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경찰이 체험한 5.18(6), "일부 경찰관서 무기 소산 및 피탈과정 조치 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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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2.06 12:39:42
  • 최종수정 2019.02.06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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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수부대와 시민군의 대결 구도였으므로 경찰들이 경찰관서를 버리고 무조건 도망간 것은 잘못된 것이며, 군이 관리주체라는 이유로 예비군 무기고를 그대로 둔 것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함(한○○ 광주서 정보계장)
-무기를 지서 앞 블록공장에 숨기는 등 한참 무기를 소산중일 때 유리가 깨진 버스 여러 대를 타고 온 시위대 수십 명이 습격, 무기고 문이 열려진 상태에서 시위대가 들이 닥쳤기 때문에 속수무책(한○○ 나주 남평면 예비군소대장)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1980년 5월 당시 전남 경찰국장은 시위대를 강경진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된 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되어 고문당한 후 강제 사직 당했다.
1980년 5월 당시 전남 경찰국장은 시위대를 강경진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된 후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되어 고문당한 후 강제 사직 당했다.

 

Ⅵ. 기 타

안병하 경찰국장 면직 처분

※ 안병하(28年, 강원 양양) : 육사 8기, 총경 특채, 경무관 승진(’71), 전남경찰국장(’79)
❍ 안 국장은 군인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전 후 중령으로 예편, 총경으로 특채(ʼ61), 경무관으로 승진하여 강원․경기경찰국장을 거쳐 전남 경찰국장으로 부임(ʼ79.2.20)
— 안 국장은 평소 부하직원들에게 부드럽고 따뜻하게 대하고, 경찰의 역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
* 모시게 된 기간은 몇 개월 밖에 안되지만 정말 인성이 좋으시고 군 출신답지 않게 부드러우셔서 직원들이 잘 따랐음(배○○ 도경 작전2계장)
— 5․18 당시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무유기 및 지휘포기’ 혐의로 직위해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 연행되어 고문당한 후 강제 사직
— 평소 건강했던 안 국장은 신부전증 등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ʼ88.10)
* 군 출신이라 젊은 부하직원들도 부러워할 만큼 체력이 뛰어났으며 조퇴나 결근은 물론 병원에 간 적도 없을 정도로 건강(권○○ 국장 부속주임)
❍ 당시 안 국장 가족들은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였고, 수년간의 투병생활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가
— ʼ92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결정, ʼ02년 보상금 지급
— 경찰청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안국장의 민주화 순직 진상규명 건 채택(ʼ05. 9), 전남청에서 3개월간 재조사 후 국가보훈처 신청, 국가유공자 등록(ʼ06)
※ 안병하 전 국장의 온건진압 지침은 유혈사태의 확산을 방지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의원면직은 강제해직에 해당되고 불법구금 및 심문의 후유증으로 투병 중 사망하였으므로 순직경찰관으로 등록되어야 함(조사결과 요약)
❍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순직하기 전 자필로 ‘광주 비망록’ 작성(ʼ88)

< 비망록 주요 내용(‘前전남경찰국국장 故 안병하 씨의 비망록 공개’, MBC 뉴스데스크(’95.12.13 字)) >
○ ‘데모 저지에 임하는 경찰의 방침’
 ․절대 희생자가 발생 않도록(경찰의 희생자 있더라도) 일반 시민 피해 없도록
 ․주동자 외는 연행치 말것(교내서 연행금지)
 ․경찰봉 사용 유의(반말, 욕설엄금)
 ․주동자 연행시 지휘보고(식사 등 유의)
○ 5.16.까지는 광주와 전남지역의 학생시위는 다른 시위에 비해 평온한 편
○ 17일 자정 이후 계엄확대와 더불어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무차별 진압이 시작되자 이에 자극 받은 시민들이 총기를 탈취하고 건물에 불을 지르는 등 사태가 급속히 악화
○ 광주항쟁의 원인은 ① 과격한 진압으로 빚어진 유혈사태, ② 악성 유언비어의 난무, ③ 김대중 씨의 구속이라고 분석

❍ 한편, 전두환 회고록 등 일부 기록은 안 국장이 5. 21. 당시 지휘권을 포기하고 연락두절 되었다고 기재하고 있고, 경찰 내부 일각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견해가 있으나 사실과 달라 바로잡을 필요 있음

