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의 현대사 추적] 박정희 집권 18년은 국가혁명의 길이었다
[김용삼의 현대사 추적] 박정희 집권 18년은 국가혁명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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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2.19 14:29:32
  • 최종수정 2019.02.2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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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각 나라가 국민소득 4,000달러에서 7,000달러 사이에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 혁명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즉, 참다운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하려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경제적·산업적 기반과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는 중상층의 형성, 그리고 국민들의 민주시민 의식이 필수적이란 뜻이다. 한국에서 로버트 달이 지적한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 혁명이 가능할 정도의 경제적·산업적 기반, 그리고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된 것은 전두환 정부 말기에서 노태우 정부 시절이다.


박정희 집권 18년의 의미
-박정희 재임 18년, 한국사에서 ‘예외의 시대’였다


일본의 한국 정치 전문가인 다나카 메이(田中明)는 1992년 출간한 그의 저서 『한국정치를 투시한다』에서 박정희 시대를 ‘예외의 시대’라고 명명했다.(다나카 메이(田中明) 저·윤학준 역, 『한국정치를 투시한다-한 일본 지식인이 본 한국』, 길안사, 1995, 10쪽).
 그 이유를 다나카 메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기 1270년 고려 무인정권의 몰락 이후부터 조선 500년 등 한민족 700년의 역사는 글 읽는 문과(文科)적 지식인을 가장 우대하고 부가가치 창출의 주역인 농민이 그 뒤를 잇고, 기술자와 상공인을 천시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급이념 및 지배구조로 일관해 왔다. 즉, 유교를 신봉하고, 글 읽는 선비(즉 먹물)들이 칼을 든 무인들을 찍어 누르고 통치하는, 지구상에서도 예의 중의 예외에 속하는 문민통치(文治) 시대였다는 것이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 이전까지는, 한국 사회에서 군인 따위의 ‘인종’이 권력을 장악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 500년에 이어 1948년 대한민국의 탄생, 그리고 제1·2공화국까지도 양반 지배계층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완벽한 문치의 나라였다.
이 와중에 발생한 박정희의 쿠데타와 18년 집권은 한국 정치사에서 고려 무인정권 이후 700년만의 대이변이었다. 박정희는 ‘독립된 국가’란 개념조차 생소했던 양반 중심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구조를 일거에 뒤엎고 공상농사(工商農士)의 가치관을 우선하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의 나라로 변모시켰다.
박정희의 18년 집권기간을 아우르는(광의로 해석하여 육사 출신인 전두환과 노태우 집권기까지를 군인정권의 범주에 넣는다면 총합 30년의) 군인통치 시기는 양반 중심의 문치에 익숙했던 한국인에게는 너무나 색다르고 어색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인통치(武治)의 시대였다.
이러한 무치 시스템은 한반도 역사에서 ‘예외 중의 예외’에 속했던 시기이므로 한국은 노태우의 퇴장 이후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기질에 알맞은 문치의 시대로 회귀할 것으로 다나카 메이는 예견했다. 역시 ‘예외’의 시대는 한국인의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근처에 세워진 박정희 동상.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근처에 세워진 박정희 동상.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연합뉴스 제공)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 가능성 예언한 스칼라피노

1960년 4·19 시민혁명으로 출범한 장면 정권은 리더십이 대단히 취약했다. 정권 출범 직후부터 민심 이반 현상이 뚜렷했고 거듭되는, 시위로 인해 무질서가 극에 달했다. 장면이 사회질서 유지에 어려움을 겪자 월터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정치적 리더십 측면에서 볼 때 장면은 적임자가 아니며 한국 정부는 개인보다는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책과 함께, 2012, 190~191쪽).

당시 한국에서 ‘젊고 유망한 지도자 집단이나 조직’은 군이 유일했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한국에서의 군사 쿠데타 가능성을 예견한 것이다. 1959년, 동아시아 문제 연구가인 미 버클리 대학의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는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외교정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콜론 보고서」(Colon Report)를 발표했다. 이 중 일부 내용이 당시 지식층에게 인기가 있던 <사상계> 잡지에 번역 소개되면서 한국의 학계와 지식층, 군부에 널리 알려졌다. 핵심 내용은 ‘피치 못할 과도적 정치체제 단계’, 즉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를 예견했다.
박정희 장군의 5·16 쿠데타는 거의 내놓고 일을 벌인, 절반 정도는 공개된 것이나 다름없는 ‘예고된 거사’였다. 장면 총리는 네 차례나 박정희 소장을 지도자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고도 정권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 2공화국 지도부는 국민들이 자신들에게 부여한 합법적인 정권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고 수녀원으로 도주(총리), 쿠데타에 협조(대통령), 양다리 걸치기(육군참모총장) 등 내부 분열로 자멸했다.
한국은 1인당 소득수준이 50달러 정도의 가난한 시기에,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물적 토대와 훈련받은 중산층이 존재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의회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 2공화국 시대에도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권위주의 사회라고 일컬어져 온 한국에 이질적인 민주주의가 도입됐을 때 사회 전체에 야기되는 삐걱거림이나 불협화음, 아픔을 어떻게 하면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을까, 즉 희생을 극력 줄이면서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에 대해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다나카 메이(田中明) 저·윤학준 역, 앞의 책, 76쪽).
 
자유민주선거만 되풀이된다고 해서 후진국 경제가 발전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자유민주정치를 위한 선거가 오랜 기간 되풀이되어 왔음에도 전통적인 경제가 근대화되지 않은 인도와 필리핀을 보면 그것은 명약관화했다. 바로 이것이 약 7개월 간 존속했던 제2공화국의 비극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불과 250여 명의 장교와 3,500여 명의 군인 등 소수 병력이 한강대교를 건너 수도 서울을 장악했을 때 시민들은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60만 대군의 나라에서 불과 3,500명의 병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다는 사실, 군부 내에서 조직적인 반혁명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일반 국민 거의 대부분이 쿠데타에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점은 군 지도부를 포함한 사회 전체가 새로운 혁명적 기운을 요청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말하자면 박정희 장군의 쿠데타는 ‘타는 목마름’에 시달리던 대지에 내린 단비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 분위기는 <사상계>의 발행인이었던 장준하가 5·16 쿠데타가 발생한 다음 달 발행된 <사상계> 잡지에 ‘5·16 혁명과 민족의 진로’라는 권두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장준하는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정의하며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평한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따라서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다.”
결국 4·19 혁명과 제2공화국은 시민들의 봉기를 통해 권위주의 정권을 붕괴시킬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경제발전이나 국민형성 등 다른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는 값비싼 교훈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김인섭, 『기적은 끝나지 않았다』, 영림카디널, 2016, 185~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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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 : 박정희가 한강을 건넌 까닭은?
-그가 민주주의 잘 하려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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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단이나 개인이 정권을 장악하려면 합법적인 정당을 구성해서 선거를 통해 승리하거나,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개혁을 꿈꾸던 군인 박정희는 정당 결성과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정권 창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남은 길은 무력을 통한 정권탈취였다.
군인이 무력을 동원하여 정당한 선거를 통해 선출된 합법정부를 무너뜨리고 헌정질서를 파괴하면 명백한 쿠데타이자 군사반란이 된다. 그렇다면 쿠데타와 혁명의 차이는 무엇인가.
군인들이 정권욕(혹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권력을 찬탈했다면 그것은 명백한 쿠데타가 된다. 그러나 초법적 수단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그 후 경제를 부흥시켜 국민을 절대 빈곤에서 해방시키고, 당시 남한보다 월등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던 북한을 추월하며, 국가 근대화에 성공한다면 그것은 쿠데타가 아니라 조국 근대화를 위한 혁명이 된다고 박정희는 보았다.
쿠데타와 혁명에 관한 박정희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이석제(박정희 시절 총무처장관·감사원장 역임)의 회고록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이다. 이 책에서 박정희는 자신의 혁명관을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우리는 정권이 탐나서 궐기하려는 게 야니야. 우리의 목표는 나라의 근본을 개혁하고 썩어빠진 병폐를 뜯어고치려고 일어서는 건데 혁명이면 어떻고 쿠데타면 어떤가. 그 동안의 정권이 해내지 못한 국가발전을 달성하면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내려줄 거야.”(이석제,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서적포, 1995, 65쪽).

“혁명거사를 성공시킨 다음엔 혁명주체들이 희생적으로 앞장서서 허리띠 졸라매고 뛸 각오들을 합시다. 우리는 국민들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국가건설에 나서기 위해 혁명을 하려는 거요.”(이석제, 앞의 책, 81쪽). 이석제는 박정희의 이 말을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발길로 걷어차서라도 예정된 목표까지 가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국민에게 세 끼 밥도 제대로 못 먹이는 지도자는 참다운 지도자가 아니오. 여러분들은 어떤 정책이나 법률을 입안할 때 반드시 국민에게 밥을 먹일 수 있는 방법론과 연관을 시켜서 발상을 해야 합니다.”(이석제, 앞의 책, 158쪽).

