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革春秋: 현대중국의 슬픈 역사] 5. “해방, 인민을 삼켜버린”

 

1. “장춘홀로코스트” 최후의 작전

1948 2 23일자 미국 타임지의 기사에 따르면, 만주 지역은 이미 99프로가 인민해방군에 점령된 상태다. 국민당군은 육로 보급이 끊긴 채로 장춘, 심양, 길림, 사평 등의 도시에 갇혀 있다. 붉은 공군(共軍) 바다에 푸르스름한 국군(國軍) 섬들 조각이 둥둥 있는 형국이다. 타임 특파원의 표현을 빌자면, 인민해방군에겐 이제 마지막 소탕(mop-up) 작전만이 남아 있다.  

석달 후, 1948 5 , 본격적으로 장춘 포위작전이 개시되자 채  달이 못 돼 성내에 갇힌 10만의 국민당 병력은 극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린다. 총사령관 장개석은 공중지원으로 식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지만·······활주로를 모두 팔로군에 빼앗긴 후엔 낙하산을 이용한 공중투하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1948년 장춘의 난민들
1948년 장춘의 난민들

포위된 장춘은 동북보위사령부 부사령관 정동국(鄭洞國, 1903-1991) 통치한다. 1930-40년대 항일전쟁 당시 운남, 버마 인도의 전장에서 맹위(猛威) 떨친 정동국은 장개석이 총애하는 백전노장의 무골(武骨)이다. 야전생활에 단련된 벌어진 그의 어깨 위에 10 병력의 지휘와 치안유지의 중책이 놓여 있다. 그는 우선 모든 식량의 중앙집권적 관리를 위해 전시식량관리위를 결성한다. 군량미 배급을 조건으로 장춘의 소요세력을 징집해 군사조직에 편성하지만, 근본적으로 식량부족을 극복할 없다.

8 말부터 공군(共軍) 무법지대 “치아즈”에 억류된 난민들을 제한적으로 수용한다. 무엇보다 총기나 군수품을 가진 난민에 우선권을 줌으로써 국군의 탈영자를 유인한다. 결과 포위 4개월 되던 9 중순이면, 국군 중에서 1 3 7 명의 장교 사병들이 철조망 너머 적진으로 투항한다. 투항자 쯤은 하부의 잡군들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7(3,700) 60(3,800) 정규병력이다.   

60군은 특히 버마 접경의 운남성 출신들로 이역만리 타향에 끌려와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엔도 선생의 회고록에 따르면, 일곱 어린 일본인 소녀의 눈에도 60 병사들은 7 병사들에 비해 초라하고 피폐한 몰골이었다. 포위가 장기화되면서 60군과 7 사이에선 점점 내분이 일어나고, 결국 60군과 7 사이에선 기관총까지 동원된 싸움이 일어난다. 이런 상황을 꿰뚫어보던 공군(共軍) 투항한 60군의 병사들로 하여금 운남성 언어로 동료의 투항을 독려케 하는 심리전을 전개한다. 굶주리다 야생초를 뜯어먹고 살던 60 병사들은 9 본격적으로 반란 모의를 시작하는데·······.    

 

전시 작전 회의 중의 장개석 (구글 이미지)

10 , 북평(北平=북경) 국민당군 본부에서 장개석은 만주의 전장(戰場)지도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장춘과 심양이 포위된 상태에서 심양 아래 200 킬로 남쪽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 요녕성의 금주(錦州) 공군(共軍) 점령되기 직전이다. 금주가 함락된 장춘까지 무너지면, 더는 승산이 없어 보인다. 장춘의 병력이 포위를 뚫고 심양 쪽으로 옮겨와야만 실낱같은 재기의 가능성이라도 읽힌다. 고심 끝에 장개석은 장춘의 국군에게 포위 돌파 명령을 내린다. 10 3 정동국은 장개석의 명령을 받들어 공군(共軍) 병력과 수차례 교전을 벌이지만, 객관적 전력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다. 국군지도부는 사기를 잃고 물러선다.

