배양해냈다. 한 그룹은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공산당에 소속되어 동북인민혁명군(후에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빨치산 무장활동을 벌였다. 그 반대쪽에 만주군관학교, 혹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혹은 만주국) 국적자로서 만주군(혹은 일본 관동군) 소속으로 동북항일연군과 싸웠다.
흥미로운 것은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지침과 행동목표다. 그들의 자료에 의하면 동북항일연군은 “중화(中華)조국을 옹호하고, 동북(東北) 실지(즉 만주)의 회복, 민중과 연합하여 항일구중국(抗日救中國)”으로 규정되어 있다. 즉,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투쟁한 것이 아니라, 중화조국을 옹호하고 일본에게 빼앗긴 만주를 되찾기 위해 빨치산 활동을 벌인 것이다.
만주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군 세력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중국공산당이 조직한 동북항일연군 소속으로 일본과 싸웠다. 이러한 활동이 조선의 독립·해방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문재인과 청와대 종북 주사파들은 답해야 한다.
게다가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들이 일본과 싸운 이유는, 조국을 독립시킨 후 계급해방, 민중혁명을 위해서였을 뿐 자유로운 민주국가 건설이 아니었다. 투쟁을 했다고 해서 다 같은 성격의 투쟁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일본 관동군과 만주군은 공산 빨치산들을 체포해 보니 대부분이 조선에서 만주로 이주해 온 한국인들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만주의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동원해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일·만군 공격에 앞장서도록 이이제이(以夷制夷)를 한 것이다.
이 사실을 간파한 관동군과 만주군은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고 판단, 대부분이 한국인들로 조직된 간도특설대를 조직했다. 이 부대는 장교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50 대 50이고, 부사관과 사병은 전원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특별부대였다. 일본은 만주 일대에서 간도특설대를 동원하여 전투대원의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판?

그 결과 만주 땅에서 중국공산당 편에 선 한국인 공산주의자들과, 일본·만주국 편에 선 한국인들 간에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격돌이 벌어졌다. 만주라는 공간에서 일본·만주국 편에 섰던 그룹은 후에 대한민국 정부의 핵심요직을 구성하게 된다. 반면 중국공산당과 소련군 편에 서서 일본·만주국과 투쟁한 그룹은 북한으로 들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조선 멸망 과정에서 전통적인 유학에 기반을 둔 정치신념이 무너지면서 근대 민족주의 사상이 도입되었고, 거의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었다. 3·1운동 이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이데올로기 분열이 일어났다. 두 이념의 배후에는 중국·소련·미국 등 강대국의 정치역학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운명적 갈림은 개개인이 스스로 원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격랑에 휘말린 결과였다. 그 무시무시한 격랑은 한 인간의 의지 따위는 거침없이 날려버리는 질풍노도의 파괴력을 내재하고 있다. 그 질풍노도의 깊은 상처가 오늘까지 남아 북한은 ‘항일 무장투쟁’이라는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장악하고 대한민국 건국 및 호국, 산업화 추진세력을 친일파, 민족반역자라고 매도하며 현대사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해방 후 이승만에게 친일 프레임을 걸어 공격한 것은 소련과 남북한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련의 지시를 받아 로봇처럼 공산국가를 건설한 치명적 약점을 은폐하기 위한 선전선동의 무기가 필요했다. 그 결과 이승만과 대한민국을 건국한 사람들을 “친일 매국노”, 혹은 “외세를 업고 한반도를 분단시킨 원흉”으로 공격했고, 국회 공작을 통해 반민법과 반민특위를 조종했다.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주자학적 세계를 이어받은 좌파·좌익·친북·종북 세력들도 남한 사회에 친일 프레임을 걸어 북한은 친일파를 깨끗이 청산하여 민족적으로 흠결이 없는 존재라고 선동했다.
이 모든 것은 ‘한 여름 밤의 꿈’이다. 친일보다 죄질이 훨씬 더 악질인 친소련 행위로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만든 자들이 바로 북한 공산집단이다. 이 땅의 좌파·좌익·친북·종북 세력들은 소련 위성국가 북한의 허무맹랑한 논리를 수용하여 한국을 붉게 물들여 왔다.
친일·항일 따지기 이전에 건국 과정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인재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나라를 지킬 군인과 경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잘 훈련된 장교와 하사관, 도둑과 강도 잡는 경찰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제하에서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광복군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국군·경찰에 참여했다.
일제하에서 일본군 장군에 오른 사람은 홍사익이 유일했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최고 엘리트들이 진학하는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홍사익은 일본 육군 중장까지 올랐다. 1944년 필리핀 주둔 일본 남방군 총사령부의 병참총감, 연합군 포로수용소장을 겸직했는데, 이 때문에 종전 후 필리핀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서 포로 학대 혐의로 교수형을 당했다. 
이승만은 홍사익 장군을 구명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을 비롯하여, 그의 부관이었던 필리핀의 카를로스 로물로 등을 통해 구명운동을 벌였다. 신생 대한민국엔 한 사람의 고급인재가 아쉬웠기 때문이다. 만약 홍사익 장군이 구명되어 국군 창설에 앞장섰다면 대한민국 국군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해방 후 친일세력의 역할

일제 치하에서 친일세력, 친일파들은 공산주의자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쌓았고, 공산주의와 싸워 분쇄할 능력과 의지가 있었다. 해방 2개월 후인 1945년 10월 미국으로부터 귀국 한 이승만 박사가 이들 친일세력, 친일파를 기용한 것은 인재 부족 상황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오늘날 주체사상을 받아들여 한국 사회를 친북 혹은 종북의 소굴로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 온 주사파와, 좌익 운동권, 좌익 언론인, 그리 ‘국사’라는 이름으로 김일성과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들에게 월계관을 씌워준 국사학자들 덕분에 친일 청산, 항일 독립운동이란 거대한 우상이 만들어졌다.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 독립투쟁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화가 됐고, 금단 영역이 되었다. 이 부분을 잘못 건드리거나 그 정신을 훼손하면 가차 없이 ‘친일’의 주홍글씨가 새겨졌다. 따라서 이 주제는 거의 종교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조선의 독립과 해방이 아니라 중화조국 옹호를 위서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해방공간에서 공산당과 좌익의 반란·난동을 막고, 그들 조직을 파괴하여 이 나라를 공산화 위기에서 견져낸 것은 친일세력들이었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좌파, 좌편향 세력들이 집요하게 친일파를 공격하는 것은 식민시대의 그들 행위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 후 대한민국 건립에서 그들의 지대한 공헌을 증오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드디어는 김일성 주도하의 적화통일이 완성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친일파의 유능함과 유용성은 이북도 마찬가지였다. 송복은 남한이 친일세력을 ‘이이제이’ 했다면 이북은 친일세력을 ‘이이호제(以夷護制)’했다고 말한다. 친일파라는 적을 기용해서 공산주의를 지키고 그들 체제를 보호한 것이다. 그것도 남쪽보다 더 노골적으로 더 높고 센 자리에 친일파를 갖다 앉혀놓고도 한편에선 “북한은 친일파를 완전히 소탕했다고”고 새빨간 거짓 선전을 해댔다.
이처럼 가슴 아픈 시대 상황을 지워버리고 친일파 청산을 못했다고 이승만과 박정희와 대한민국을 공격하는 것은 친일청산이 목적이 아니라 이승만과 박정희, 대한민국 격하운동이 그 진짜 목적이다. 이것이 문재인 대통령이 날마다 떠들어대고 있는 친일 프레임의 진면목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