“인권, 민주 모두 다 좋은 말이오. 그러나 참다운 인권과 민주는 ‘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에서 나옵니다. 당장 배고파 죽어가는 국민들 앞에서 말장난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인권이나 민주는 경제가 해결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두고 보시오. 모든 결실은 나보다 오래 사는 세대에게 돌아갈 것입니다.”(이석제, 앞의 책, 171~172쪽).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박정희는 배고픔이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체험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 ‘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신성물이었다. 당시 한국의 배부른 양반 지배층과 지식인, 학생들이 ‘민주주의는 신(神)’이라고 떠받들 때 박정희의 신은 ‘밥’이었다. 이처럼 같은 시대에 살면서 서로 다른 신을 숭배한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었을 것이다. 

박정희의 국가 근대화 철학

1962년 1월 13일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의 첫 출발은 1962년 2월 3일 기공식을 거행한 울산 공업단지 건설이었다. 이날 박정희는 “4,000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인 부귀를 위하여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빈곤 타파, 곧 ‘밥’의 확보, 이것이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의 본질적인 세계관이자 가치관이었다. 그는 이런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국가의 질서와 근본 틀을 완전히 새로 짜는 혁명을 실천에 옮겼다.
이석제는 박정희에 대해 “즉흥적으로 혁명에 나선 사람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철저한 이론과 논리를 바탕으로 성숙된 자기 나름의 혁명철학을 가지고 거대한 물줄기를 잡아 나간 인물”이었다고 증언한다. 혁명 직전 박정희는 이석제와의 대화에서 국가 근대화의 철학을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박정희 : “국가를 지도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우선 두 가지 문제에 근본적인 대안을 가져야 됩니다. 우선 국민들 배고프지 않게 밥을 먹이고, 그 다음에 제 나라를 자기네 힘으로 지키는 것이 통치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대화의 길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오.”
이석제 : “각하, 국가의 근대화란 뭐를 어떻게 한다는 겁니까.”
박정희 : “이론상으로는 복잡하고 나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쉽게 해석하자면 농업사회를 뜯어고쳐서 공업화를 추진한다는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요. 우리나라 인구가 3천만이 넘는데 좁은 국토에서 농사를 지어 언제 국민들 배불리 밥 먹이겠소. 농토에 매달린 농민들을 공장으로 끌어내서 소득을 높여 주는 국가 시스템을 잘 연구해 봅시다.”
이석제 : “공장 지을 돈이나 기술은 어디서 조달합니까?”
박정희 : “장사를 해도 남보다 다른 아이디어와 열정이 있어야 하는 거요. 거기에다 친절하고 정직하면 더 좋겠지요. 가진 게 없다고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까, 우선 급한 대로 돈 있는 집에 가서 돈을 좀 빌려다가 장사를 해서 갚으면 될 게 아니오.”(이석제, 앞의 책, 75~76쪽).

여기서도 ‘밥’의 문제가 등장한다. 박정희는 혁명의 대의명분을 ‘국가 근대화’로 정의했다. 그의 사고(思考)는 배고픈 국민에게 세 끼 ‘밥’을 먹이고, 강대국의 눈치 보지 않고 자기주장대로 살 수 있는 나라, 즉 ‘부국강병의 조국건설’을 위해 전면 작동했다.

그가 민심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치가였다면…

군정연장도, 혁명군의 원대복귀도, 3선 개헌과 10월 유신을 통한 정권 연장과 국민 기본권의 제한도 어쩌면 그에게는 하찮은 관심사였는지도 모른다. 배고픈 국민에게 배불리 밥을 먹여야 하고, 안보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는 데 있어 민주주의적 절차와 과정을 따지는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사치스런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1971년 대선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와 격돌한 박정희가 이석제에게 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민주주의나 선거에 대한 박정희의 냉혹한 본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장관, 우리에게 선거란 어떤 의미가 있는 거요? 국민들이 2~3년간 피땀 흘려 열심히 일해서 조금 여유가 생기면 선거를 통해 다 탕진해 버리고, 국민들 마음까지 해이하게 만드니…. 우리에게 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시간인데 맨날 정쟁(政爭)으로 시간과 노력을 헛되게 버리는 게 안타깝구먼. 밥도 제대로 못 먹는 형편에 민주주의란 참으로 어려운 제도요. 여야는 선거에서 이기려고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못 쓰듯 돈을 낭비하면서 온 나라를 휘저어 놓으면 일은 언제 하고, 조국 근대화는 무슨 힘으로 한단 말이오.”(이석제, 앞의 책, 266쪽).

박정희는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의 표심에 의해 탄생된 지도자가 아니다. 그가 쿠데타에 성공하기 직전까지 키 작고 삐쩍 말라 광대뼈가 튀어나온, 선글라스를 낀 육군 소장을 기억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는 현대적 의미의 민주시민교육을 받은 인사도, 표를 얻기 위해 유권자에게 무릎 꿇고, 때만 되면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해야 하는 정치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힘과 무력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섬멸하는 교육에 길들여진 장군이자,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든 말든 망해 가는 나라를 도탄에서 구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혁명가였다. 오직 혁명가였기에 3선 개헌, 10월 유신 같이 초헌법적인 시스템을 통해 국가 총동원령을 통한 중화학공업의 추진 등 국가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국민의 뜻(民意)’을 최우선으로 섬기는 정치가였다면 거의 전 국민이 결사반대했던 일본과의 국교 수교를 민심을 거슬러 비상계엄령까지 선포하여 총칼로 시위를 진압해가며 추진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우방국이자 동맹국인 미국을 비롯하여 수많은 세계의 전문가와 석학(碩學), 국내의 정치가와 언론, 대학교수 등 지식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던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 중화학공업을 온갖 욕을 얻어먹어가며 밀어부친 것도 민의, 민심, 국민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행보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혁명적 발상이 아니면 절대로 불가능했던 국가 근대화를 그는 정치가적인 ‘통치’가 아니라, 혁명가적인 ‘건설’로 쟁취했다. 그렇게 얻은 성취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고루 나눠줌으로써 혁명의 대의를 성공시켰다. 그러나 그 대가로 박정희는 지금도 “민주주의를 파탄 낸 독재자”라고 모진 비판에 직면해 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은 “쌀밥에 고깃국,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사는 것”을 지상낙원으로 정의했다. 그는 북한 백성들에게 배불리 밥을 먹이고 등 따뜻하게 해주겠다고 수없이 약속했다. 박정희도 배고픈 국민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다고 선언했다. 누가 국민과의 약속을 지켰는지는 바보가 아니면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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承 : “한국에서 경제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 경제기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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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없어 헐벗은 민둥산, 할 일 없이 노는 청장년, 길거리를 떠도는 거지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오고 배고픔이 상식이었던 곳, 제대로 된 건물이나 교량 도로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나라….(최중경, 『청개구리 성공신화』 매일경제신문사, 2012, 11쪽).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절망적인 민생고” 이것이 5·16 직후의 보편적인 사회상이었다. 당시의 언론보도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해 얼굴이 붓거나 영양실조로 사망한 기사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1년 전인 1960년, 우리나라는 수출 3,283만 달러, 수입 3억 4,353만 달러였다. 수입의 절대다수는 국민의 의식주(衣食住)를 해결하기 위한 생필품과 관련된 것이었다. 수입대금 3억 4,353만 달러는 정부 보유 달러로 9,717만 달러, 공공원조(구호자금 포함) 자금으로 2억 4,636만 달러를 결제했다. 대한민국은 10 대 1의 절망적인 무역역조 국가, 매년 국가 살림의 71.7%를 미국 원조에 의존하는, 경제적으로는 파산한 나라였다(오원철,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한국형 경제건설(7)』, 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1999, 46~48쪽).
정부 보유 달러 9,717만 달러 중 6,260만 달러는 미군이 거의 전부인 유엔군의 한국 주둔으로 인한 군납·용역·전기료·철도료·통신·수도료 등의 수익이었으니 우리 경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세계개발은행(IBRD) 통계에 의하면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세계의 독립국가 125개국 중 101번째였다. 당시 우리의 1인당 소득은 우간다,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토고, 파키스탄과 엇비슷했다. 북한은 1961년 1인당 국민소득 320달러로 포르투갈, 브라질의 바로 위인 50위였다(조우석, 『박정희 한국의 탄생』, 살림, 2014, 285~286쪽).

박정희가 합법적인 민간정부를 전복하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1년 전인 1960년,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는 1960년에 한국에 대해 “한국에서 경제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최중경, 앞의 책, 15쪽에서 재인용)고 썼다. 또 박정희의 쿠데타 직후 ‘앞으로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예측한 미 CIA의 ‘남한 장기전망’이라는 특별보고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의 정치정세는 군부, 민간 부문이 격렬한 갈등과 분파주의에 휩쓸릴 것이다. 쿠데타에 의한 정권교체 가능성도 있다. 경제전망은 심각하지만 희망이 없지는 않다. 미국 원조를 잘 사용하면 경제성장률을 다소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 성과는 잘해봐야 지지부진할 것이다.”(조우석, 앞의 책, 269~270쪽).

