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영 칼럼] '직접민주주의'의 타락과 실패를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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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1.28 10:58:55
  • 최종수정 2018.01.28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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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영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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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주의’는 잘못된 번역

‘democracy’는 19세기 말(末) 일본을 통해 ‘민주주의’(民主主義)로 번역되어 들어 왔다. 하지만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democracy’를 ‘민주주의’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democracy’에는 ‘ism’이라는 접미어가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의’(主義)를 붙여 이념으로 만들었고 이것이 오해의 시작이 되었다.

다시 말해 ‘democracy’ 어디에도 ‘이념’(주의, ism)의 언어적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훗날 ‘democracy’에 이념적 요소가 추가된 부분도 있지만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정’ 또는 ‘인민 정체’라는 의미가 우선이고 이러한 정치체제로서의 의미가 사상(捨象)된 채로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만 강조되는 것은 ‘democracy’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의 시각에서 보아도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ideology)라는 개념 자체가 프랑스 혁명(the French Revolution) 직후의 ‘거대한 테러’(the Great Terror) 기간 중 만들어진 것이므로 아테네에서 만들어진 ‘democracy’를 ‘민주주의’라고 이념의 일종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다.

‘democracy’는 정치체제의 하나로서 ‘민주정’ 또는 ‘인민 정체’라는 번역이 맞다. ‘democracy’의 어원인 그리스어의 ‘demokratia’는 ‘demo/demos’(인민 또는 시민)와 ‘kratia’(통치 또는 정부)의 합성어로 언어 그대로의 의미로 보자면 ‘인민에 의한 통치’를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democracy’ 또는 ‘인민에 의한 통치’는 왕(王)이 통치하는 왕정(monarchy), 귀족(貴族)이 통치하는 귀족정(aristocracy), 또는 소수의 사람이나 집단이 통치하는 과두정(oligarchy)과 같은 통치체제의 일종일 뿐이었다.

통치체제의 하나였던 ‘democracy’를 ‘이념’으로 잘못 받아들인 것은 한국 정치에 커다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선택 가능한 통치체제의 하나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면 죽고 못 사는 것으로 인식하고 ‘민주주의’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한국 정치의 비극적 시작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반정권/반정부 투쟁의 이데올로기(ideology)로 자리 잡게 되었고 죽음을 불사하며 달성해야만 하는 목표가 되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과잉 집착을 가져온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가발전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때문에 생겨난 비용이 너무도 엄청나기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룬 이 시점에서 통치체제의 하나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20세기 말에 와서야 민주주의(민주정)가 세계적 조류가 되었지 그 이전 20세기 중반까지 인류는 왕정, 귀족정, 과두정 등 다양한 정치체제를 경험하며 통치체제를 변경해 왔다. 21세기 말까지도, 즉 인공지능(AI)이 발전을 거듭하여 인간의 사고와 결정을 대신하게 될 때에도 민주적(democratic) 결정 방식이나 민주주의 통치방식이 대세가 될지는 의문이다. 동일하게 지금의 민주주의(민주정)의 잣대로 과거의 왕정과 귀족정, 그리고 플라톤(Platon)이 주장하는 철인왕(哲人王, Philosopher King)이 다스리는 유토피아 ‘칼리폴리스’(Kallipolis)를 모두 잘못된 통치체제로 부인하는 것은 단견이다.