1992 발표된 정동국의 회고록에 의하면, 10 10 점심 무렵 청명한 장춘 상공으로 비행기 대가 날아오더니 공문상자(公函)를 투하하고 사라진다. 상자 속엔 장개석 총통의 친필 명령서가 담겨 있다. “공군(共軍) 금주를 집중공격하고 있는데 더는 물자를 공수할 없으니 한시바삐 적의 포위를 뚫고 사평가(四平街) 지나 심양 방면으로 행군해 오면 비행기 엄호를 제공하겠다”는 내용이다.     

금주 최후의 일격 (구글 이미지)

결국 10 15 34 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금주는 공군(共軍)에 함락된다. 장개석은 부리나케 비행기를 타고 심양으로 날아가지만, 심양 역시 붕괴 직전까지 내몰려 있다. 장개석은 장춘의 병력을 심양으로 집결시켜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려 한다. 그는 다시금 비행기로 적의 포위망을 뚫는 돌격전을 독촉하는 친필 명령서를 투하한다. 정동국은 총통의 명을 받들어 10 17 새벽 돌격작전의 초읽기에 들어가지만, 이미 공군(共軍) 내통한 60군은 반란준비를 마친 상태다

10 17 국군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던 60군 공군(共軍) 병력이 철조망을 뜯고 성내로 진입하자 뒤로 물러선다. 정동국은 장춘 중앙은행 건물에서 고독하게 버티기에 들어간다. 공군(共軍) 집요하게 항일전쟁의 영웅 정동국을 회유한다. “장춘홀로코스트”의 모든 책임을 장개석에 떠넘기려는 계략이다. 황포군관학교 강사였던 주은래(周恩來, 1898-1976) 직접 황포 1 정동국을 설득하기 시작하고······.

꼬박 사흘을 버틴 정동국은 10 20 장개석에게 마지막 전보를 자결을 결심하지만, 부하들이 이미 총기의 탄약을 빼놓은 상태이다. 꼼짝없이 공군(共軍) 생포된다. 적어도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공군 지도부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자발적으로 투항을 결심한다. 결국 장춘은 함락되고, 정동국 직속의 8 국군 병력은 모두 공군(共軍)으 편입된다. 이로써 장춘포위전은 막을 내리지만·······.   

 

정동국, 1948년 10월, 공산당에 투항한 후 하얼빈에서 (정동국 회고록 발췌)

 

2. 인민해방군, 만주를 정복하고 북경을 접수하다

금주와 장춘이 넘어가자 만주 전역의 “해방”이 눈앞의 현실이 된다. 중공지도부는 흥분을 감출 없다. 당장 여세를 몰아 국군의 마지막 보루 심양으로 몰려간다. 국공내전 만주 지역의 최후 결전 이른바 “요심전역”이 시작되었다.  

당시 심양엔 중국 최대 화약고가 있다. 이미 10개월 , 임표는 기민하게 북경-심양 철도를 끊고, 도시 주변을 포위한다. 120만의 도시 심양에는 순식간에 280 피난민들이 몰려와서 무려 400만이 북적대고 있다. 장개석은 공수지원을 이어가지만 20 병력을 장시간 주둔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만주 내전의 삼대 격전지, 장춘(창춘), 심양(선양), 금주(진저우)

금주를 함락시킨 공군은 88 명의 국군 포로들을 압송해간다. 장개석은 9 명의 국군을 밖으로 급파해서 구조작전을 벌리는데, 임표의 함정에 걸려든 셈이다. 불과 일주일 매복했던 임표의 군대는 9만의 병력을 제압한다. 공군(共軍) 곧바로 여세를 몰아 성내로 진입한다. 죽고 죽이는 백병전 끝에 심양의 국군은 공군(共軍) 항복하고 만다. 금주는 10 15, 장춘은 10 23, 심양은 11 1, 이렇게 도시는 인민해방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중국공산당은 비로소 만주를 정복한 셈이다. 50만의 최정예 병력을 투입했던 장개석은 이제 회복불능의 타격을 입게 된다.