5·16 군사 쿠데타 발생 두 달 후 일본 정부는 한국의 상황을 분석하여 두 달 후인 7월 27일 「한국경제에 대해서」라는 분석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자료에서 일본 정부는 한국이 다음과 같은 7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 경제성장과 자립을 이룩한다는 것은 절망적이라고 분석했다.
1)인구의 과잉, 2)자원의 부족, 3)공업의 미발달, 4)군비압력, 5)정치의 졸렬, 6)민족자본의 약체, 7)행정능력의 결여(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 동서문화사, 2010, 58쪽).

엘리트 장교들 미국 유학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 미 CIA, 그리고 일본 정부의 분석과는 정 반대로 한국에서 진정한 의미의 경제기적이 일어났다. 바로 여기에 박정희 혁명의 본질이 숨어 있다.
6·25 발발 당시 9만 5,000명 규모였던 한국군은 6·25 남침전쟁을 치르며 휴전 당시에는 49만 2,000명으로 증가했다. 이승만이 얻어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국군은 70만 대군으로 급팽창한다. 이 와중에 한국군 장교들은 미군들로부터 새로운 군사지식과 과학기술을 습득했으며, 병사들을 지휘하는 리더십 특별교육도 배웠다. 각종 군사학교를 통해 받은 전문교육으로 장교들은 국가경제에 유익한 프로젝트를 관리할 수 있는 경험을 축적했다.
또 엘리트 장교들의 훈련을 위해 고급 지휘관들을 선발하여 미국에 유학을 보냈다. 1950년부터 1957년까지 7,000여 명의 한국군 장교(육군 4,729명, 해군 920명, 해병대 189명, 공군 1,503명)들이 코누스(CONUS: Continental United States) 프로그램에 의해 미국의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그렉 브라진스키, 앞의 책, 142~169쪽 참조).
통계에 의하면 5·16 당시 군 장교단 약 6만 명 중 10% 정도가 미국 유학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은 외무부 공무원보다 높은 비율이었다. 1951년부터 1960년까지 군사 해외유학 인원은 1만 1,595명이었는데, 같은 기간 중 민간인 해외 유학 인원은 5,423명에 불과했다([표1] 참조).

자료출처 : 박진환,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경제 근대화와 새마을운동』, (사)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2005, 47쪽.
자료출처 : 박진환, 『박정희 대통령의 한국경제 근대화와 새마을운동』, (사)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2005, 47쪽.

군대란 기본적으로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적을 제압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최첨단 과학과 기술, 행정력, 지리학, 군수물자의 보급과 통신, 수많은 병력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병참능력,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의학 기술 등 당대의 최첨단 종합기술이 총동원된다. 군은 일종의 축소된 국가나 마찬가지다.
당시 한국 군부는 미국의 원조를 통해 장거리포, 고속함정, 초음속 제트 전투기와 같은 고도의 정밀무기를 운영 유지하는 과학기술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효율적으로 가동하기 위해 조직이나 운영 면에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 된 미국식 제도를 도입했다.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기술적, 과학적으로 가장 현대화되고 능률적인 근대화 집단은 군이었다. 군이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박정희는 혁명공약의 실천을 위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경제개발계획은 이승만 정부가 마련했던 ‘경제개발 3개년계획’이 그 시초다, 1960년 4월 15일, 이 계획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으나 4일후 터진 4·19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 계획은 장면 정부 시절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수정되었으며, 1962년부터 시행될 계획이었으나 5·16 쿠데타로 인해 추진되지 못했다.
 추진 과정에서 인문계통의 행정 관료들로는 계획 수립이 불가능하자 외부로부터 기술자들 대거 끌어 모았다. 당시 정래혁 상공부장관은 상공부 산하 4개의 국(局) 중 상역국을 제외한 3개의 국장에 이공계통 기술자 출신을 기용했다.

테크노크라트들 대거 등장

과장급도 상역국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공계 기술자 출신들을 스카우트하여 임명했다. 이러한 이공계통 기술자 출신 국장, 과장들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원동력이었다. 계획이 본격 추진되면서 상공부 업무가 급증하여 광공전 차관보(광업·공업·전기 담당), 상역차관보 두 자리가 신설됐다. 당시 상공부의 ‘국장급 이상’ 진용을 보면 차관보급은 두 명 전원, 국장급은 4명 중 3명이 기술 관료다.

 이들 중 박충훈 차관, 함인영 차관보, 최형섭 광무국장, 이태현 공업국장, 그리고 박승엽 과장과 화학과장인 오원철 등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던 해 12월 공군 기술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하여 함께 교육을 받은 동기생들이다. 공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미 공군식 행정을 몸에 익힌 이들이 정부에 참여하여 전문가로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따라서 이들의 사고체계 형성 과정에서 미국 공군식 교육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봐야 한다.
이처럼 기술지식을 바탕으로 정책을 다루는 고급 관료, 즉 한국형 테크노크라트들이 등장하면서 한국은 명분이나 체면을 중시하고 글 읽는 사람들이 통치하던 양반 문화, 문치 시스템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테크노크라트들이 박정희의 구미에 적합한 인물군이었으며, 박정희 자신도 테크노크라트로서, 이들을 진두에서 지휘했다.
성공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확고하고 안정적이며 비전 있는 리더십, 둘째, 잘 짜인 경제발전계획, 셋째, 경제발전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유능한 정부 관료집단, 넷째, 경제발전계획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의 확보다(최중경, 앞의 책, 14쪽).
지속적인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려면 정치 사회적인 안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 국내 자본은 물론 외국 자본이 안심하고 들어와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선진국에서는 정치 사회적 안정을 비롯한 모든 인프라와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지만 한국은 위에서 열거한 거의 모든 조건들, 즉 자본과 기술, 훈련된 인재, 축적된 경험, 행정력, 사회간접자본, 인프라, 리더십 등이 총체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이처럼 불리한 여건을 획기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박정희가 단 기간 내에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다음으로 꺼내든 비장의 카드는 ‘압축적인 국가건설’(short-cut nation-building)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국가가 민간부문과 시장을 통제하고 이끄는 지도받는 자본주의, 즉 계도자본주의(guided capitalism), 혹은 발전국가체제를 지향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하는 미국식 자유방임적 경제운영이 아니라,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유사하게 정부가 시장과 민간부문에 개입하여 통제하고 선도하는 경제운영방식이었다. 정부가 계획을 수립하고 한정된 자원을 전략적 부문에 우선적으로 투입함으로써 산출 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강력하고 능률적인 정부 구성

앨리스 암스덴은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과정을 ‘국가와 재벌이 주도한 후발 공업화’라는 개념으로 정립해 한국경제의 성공모델을 세계에 알린 석학이다. 암스덴 교수는 “한국이 채택했던 강력한 경제정책이 과연 민주적 정부 하에서도 가능했을지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후진국의 경우 강력한 중앙권력은 경제발전의 필요조건이며, 이것 없이는 공업화를 거의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앨리스 암스덴 지음·이근달 옮김, 『아시아의 다음 거인: 한국의 후발공업화』, 시사영어사, 1990, 20쪽).

