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

지난 3년간, 자유진영 국민들만큼 정치적 혼란을 겪은 사람들이 있을까. 어느 날 닥친 정치적 혼란에 모두들 허탈감, 무력감, 분노의 시절을 보내왔다. 대다수 국민들은 열심히 자기 앞날을 개척하고 살면 그게 인생인 줄 알았다. 좌파세력이 득세해도, 전체주의를 평등이란 이름으로 강요할 때에도 70년 대한민국 역사를 송두리째 뒤엎기는 어렵다는 막연한 희망(?)이 있었다. 한편으론 “뭐 저런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야지, 때로는 어리광도 받아줘야 쟤네들도 먹고 살지”같은 말로 넘겼다.

실제로 그랬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들어섰지만, 한미동맹의 근간을 무너뜨리려 해도 막을 수 있었고, 자유우파의 핵심인 시장경제를 무너뜨리려했어도 체감으로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막상 좌파 정권이 이를 실행해 옮기려고 하면 사회 곳곳에서 브레이크를 거는 힘이 있었다. 심지어 세간에는 “노무현 때 삼성이 더 잘 나갔다”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물론 이 말이 노무현 때 더 자유경제로 갔기에 그렇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문재인 정권 이전 가장 극좌스러웠던 노무현 정권도 한미 FTA, 미쇠고기수입, 제주건설기지 등, 우리식으로 과장해서 얘기하면 우익진영이 정권을 잃었어도 “결국은 현실을 이기지 못할 거야”라는 막연한 자신감을 갖게 했다. “뭐 정권교체도 한번은 있어야 우리도 정신 차리지 않겠어?”정도로 자위했다. 물론 상대세력이 전체주의 추구세력이란 것은 알지 못했다.

우익진영은 정권의 변화가 결코 우리 삶의 근본을 바꿀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실제로 또 그랬다. 노무현 정권의 실정과 무능력에 최다표차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박근혜 정부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우익진영은 정권의 변화가 결코 우리 삶의 근본을 바꿀 것이라고 역시 생각하지 못했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지난 30년간 우리에게 개인생활이 아닌 정치에 대한 ‘냉정’이 있었을까, ‘열정’이 있었을까. 서두에서 정치적 혼란을 겪은 사람들을 나는 자유진영이라고 표현을 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 이전에 우리에게 자유진영이라고 할 만한 세력이 있었을까. 막연한 보수진영, 정체불분명한 우익진영이 있었을 뿐이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냉정’함을 유지하기 보단 정치를 단순히 ‘권력 먹기’라는 생각으로 ‘사람’만 따라다니지 않았을까.

어쨌든, 지난 탄핵정변을 겪으면서 자유 시민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자유우파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정치에 관심을 갖자, 이제 더 이상 우파유권자는 거수기가 될 수 없다. 헌정질서가 중요하다”는 ‘열정’이 솟구쳤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자. 문재인 정부의 온갖 내로남불과 실정, 폭정이 거듭되면서 국민적 지지율이 떨어지는 이때 우익진영에도 기회가 온 것 같긴 하다. 그러나 그것은 반대로 자유진영의 ‘열정’만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볼 순 없다는 또 다른 딜레마가 있다. 단순히 목소리만 낸다고 인터넷에 주장을 펼친다고 해서 그 열정이 현실로 실현되는 ‘냉정’으로 승화되지 않는다.

문재인 정권은 대다수 국민의 ‘열정’에 불을 지펴 정권을 차지했다고 보이나 기실 그 안에는 제도권 정치세력과 언론을 잘 이용한 ‘냉정’이 숨어있었다. 지금 문재인 정권이 ‘폭망의 길’로 가는 면은 정권을 차지한 이후에 ‘냉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최근에 공식이 바뀌었다고 한다.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에서 “우파는 분열로 망하고 오랜 기득권인 좌파가 부패로 망한다”로 말이다.

99% 같아도 1%만 다르면 갈라서는 우익진영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좌파의 분열은 이념에 있어 각론적 분열이지 사람들의 분열은 아니다. 우파의 분열은 우파유권자들이 이념체계가 확실치 않다는 점이 약점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분명 사람에 따른 분열이라는 점이다. 이는 99% 같아도 1%만 다르면 갈라서는 시민사회 우익진영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혈연, 지연, 학연 등 ‘인맥’을 메시지보다 중요한 판단근거로 삼는 우익의 고질적인 병이기도 하다.

재판에 있어서 가장 열정적인 사람은 원고와 피고다. 당사자는 열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승패를 가르는 사람은 판사고 판사는 열정으로 재판하지 않는다. 어쨌든 판결로 한쪽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 것이 ‘냉정’한 판사가 해야 할 일이다. 자유우파는 기본적으로 판사의 입장이다. 그러나 ‘열정’이 ‘냉정’을 능가하는 순간 법정은 사라질 것이며 법정 밖의 사람들은 그 재판을 지지할 수가 없다.

‘열정’이 없다면 ‘냉정’도 필요 없겠지만, 그것이 ‘냉정’을 결코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냉정’한 싸움은 ‘열정’의 싸움과 다르다. 결국 승부는 ‘냉정’의 싸움에서 결정된다. 폭력혁명을 하지 않을 거라면 우리도 제도적 싸움에 익숙해져야하고 자유우파도 이제 ‘냉정’을 키울 때가 됐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제 광야에서 떠드는 감정배설의 대리만족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자. 정치는 정치인의 싸움이기 이전에 나의 냉정과 열정사이의 싸움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냉정과 열정사이 어디쯤에 있을까.

황성욱 객원 칼럼니스트(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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