심양을 접수한 75 명의 공군 병력은 이제 장갑차와 중화기로 무장하고 있다. 파죽지세로 만주평원 지나 만리장성 너머로 남하한 공군은 곧이어 국군에게 북평(北平=북경) 천진을 내놔라 요구한다. 장춘포위전에서 이미 “위곤(圍困)작전”의 노하우를 축적한 공군은 1948 11 천진을 포위한 철도와 도로망을 끊어버린다. 이어서 국군을 압박해 북평에 몰아넣더니 바로 전기와 수도를 끊고 포위전에 돌입한다.

요심전역의 한 장면 (구글 이미지)

 

북평과 천진 지역의 국군 사령관은 항일전쟁 당시 전공을 세웠던 부작의(傅作義, 1895-1974) 장군이다. 북평의 많은 시민들은 부작의의 평화적 항복을 기대했으나 부작의는 돌연 결사항전을 맹세하고 전쟁준비에 돌입한다. 1948 12 27 타임지의 기사 “일방통행로(one-way street) 따르면, 부작의는 군대본부를 북평의 중심으로 옮긴 , 수천 명의 노역자를 동원해 참호를 파고 바리게이트를 친다. 이어서 수백 명의 군인들은 민가를 돌며 숙소를 징발한다. 공산당이 비행장을 모두 점령하자 부작의는 과거 외국 공사관이 모여 있던 도심의 폴로경기장을 활주로로 급조한다.

반대편의 임표는 북평 주변에 다시 견고한 포위망을 구축한다. 고립된 북평 시내에선 순식간에 식료품 가격이 두세 배로 뛰더니 시장에선 야채가 아예 사라지고 만다. 입소문으로 “장춘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전해들은 북평의 시민들은 당연히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다. 지금 밖에서 북평을 포위한 자는 장춘홀로코스트의 주동자 임표이기 때문이다

 

공산당에 항복해 북경을 이양하는 부작의 (http://www.chinaforeignrelations.net/node/553)

부작의는 결국 공산당원 친딸을 중간에 두고 공군(共軍)과의 비밀협상을 시작한다. 1949 1 22 부작의는 공군에 포위당한지 40 만에 항복문서에 서명한다. 감히 누구도 수도 북평까지 죽음의 도시로 만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리라. 세계가 지켜보는 중국의 수도에서 “장춘홀로코스트”를 재현할 없었기 때문이리라.  중공지도부는 북평과 천진을 접수한 후 대대적으로 "평화로운 해방"이라 선전했지만, 그 평화는 실은 장춘홀로코스트에서 숨져간 수십 만의 희생자와 맞바꾼 셈이었다.   

 

3. 전쟁의 파도는 인간을 삼키고

2 세계대전 당시 마닐라 전선에서 미육군 장교로 복무했던 세이모어 타핑(Seymour Topping, 1921-) 1946 전역한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어를 공부하며 비상임 특파원으로 일한다. 1946 11 스물다섯 살의 타핑은 미국 국무장관 조지 마샬(George Marshall) 이끄는 국·공 중재요원들의 틈에 끼어 섬서성의 연안(延安) 방문해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을 직접 취재한다. 1948 그는 뉴욕타임즈 외신 특파원 신분으로 바로 심양의 현장을 취재한다. 1972 닉슨의 중국 방문 직후 출판된 그의 회고록엔 요순전역의 참상을 고발하는 진귀한 기록이 담겨 있다.

1948 1 임표의 공군(共軍) 20만의 국군(國軍) 포위해서 심양에 고립시킨다. 미국 군사고문단은 심양을 버리고 200킬로 남쪽의 금주(錦洲) 병력과 결합하라 종용했으나 장개석은 심양을 포기하지 않는다. 시간을 벌게 임표는 성공적으로 도시 둘레 지름 100킬로 정도의 견고한 포위망을 친다. 주민과 난민을 합쳐 4백만의 인구가 갇혔는데, 주변 농지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고작 20 정도밖에 먹일 수가 없다.