1960~70년대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살펴보면 박정희의 개인적 리더십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박정희가 경제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강력한 중앙권력을 보유한 정부 형태는 미국의 의도와는 맞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은 하나의 국가나 다름없는 독립된 주(州)들이 모여서 연방을 구성한 국가 형태다. 따라서 모든 권한은 주정부가 가지며 연방정부는 가급적 그 권한을 축소하는 작은 정부, 약한 정부 형태로 되어 있다. 미국은 이처럼 3권 분립과 약한 정부 형태를 은연중에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나라에 이식하고자 했다. 만약 국가건설(nation building) 단계에 있는 한국이 미국식의 작은 정부, 약한 정부 형태를 취했다면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5·16 주체세력들의 슬로건은 “싸우면서 건설하자”였다. 이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박정희는 자신이 구상한 국가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 미국식의 ‘약한 정부’가 아니라 강력하고 능률적인 정부를 원했다. 이를 위해 박정희는 5·16 직후인 1961년 6월 10일에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켰고, 7월 21일에는 경제기획원을 창설했다. 
중앙정보부는 국가안보를 위한 정보수집기관이 아니라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국가의 거의 모든 부문을 통제하고 관여할 수 있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기구였다. 이석제는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같은 파워 집단을 만든 이유는 국가 근대화를 위한 역량을 총동원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즉 국가적 목표를 일사불란하게 달성하기 위해, 그리고 목표의 추진과정에 걸림돌이 되는 존재를 억누르기 위해 파워 집단의 권력 드라이브를 적절히 활용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파워 집단의 권한행사가 서툴거나 지도자의 의중을 잘못 읽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이석제, 앞의 책, 54~55쪽).
경제기획원은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예산을 편성하며 경제정책을 조정 통제하는 박정희의 경제 사령탑이었다. 경제정책에 대한 막강한 권한이나 영향력 면에서 경제기획원 같은 기구는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박정희는 고도로 중앙 집중화 된 두 기관을 통해 자신의 과업을 효과적으로 조정 통제하며 관리할 수 있게 됐다(김충남, 『대통령과 국가경영-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2, 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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轉 : 독자적인 발전전략
-국내외 어느 누구도 박정희 발전방식에 찬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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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이 일어났을 때는 휴전된 지 10년도 안 된 시기로서 남북은 생사를 건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경제력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간의 우열을 가리는 지표로 인식됐기 때문에 경제발전은 안보를 위해서도 시급한 문제였다. 박정희는 공산체제에 맞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는 핵심은 ‘밥’의 문제, 즉 경제라고 판단했다.
세계개발은행(IBRD) 통계에 의하면 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여 북한 지도자 김일성과 맞서게 됐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로 세계의 독립국가 125개국 중 101번째였다. 한국의 1인당 소득은 우간다, 방글라데시, 에티오피아, 토고, 파키스탄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반면에 북한은 1961년 1인당 국민소득 320달러로 포르투갈, 브라질의 바로 위인 50위로 북한이 4배 정도 많았다.
박정희는 북한보다 못 사는 나라를 북한보다 잘 사는 나라로 변모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밥’, 즉 경제 문제로 귀결시켰다. 정치마저 경제로 귀결시킨 이런 통치행위에 대해 학자들은 ‘정치의 경제화’, 혹은 ‘경제 제일주의’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정치의 경제화’ 면모는 박정희가 경제 전문가인 김정렴을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는 자리에서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야. 경제가 잘 되어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고 포실한 생활을 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발언하는 데서 그 적나라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 30년사』, 중앙일보사 1995, 172쪽).

당시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은 수입대체산업을 육성하고 착취적인 외국 자본의 유입을 막아 대외의존도를 낮춰서 독자적 경제를 구축한다는 후진국 발전 이념을 따르고 있었다(김영봉, 「경제개발과 성장」, 『한국현대사』, 세종연구원, 2013, 227쪽).
 박정희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대폭 수정하는 과정에서 수입대체산업 건설 노선을 포기하고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이것은 후진국 발전이론, 그리고 외국 문가들의 조언과는 정반대되는 행보였다. 그것은 수천 년 동안 쌀농사 위주의 농업으로 먹고 살아 온 한국을 수출하는 공업국으로 탈바꿈시키는 역사적인 도전이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선진국 대학에서는 ‘후진국 경제발전론’이라는 과목이 후진국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과목이었다. 후진국 경제발전론의 공통된 기조는 후진국들은 전통적인 농업국이기 때문에 농업부터 먼저 발전시켜 거기서 얻어지는 저축으로 공업화를 이룩하는 것이 합리적인 경제발전이 된다는 것이었다(박진환, 앞의 책, 50쪽).

1961년 11월,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루터 하지스 상무부 장관을 비롯한 미국 정부 관계자와 월터 로스토우 같은 경제개발 전문가들은 박정희에게 “한국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농민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며, 수공업과 같은 소규모 산업을 점차 활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파견됐던 미국의 경제 전문가들은 박정희가 수출산업 건설로 방향을 틀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비난하면서 “미국과 협조하여 계획을 수정하라”고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그렉 브라진스키, 앞의 책, 220~221쪽). 
우리나라는 농업에는 부적합한 나라였다. 산지가 거의 대부분이고 전 국토의 22% 정도만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었다. 약 200만 정보의 농토는 200만 가구의 농가에 의해 경작되어 농가 가구당 경지면적은 1정보에 불과했다. 게다가 인구밀도는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높았다. 한반도의 기상 여건 상 겨울이 춥고 길기 때문에 농토를 연중 이용하기도 불가능하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 30년사』, 중앙일보사, 1995, 173쪽).
 강수량은 벼농사를 짓기에 충분할 정도로 내리지만, 7~8월에 집중호우, 폭우 형식으로 집중돼 이 기간을 제외하고는 늘 가뭄에 시달렸다.
이처럼 척박한 상황에서 미국이 제안한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길을 통한 근대화’의 방법론을 수용하여 그 길로 갔다면 우리는 아직도 저급한 농업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미국의 압력을 물리치고 고집스럽게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으로 나갔다.
1964년 11월 30일, 연간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자 박정희는 이날을 ‘수출의 날’로 지정하고 수출 목표를 초과달성한 기업과 기업인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추진된 수출전략으로 인해 1965년부터는 섬유 봉제품이 수출 붐을 일으켰다. 이런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전략’으로 산업구조가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급격하게 이동하면서 한국은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수출지향형 공업화 전략으로 궤도 수정

수출 지향적 공업화 전략, 수출 목표 달성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학자들이나 관료, 업계에서 이구동성으로 “수출 목표액이 너무 많아 달성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박정희는 매년 40% 수출 신장 목표액을 강제적으로 설정하고 당근과 채찍을 들었다. 오원철의 회고에 의하면 1970년의 10억 달러 수출목표를 제시하자 학계나 국민이나 언론계 모두 이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고 명령조로 지시했다(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7)-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1999, 39~40쪽).
 그해 말 역사상 최초로 연간 수출 10억 달러를 돌파하자 박정희는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국가공휴일로 선포했고 1977년 말, 드디어 100억 달러 수출에 성공했다.
서독이 10억 달러 수출에서 100억 달러에 도달하는 데 11년, 일본은 16년이 걸린 데 비해 한국은 6년 만에 이를 달성했다. 그것도 북한의 지속적인 안보 위협과 세계 경제 침체라는 어려운 여건에서 이루어낸 값진 결실이었다.

                                 [표3] 한국경제의 도약을 나타내는 경제지표(1953~1979)


박정희는 1965년부터 매월 정기적으로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직접 주재 하에 수출진흥확대회의와 월간경제동향보고 회의를 운영했다. 월간경제동향보고는 물가와 국제수지, 개별 산업정책, 공기업 구조조정 등 포괄적인 국정과제를 논의하는 회의였다. 박정희가 서거할 때까지 15년 동안 매월 두 차례 대규모 회의를 빠짐없이 주재하며 수출전선의 선두에 서서 뛴 결과가 바로 ‘수출 대한민국’이란 선물이었다.
1961년부터 1972년 사이에 한국의 수출총액은 40배, 제조업 수출은 170배, 연평균 수출증가율 60%를 기록했다. 수출증대는 국내 경제와 산업에 1석10조의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수출이 늘면서 외화획득은 물론 일자리 창출, 품질 및 기술향상, 기업발전, 소득증대 등이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때문에 정부는 수출입국과 공업입국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수출지향적 공업화 전략’을 추구하게 된다.
이런 노력으로 산업구조가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급격하게 이동하면서 한국은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이 정도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더 큰 도약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본과 기술, 경험이 요구되었다. 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이웃 나라가 일본이었다.
박정희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일본과의 경제협력 없이 신속한 경제개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의 민심은 일본과 수교하면 한국은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전락하고 일본의 매판자본에 착취를 당해 또 다시 일본에 경제 종속이 될 것이라며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에 거의 적대적인 분위기였다.
결국 신속한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일본과의 수교가 절박했는데, 그것은 민심을 거스르는 길이었다. 박정희는 정권의 운명을 일본과의 수교에 걸었다. 정치인과 지식인,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불과 몇 개월 전 출범한 박정희 정권을 반민족·매판·친일정권으로 매도하며 대규모 시위로 맞섰고, 박정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한일 수교는 제2의 쿠데타
 
대중 정치인으로서 국민의 지지도나 인기에 연연했다면 박정희는 한일 수교라는 모험을 감행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정치가가 아니라 혁명가였다. 혁명가답게 그는 대중적 인기 대신 국가의 백년대계를 선택했다.
1964년 한국의 수출규모가 1억 달러를 처음으로 넘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일본으로부터의 무상지원 3억 달러, 공공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는 1964년 수출대금의 8년 치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월남 파병을 통해서도 한국은 엄청난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한국은 2개 전투사단(맹호, 백마부대)과 1개 해병여단(청룡부대), 그리고 지원부대(비둘기부대)의 대병력을 파병, 1973년 철수할 때까지 약 5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상주시켰다. 한국군 전투병력 증파에 대한 대가로 1965~70년 사이 미국은 모두 10억 달러 정도를 한국에 지원했으며, 한국군에 대한 최신 군사장비 지원을 위해 미국은 상당한 비용을 지출했다. 한국에 지원되는 파월 장병들의 해외 근무수당을 비롯한 각종 지원금은 경제개발을 위한 소중한 자금으로 활용됐다.
1963~73년 기간 중 한일관계 정상화와 베트남전 참여로 획득한 외화 총액은 한국 외화수입 총액의 3분의 1에서 절반에 이르는 규모였다. 일본이 6·25를 통해 경제부흥을 했듯이 베트남전은 한국경제의 도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충남, 앞의 책, 253쪽.
 베트남전 기간 중 한국이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은 100억 달러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다(그렉 브라진스키, 앞의 책, 237쪽).
 