< 경찰 철수과정에 관한 전두환 회고록 내용(전두환 회고록 494쪽) >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경찰차가 불타는 등 소요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는데 시위진압을 해야 할 전남경찰국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다며 경찰국청사를 떠난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이 연락두절 상태가 된 것이다. 안 국장은 이날 오후 늦게 업무에 복귀했지만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된 후였다. (중략) 경찰국장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부하들은 안 국장이 위급한 상황에 직면해 부하들에게 알리지도 못한 채 피신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계엄군이 출동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경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전남계엄분소에 상황을 통보한 후 모두 피신해버렸다. 결국 그렇게 해서 파출소가 시위대에 습격을 당하고 무기까지 탈취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 안 국장은 11:40 CAC사령관 만나기 위해 도청을 떠나 12:50경 다시 복귀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상황관련 지시를 하였으나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자 치안본부와 계엄분소장에게 철수를 건의(치안본부, 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안병하 진술조서 24∼27쪽)하였으며
* 다시 12:50경 사무실에 당도하니 긴급대피하라는 방송이 있어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경찰헬기에서 지사님과 국장님이 내리시기에 상황이 극히 불리하지는 않다고 생각되어 13:20경 사무실에 들어와 전화를 들었음(김○○ 전남경찰국 작전과)
— 비상시 재집결 장소를 알려주며 해산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등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노력하였음
* 기동대는 제1집결지로 기동대 원대로 복귀하되 폭도들이 점거중이면 지산유원지로 집결, 경찰국 요원들은 경찰항공대로 집결, 경찰서장 및 기동대장에게도 비상시 CP위치를 알려줌(치안본부, 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안병하 진술조서 26,27쪽)
* 21일 17:30경 경비과장이 무전으로 호출하여 1,2중대장과 국장실로 갔다. (3중대장은 고립되어 오지 못함) 경찰국장은 부대해산을 지시하면서 계엄군에 의해 삼사일 내에 회복될 것이니 대원들을 잘 소산시켜서 피해가 없도록 하라. 무등산 일대가 괜찮을 것이므로 그쪽으로 소산하여 부대관리를 하라. 자신은 송정리 경찰항공대에 있을 것이다. 소집 지시하면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송○○ 118전경대장)
* 5.21.16:30경 경찰국장님께서 강진서장님을 위시한 출동했던 각 서장님께 폭도는 무장포위하고 있고 도청을 경비하는 군부대도 철수한다고 하니 각서별로 철수하여 귀서하라는 지시..(양○○ 강진서)

< 안병하 국장 지시사항(5. 21)(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319~323쪽) >
○ 11:40, CAC 사령관을 만나기 위해 도청에서 이륙
○ 14:13, 군용 UH-1 헬기에 의해 전투부대가 착륙예정인바 각 부대는 부대를 재정비하고 현위치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대기 지시
○ 14:35, 무기고 소산지시
○ 15:32, 각서 총기피탈방지 지시
○ 15:46, 각 경찰서 총기 소산 지시
○ 16:00, 각 서 동원부대 동원해제
○ 17:21, 기동대 철수지시(국장실에서 기동 1․2․118중대장에게 철수지시)

❍ 한편, 경찰청은 5 18 민주화 운동 당시 강경진압 지시를 따르지 않고 안전에 유의한 시위 대응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인권경찰의 귀감이 된 고인을 2017년 올해의 경찰영웅으로 선정, 추모흉상 제작(’17. 11)

함평경찰서 경찰관 사망 사고

❍ 5.20. 21:00경 도청 인근 노동청 주변에서 대기 중이던 함평경찰서 직원 4명이 시위대가 몰던 버스에 치어 사망(사망 4․중경상 4)
※ 사망자 : 경장 정충길, 순경 강정웅, 순경 이세홍, 순경 박기웅
— 노동청 반대방향에 영광서장이 지휘하는 중대(함평․영광․장성서)가 2선에 배치되었는데 버스가 1선을 뚫고 2선으로 돌진
❍ 당시 운전자는 야간시간대이고 사고장소 주변이 최루가스로 인해 눈을 뜰 수 없어 사고를 인지하지 못하였다고 주장
— 1․2심(전교사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살인․소요 혐의로 사형,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ʼ81.3)
— 광주사태 관련자에 대해 특별감형, 특별사면 또는 복권조치로 피의자는 무기 감형 후 석방(ʼ82.12)
— 이후 재심 법원에서 헌정질서 파괴범죄(군사반란 및 비상계엄)에 저항한 정당한 행위로 보아 무죄 선고(ʼ98.7)

