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쿠퍼 주연 영화 ‘하이 눈(High Noon)’
거짓만 난무하는 정치. 망언뿐인 언론, 권력의 발바닥만 핥는 법조계
망국을 지켜낼 강직한 케인 보안관은 단 한 명의 영웅 아닌, 국민 모두여야
‘거대한 변화의 날, 판결의 칼날이 떨어지는 날’
대한민국을 깨울 ‘위대한 정오’가 다가오고 있다.

김규나 객원 칼럼니스트
김규나 객원 칼럼니스트

프랭크 밀러는 정오 기차를 타고 와요.

내가 아는 건 다만 용감해야 한다는 것.

당당히 살인마와 맞서 싸우겠소.

그렇지 않으면 겁쟁이가 되어 무덤에 누워야 할 테니까.

- '하이 눈' ost '나를 버리지 마오.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 중에서.

보안관 임기를 무사히 마친 케인은 이제 막 결혼식을 끝내고 아내 에이미와 마을을 떠나려 한다. 그때 5년 전 체포하여 감옥에 보냈던 살인범 프랭크 밀러가 석방되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패거리들은 기차역에서 두목을 기다리며 벌써부터 마을에 공포를 확산시키는 중이다.

악당들이 복수의 총알을 난사할 시간은 앞으로 약 한 시간 뒤. 마을 사람들이 악당 손에 죽든 말든, 체포에 대한 앙갚음을 하겠다며 지구 끝까지 쫓아올지언정, 허니문을 포기하고 밀러와 맞서야 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케인은 지금 여기에서 악연을 매듭짓기로 결심한다. 눈앞의 위기를 간과했을 때 더 큰 위험이 닥쳐오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고, 그것이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는 길이며, 임기는 끝났지만 새 보안관이 오기 전까지 마을의 안전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52년 아카데미 4개 부문(남우주연상, 주제가상, 음악상, 편집상)을 수상했던 ‘하이 눈(High Noon)’, 젊은 시절 그레이스 켈리의 아름다운 모습도 눈을 뗄 수 없게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이 영화가 눈부시게 기억되는 이유는 게리 쿠퍼가 연기한 케인 보안관의 강직함이다.

결혼하자마자 과부로 만들 생각이냐며 에이미도 결투를 반대하지만, 피해의 당사자가 될 게 뻔한 마을 사람들조차 밀러와 맞서 싸우겠다는 케인을 만류한다. 오히려 귀찮은 일 만들지 말고 빨리 떠나라고 재촉한다. 살인범 밀러를 체포했던 케인만 없으면 복수도 없고 결투도 없이 마을은 평화롭고 자신들은 안전하리라 착각한 탓이다.

"아테네 시민들은 폭군을 몰아냈지만 몇 년 뒤 폭군은 군대를 끌고 돌아왔지. 시민은 성문을 열어줬고 대표들이 처형되는 걸 구경만 했다네."

군중의 그러한 어리석음을 핑계 대며 마을에서 제일 먼저 도망가는 것은 판사다. 밀러에게 사형을 언도했지만 감형이 거듭되어 겨우 5년 만에 돌아오는 살인범의 복수가 두려운 것이다. "당신은 판사잖아요." 케인이 말하자 당연하다는 듯 그가 답한다. "그래, 판사 노릇 오래했지. 그리고 앞으로 더 오래 하고 싶단 말일세."

케인을 시기하며 그의 자리를 호시탐탐 넘보던 직속 부하도 신임보안관 대신 자신을 추천, 임명해주면 같이 싸워주겠노라, 감투 거래를 요구한다. 전임 보안관 역시 “모두가 법과 질서에 대해 떠들지만 실은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탄식할 뿐, 목숨 내놓고 봉사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현실이나 영화나 시대불문, 입만 살아서 불의와 타협하는 욕심 많고 나약한 법조인, 경찰, 공직자들은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술집에도 사내들이 버글버글하지만 케인과 힘을 모아 마을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이는 없다. 교회에 모여 예배 중인 사람들도 겁 많고 비겁하긴 마찬가지다. 집에 없다고 거짓말을 하라며 아내의 치마폭 뒤로 숨는 사내가 있는가 하면, 돕겠다고 자청했던 친구도 협력자가 없다는 말에 자신만 죽을 수 없다며 뒤로 물러선다.

케인이 믿음직한 보안관이었고 그 덕에 지난 5년,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너무 청렴 정직하여 틈이 없는 케인을 마을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불법이 횡횡할 때 마을을 찾는 떠돌이도 많았고 흥청망청 장사도 잘 됐다며 악의 번성을 은근 기대하는 이도 있다. 그동안 누린 평화 덕분에 대낮에도 여자와 아이들이 마음 놓고 돌아다니지 못했던 시절의 어려움을 까맣게 잊어버린 탓이다.

그들에게 지금 당장 성가신 존재는 악당과 대항해서 분란을 만들겠다는 케인이다. 그들은 말한다. 살인범 밀러를 잡아넣은 것은 너이고, 밀러가 돌아오는 것은 너에게 복수하기 위한 것, 너만 죽으면 됐지 왜 우리까지 끌어 들이느냐고, 너만 사라지면 마을은 안전하고 자유로울 거라고, 숨죽여 복종하면 악당이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케인을 해치운 악당의 다음 희생자가 그들 자신이 되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온갖 거짓에 눈감으며 별별 음해에 부화뇌동하고 사기 탄핵을 방조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권력층의 치밀한 기획과 언론조작이 만들어낸 마녀 하나만 사라지면 오랜 세월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던 악이 싹 다 없어지고 새 세상이 온다고 믿은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청렴한 대통령을 온갖 누명 씌워 감옥에 처넣었고 그를 따랐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도 줄줄이 수감시켰다.