베트남 파병은 우리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오랜 열등의식, 피지배의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자질에 새롭게 눈뜨고 자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원철은 우리 국군과 파월 노무자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 행해진 전국 규모의 대규모 해외연수였다고 지적한다(오원철, 앞의 책, 292쪽).

그러나 여당은 물론 야당과 비판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용병(傭兵)” 운운하며 박정희의 베트남전 파병을 거세게 비판한다. 박정희 정부의 집권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의 초대 총재와 당의장을 지냈던 정구영조차 베트남 파병을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강력 반대했다.
“월남 파병으로 우리 경제를 일으킬 수도 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나는 호지명의 월맹과 총칼을 맞대야 하는 더러운 전쟁에 나가 피를 팔아가며 돈을 벌기보다는 차라리 궁핍하지만 깨끗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이요.”(조우석, 앞의 책, 160쪽).

박정희가 그런 반대에 귀를 기울여 파병을 포기했다면, ‘월남 특수(特需)’라는 경제적 혜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의 조언대로 한국이 자립경제를 이룩하려면 고속도로가 반드시 필요하며, 고속도로가 뚫려야 한국의 근대화는 본격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1967년 4월 고속도로 건설, 철도 확충, 항만시설 건설 등을 추진하기 위한 사회간접자본 건설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국내외의 거센 반대 무릅쓰고…

국도 1호선의 포장이 완공된 것은 포장공사를 시작한 지 무려 25년만인 1971년 12월의 일이었다.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국도 1호선조차 포장이 제대로 안 되어 있던 상황에서 2년 5개월 만에 고속도로를 닦겠다고 나선 것은 어떻게 보면 황당한 일로 치부될 정도로 무모한 도전이자 일대 모험이었다.
박정희는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돌입했다. 당시 428㎞의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는 429억 원으로, 1969년 정부 예산의 13%를 차지하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여당과 정부 일각에서는 물론이고 야당과 대학교수, 언론이 “경부고속도로는 부자들만을 위한 길” “한국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는 지름길”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최고의 반대자는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하여 야당 국회의원들과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들이었다. 송복, 「5․16의 역사적 평가」, 『한국현대사』, 세종연구원, 2013, 213쪽.
 심지어 야당 인사들은 고속도로 건설을 방해하기 위해 건설용 중장비가 이동하는 도로를 막고 시위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 
마치 군사작전 하듯 공사를 진행한 결과 경부고속도로는 1970년 7월 7일, 불과 2년 5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전 구간이 완공됐다.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에서 제일 싼 건설비로, 가장 짧은 기간에 우리 기술진으로 완성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공사비는 ㎞당 1억 원으로, IBRD는 한 보고서에서 왕복 4차선을 기준으로 할 때 경부고속도로는 선진국 수준의 고속도로보다 5분의 1의 투자로 건설해 냈다고 지적한 바 있다(김정렴, 앞의 책, 242, 253쪽).

IBRD는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이 시기상조라면서 부정적 입장이었기 때문에 차관 제공을 거절했다. 때문에 경부고속도로는 IBRD의 차관 없이 순수한 우리 자본과 우리 기술로만 건설됐다. 한국에서 고속도로의 효용도가 대단히 높다는 점이 입증되자 IBRD는 호남고속도로(전주~순천 구간), 남해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새말~강릉 구간) 및 동해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등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차관을 제공했다(김정렴, 앞의 책, 253~254쪽).

박정희의 다음 승부수는 종합제철소 건설이었다. 1950년대 이래 미국 원조 관계자의 한결같은 입장은 한국과 같이 산업능력이 빈약한 나라에서는 일관(一貫) 제철소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 철강이 필요하면 일본에서 사다 쓰라는 것이 미국 전문가와 일본 기업인이나 정치가들의 주장이었다.
세계은행 총재였던 유진 블랙은 세계은행과 IMF 연차총회에서 “개발도상국에는 세 가지 신화가 있다. 첫째는 고속도로 건설, 둘째 종합제철소 건설, 셋째 국가원수 기념비 건립”이라면서 세계은행과 IMF에서는 이러한 사업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국제적인 평가가 이처럼 부정적 비관적인데 국내 여론이 잠잠할 리 없었다. 정치인, 언론인, 학자 등 많은 이들이 제철소 건설을 적극 반대했다. 이처럼 부정적 여론이 대세를 이룰 때 박정희는 “종합제철소 하나 없는 나라는 독립국가라고 할 수 없다”면서 제철소 건설을 강행했다. 돈이 없으니 한일협정에 따라 일본에서 제공될 예정인 청구권자금 중 무상 및 재정 차관의 51%인 2억 5,000만 달러를 종합제철소 건설에 투입했다. 나머지 자금 중 18%는 경부고속도로와 소양강댐 건설, 철도 시설 개량 등이 사용했다(김영봉, 「경제개발과 성장」, 『한국현대사』, 세종연구원, 2013, 227쪽).
일본에서 제공한 청구권 자금의 69%를 전 세계의 전문가와 국내의 지식인·학자·언론인·정치인들이 시기상조라고 극력 반대한 고속도로와 제철소 건설에 투입한 것을 보면 박정희가 어떤 유형의 지도자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1970년 4월 포항제철소 건설에 돌입하여 1973년 6월, 포항제철에서 쇳물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포항제철 성공을 위해 정부는 저리의 정책자금을 지원하고 해외로부터 기계설비 등을 들여올 때 관세를 면제해 주었다. 정부가 베푼 것은 103만 톤 규모의 첫 사업 추진 때의 지원이었고, 이후에는 이렇다 할 정부 지원이 없었다. 공장 건설 첫 해부터 엄청난 흑자를 기록해, 그 후의 확장사업은 자체 수입으로 충분히 가능했다(강경식, 앞의 책, 534~535쪽).

제철산업은 인구가 1억이 안 되는 후진국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 서구 선진국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이론이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절대 불가능하다던 제철산업을, 그것도 IMF, 세계은행, 미국, 일본의 전문가들을 비롯하여 국내 지식인과 학자, 언론인, 정치인들이 극력 반대하는 상황에서 성공시켰다. 그 결과 조선, 자동차, 전자 등 연관산업의 성공 기반을 다졌다.

거듭된 남침 도발

3선 개헌,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로 민의를 거슬러 정권을 연장하고 독재정치로 민주주의를 압살한 것이 박정희 최대의 실책으로 현재까지 극렬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복기해 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진다. 1960년대 중반, 미군과 한국군이 베트남 정글에 묶여 있는 틈을 이용하여 1965년 9월 3일,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에게 “월남의 베트콩식 무력해방을 남한에서 실시하라”는 강요를 했다.
김일성은 1970년대를 공산통일의 시기로 정하고 도발 강도를 높여가기 시작했다. 미국이 베트남에 발목이 잡혀 있어 남침을 해도 한반도에서 제2의 전선을 벌이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결과 1967년에는 445건의 북한 게릴라 침투사건이 일어났고, 1968년에는 무려 542건으로 늘었다(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7)-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1999, 320쪽).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 게릴라 31명의 청와대 기습을 위해 침투했고 이틀 후에는 미 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 호를 동해안에서 납치했다. 1968년 4월에는 미국 정찰기(EC-121)가 북한 공군기에 의해 격추되어 승무원 3명이 사망하고 1명은 포로가 됐다. 1968년 11월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북한의 무장 게릴라 100여 명이 침투하여 이들을 소탕하는 데 한 달 이상이 걸렸다.
1970년 6월 5일 서해 휴전선 부근에서 우리 어선단 보호임무를 수행하던 해군 방송선이 교전 끝에 침몰 직전 북한에 납치됐고, 6월 22일에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현충문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의 거듭된 대남 도발로 안보상황이 크게 위협받자 박정희는 1968년부터 1970년까지 3년간 국정지표를 ‘싸우면서 건설하는,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의 해’로 정하고 250만 명의 향토예비군 창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군사훈련 도입으로 맞섰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1969년 7월 29일 “어떤 나라의 국방과 경제도 미국 혼자만이 떠맡을 수는 없다. 세계 각국, 특히 아시아 및 중남미 국가들은 자국 국방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베트남전 반전(反戰) 분위기가 팽배하자 미국은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1970년 7월 닉슨 행정부는 한국과 사전 협의 없이 6만 2,000명의 주한미군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명을 철수시켰다. 1971년 2월 닉슨은 중국과의 수교를 발표했고, 그로부터 3개월 후 중공이 유엔 의석을 차지하고 타이완이 유엔에서 축출되었다.
1971년 12월 5일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고, 1972년 10월 17일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10월 유신은 지금도 국민들 기억 속에 국회 해산, 비상계엄령 선포 등 살벌한 공포통치 하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의 임기를 사실상 종신으로 연장하는 등 ‘독재의 표본’ ‘민주주의 장례식’ 등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10월 유신은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10월 유신은 제3의 쿠데타

