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를 ‘야수(野獸)'로 키우지 말고 편안히 잠들게 해야…이게 집권자의 책무”
“공포의 대상이었던 공수부대원이 거꾸로 시민군에게 겁먹고 있었던 것
당시 광주에서 시민들과 공수부대원 모두 이유가 있었고 이해가 됐다
내가 시민이었으면 총 들었을 것이고, 공수부대원이었으면 총 쐈을 것…
소위 균형감각을 갖고 바라보게 됐고 선악으로만 접근할 수 없었다”

조갑제씨는 “애국가 부르는 시민을 향해 공수부대가 무릎쏴 자세로 발사하는 영화 장면은 북한군 개입설보다 더 악의적인 왜곡”이라고 말했다.
조갑제씨는 “애국가 부르는 시민을 향해 공수부대가 무릎쏴 자세로 발사하는 영화 장면은 북한군 개입설보다 더 악의적인 왜곡”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조선일보 2월 18일자에 미개재된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의 글입니다.

자유한국당이 ‘5·18 프레임’에 갇혔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는 않았을 텐데, 공교롭게 이 시점에 ‘조갑제의 광주사태…40년 동안 다섯 가지 루머와 싸워 이긴 이야기’가 출간됐다.
조갑제(74)씨는 국제신문 기자 시절 병가(病暇)를 내고 광주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해직됐던 인물이다. 그 뒤 월간조선으로 옮겨 ‘5·18 광주’ 심층취재를 계속했다. 5·18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그는 발언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광주 5·18과 관련된 루머 중 ‘북한특수군 600명 개입설’은 2013년부터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해 종편 TV에서 탈북자가 출연해 북한군 개입설을 떠들자 광주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기자들의 검증 취재로 북한군 개입설은 사실이 아닌 걸로 정리됐지만 지하로 들어가 더 확산됐다. 지금은 마치 2013년의 데자뷔 같다. 이번에는 자유한국당이 그 낚시 미끼를 물었고, 5·18단체가 들고일어났다.”
-삼엄한 계엄하에서 북한 특수군 600명이 광주로 들어갔다는 비상식적인 주장에 보수 성향 사람들은 왜 솔깃했을까?
“북한군 개입설을 믿는 사람이 많이 늘어난 것은 ‘광주 사람들이 너무 한다’는 심리에서 비롯된 면도 있다. 국방부가 증거 없이 ‘광주사태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발표하고, 알츠하이머에 걸린 전두환을 광주 법원으로 출두하라는 것 등에 반발 심리가 작용했다고 본다. 더욱이 여당이 ‘5·18 진상규명특별법’을 몰아세우자 보수 쪽에서는 ‘북한군 개입설도 함께 조사하자’고 나온 것이다.”
-여야가 합의한 ‘5·18 진상규명특별법’의 조사 대상에 ‘북한군 개입설’이 들어 있었다. 야당 의원이 섣불리 공청회에서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고 단정해 이런 파동이 났는데.
“5ㆍ18 진상 규명은 할 만큼 다 했다. 태양이 동쪽에 뜨는 것을 재조사하겠다는 것과 같다. 김현희를 ‘가짜’로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또 조사하는 것과 같다. 이미 국가적 조사만 여섯 차례 있었다. 1980년 5·18 직후 계엄사 수사 발표, 1985년 국방부 재조사, 1988년 국회 광주 특위 청문회, 1995년 검찰 및 국방부 합동 조사, 뒤이어 5·18 특별법에 의한 재판이 있었다.”
-그 뒤 노무현 정권에서도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가 5ㆍ18을 조사했는데.
“당초 정치권에서는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의 국회 증언으로 5ㆍ18 문제를 마무리 짓겠다고 했다. 그게 안 지켜졌다. 1995년 검찰·국방부 합동 조사가 이뤄졌을 때 공소시효가 지나 ‘공소권 없음’으로 결론 났다. 하지만 그해 가을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을 터뜨려 김영삼 대통령이 코너에 몰리자 전두환·노태우를 처형할 수 있는 소급(遡及) 입법인 ‘5·18 특별법’으로 돌파구를 삼았다. 5ㆍ18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도돌이표가 계속되는 것이다.”
-이번 진상 규명 대상에 ‘시체 암매장’ 부분이 있는데, 이 또한 1995년에 이미 11개 장소에서 조사가 이뤄졌다. 근거 없는 걸로 밝혀진 내용이다.
“국민만 분열시키고 결코 합의된 결론을 내지 못할 것이다. 광주를 ‘야수(野獸)’로 키우지 말고 편안하게 잠들게 해야 한다. 이게 정치인 특히 집권자의 책무다.”
-당초 광주 전일빌딩에서 150개 이상의 총탄 흔적이 발견된 것이 계기가 됐다.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故) 조비오 신부에 대해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는 전두환 회고록 구절도 문제가 됐다. 이에 문 대통령이 2017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재조사 분위기를 만들었는데.
“그 지시를 받고 꾸려진 ‘국방부 5·18 특조위’가 ‘헬기 사격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확실한 증거는 없고 추리와 비약으로 결론내렸다. 헬기 조종사 수십 명은 ‘양민학살범’이 됐다. 국가기관에 의한 역사 조작, 내가 가장 분노하는 대목이다.”
-사진으로 보면 전일빌딩의 탄흔 밀집도는 아주 조밀한데?
“무장헬기에는 벌컨포가 장착돼 있다. 헬기에서 쏘면 벽이 날아가지 탄흔 자국이 그렇게 밀집해 박힐 수 없다. 작년 국방부 재조사에서 육군항공사령관 출신 위원은 국과수 감정 결과를 참조해 ‘헬기 공중사격 시 발생한 탄흔의 밀집도가 반경 1m가 안 되는 좁은 범위 안에서 수십 발의 탄흔이 생기도록 밀집사격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건물 안으로 진입하던 계엄군이 쏜 M16 탄흔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계엄군 지휘부가 헬기 사격 명령을 내린 것은 확인됐지 않나?
“광주천(川)을 따라 헬기 사격 명령이 떨어졌지만, 현장에 출동한 조종사가 ‘너무 큰 피해가 예상돼 쏠 수 없다. 서면(書面)으로 명령을 내려달라’고 항명했다. 이런 조종사가 의인(義人)이다.”
-비상계엄하에서 조종사가 사격 명령을 거부했다는 걸 믿을 수 있겠나?