민주주의가 통치체제의 하나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을 한다고 감옥에 가고 또 죽기까지도 했지만 그것은 권위주의 정치체제로부터 인민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일종의 권력(勸力) 투쟁이었을 뿐이지 이념(理念) 투쟁으로 보기는 힘들다. 이념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liberalism), 사회주의(socialism), 또는 공산주의(communism)를 지향한다고 밝혔어야 했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의 합성어로 자유주의 실현이 그 본질이고 그 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결정 방식으로서 민주적 방식이 뒷받침 되는 이념이자 통치체제다.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socialism)의 실현이 본질이고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방식으로 민주적 선거라는 다수결 방식을 채택하는 주의이다. 인민민주주의(people’s democracy)를 주장하는 자들은 선거라는 다수결 방식에 의해 정권을 잡겠다는 사회민주주의 방식으로는 민중에 의한 통치체제의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하고 노동자(프로레타리아) 인민에 의한 노동당(더 진전되면 공산당)에 의한 일당(一黨) 독재(獨裁) 내지는 프로레타리아 독재(proletariat dictatorship)라는 방식만이 진정한 민주주의(real democracy)를 성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무리들이다. 이석기의 체제 전복에 의한 ‘민중의 나라’ 성취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2. 직접민주주의의 실천은 현대적 조건을 무시한 편견

자유민주주의이든, 사회민주주의이든, 인민민주주의든 모두 시민의 대표자(representatives)를 통한 통치로서 간접 통치의 방식을 따른다. 하지만 아테네 민주주의 앞에는 어떠한 수식어도 붙이지 않는다. 대신 인민(시민)이 직접 통치한다는 의미에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로 분류한다.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본질이 ‘직접’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이 ‘democracy’를 ‘민주정’으로 번역하자는 주장은 일부는 맞지만 ‘democracy’의 진정한 의미를 내포하는 번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democracy의 본래의 의미는 ‘민’(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民主)에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이 직접 통치하는 또는 직접 다스리는데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민’이 결정하고 직접 다스려야 아테네식의 직접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시민이 무작위 추첨에 의하여 정부의 행정을 담당하고, 재판도 담당하고, 중요한 국가의 정책을 직접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시민이 직접 ‘민회’에 참석하여 토론하고 결정했으며, 추첨과 윤번제에 의하여 일생에 한번 이상 행정과 재판관 등의 공직을 담당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강조하는 직접민주주의, 즉 국민이 “촛불집회처럼 직접 촛불을 들어 정치적 표시”를 하고 “국민은 간접민주주의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댓글을 통해 직접 제안하는 등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했을 때 이 주장은 촛불집회를 칭찬하는 수사이기도 하지만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조건(the conditions of direct democracy)들을 배제한 오판에 근거하고 있다.

아테네식의 직접민주주의 또는 미국 건국 시기의 타운(Town) 공동체 등의 직접민주주의 통치가 작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으로 흔히 두 가지를 든다. 첫 번 째 조건은 공동체가 작고 시민이 여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테네 직접민주주의는 여성과 노예를 시민으로 간주하지 않고 정치로부터 배제하여 정치참여의 인원을 줄였다. 때문에 아테네의 경우 민주주의에 참가하는 시민은 3만명 내외였으며 아크로폴리스에 모여 토론할 수 있을 정도로 공동체가 크지 않았다. 생산은 노예가 맡았고 가사 일은 여성이 담당하는 등 성인 남성에게 정치에 참여할 시간적 여유로움까지 주었다. 그리하여 20세 이상의 자유인 남성으로 구성된 시민(free male citizen)은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들을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민회’라는 집회에 참여하고 하루 종일 논의해야만 했다. ‘바보’를 지칭하는 영어의 ‘idiot’은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민주주의 정치(politics, 폴리스의 일)에도 참여하지 않는 이기적 시민을 지칭하는 그리스어에서 왔다.