닉슨 독트린 발표 직후인 1969년 9월 박정희는 김학렬 경제부총리에게 방위산업 육성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의해 1970년 6월 4대 핵공장 계획(주물선, 특수강, 조선소, 중기계종합공장 등 4개 공장을 새로 건설하는 프로젝트)이 수립됐다. 이 계획이 차관 도입선인 일본 측 반대에 부딪쳐 성과가 없자 박정희는 1971년 11월 10일 오원철을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고 중화학공업을 건설하여 방위산업을 해결하고 전 산업의 수출화라는 과제를 동시에 해결기로 결정했다. 
당초 박정희의 계획에 의하면 1980년대 초 우리나라 수출 목표는 50억 달러였다. 그런데 50억 달러 수출로는 남북대치, 즉 경제대결에서 완전 승리를 이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 100억 달러 수출로 목표액을 두 배 늘렸다. ‘100억 달러 수출’이 달성되면 우리나라의 국력이 북한을 완전 압도하게 되고, 국민들의 생활이 북한 주민보다 월등히 윤택해진다. 또 방위산업을 비롯한 모든 중화학공업이 북한을 능가해서 북한이 6·25 전쟁과 같은 도발을 못하게 된다는 철학이었다(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동서문화사, 2010, 139쪽).
 즉 중화학공업 건설의 성공 여부로 남북문제가 결판이 나는 것이니, 박정희는 ‘제2의 한국전쟁’을 치른다는 각오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100억 달러 수출’ 목표가 설정됐고, 목표 달성을 위해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 즉 중화학공업화 전략을 추진하게 된다. 다른 나라는 공업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화학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수출도 하게 되었으나, 우리나라는 수출목표를 먼저 수립해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서는 선진국 수준의 철강공업, 비철금속공업, 기계공업, 전자공업 등을 일으켜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후진국이 중화학공업을 건설한 것은 세계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중화학공업을 건설하자면 국가 원수가 직접 나서서 상황파악과 분석을 하고,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즉각 수정·보완·지원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중단 없이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어야 한다. 즉, 후진국 경제개발에 있어서는 국가원수의 역할이 선진국에 비해 질과 강도를 달리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10년 이상의 세월과 100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설비와 고가의 장비가 투입되는 자본집약형 장치산업이 중화학공업이다. 경험과 능력, 자본력이 일천한 우리 기업들은 이를 감당할 만한 준비가 현저히 부족했다.
반면에 박정희의 대통령 임기는 3선 개헌으로 임기를 12년으로 늘렸음에도 불구하고 1975년 6월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1975년 6월이 되면 박정희는 퇴임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정면 돌파하지 않으면 중화학공업 건설은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박정희는 비상한 정치 수단을 동원했다. 그것이 10월 유신이었으니, 10월 유신은 5·16, 한일 수교에 이은 제3의 쿠데타인 셈이다.
10월 유신으로 임기에 구애받지 않게 된 박정희는 청와대에 ‘중화학공업화추진 기획단’을 설치하고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했다. 1973년 6월 박정희는 철강·비철금속·기계·조선·전자·석유화학 공업을 6대 전략 업종으로 선정했다. 6대 분야에 8년 간 88억 달러를 투입하여 1981년까지 전체 공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을 51%로 높이고, 1인당 소득 1,000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이 한창 추진되고 있을 때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상황은 해가 갈수록 위기감이 증폭됐다. 1973년 1월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조총련계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했고, 1974년 11월 15일에는 휴전선 남쪽 비무장지대에서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발견됐다. 1975년 3월 20일에는 중부전선에서 제2땅굴 발견, 이로부터 12일 후인 3월 30일에는 캄보디아의 론롤 수상 망명, 4월 30일에는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이 적화 통일됐다.

박정희, 10월 유신을 ‘혁명’으로 정의

이제 한국에서 북한의 남침이 벌어져도 미국이나 유엔이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는 국제정세가 전개되고 있었다. 1975년 북한은 각종 무기와 병력을 휴전선 부근으로 남진 배치했고, 남침 개시일을 북한 노동당 창당 30주년 기념일인 10월 10일로 정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정부의 과감한 지원정책에 힘입어 대기업들은 조선소, 석유화학 공장, 자동차 공장, 전기·전자 공장 등을 설립하면서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여 세계적인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제조업은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를 추구했다. 이처럼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재벌이라는 이름의 대기업 집단이 탄생하게 되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덕분에 1973~78년 기간 중 경제는 연평균 11%, 제조업은 연평균 16.6%라는 경이로운 성장률을 기록했다. 제조업에서 중화학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도 1972년의 40%에서 1979년 55%로 크게 높아졌다. 수출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1971년 13.7%에서 1979년 37.7%로 크게 높아졌다.
박정희는 거의 매일 국방 관계자와 대책회의를 가졌고, 방위산업 육성을 독려했다.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단 시일 내에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으려면 국가 총력전 체제가 불가피했다. 이를 위한 불가피한 시스템이 유신체제라는 것이 박정희의 논리였다.
박정희는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하면서 “10월 유신은 5·16과 그 기조를 같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스스로 10월 유신을 ‘혁명’으로 정의한 것이다. 오원철은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10월 유신은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일부를 희생시키는 조건으로 초강력 정부를 구성하여 단기간 내에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해 선택한 가시밭길이었다.”
김형아도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10월 유신은 반드시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10월 유신을 통해 임기에 구애받지 않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국가 총동원체제로 추진하지 않았다면 과연 중화학공업 건설이 가능했을지는 좀 더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과제다. 중화학공업화의 산 증인인 오원철은 중화학공업화와 10월 유신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박 대통령은 경제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에서는 실패했다고들 말한다. 심지어는 박 대통령 아래서 장관을 지냈던 이들조차 공개적으로 중화학공업과 유신개혁을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를 한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중화학공업화가 유신이고, 유신이 중화학공업화라는 것이 쓰라린 진실이라고….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을 무시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다.”(조우석, 앞의 책, 2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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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 : 박정희와 김일성의 대결
-남북한 국력 대결, 박정희의 완승으로 끝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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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박정희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여 북한 지도자 김일성과 맞섰을 때 남북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82달러 대 320달러로 북한이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러나 “철(鐵)은 곧 국가”라는 슬로건 아래 국가 재건과 총력안보라는 박정희의 ‘돌격적 근대화’ 노선이 본격 시동되면서 남북의 1인당 GNP는 1970년에 역전됐다. 통계청, 『남북한 경제사회상 비교』, 1995, 41·183쪽.
 
통계청이 2015년 12월 15일 발표한 『2015년 북한의 주요통계지표』에 의하면 북한의 명목 GNI(국민총소득·2014년 기준)는 34조 2360억 원으로 남한(1496조 6000억 원)의 44분의 1 수준, 1인당 GNI는 남한이 2968만 원, 북한은 139만 원에 불과해 21배 차이가 난다. 이밖에 다른 종목의 남북한 격차는 다음과 같다.
▲무역총액 :  북한 76억 달러로, 남한(1조982억 달러)의 144분의 1
▲시멘트 생산량 : 북한 667만 5,000톤으로, 남한(4,704만 8,000톤)의 7분의 1
▲발전설비용량 : 북한 725만 3,000kW로 남한(9,321만 6,000kW)의 13분의 1
▲쌀 생산량 : 북한 215만 6,000톤으로 남한(424만 1,000톤)의 절반 정도
▲도로 총연장 : 북한 2만 6164㎞로 남한(10만 5673㎞)의 4분의 1
▲선박 보유톤수 : 북한 71만 톤, 남한은 1392만 톤 
김일성은 1919년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이래 1932년 4월부터 항일 빨치산 투쟁을 하는 중간급 군사지도자로 활동하며 리더십을 형성했다. 그의 만주에서의 빨치산 활동은 약 7년으로 가혹한 환경 하에서도 투항하지 않았고, 토벌대에게 사살당하지도 않아 끝까지 살아남아 소련령으로 도주하여 소련군 대위가 됐다.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서부공립심상소학교에서 3년 간 교사 생활을 하다가 1939년 9월 만주로 갔다. 1940년 4월 신경 육군군관학교 입학, 1942년 3월 졸업과 일본 육사 편입, 1944년 일본 육사 졸업 후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만주 관동군에 배속되었다.
박명림은 만주는 훗날 남한과 북한의 근대화를 결정지은 ‘박정희 방식’과 ‘박정희 문제’ ‘김일성 방식’과 ‘김일성 문제’가 탄생된 배양처였다고 말한다. 만주는 박정희와 김일성의 권력의 자양분이었고, 공통의 역사적 기원이었다. 이 점에서 만주는 두 사람, 그리고 한국적 두 근대화의 모태의 하나라고 부를 수 있다(박명림, 「박정희와 김일성-한국적 근대회의 두 가지 길」, <역사비평>, 2008년 봄호(통권 82호), 역사비평사, 134쪽).

