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1일 해산된 경찰경력은 복귀명령 이후 순차적으로 복귀하여 5월 26일 광주서 63.5%, 서부서 77.6% 복귀, 기타 동원 15개서(878명)는 34명을 제외한 전원 복귀(96.2%). 반면 기동대원은 728명 중 160명만 복귀(22%). 소산된 경력에 대해 라디오나 전화 통해 경찰관 등 공무원 복귀명령 내렸으며 복귀시간 넘겨 복귀한 직원 일부는 징계 받아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4회 내용은 ‘계엄군의 철수 이후 경찰 활동(5.22~5.27)’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경찰은 5월 21일 도청 앞에서 집단 발표 후 계엄군이 철수하고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자 전남경찰국은 항공대로, 광주서와 서부서는 상무파출소로 지휘부(CP)를 옮겨 비상근무체제를 유지했다. 이 기간에도 정보형사들은 시내상황을 파악하여 보고했으며, 일부 직원은 계엄군에 파견되어 재진입 시 지리안내를 담당했다. 또 경찰이 시내에서 철수한 후 총기를 이용한 강력사건이 몇 차례 발생한 것을 제외하고는 안정적인 치안이 유지되었다고 보고했다.
1980년 5월 21일 집단발포 후 시 외곽으로 철수했던 계엄군이 다시 광주시내로 진입하여 대기하고 있다. 경찰은 광주시내에서 경찰력이 철수한 후 몇 차례 강력사건을 제외하고는 치안이 안정적이었다고 보고했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21일 집단발포 후 시 외곽으로 철수했던 계엄군이 다시 광주시내로 진입하여 대기하고 있다. 경찰은 광주시내에서 경찰력이 철수한 후 몇 차례 강력사건을 제외하고는 치안이 안정적이었다고 보고했다.(연합뉴스 제공)

 

Ⅲ. 계엄군의 철수 이후 경찰 활동 (5.22~5.27)

○ 집단 발포 이후 계엄군이 철수하고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자 계엄군은 광주 외곽을 봉쇄, 5. 27. 새벽 재진입작전(충정작전) 전개
○ 전남경찰국은 항공대로, 광주서와 서부서는 상무파출소로 CP를 옮겨 비상근무체제 유지하였고, 이 기간에도 정보형사들은 시내상황을 파악하여 보고하는 임무를 지속 수행, 일부 직원은 계엄군에 파견되어 재진입 시 지리안내를 담당하기도 함
○ 도청에서 철수한 지방 경찰서의 경력은 현장에서 해산 후 5.24 ~26. 순차적으로 복귀하여 각 서 자체경비, 정보활동 등 기초치안활동 전개
○ 무기탈취를 위한 전남권 경찰서 피습과 탈취 총기를 이용한 강력사건이 몇 차례 발생하였으나 대체적으로 안정적인 치안 유지

주요 상황

❍ 5. 21. 집단발포 후 계엄군 퇴각, 경찰 전 경력(경찰병력) 소산
❍ 5. 22. 09:25, 치안본부로부터 경찰관 자위권 발동 지침 하달
❍ 5. 22. 13:30, 시민수습위 대표 8명, 상무대 계엄분소 방문, 7개 수습안 전달
❍ 5. 23. 13:00, 지원동 주남마을 앞 소형버스에 공수부대 총격, 승객 17명 사망
❍ 5. 23. ~ 26. 1~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5. 26. 안병하 국장, 지휘포기 및 직무유기 혐의로 보안사로 압송

* 5.26. 안 전(前) 국장은 신임 도경국장이 타고온 헬기편으로 바로 준비도 없이 치안본부로 갔음. 당시 CP에는 직원 50∼60여명이 있었으나 거의 몰랐기 때문에 이임인사도 하지 못함(이○○ 전남경찰국 항공대장)
* 5.26. 13:00경 상경하여 국장님께서 정보과장실로 들어가 정보2계장실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보안사령부로 갔다고 했음(권○○ 부속실장)

❍ 5. 27. 충정작전 개시, 광주재진입(01:00~05:10, 8개 부대 7,200여명 투입)
 ※ 03:30 작전개시 / 04:40 관광호텔, 전일빌딩 점령 / 05:10 도청 및 시가지 진압 완료

경찰의 비상근무체제 돌입

❍ 계엄군 철수와 함께 해산한 경찰은 전남경찰국 CP를 이전, 익일(5. 22)부터 비상근무에 돌입하는 한편, 군 재진입을 앞두고 검문소운영 및 정보․보안 등 상황대비에 중점을 둔 치안활동 전개
❍ 광주서와 서부서는 CP를 상무파출소로 이전하고, 최소 경력으로 기초 치안활동 전개
— 비상연락체계를 유지하면서 직원들이 교대로 서내에 출입하며 상황 파악, 야간에는 시민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만 잔류
* 사복으로 경찰서에 출근하여 국에서 하명하는 폭도들의 동향, 주동자에 대한 채증, 계엄사에서 지시되는 각종 업무 등을 최소한으로 수행(안병하 국장)(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안병하 진술조서(1980.5.31.) 36쪽)
* 시민군 점령 기간에도 총각 경찰관들 몇 명이서 사복을 입고 경찰서를 지켰는데, 중간 중간 과장이나 서장 등 간부들이 수시로 경찰서에 나와서 상황을 점검(안○○ 광주서 수사과)