하지만 고대와 달리 현대인들은 생업과 가사, 그리고 여가생활에 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되었다. 또한 단순했던 고대 사회와는 달리 현대 사회는 너무도 복잡하기 때문에 전문가가 아닌 이상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지을 수 있는 문제들을 정확히 판단하고 결정할 지식이 부족한 현실이 되었다. 예를 들어 ‘탈원전 결정’, ‘부동산 대책’, ‘미세먼지 대응’, 또는 ‘4차 산업에 대한 대응’과 같은 장기적 정책 과제를 일반 시민이 한나절이나 몇일 모여 논의한다고 또는 서울시가 광화문 광장에서 개최했던 “미세먼지 시민원탁토론회”와 같은 시민 모임에서 정확한 진단과 대책이 나올 수는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시행 가능했던 직접민주주의의 조건들이 복잡한 현대 사회에는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두 번째 조건은 ‘이세고리아’(isegoria)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세고리아’는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의 핵심으로 공적인 자리나 민회와 같은 모임에서의 ‘발언의 평등’을 의미한다. 이는 동료 시민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며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말한다. 따라서 촛불집회가 직접민주적인 ‘정치적 표시’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댓글이 ‘(국민) 직접 제안’이 되기 위해서는 촛불집회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이세고리아’라는 ‘발언의 평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청와대 게시판에 올리는 국민청원 댓글이 순수하게 자발적인 것인지 아니면 몰이식 집단 동원으로 이루어진 것인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세고리아’는 공동체의 중요한 결정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치적 책임을 의미하는데 2016년 말 촛불집회를 직접민주주의의 표상라고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는 촛불집회에서의 구호와 발언자와 발언의 내용이 자유롭게 모든 참가자들에게 개방된 것이 아니라 주최 측에 의해 선택되고 기획되었다는 측면 때문이다. 물론 2016년의 촛불집회에서는 과거의 촛불집회와 달리 ‘2분 자유발언’이 허용되었지만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기회로서 충분한 발언 시간과 내용이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촛불집회는 정치적으로 국민의 불만 표시이지 그것을 직접민주주의의 실천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분히 수사적 표현이다.