비록 한 사람은 비정규군으로서 게릴라 활동에 종사했고, 한 사람은 정식 사관학교 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한 차이는 있지만, 박정희와 김일성은 만주에서 군인의 길을 갔다. 군인으로서의 경험은 두 사람이 집권 시기 동안 남과 북에서 전통적 한국 사회의 특성과는 크게 다른,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철저한 상무(尙武)주의와 상무정신에 투철한 사회와 국가를 만들도록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서 거시적인 군사주의의 등장과 강화는 이들 군인 경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박명림은 지적한다(박명림, 앞의 자료, 135쪽).

한국 근대화에 김일성이 끼친 역할

김일성의 6·25 남침전쟁을 휴전으로 매듭 짖기 위해 미국은 휴전협정을 끝까지 반대하는 이승만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과 70만 대군의 건설을 약속했다. 이후 한국의 군대는 국가 예산의 50% 이상을 사용하고, 선진 과학기술·행정·조직 시스템의 선두주자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1961년 박정희 장군의 5·16 쿠데타였다.
결국 5·16의 거시 구조적 기원은 명백히 6·25였고, 그 6·25는 김일성이 일으켰으니, 김일성은 6·25 남침이라는 나비 효과로 5·16 쿠데타라는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고, 그 결과 박정희를 역사의 전면에 불러낸 셈이 됐다.
남북의 국력이 역전되는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남한 안보의 강화였다. 이것을 가능케 해 준 것이 김일성의 남침이었다. 그는 또 박정희가 좌익 혐의로 예편 당해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군부 복직 기회까지 만들어 주었으니 김일성은 사후 역전 및 자기 패배의 조건들을 스스로 미리 제공한 셈이다(박명림, 앞의 자료, 141쪽).
게다가 김일성의 6·25 남침전쟁은 항일 무장 독립운동을 수행한 그룹에 비해 하자를 안고 있었던 일본군 혹은 만주군 경력자들에게 반공 투쟁을 통해 ‘일본 협력’ 경력을 세척할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박명림, 앞의 자료, 139쪽). 
박정희와 김일성으로 상징되는 두 세력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공간에서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체험의 차이가 존재한다. 박정희가 만주로 건너가 신경군관학교와 만주국 초급장교로 재직할 때 만주국에서는 소련의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를 모방한 통제경제의 거대한 실험과 근대화를 위한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이 격렬하게 추진되었다.
바로 이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이 박정희의 개발독재형 ‘지도된 자본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박정희가 추진했던 병영국가적인 국력배양과 총력안보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에는 만주국의 유산이 고동치고 있었다(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책과 함께, 2013, 13쪽).

박정희는 일본이 주도한 「만주산업개발 5개년계획」에 의해 중공업 건설정책을 다이내믹하게 추진해 나가는 경제개발의 진면목을 흥미롭게 지켜보았고, 그것이 그의 영혼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한 공업화 전략과 만주국이 추진한 「산업개발 5개년계획」은 일란성 쌍둥이다. 계획 추진자가 군인이었다는 점, 학자나 관료를 손발처럼 활용해서 계획을 입안하고 실시했다는 점, 공업화 전략의 중심에 철강업을 두었던 점, 철강업의 기초 위에 중화학공업이 추진되었다는 점(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지음·임성모 옮김, 『만철(滿鐵),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산처럼, 2015, 6쪽) 등은 만주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박정희의 체험에서 우러난 전술전략이다.
반면에 북한의 지도부를 형성한 김일성과 빨치산 세력들은 토벌대에게 쫓겨 만주의 산골 궁벽한 지역으로 숨어 다니며 주민들을 약탈, 살상하고 등을 쳐서 먹고 살며 목숨을 부지하기에 바빴다. 식민지 시절, 만주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과 빨치산 일파는 만주국에서 추진되는 근대화의 격렬한 변화를 체험은커녕 구경조차 하지 못했고, ‘유럽으로 열린 창’이라 불린 만철을 타보기는커녕 그것을 때려 부수기 위해 골몰했다.

남북의 차이

결국 김일성의 빨치산 체험은 ‘항일 무장투쟁’이라는 선명한 구호로 환생되어 자존심을 살리고, 프로파간다의 도덕적 이니셔티브를 쥐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항일 무장투쟁의 선명성을 위해 2,300만 주민과 북한이라는 국가 전체가 항일 빨치산의 아지트가 되어, 1930년대나 다름없는 폐쇄 고립 생활을 전 주민에게 강요했다.
김일성은 1957년 12월 20일, 농촌의 협동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 옷을 입고 기와집에 사는 것이 사회주의 북조선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93년에도 동일한 발언을 했다. 그가 이 발언을 할 무렵,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으로 수많은 인민이 영양실조와 굶주림으로 죽어나갔다. 김일성이 평생에 걸쳐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일성은 만주국 시절 토벌대에게 쫓기고 굶주림, 학살, 납치, 살해의 어두운 추억을 국가 지도자가 되어서도 그대로 답습했고, 토벌대에게 포위되듯 폐쇄, 쇄국, 자급자족, 우리 식대로를 외치며 자신들의 나라를 지구촌에서 가장 실패한 국가로 고립시키는 데 완벽하게 성공했다.
반면에 박정희와 만주군 출신 리더 그룹은 만주국 시절 자신들의 체험을 통한 경제개발 시스템을 이 땅에 옮겨 와서 개방, 교류, 통상, 국제화, 중화학공업화를 건설하는 데 성공하여 국제사회의 모범국가로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창출해냈다.
아직도 북한은 김일성 체제의 파탄을 수습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고, 남한은 박정희 체제가 낳은 산업화·근대화의 단물을 빨며 살아가고 있다. 한편에선 박정희 체제의 저항적 테제로 탄생한 ‘민주화 세력’ 중 일부가 박정희의 친일 경력을 공격하며 김일성의 선명했던 항일 무장투쟁을 ‘민족’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흠모한다. 이것이 좌익 세력이 학계와 교육계, 문화계와 법조계를 장악한 한국 사회의 진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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終 : 혁명가와 정치가의 차이
-박정희의 쿠데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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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1965~1980년 사이에 평균 9.9% 성장했고 국민총생산은 27배, 1인당 소득은 19배, 수출은 275배 성장했다. 특이한 것은 이처럼 격렬한 성장 과정에서 선진국이나 국제 원조기구, 국제 금융기관 등의 정책제언이나 압력도 경우에 따라서는 과감히 사절했다는 점이다.
원조를 받아 나라살림을 꾸려나가는 국가가 선진국과 국제 원조기구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중경(전 지식경제부 장관)은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은 기적이기 이전에 하나의 수수께끼라고 말한다. 한국은 당시 서구의 지식인들이 주장하고 국제기구가 앞장서 설파한 경제발전 공식을 그대로 구사하지 않고, 자기 몸에 맞는 제도를 직접 만들어 썼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소개한다.
“한국은 수입대체전략 대신 수출드라이브 전략을, 일시적 전면개방과 규제철폐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 대신 점진적인 개방과 규제의 단계적 완화를 선택했다. 서구의 전문가들이 타당성이 없다고 한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설립, 중화학공업 진입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또 서구식 민주주의의 조기 도입보다는 개발독재(development dictatorship)를 통한 자원동원과 배분의 효율 극대화를 먼저 추구했다. 서구의 조언을 받아들였던 남미의 여러 나라들으니 외환위기가 반복되는 큰 홍역을 치렀고, 우리보다 좋은 조건에서 출발한 동남아 국가들도 더딘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거꾸로 한 한국이 오히려 앞서가고 있는 것이다.”(최중경, 『청개구리 성공신화』 매일경제신문사, 2012, 5~6쪽).

우리 식대로 해서 성공

한국의 경제발전은 결코 서구 제국의 온정어린 원조와 조언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서구 제국의 충고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는 중화학공업 건설 과정에서 오원철에게 “미국의 경제학자라는 자들이 후진국의 실정도 모르면서 이러쿵저러쿵하니 우리는 우리 식대로 해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동서문화사, 2010, 188쪽).