< 일자별 주요 활동(전남경찰국, CP업무현황 325~339쪽) ) >

○ (5.22) 경찰국 CP 항공대 이전, 비상근무체제 운영, 경찰서 청사 상황 확인
○ (5.23) 충정작전대비작전거점현황파악, 계엄사에27명지원(서부서8․광주서(전남경찰국, CP업무현황(기무사 383-1980-99) 325~339쪽)
○ (5.23) 10:00 광주서 전 직원 상무동 파출소 집결지시(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광주서 상황처리 기록부 74쪽)
○ (5.25) 경찰관 복귀인원 증가하여 경찰서 청사로 복귀, 정상근무(광주서)
○ (5.26) 全직원 출근 근무, 도청내 폭도 반납무기 인수 지시(국장 지시사항)

❍ 시위대의 동향파악을 위해 대공․정보기능 활동 전개, 첩보 입수 및 보고

○ 5.22. 14:00, 시내요소의 고층건물에 병력을 배치함과 동시 기관총을 설치, 계엄군과 대처할 준비를 완료하고 불가능시 도청을 폭파하는 등 최후의 수단을 강구한다는 시내동향을 수시입수 CAC 정보처에 통보(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서부서 상황일지 94쪽)
○ 5.22. 18:00, 광산지역에서 무기탄약 탈취 폭도가 추럭으로 예비군무기고 습격, 상무동 쪽으로 이동한다는 첩보
○ 5.25. 15:00, 도청앞 광장, 희생자에 대한 장례식을 거행하겠다는 명목으로 약 10만명의 인파가 운집
○ 5.25. 16:00 도청현황, 폭도들이 계속 점거하고 시가는 폭도들의 차량만 운행
○ 5.26. 14:00 광주시민 도청 앞 금남로에 집결 시작
○ 5.26. 15:00 도청 앞, 시민운집인원 2-3만 정도(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광주서 상황처리 기록부 80∼85쪽)

* 5. 21. 18:00경 시내 양개서장과 일반전화로 통화하여 소재를 확인 후 서부서 병력은 상무대 파출소로 집결시키고, 광주서 병력은 광주서 주변 적당 장소로 병력을 집결시켜 대공 및 정보요원은 폭도들의 동향파악과 주동자에 대한 채증활동을 강력히 하라고 지시(안병하 전남경찰국장)(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안병하 진술조서 1회 29쪽)
* 해산한 다음날 연락이 와서 경찰서로 갔는데,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경찰서 바로 건너편 2층 치과에서 정보2과장과 정보 형사들이 집결. 정보 형사들이 앞장서서 경찰서를 지키고 경찰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독려, 정보 형사들은 시내에 나가서 지속적으로 시위대 움직임을 파악하여 보고(김○○ 광주서 정보2과)
* 광주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으나, 23일인가 24일부터는 낮에는 사복을 입고 파출소에 나가서 파출소도 관리하고 동태도 파악(노○○ 기동1중대)
❍ 작전거점 현황을 파악하여 보고하고 경찰관을 계엄사 파견
 ※ 작전거점 운용 : 유리한 침투노상 선점, 군경합동근무체제 유지, 경찰 단독근무 시 병력은 1개분대 이상으로 구성
    작전거점 유형 : 군 단독 거점 11개소, 군경합동 거점 14개소(9/152), 경찰단독 거점 53개소(28/474)(전남경찰국, CP업무현황(기무사 383-1980-99) 330~331쪽)
※ CAC, 작전계 경찰관 5명 차출지시 및 상무대 정보처장에게 인계(5.26.11:00)(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115쪽)
❍ 통신 요원들은 도청에 직접 출입하며 통신망을 복구하는 등 이 기간 가장 적극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비상체제의 빠른 안정에 기여함
— 경찰국 폐쇄 직후 경찰항공대에 경비전화 회선 개설하고 22일 치안본부와 비상통신망 구성, 23일에는 CP에 일반전화 회선을 증설, 광주시내 첩보활동 망으로 사용케 하는 등 지원활동
* 5.21이후 폭도들 점령하에서도 통신기술자들은 18명까지 수시로 출입하면서 통신유지에 노력하였고...(안병하 전남경찰국장)(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안병하 진술조서1회 37쪽)
— 그 밖에 시위대가 탈취한 무전기로 교신한 내용을 각 중계소를 통해 입수, 경찰국 상황실에 제보하는 등 정보활동 수행(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통신과장 경정 주○○ 확인서 94쪽)
※ 서부서, 탈취무전기 청취내용(시위대 동향)을 계엄사에 전달(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91쪽)
❍ 계엄군은 시민과 대립 관계였고 지역 지리에 취약했기 때문에 사전 선무활동 및 재진입시 경찰 정보․보안기능을 동원하였음
* 계엄군이 들어올 때까지 외근형사들은 광주 시내를 돌며 시내 상황을 파악하여 보고하였고, 일부 직원들은 계엄사에 동원되어 비무장으로 목숨을 걸고 계엄군을 안내(한○○ 광주서 정보2계장)
* 5.23. 상무대로 집결하여 헬기를 타고 무등산 자락으로 이동, 주둔해 있던 공수부대원들과 생활하다가 27일 00시경 사복 비무장 상태로 광주시민회관까지 선두에서 길안내(장○○ 광주서 정보과)
* 5.26. 경찰서를 지키고 있는데, 경찰서에서 밤을 새고 새벽에 진압군이 오면 도와주라는 지시가 내려옴(안○○ 광주서 수사과)