“심양에 도착해서 보니 고통의 도시였다. 토치카가 들어선 거리 양옆으론 닫힌 상점들이 즐비했고, 황량하게 버려진 붉은 벽돌 공장들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국인 군사자문관 클레어 체널트(Claire Chennault) 장군의 민항 수송기가 군수물자와 일용품을 공급했지만, 태부족이다. 심양에선 이미 30만의 굶주린 시민들이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풀잎을 뜯어 먹고, 짐승여물을 씹으며 분뇨더미를 뒤져가며 연명하고 있다. 굶주린 난민 수천 명이 비타민 부족으로 눈이 먼다. 수많은 아이들의 얼굴이 괴저(壞疽) 허물어 내린다. 초췌한 사람들은 영양실조와 괴혈병으로 거리에서 픽픽 쓰러진다. 길옆의 시궁창엔 굶주려 죽은 깡마른 시신들이 쌓여 있는데, 어린 거지아이들과 여인네들은 행인들을 따라오며 도와 달라 울부짖는다.  

 

난민들의 모습 (https://www.pinterest.com.au/pin/322077810829455320/)

공군을 피해 도망친 난민들과 농민들은 모두 맨발로 군사도로를 따라 도망치지만, 도시를 벗어나면 비적들에 약탈당하고 만다. 날마다 비행기로 1 5백명의 사람들을 대피시키지만, 수십 돈의 () 내밀어도 비행기를 수는 없다. 공항에 몰려온 인파는 비행기를 앞에 두고 몸싸움에 휘말리고, 떠나는 사람은 쫄쫄 굶는다. 그런 상황에서도 국민당공군의 무스탕 전투기 P-51 수송기는 무익하게도 국군 장교들의 소지품과 귀금속을 실어 후방으로 나르고만 있을 뿐이다

장춘은 1948 5 말부터 10 말까지 다섯 달에 걸쳐 봉쇄되었다. 심양은 같은 1월부터 11 초까지 동안 봉쇄되었다. 심양은 도시로서 농지를 확보하고 있었고 많은 외부지원이 이어졌기에 장춘만큼 참혹한 피해는 없었던 듯하지만, 30 난민이 쫄쫄 굶다 스러져간 심양의 상황 역시 생지옥이었다.

 

4. 장춘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

장춘홀로코스트에서 가까스로 탈출한 수십만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948 7 28 타임지의 기사에 따르면, 매달 14만의 피난민이 장춘과 심양을 탈출해서 북경/천진 방향으로 1300 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에 오르고 있었다.

중국 동북지방에선 그렇게 3 만의 “굶주리고 병들고 절망에 빠진”(starving, diseased, despairing) 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대책 없이 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타임 특파원 프레더릭 그루인(Frederick Gruin) 분석에 의하면, 난민들은 거의 대부분 공산당을 피해 국민당 쪽으로 넘어간 사람들이었다. 공산당이 휘두르는 개혁의 망치질(hammer blows) 농촌 마을을 허물고 가족을 붕괴시켰기 때문이었다.

 

번신유행도(翻身遊行圖, 강연[姜燕]의 작품; 두빈, <<장춘아표전>> ). 농촌은 전시 식량, 자원 및 인력의 주요공급지였다. 공군(共軍)은 농촌을 장악한 후, 토지개혁을 진행했다. "몸을 뒤집다"는 의미의 "번신"은 미신타파, 문맹퇴치, 남녀차별 폐지 등 구시대의 악습을 물리치고 신세계를 건설하는 농민 의식개혁 캠페인의 핵심 구호였다. 공산당에 의한 농촌의 급격한 변화는 수많은 피난민을 양산했다.