5‧18 이후 경찰조치과정 상 미흡한 점

❍ 사망․부상경찰관에 대한 예우․보상 미흡
— 2005년 경찰에서 파악한 5․18 당시 순직 공상경찰관은 4명 사망, 9명 부상에 불과, 144명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는 다른 자료와 상당수의 차이가 있어, 사망경찰관과 부상자에 대한 지원이나 보상 등이 적절히 이루어졌는지 의문
— 특히, 5.20 순직한 함평서 경찰관 4명에 대한 시신 안치 등 사후수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지휘부를 비롯한 동료 경찰관들의 과오
※ 사망한 5. 20 이후 수습되었던 5. 27까지 기동복을 착용한 채로 사망 현장 근처에 방치되었으며, 5. 21 계엄군이 퇴각하고 경찰이 비상근무에 돌입한 이후에도 수습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
* 27일 상무관에는 20일 순직한 함평서 경찰관들의 시신이 상무관과 장비계 사이 노상에 순직 당시와 같이 방석복을 입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음(나와 많은 경찰관들이 매우 분노했었다)(이○○ 전남경찰국 경비계)
* 전대병원에 갔을 때는 버스에 깔려 순직한 함평서 직원들의 시신이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시민이 죽으면 태극기를 덮었고 경찰은 순직 당시 착용한 방석복 상태로 방치되어서 가슴이 아팠음(오○○ 서부서 정보과)
* 함평서 직원 사망자 4명에 대한 조치는 5.20. 11:00경 2구는 전남대 부속병원에 안치시키고 다른 2구는 안치코자 하였으나 폭도들의 공격 강화로 거두지 못하고 철수 시까지 시체를 방치하였음(안병하 국장 진술조서)
* 광주가 회복되고 순직자 시신이 운구되어 각기 초상을 치뤄 조문을 갔고 미망인의 싸늘한 눈빛에 서둘러 나온 사실이 있는데, 그들이 순직한 후 몇 년에 걸쳐 가족들도 모두 함평을 떠남(장○○ 함평서 수사과)
* 이들의 순직 처리가 안되어서 방상훈 과장과 조기웅 계장이 나서서 유족들 명의로 치안본부에 진정을 하였으나, ‘경찰관 신분으로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다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순직 처리가 안된다‘는 황당한 사유로 반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순직이 인정되어 현충원에 안장되었는데 과연 이들 유족들에게 적정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인지 의문(장○○ 함평서 수사과)
* 5․18당시 사망하였던 함평서 경찰관 4명에 대해서도 경찰에서는 관심이 없어 경찰유족회에서 처음으로 추모행사를 해줌(안○○ 안병하 국장 子)
— 안병하 국장에 대해서도 퇴직 후 명예회복 등 경찰청 차원의 적극적 움직임이 없었으며
* 아버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셨어도 ’05년까지 경찰청이나 국가가 해준 것은 거의 없었음. 가족들이 직접 정부부처 찾아다니고 절차를 알아보곤 했음(안○○ 안병하 국장 子)
— 부상경찰관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파악되지 않아 그에 대한 보상이나 지원은 전무하다시피 함
* 27일 모든 공무원들은 출근하라는 방송을 듣고 걸어가는 중 누군가 쏜 총이 내 우측 하복부를 관통하여, 기독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우측 다리가 틀어져서 균형이 잡히지 않은 채로 살고 있음(노○○ 광주서)
* 당시 피해를 입은 경찰관에 대해서도 적절한 보상이 이뤄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듦(오○○ 서부서 정보계)
* 노동청 앞에서 버스에 압사당한 함평경찰서 직원들 생각이 난다. 그들은 정말 나라를 지키다 숨진 사람들인데 마땅한 처우를 받고 있는지 의문(염○○ 광산서 동곡지서)
