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분열시켜 6.29 선언의 의미 퇴색시킨 것 사과해야”
"학생들의 희생과 넥타이 부대 열정이 '죽 쒀서 개 준 꼴"

 

황인희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황인희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여성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인 황인희 씨가 26일 “지금의 집권 세력이 영화 ‘1987'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건 당연하지만, 그 눈물의 의미는 사죄와 반성이어야 한다”고 질타했다.

황 작가는 이날  PenN에 보내온 글을 통해 "1987년 6.29 선언 이후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신군부 세력의 연장선인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당시 목숨을 잃은 학생들의 희생과 넥타이 부대의 열정이 모두 ‘죽 쒀서 개를 준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6.29 선언이 제대로 지켜져 제대로 가치를 발하려면 신군부 세력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이 됐어야 한다는 취지다. 6.29 선언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과 평화적 정부 이양을 약속한 내용이 담겨 있다.

황 작가는 “(현 집권부가) 1987년 그 해를 소중히 여긴다면, 지금이라도 국민과 열사들의 영령 앞에 사죄해야 한다”며 “사죄가 없다면 6월 항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던 국민들이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화여대 사회교육학과 출신인 황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는 10여년 전부터 역사 공부의 매력에 빠져 역사 유적지 답사를 다니며 취재를 해왔다. 이후 『역사가 보이는 조선 왕릉 기행』, 『고시조 우리 역사의 돋보기』, 『잘! 생겼다 대한민국』, 『궁궐, 그날의 역사』, 『우리 역사 속 망국 이야기』 등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책들을 집필했다. 이 외에도 『쉽게 풀어 쓴 선진 통일 이야기』, 중년을 위한 에세이 『하루를 살아도 당당하게』 등의 저서가 있다. 다음은 '1987년의 달력은 6월에서 멈췄는가'라는 제목의 황인희 작가의 글 전문이다.

            <1987년의 달력은 6월에서 멈췄는가?>

영화 ‘1987’이 여전히 장안의 화제다. 대통령이나 여당 관계자들이 앞장서 관람한 것은 물론 경찰 간부 등 공무원들의 단체 관람도 줄을 잇고 있다. 그 영화를 보고 분노하고 눈물 흘리고 역사를 비로소 바로 알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말 1987년 그 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 해 1월 14일 대학생 박종철이 고문당하다 사망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4월 1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7년 단임의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선출하는 이전의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4.13호헌조치이다. 6월 9일 연대생 이한열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친구의 품에 안긴 그의 모습은 국민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6월 29일 대학생들에 넥타이 부대까지 가세한 국민 항쟁이 격렬해지자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백기를 들었다. 이른 바 6.29선언이다. 그 내용은 ① 대통령 직선제 개헌 ② 1988년 평화적 정부 이양 ③ 언론기본법 폐지, 지방 주재 기자제 부활 등 언론 자유 보장 ④ 지방자치제 및 교육 자율화 실시 ⑤ 정당 활동 보장 ⑥ 사회 정화 조치 실시 ⑦ 유언비어 추방 ⑧ 지역 감정 해소 등을 통한 신뢰성 있는 공동체 형성 등 8개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①번과 ②번에 자리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88년 평화적 정부 이양이었다.

당연히 1987년에도 7월이 있었고 11월, 12월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의 1987년 달력은 6월 29일로 끝나 있는 듯하다. 젊은 학생들의 희생을 밑거름 삼아 얻어낸 6.29선언 이후 우리나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정말 6.29선언이 제대로 지켜져 희생이 그 가치를 발했을까?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6월 항쟁의 가장 큰 이슈는 12.12사태 이후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6월 항쟁의 전리품으로 얻어낸 1987년 12월의 대통령 직접 선거에서는 신군부 세력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국민의 손에 의해 당당히 선출된 대통령은 노태우였다. 그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육사 동기 동창이고 4.13호헌조치를 그대로 유지했어도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6.29선언 이후 대표적인 재야 세력이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굳게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두 사람 중 김영삼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다. 당시 분위기로는 12월 16일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 결과는 김영삼의 승리, 재야 세력의 승리, 문민의 승리로 확신되었다. 그런데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둔 11월 12일 평화민주당이 창당되었고 총재였던 김대중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선거 결과 노태우 후보가 36.6%(828만 표)의 득표율을 확보해 당선됐다. 김영삼 후보는 28.0%(633만 표), 김대중 후보는 27.1%(611만 표)를 얻는 데 그쳤다. 역사의 가정은 의미가 없다지만 만일 두 김씨 사이의 단일화 약속이 지켜졌더라면 55% 이상의 표를 얻어 신군부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1987년의 승리는 더욱 빛났을 것이고 ‘1987’ 영화도 진작에 만들어져 1000만을 넘어 3000만 관객을 감동케 했을 것이다.

단일화 약속의 파기는 결국 신군부 대통령에게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은’이라는 날개옷을 입혀주었다. 학생들의 희생도, 넥타이 부대의 열정도 다 ‘죽 쒀서 개를 준 꼴’이 되었다. 그때 단일화의 약속을 깨고 뒤늦게 자기들만의 대통령을 만들겠다고 나섰던 세력은, 죽 쒀서 개 준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 앞에 사과 한 마디 한 적 있었던가? 동지 간의 약속을, 국민에 대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던, 그래서 학생들의 희생의 의미마저 퇴색하게 만들었던 그 세력의 계보가 지금 정권을 잡고 있다.

지금의 집권 세력이 영화 ‘1987’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건 당연하다. 단 그 눈물의 의미는 사죄와 반성이어야 한다. 이들이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의 희생과 1987년 그 해를 소중히 여긴다면, 그해 봄 매운 최루탄 가스에 시달리면서도 옳은 일을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우리 국민의 목소리를 존중한다면, 지금이라도 국민과 열사들의 영령 앞에 사죄해야 한다. 당시 야당을 분열시켜 민주화 세력이 선거에서 지게 만들고 신군부 세력의 집권을 정당하게 만든 것에 대해, 6월 항쟁의 정신을 퇴색되게 만든 것에 대해, ‘죽 쒀서 개 준 꼴’을 만든 것에 대해 죄송하다고 진심어린 사죄부터 해야 한다. 만일 그들의 사죄가 없다면 6월 항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냈던 국민들이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최소한 그 승리가 자신들의 것인 양 으스대는 꼴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1987년에 이룬 대한민국 국민의 영광은 허위 속에 침몰하고 말 것이다.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이슬기 기자 s.l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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