3. 다수는 항상 위대하다? - 역사는 다르다

신문과 방송은 지난 2016년 말의 촛불집회의 의미를 ‘국민’과 ‘다수’에서 찾고 있다. 이는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헌법 제1조 제2항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문구를 크게 외쳤음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헌법 제1조 제2항은 국가 공동체가 국민에 선행(先行)하는 존재가 아니라 국민적 동의(同意)라는 사회계약론적 정당성에 기초한 것이라는 선언적 표현일 뿐이지 사실적 표현은 아님을 간과하고 있다. 국가와 정부는 법률에 의해 투표 행위라는 국민적 주권 행사로 뽑힌 대표자에 의해 통치되는 것이고, 그 주권 행사는 투표로만 가능한 것이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외침 그 자체가 법적 권위를 가진 주권적 행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광장의 외침이 크고 광장에 몇 십만 명이 모였으니 그것이 곧 ‘국민의 명령’이 되고 또 법 위에 군림하는 최종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광장의 모임이나 외침을 ‘국민의 (주권적) 명령’이니 또는 국회나 법 위의 권위를 가진 것으로 묘사한 방송과 언론, 그리고 일부 정치인들은 대의민주주의를 오독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타락을 가져왔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광장에 모인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주인이라면, 또 그것을 ‘민주’로 해석한다면 대의민주주의 기관인 정부도 국회도 헌재도 법원도 필요 없고, 오직 광장과 광장의 결정만이 존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언론에 보도된 헌법재판소가 간행한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한민국의 변화』라는 책의 내용은 매우 당혹스럽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 “촛불집회의 헌법적 완결체”였다는 해석을 내림으로써 탄핵심판이 촛불집회의 요구에 따른 여론재판이었음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헌법재판소가 헌법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조항을 부인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과 같다. 헌법재판소가 헌법을 부인하는 방식으로 판결을 했다면 헌재는 존재의 이유(raison d'etre)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 된다. 이는 ‘민주’와 ‘민주주의’를 헌법 위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즉 민주주의의 과잉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런데 왕사오캉은 ‘민주’(民主)라는 단어에 대해 『민주사강』에서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과거 중국에서 ‘민주’는 ‘민’(民)의 주인으로 ‘왕’(王)이나 ‘황제’(皇帝)를 지칭 하던가 또는 ‘관료’(官僚)를 의미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서경(書經)』 <다방(多方)>편의 “天惟時求民主, 乃大降顯休命於成湯”(하늘이 백성의 주인(民主)을 찾으시다가 이내 탕임금에게 분명하고 위대한 명을 크게 내리셨다.)와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종리매전(鐘離昧傳)>의 “仆爲民主, 當以法率下”(나는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民主)로서, 마땅히 법률로써 아랫사람들을 이끌어갈 것이다.)를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그렇다면 모순적이게도 중국에서 하는 인민민주주의란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산당이 주인인 독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촛불집회의 진짜 주인은 누구일까? 촛불집회의 결과로 정치적 이득을 얻은 세력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촛불 민주주의에서 주장하는 ‘다수’ 또는 다수결에 의한 민주주의라도 그것이 투표로 귀결되어 법적 권위를 가지지 않지 않는 한 민주주의의 실패를 초래할 수 있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언도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시민법정 500인에 의한 것이었고, 성경(聖經)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사형 언도를 회피하고자 했던 빌라도는 ‘다수 대중의 이름으로’ 예수에게 사형을 언도했으며, 히틀러의 나치당은 당시 최고의 민주주의를 보장했던 바이마르 헌법의 모순과 중산층의 배신 위에서 집권했다. 따라서 광화문 광장의 촛불을 든 시민 대중은 후대에 다수에 의한 민주주의의 실패라는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자신들이 히틀러(Hitler)의 독일, 페론(Peron)의 아르헨티나, 차베스(Hugo Chavez)의 베네수엘라의 광장에 나타난 ‘동원된 군중’과는 다른 책임 있는 시민이었음을 진실 되게 보여주어야 한다. 계속 개방적이고 깨어 있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려되는 것은 역사가 보여주는 다수에 의한 직접민주주의 과잉의 결과적 교훈이다. 기원전 4세기 플라톤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스스로 파멸한다”고 비판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언도한 것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에 의한 시민 법정이었고 그 억울함은 직접민주주의의 과잉과 타락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민주주의의 과잉과 타락이란 결국 “폭도들에 의한 통치”(mobocracy)로의 귀결을 의미하며 이는 적절하게 교육받지 못한 대중들이 내리는 당연한 결과였다. 이어서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다수 빈민(the poor)에 의한 민주주의 정치, 즉 민주주의의 중우(衆愚)적 타락을 ‘폭민’(暴民)에 의한 통치, 즉 ‘오클로크라시’(ochlocracy) 또는 ‘mob rule’이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직접민주주의의 과잉은 아테네 공동체 내의 계급 집단 간의 분열과 반목을 초래했고 결국 국력 손실을 가져와 아테네는 스파르타(Sparta) 연합군에 패퇴하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이후 인류의 역사는 약 2000년 동안 다시 직접민주주의를 논의하거나 실험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영국(England)에서 의회(Parliament)가 왕의 권력을 빼앗아 의회민주주의(parliamentary democracy)라는 대의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의 전형을 탄생시켰다.

일부 학자들이 대의민주주의의 대표성을 문제 삼고 직접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의 문제를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인터넷 공간이나 소셜네트워크(SNS)에서조차도 ‘이세고리아’라는 발언의 평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현대 사회가 고대 사회처럼 단순하지도 또는 아테네 성인 남성처럼 정치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시간적·경제적 ‘여유’라는 조건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측면에서 촛불집회의 직접민주주의 시도는 결국 민주주의의 과잉과 타락, 그리고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우려하게 한다. 의회에서의 전문가적 진단을 전제로 한 지속적인 토론과 결정보다 광장에서의 한나절 또는 단 몇일의 토론에 의한 대중의 결정이 집단 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며 민주적이고 정의(正義)롭다라는 주장은 지금 가장 부강하고 민주적인 나라의 대부분이 의회민주주의라는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현실로 볼 때 허망한 주장일 뿐이다. 대의민주주의와 달리 직접민주주의는 시민(citizen)과 민중(people)의 덕성(virtue)과 자질(quality)만큼만 작동하는 실천하기 매우 어려운 정치체제임이 증명되었음에도 다시 실험에 나서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인영 객원 칼럼니스트(한림대 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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