❍ 기록에 의한 진상규명의 한계
— 경찰기관은 경찰사 편찬자료가 될 주요사항을 빠짐없이 충실히 치안일지에 기록하고, 관련 자료를 문서집중 관리소에 영구보존하도록 되어있으나(경찰역사편찬업무규칙(2009.7.31.경찰청 훈령 제506호)), 5 18 당시 전남경찰국을 비롯한 경찰서별 치안일지 내용이 부실하거나, 일부 경찰서 치안일지가 망실되는 등 관리 부실
* 경찰은 무엇인가 남겨 놓으면 나중에 화를 입는다는 뿌리 깊은 문화가 있는 것 같음. 그래서 각종 귀중한 자료들이 멸실되어 버렸음(유○○ 전남청 경무계<전남경찰사 작성자>)
— 특히, 5 18 관련 상황일지 등 중요자료들이 ʼ07년 광주청 개청 및 ʼ11년 전남청사 이전 시 분실되거나 임의 폐기처분되어 사라짐
* ’02년부터 ’03년까지 5․18 보상심의가 이루어질 때 당시 상황일지를 열람하여 사실여부를 회신해 주었고, 캐비넷 3개에 넣어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 상황일지가 현재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음(이○○ 곡성서)
— 또한 경찰 및 타기관에서 보존하고 있는 일부 경찰관련 문서 또한 성립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등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많아 기록에 의한 진상규명은 한계
*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은 원본이 아니라 필사본. 원본은 8절지 크기로 기재할 내용이 많아 횡으로 기재. 추후 국보위에서 상황일지 복사본을 요구하여 복사가 가능한 A4용지에 재작성하였는데 이 때 감찰조사가 예상되고 보안사 등에서 예민하게 지켜보아 무기피탈과정 등 일부가 삭제되거나 추가되었음. 단 시간대별 상황, 부대 이동 등은 변경 없음(이○○ 전남경찰국 경비계)
* 오일팔이 끝나고 국보위 조사를 받는 등, 복잡한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에 경찰에 불리하거나, 민감한 사안들은 빼 버린 것. 단, 시간이나 상황, 부대 배치사항 등은 기본적인 사실은 원본과 같이 기록하고, 경찰에 불리하거나 민감한 사항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므로, 큰 틀은 달라진 것이 없을 것(박○○ 전남경찰국 경비계)
— 특정 상황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없다면 경찰에 대한 각종 명예훼손, 폄하 등 왜곡에 대한 적절한 대응 곤란하므로 철저한 기록관리 필요
❍ 일부 경찰관서 무기 소산 및 피탈과정 조치 미흡
— 전남경찰국 지휘부는 계엄군 투입에 따라 사태가 확산되고, 무기 피탈로 인해 피해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무기소산을 지시하였으나
— 광주권 경찰관서에 대해서만 사전 무기소산 지시(5. 19)를 하고 전남지역 경찰서는 계엄군 집단발포 이후(5. 21. 15:46) 무기소산 지시 하달(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323쪽)로 무기소산을 위한 시간 부족으로 소산 곤란
* 무기를 지서 앞 블록공장에 숨기는 등 한참 무기를 소산중일 때 유리가 깨진 버스 여러 대를 타고 온 시위대 수십 명이 습격, 무기고 문이 열려진 상태에서 시위대가 들이 닥쳤기 때문에 속수무책(한○○ 나주 남평면 예비군소대장)
— 계엄군 투입 이후 상황이 악화되고 지방 경력 상당수가 동원되어 치안부재가 우려되는 시점에서 적절한 대비책 강구치 못하였으며, 일부 경찰관서에서 지역주민과 함께 설득하는 등 최소한의 조치조차 취하지 않았던 것은 아쉬운 조치로 판단됨
* 당시 공수부대와 시민군의 대결 구도였으므로 경찰들이 경찰관서를 버리고 무조건 도망간 것은 잘못된 것이며, 군이 관리주체라는 이유로 예비군 무기고를 그대로 둔 것도 잘못되었다고 생각함(한○○ 광주서 정보계장)