“조종사들은 이미 1988년과 1989년 똑같은 조사를 받았다. 헬기 사격을 했다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해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조비오 신부 등의 증언은 이미 1995년 검찰·국방부 합동조사에서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 전문(轉聞)이었거나 헬기 성능이나 무장화기의 특성 등을 몰라서 한 주장’으로 평가됐다. 당시 11공수여단이 트럭을 타고 외곽으로 빠져나갈 때 매복하고 있던 광주보병학교 교도대가 이를 시민군으로 오인해 발사했다. 군인 11명이 숨졌다. 무장헬기가 출동했으나 같은 군인임을 알고 쏘지 않았다. 그런데 국방부 특조위는 ‘시민군이었으면 실제 발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식의 논리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1980년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현장 취재를 했는데?
“그걸로 광주 상황을 알았다고는 할 수 없고, 그 뒤로 관련자들을 쭉 취재했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것은 광주사태를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건 사실이고 저건 아니다’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갖게 됐다. 광주사태 직후 계엄사는 사망자를 200명쯤으로 발표했으나 세간에는 2000명 설이 퍼졌다. 1985년 국회에서 이게 쟁점이 됐다. 그해 월간조선 7월호에서 ‘사망자 수는 정부 발표대로 200명 선’이라는 현장 취재 기자들의 좌담기를 실었다. 광주에서 불매운동이 일어났지만 우리가 정확했다.” 
-광주 취재에서 무엇이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 있나?
“시민 집회에서는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일성은 오판 말라’는 목소리가 컸고,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목소리는 작았다. 간첩처럼 선동한다고 어떤 사람을 계엄군에 넘기는 장면도 봤다. 전남도청과 전남대병원에 놓여 있던 시신들의 머리에 멍이 많았다. 공수부대원의 진압봉에 맞아 그랬을 것이다, 계엄사에서 발표한 사망 원인에 타박상이 18명이었다. 맞아 죽은 것이다. 그게 광주사태의 도화선이었다고 본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문제였다는 건가?
“애초에 공수부대를 투입시킨 데서 문제가 있었다. 처음 투입된 7여단은 방패·방석모·최루탄 등 진압장비를 안 갖추고 있었다. 공수부대가 들어오면 다들 도망갈 줄 알았는데 학생들이 돌멩이를 던졌다. 진압하려면 겁주는 수밖에 없었다. 쫓아가서 붙들어 난타했다. 그런 장면을 본 시민들이 화가 난 거다. 거의 동물적인 분노로 폭발한 것이다.”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가 계엄군 쪽으로 차량을 돌진시켜 공수부대원이 치여 죽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발포가 있었는데.
“당시 장교가 위협을 느껴 엉겁결에 쏜 게 발포의 시작이었다. 사병들은 실탄을 휴대하지 않았다. 애초에 ‘발포 명령자’라는 게 없었다. 그날 저녁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자위권(自衛權) 보유 천명’ 담화가 나왔다.”
-여전히 전두환을 ‘5·18 발포 명령자’라고 믿고 있다. 전두환의 배후 조종으로 광주에서 무자비한 진압이 이뤄졌음을 끝까지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지휘체계 2원화’ 주장이 제기됐다. 정상적인 지휘 계통이 아닌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의 지휘 체계가 있었다는 것인데, 김영삼 정부 시절 전두환을 잡아넣기 위한 목적으로 수사했으나 법원에서 근거 없는 것으로 나왔다.”
-1995년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검찰 수사기록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사실상 군권을 장악해 군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직접 내가 진압작전을 수행하는 것에 관여해 간섭한 사실은 없다. 계엄사령관으로서 내가 병력 투입을 결정하고 작전 지시를 했다’라는 진술이 나온다.
“5·18로 전두환의 집권이 앞당겨졌지만, 광주 진압작전에 전두환이 관여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광주사태와 관련해 가장 큰 왜곡은 700만명이 본 영화 ‘화려한 휴가’(2007년)였다.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 공수부대가 무릎쏴 자세로 발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북한군 개입설보다 더 악의적인 왜곡이다.”
-5ㆍ18의 성격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민주화 열기가 끓어오를 때였고 다들 봄이 올 줄 알았다. 신군부의 출현은 이런 시대적 흐름의 반동(反動)으로 봤다. 정부 차원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평가가 내려졌다. 하지만 1988년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을 취재하면서 소위 기자로서 균형감각을 갖고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취재로 5ㆍ18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게 됐다는 건가?
“공수부대원은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만나보니 이들이 거꾸로 시민군에게 겁을 먹고 공포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 광주에서 시민들과 공수부대원 모두 이유가 있었고 이해가 됐다. 선악으로만 접근할 수 없었다. 심하게 말하면 내가 광주시민이었으면 총을 들었을 것이고, 내가 공수부대원이었으면 총을 쐈을 것 같았다.”

최보식 조선일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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