국가안보 전략상 행해졌던 소수의 댓글에는 중형을 때렸으면서도 드루킹 댓글조작에는 침묵하는 수많은 입들. 몸통 조사는 요구하지 않으면서 꼬리 자르기식 가벼운 형량조차 무효라 주장하는 저들은 개인 사찰이 목표가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성인 사이트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사기 탄핵이 통과되면 부당한 판결과 제재가 정치인에게만 한정되지 않으리라 우려했던 그대로, 국민의 자유와 개인의 사생활까지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민 다이어트를 위해 먹방 프로그램을 규제하겠다더니 이제는 방송에 나오는 걸 그룹의 화장법과 옷차림, 머리길이까지 통제하겠다며 장관이 엄포하는 현실이다. 개인의 노트북, 휴대폰까지 일일이 검사받게 될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무엇보다 5,18유공자의 명단과 실체에 대해 언급하면 모독이다, 명예훼손이다, 망언이다 하며 징계, 제명에 동의하는 언론과 정치권이니 국민들은 무서워서 말 한 마디도 조심스러운 시절이다. 이렇게 날이면 날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권력만행에 국민들은 멀미가 날 지경인데 국회는 여야구분 없이 국가몰락의 모든 책임과 원인을 대통령제 탓으로 돌리며 내각제 개헌을 획책하려는 주장만 목청 높여 외치고 있다.

어느 분야든 립 서비스뿐, 단호하고 일관되게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결단과 행동은 보이지 않는다. 겁쟁이란 묘비명을 세우고 무덤에 누울 자들만 즐비해 보이는데, 정작 무덤에 누워서도 그동안 뒤집어 쓴 감투 크기와 숫자만 자랑할 탐욕에 더 높고 더 큰 권력을 꿈꾸는 사람들. 이것이 정신 똑바로 박힌 국민들 눈에 비친 이 땅의 기득권, 권력자들의 추한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영화에서 악당을 태운 기차는 왜 하필 12시에 도착하는 것일까. 왜 제목마저 12시 정각을 뜻하는 하이 눈일까. 정오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짧아지는 자신의 그림자에 놀라 움츠러드는 반면, 악당이 탄 기차가 다가올수록 마을은 검게 드리운 악의 활기로 꿈틀거린다. 정오를 무사히 지나면 내 그림자가 다시 길어지라는 것을, 그러나 그까짓 그림자 역시 허깨비라는 것을 알고 있던 건 케인, 단 한 사람이었다.

케인은 혼자였지만 당당하고 용감하게 맞서 싸우고 끝내 악당 패거리들을 쓰러뜨린다. 그제야 쥐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던 거리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기어 나온다. 케인은 그들을 경멸하듯 보안관 배지를 미련 없이 집어던지고 유일한 협력자였고 지지자였던 아내와 함께 마을을 떠난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은 술을 마실 때마다 케인의 승리를 예견했다고 떠벌일 것이다. 케인의 옆에서 자신도 총을 쏘아 악당을 쓰러뜨렸다고 허풍을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오래 지속될까. 또 다른 악당이 나타난다면, 케인이 없는 마을을 그들은 지켜낼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는 건 오직 나, 자기 자신뿐이라는 사실, 그러한 절박한 깨달음은 언제나 가장 어둡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외로운 시간, 혼란의 소용돌이를 지나고서야 찾아온다.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올라 머리 위에서 내리비추는 시간, 내 존재가 의심스러워질 만큼 내 그림자가 작아지는 순간. 니체는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박성현 역)에서 그 순간을 ‘위대한 정오’라고 이름 붙였다.

위대한 정오는 다음날 새로운 아침으로 가는 길목,

깨달음의 태양은 위대한 정오에 걸려 있게 돼.

이제 그날, 거대한 변화의 날,

판결의 칼날이 떨어지는 날,

그때 많은 것이 밝혀져!

봐. 오고 있다. 가까이 왔다. 위대한 정오가 가까이 왔다.

떠올라라 떠올라라 위대한 정오여!

대한민국의 시계가 언제까지나 거꾸로 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새로운 세계 질서의 물결은 한반도의 시계까지 바르게 돌려놓을 것이다. 이 땅을 오래 뒤엎었던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태양이 높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이야말로 가장 두려운 순간이될 것이다. 시곗바늘이 째깍째깍, 정오를 향해 갈수록 한없이 작아져버리는 우리의 그림자. 마지막 힘을 다해 악과 마주해야 할 운명의 시간이다. 케인처럼 당당히 악과 싸워 미래의 문을 우리 손으로 열 것인가. 악에 무릎 꿇고 비겁한 겁쟁이란 이름만을 무덤에 남길 것인가. 위대한 선택의 순간, 당신의 ‘위대한 정오’가 다가오고 있다.

깨어나라, 개인이여! 일어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여!

TMTU. Trust Me. Trust You.

*‘TMTU. Trust Me. Trust You’는 김규나 작가가 ‘개인의 각성’을 위해 TMTU문화운동을 전개하며 ‘개인이여, 깨어나라!’는 의미를 담아 외치는 캐치프레이즈입니다.

* 김규나 객원 칼럼니스트(소설가, 소설 <트러스트미> <체리 레몬 칵테일>, 산문집 <대한민국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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