[붙임 1]  참고문헌 목록

 

[붙임 2] 전남경찰국직위표
※ 1980. 5. 18.기준

 

[붙임 3] 전남 도경국장 직무유기 피의사건 수사 결과(전남경찰국, 치안질서 회복을 위한 경찰의 조치(기무사 383-1980-98) 389쪽)

1. 개 요
80.5.14. 전남대, 조선대생 등 3,000여명이 중심이 된 시국성토가 과열, 교내 시위가 광주 시내로 진출하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동 시위가 폭력·폭동화 함에 따라 급기야 민족적 비운의 5․18 광주 사태를 유발시키게 되었고, 이어 5.21 폭도들이 광주시를 장악함에 따라 지역 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며 치안질서 유지의 지휘 책임을 갖고 있는 전남 도경국장 안병하(52세)의 직무유기 여부를 조사하였으나 동 피의사실을 발견할 수 없어 치안본부에 이첩, 지휘책임을 물어 면직시킨 사건임

2. 수사 결과
○ 당초 광주사태는 5.14.부터 전남대생 학생들이 어용교수 퇴진, 재적학생 복교, 이사장 퇴진, 재단과 학원 운영 분리 등을 주장하며 총장실 점거 농성을 계속하여 조선대에서는 자체 휴교 조치를 취하였으나 주동학생 200여명은 휴교중에도 잔류하여 농성을 계속하였으며 당시 경찰은 총학장 요청에 의하여 교내에 진입저지토록 한 방침에 의거 교문에서 시내 진출 저지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전남대와 조선대는 교내 울타리가 없는 관계로 시내진출이 용이하여 전문대생들이 가세함에 따라 경찰의 제한된 병력으로 완전 저지가 불가하였으며,
○ 전남도의 치안책임자인 본명은 관할 계엄분소장에게 군 동원의 필요성을 외면한 채 단순 경찰병력으로만 저지 가능하리라는 안일한 판단으로 사태가 악화되는 오류를 저질렀으며,
○ 5.17. 22:00경 관내 31사단 작전 계획에 따라 군이 시내에 진주하여 대학과 공공건물은 군이 담당 경비한다는 기본 방침에만 의존, 구체적인 군과의 협조를 소홀히 하여 경찰병력 배치 계획을 수립치 않았고,
○ 5.18. 계엄군 진주시 경찰은 도로변을 담당, 11:00경부터 작전에 임하였으나 계엄군에만 의존한 소극적 작전 계획과 협조 미비로 데모 저지에 미진하였으며 또한 100여명의 무분별한 시위 주동자의 연행으로 시위 군중의 감정을 유발시킨 사실이 있으며
○ 시위가 폭력․폭동화 할 경우에 대비하여 지역내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치안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찰 무기를 폭도들로부터 피탈을 방지하겠다는 소극적인 발상하에 치안본부장에 건의한 후 경찰 2개서 및 4개 기동대의 무기 약 1,300정을 도경 안전가옥에 이동, 소개(疏開)시킴으로서 5.21. ‘진돗개 둘’이 발령되고 5.22. ‘자위권’이 발동 되었음에도 광주 시내에 근무하는 전 경찰의 무장을 불가능케 하였고,
○ 5.21. 사태가 악화되자 계엄분소장의 사전승인을 득하고 도청에서 철수하였으나 이후 병력을 재정비, 시위 진압을 위한 진입을 결행하여야 하나 5.18. 무기를 소개시킨 사실과 철수시 병력에 대한 집결지를 명시하여 지시하지 않음으로써 사태수습을 위한 경찰의 재정비가 불가능하였음

3. 수사관 소견
본명에 대한 수사결과 이상과 같은 작전 지휘의 실패로 인하여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지역 치안 책임자로서 경찰관 순직 4명, 부상 144명, 경찰무기 200여정 피탈 등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고 그 외에 막대한 도민의 인명과 재산의 피해가 발생하였으며 1주일에 치안부재라는 역사적 민족의 비운을 초래하는 결과의 간접적 요인이 되었음

증언과 자료정리를 마무리하면서...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숙제를 끝낸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입니다. 수집된 증언과 자료는 영구보존하고 계속 발굴․보완해 나가겠습니다.
TF팀의 일원으로 5개월 여간 어려운 여건 하에서 증언과 자료 수집에 고생한 전영득, 김기웅 경감과 바쁜 업무 속에서도 팀장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해준 임준영 경정, 시간을 아껴 자료정리에 참여한 안대환 경감, 강성곤 경장, 서명진 순경과 활동을 뒷받침해준 이명호 총경을 비롯한 TF팀 전원과 활동을 성원해준 모든 전남경찰청 동료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잦은 방문에도 성실히 조언해주신 5 18 관련단체 임원 여러분과 힘든 기억을 되살려 증언에 참여해준 여러 선배님, 그리고 안병하 국장의 경찰영웅 선정과 흉상 제막 등을 통해 전남경찰의 명예를
높이고 격려해주신 이철성 경찰청장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7. 10. 11.
전남지방경찰청장 강 성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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