박정희가 국제 원조기구와 선진국 전문가들의 충고대로 움직였다면 오늘날의 한국 경제의 발전이 가능했을까? 국내의 정치가, 학자, 대학교수, 언론인들의 주장대로 한일 수교,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건설을 포기하고 농업을 통한 근대화의 길을 택했다면 한국은 지금도 아시아의 빈곤국 대열에서도 후미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이란 책을 쓴 미국 랜드 연구소의 윌리엄 오버홀트는 덩샤오핑(鄧小平)이 박정희 모델을 모방했다고 평가했다. 최근 중국이 놀라운 속도로 경제발전을 하고 있는 이유는 개방에 신중을 기하고, 새마을운동을 따라 하고, 국가 주도의 강력한 산업정책을 추진하는 등 한국의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접근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최중경, 앞의 책, 36~37쪽).
냉전이 전개되고 있는 분단국가에서 미흡한 국가안보체계와, 갈 길이 먼 경제적 자립이란 측면에서 볼 때 박정희의 집권 기간은 이승만 시대 이래 계속된 국가건설(nation building) 시기였다. 나는 이승만 시대 12년과 박정희 시대 18년을 합쳐 ‘기적의 30년’이라고 부른다. 이 기간 동안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공산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으며, 국가 근대화의 기틀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1962년 당시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55세였는데 1982년에 67세로 늘어났다. 경제개발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평균수명이 12세나 연장된 것은 이제 먹고 살만한 사회가 되었다는 뜻이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면 다른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언론인 최석채는 생전에 박정희에 대해 이런 평을 한 바 있다.
“민주정부를 무력으로 전복시키고 초법적인 개혁을 추진하는 혁명가에게 민주주의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혁명가를 정치가의 잣대로 재는 것은 무리다.”
박정희는 싱가포르의 지도자 리콴유(李光耀)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처럼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고 보았다.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시행하기 위해 무장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온 것이 아니다. 그는 빈곤퇴치와 사회개조, 조국 근대화, 즉 전 국민의 ‘밥’을 먹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을 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메이지유신과 박정희 쿠데타의 유사점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세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 제1단계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중심이 된 쿠데타군이 무력으로 막부를 쓰러뜨리고 300여 개의 번(藩)을 모두 없앤 후 중앙집권적인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단계다. 제2단계는 일본의 근대화를 위한 체제 개편 단계, 제3단계는 부국강병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박정희의 국가 근대화를 위한 대장정도 세 단계의 쿠데타로 점철되어 있다. 총과 대포를 동원해 합법정부를 뒤엎은 박정희였으니,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이 세웠던 목표를 달성해야만 역사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그는 자신에 세웠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5·16이라는 1차 쿠데타를 일으켜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메이지유신의 중앙집권적 통일정부 구성단계와 비슷). 이어 경제건설을 위해 한일 수교를 추진했는데, 야당과 대학교수, 학생, 시민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자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비상계엄령을 통한 제2의 쿠데타를 감행했다.(메이지유신의 근대화를 위한 체제 개편 단계와 비슷). 이어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한 방위산업과 전 산업의 수출산업화 완성으로 국가안보를 지켜내고 명실상부한 선발 중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10월 유신이라는 제3의 쿠데타까지 감행했다(메이지유신의 부국강병 단계와 비슷).
이처럼 박정희는 역사적 고비마다 세 차례의 다단계 쿠데타를 통해 한국을 후발 산업국가로 변모시켰다. 박정희와 메이지유신을 결부시키는 시각은 일본에서도 존재한다.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정치평론가인 후지와라 히로다쓰(藤原弘達)와 작가 겸 정치가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의 대담인 「일본의 현 정국은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같은 인물이 나오기를 바란다」에서 두 사람은 박정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내놓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주체적 인간상을 가진 정치 스타를 고른다면 전국(戰國)시대 때 일본을 통일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명치유신의 주역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명치유신 때의 주역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와 오쿠보인데 사이고와 닮은 사람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와 중국의 모택동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사이고와 오쿠보를 혼합한 인물이라고 보여진다.…(중략)…위험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정치라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지도자 혼자서 하는 것이라고 느껴진다.”(오원철,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한국형 경제건설(7)』, 한국형경제정책연구소, 1999, 504~505쪽).
박정희는 세 차례에 걸친 다단계 쿠데타를 통해 산업화의 기틀을 완성했고, 그 결과 한국은 비로소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일부 제한했고, 거친 국가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인권이 일부 희생되기도 했고, 정치가들의 정치적 자유를 제한하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의 인프라는 경제적으로는 산업화이고, 정치 사회적으로는 시민의식의 확립이다. 무엇보다 자유민주주의는 경제적으로 산업화하지 않으면 시스템이 가동되지 않는다(송복, 앞의 자료, 199쪽).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민주화란 산업화가 끝나야 가능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파라그 카나는 민주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과 국가는 애이브러햄 매슬로가 말한 욕구단계설에 따라 움직인다. 욕구단계설이란 인간에게 최우선은 굶주림과 목마름을 채우려는 생리욕구라는 얘기다. 그 다음이 보호, 안정을 원하는 안전 욕구이며, 마지막이 소속감, 애정, 자기존중, 인정을 원하는 존재욕구다.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는 마지막 단계인 존재욕구에 해당한다.”

누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는가?

학자 겸 정치평론가 파리드 자카리아는 한국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등장한 신생 민족국가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여 발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이 국가들이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리드 자카리아는 한국이 독재로부터 자유주의 독재(liberalizing autocracy. 형태는 독재 정권이지만, 국가발전, 시장 자율화 등 자유주의가 추구하는 정책을 대부분 추종했다는 뜻) 단계를 거쳐 민주주의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그렉 브라진스키 지음·나종남 옮김, 앞의 책, 19쪽). 
박정희는 세 차례에 걸친 쿠데타를 통해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상당 부분 유보시키는 독재를 감행함으로써 비난의 대상이 됐지만, 산업화와 중산층의 형성을 통한 시민의식 확립을 이룸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데 필요한 시스템을 갖추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우리나라는 1970년 외국으로부터의 원조가 종결되었는데도 정상적인 국가경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쌀 생산 4,000만 석을 돌파하여 쌀을 자급자족하는 데 성공한 것이 1977년이었다. 이 해에 박정희는 특별방송을 통해 “100% 순쌀밥을 먹어도 좋고 쌀 막걸리 제조도 허가한다”고 발표했다. 초근목피, 보릿고개로 상징되던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흰 쌀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오원철,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동서문화사, 2010, 364쪽).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각 나라가 국민소득 4,000달러에서 7,000달러 사이에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 혁명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즉, 참다운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행하려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경제적·산업적 기반과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는 중상층의 형성, 그리고 국민들의 민주시민 의식이 필수적이란 뜻이다.
한국에서 로버트 달이 지적한 정치적 고도화와 민주주의 혁명이 가능할 정도의 경제적·산업적 기반, 그리고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된 것은 전두환 정부 말기에서 노태우 정부 시절이다. 이 시기에 6·29선언을 통해 민주화로 이행한 모습을 보면 로버트 달의 지적은 설득력을 가진다.
박정희는 결코 민주주의를 잘 하기 위해 한강을 건넌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쿠데타를 통해 한국을 산업화하는 데 성공하여 역설적으로 민주화가 가능하게 되었으니, 박정희는 결국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기 위해 한강을 건넌 셈이 된다.
김광동은 박정희 시대야말로 민주주의의 성장의 토대를 만든 과정이었기 때문에 박정희를 한국 민주주의 발전의 기여자로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광동은 ‘민주화’ 세력이 단지 집권세력을 자유롭게 공격할 수 있는 경쟁적 선거가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공산주의를 주장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반민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재산을 빼앗고,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에 맞선 것이 사실은 그 시대의 민주주의이고, 민주화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김광동, 「선거민주주의의 한계와 박정희 시대의 의미」, 김용서 외 지음,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 전통과 현대, 2006, 175쪽).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박정희에게 민주주의를 했느니 안했느니, 독재자니 뭐니 따지는 것은 본질에서 한참 빗나간 적절치 않은 비판이다. 그의 본질은 정치가가 아니라 혁명가였다.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빼앗은 인간이 무엇을 두려워했겠는가.
CSP(Center for Systemic Peace)에 따르면, 1946년에서 2010년까지 전 세계에서 750회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학자들은 1923년 터키에서 일어난 케말 파샤의 쿠데타, 1952년 이집트의 나세르 쿠데타, 1961년 한국의 박정희 쿠데타를 세계에서 성공한 3대 쿠데타로 꼽는다. 그런데 케말 파샤와 나세르는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정을 건설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산업화에는 성공하지 못했다(송복, 「5․16의 역사적 평가」, 송복 외 지음, 『한국현대사』,  세종연구원, 2013, 205~206쪽).
5·16은 국가개조에 성공하고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차원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한 쿠데타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이 대단히 좋아하는 외국 학자이자,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책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의 좌파 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박정희 관(觀)을 소개한다. 브루스 커밍스는 박정희를 ‘20세기의 산업지휘관’이라고 명명하면서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평한다.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 (포드 자동차를 만든) 헨리 포드, 소련의 스탈린, 일본 소니의 회장 모리타 아키오 등 20세기 산업군주들을 도열시킨다면, 한국의 산업지휘관 역시 그 반열에 마땅히 속할 것이다.”

김용삼 펜앤드마이크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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