목숨 걸고 철조망 너머 “해방구”로 탈출한 난민들 앞엔 여전히 험로만이 펼쳐졌다. 장춘에서 심양으로 이어지는 최단거리 3 킬로의 거리엔 이미 잃고 떠도는 난민들이 인해(人海) 이루고 있지만, 동서남북 어디로도 마땅히 그들이 곳은 없다. 장춘의 경계를 벗어나면 공산당, 국민당, 지방정부, 누구도 관여하지 않는 “삼불관(三不管)”의 지대였다.

지대에선 총칼로 무장한 마적 떼가 난민들을 급습해 강탈했다. 난민들은 몸속 깊숙이에 귀걸이나 목걸이를 꽁꽁 숨기지만, 만약 몸을 수색당하다 걸리기라도 하면 마적들은 금품을 빼앗고 즉석에서 사람들을 죽여 버렸다. 마적들은 난민들의 옷가지도 빼앗았기 때문에 더러운 헝겊더미 밑에 좋은 옷을 숨기거나 오줌에 절은 아기 옷들 사이에 숨기기도 했다.  

"삼불관"을 지나면 다시 공산당 지구로 들어서는데, 흙색 군복을 입은 10대의 공산당원들이 붉은 술이 달린 창을 들고 난민들을 검문한다. 그들은 해방구의 깨끗하고 정직한 해방군이라 노래를 부른다. 공산지구를 지난 난민은 5-6일을 걸어가 심양 외곽의 국민당 지대로 들어선다. 난민들은 다시 수색을 당하고 등록된 , 완행열차에 실려 철령(鐵嶺, 톄링)에서 심양을 거쳐 신민(新民)까지 120킬로의 거리를 이틀에 거쳐서 간다.

신민에선 국민당 지구가 끝이 나는데, 거기서부턴 다시 최악의 “삼불관, 악명 높은 유하구(柳河溝) 펼쳐진다. 이곳에선 검은 바지에 황색 윗도리를 입은 도적떼가 버드나무길 구렁 아래 숨었다가 권총을 빼들고 달려들어 금품을 빼앗는다.

다시 공산지구가 끝나는 대릉강(大陵江)까지 가면 마지막 관문이 놓인다. 위장한 공군(共軍) 수공(水攻) 막기 위해 반대편의 국군은 헤엄치는 사람들에 총격을 가한다. 때문에 폭격당한 철로다리를 건너야만 하는데, 목숨을 걸고 8 미터를 끊긴 다리 위를 아슬아슬 걸어가야만 한다. 꿍쳐둔 사람들은 짐꾼의 등위에 실려 다리를 건넌다. 짐꾼들은 새끼줄로 업힌 사람의 등을 치면서 “눈 뜨고 아래를 보라” 소리친다. 업힌 사람이 긴장을 늦추고 바싹 등에 붙어야만 안전하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반대편 강둑에 도달한 사람들은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장춘 난민들 (두빈, <<장춘아표전>>) 장춘 성내에 거주하던 난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인지대에 갇혀 굶어죽은 희생자 숫자는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침내 금주(錦州)까지 도착하면 국민당군은 난민을 피난열차에 실어 산해관(山海關) 난민수용소로 보낸다. 장춘을 떠난 꼬박 3주에 걸친 여로의 끝이다. 거기까지 도달한 일부 난민들만이 가까스로 목숨을 이어간 것이다.  

그루인 특파원은 헐벗고 굶주린 피난민의 몰골을 형언할 없어 당대(唐代, 617-907)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 시를 인용해 그 고통을 전한다.

끝도 없이 식구가 맨발로 걸어가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모두가 
누더기 차림에 흙빛 얼굴을 하고······.    
 

                     

송재윤 (맥매스터 대학 교수)         

 
<참고문헌>
 
New York Times Archives. http://www.nytimes.com/ref/membercenter/nytarchive.html
TIME Magazine Archive. http://content.time.com/time/magazine/archives/
Seymour Topping, Journey Between Two Chinas (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72)
Frank Dikötter, The Tragedy of Liberation: A History of the Chinese Revolution 1945-1957 (New York: Bloomsbury Press, 2013).
鄭洞國, <<鄭洞國回憶錄:我的戎馬生涯>> (團結出版社,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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