해산 경찰의 복귀 및 활동

❍ 5.21 해산된 경찰경력은 복귀명령 이후 순차적으로 복귀하여 5. 26. 광주서 63.5%, 서부서 77.6% 복귀, 기타 동원 15개서(878명)는 34명을 제외한 전원 복귀(96.2%)한 반면, 기동대원은 728명 중 160명만 복귀(22%)
※ 5.25.10:50경 광주서 및 서부서에 경찰관 142명이 출근하여 대기(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 130쪽)
* 소산된 경력에 대해 라디오나 전화를 통해 경찰관 등 공무원 복귀명령을 내렸으며 복귀시간을 넘겨 복귀한 직원 일부는 징계를 받기도 했음(최○○ 3기동대)

< 동원경력 복귀현황(5.26. 10:00)(전남경찰국, CP업무현황(기무사 383-1980-99) 336쪽)>

○ 광주권 경찰서

○ 전남권 15개 경찰서 : 878명 중 34명 미복귀(3.8%)
○ 기동대 복귀 현황 : 728명 중 160명 복귀(22%)
- 1기동대 : 180명 중 20명 - 2기동대 : 183명 중 46명
- 3기동대 : 183명 중 19명 - 118중대 : 183명 중 75명

— 경찰은 복귀한 경력으로 자체경비․피탈무기 회수 등의 임무를 수행, 이 기간 시민군과 마주치기도 했으나 별다른 위해입지 않고 업무수행
* 젊은 직원들은 피탈무기 회수 및 시위대 차단을 위하여 나주대교에서 근무했으며, 나는 피탈무기 회수 담당이었는데 총번마다 카드를 만들어 놓고 총기가 회수되면 하나씩 찾아서 정리(김○○ 나주서 보안과)
* 시청을 지나는데 ‘임시상황실’이라는 간판이 보여 들어가서 신분을 밝히고 경비전화를 하자 상무대쪽에 있는 경찰상황실과 연결이 되었고, 계속 상주하며 상황을 유지하라고 지시를 하여 시청 임시상황실로 들어오는 내용을 경찰상황실로 보고함 (최○○ 전남경찰국 상황실)
* 광주비행장으로 피신하였다가 23일경 경찰서로 복귀하였던 기억이 있으며 시위대가 경찰서에 들어오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아는 얼굴들이라 기물을 부순다거나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음 (임○○ 광산서 수사과)
* 도청을 시위대가 점령하고 있을 때 나는 매일 도청으로 나가서 상무관 우리 부대 막사도 둘러보았는데 내 방에 들어가자 시민군이 있었으며, 그가 되려 나를 보고 누구냐고 물어서 ‘내가 중대장’이라고 답하자 계면쩍어 하면서 자리를 피해주어 몇 가지 내 소지품을 챙겨 나오기도 하였음. 내가 소년계장을 하였기 때문에 넝마주이와 불량배 등을 많이 아는데, 그들이 총을 들고 다니면서도 나를 보고는 모르는 척 해주었음(이○○ 기동3중대장)

경찰의 자위권 발동

❍ 전남경찰국은 치안본부로부터 내려온 ‘경찰관 자위권발동 지침’을 일선서·해안 전경대 등에 하달(5.22)
— 이는 추가적인 경찰관서 피습 및 무기피탈을 방지하여 사회 불안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였으며, 자위권 발동 이후 피습 및 무기피탈 급감

< 경찰관 자위권 발동 지침시달(경찰관 자위권 발동지침 시달(치안본부-작전 2047, 80.5.22.) > (치안본부 하달)
일부 폭도들이 도내 계속 경찰관서의 습격을 시도하고 있으므로 5. 22. 09:25
계엄사령관의 지시에 의하여 하달
1. 총기 및 무기를 탈취하거나 민수용 폭약 등을 탈취시는 경찰의 자위권을 발동
2. 자위권 발동시에는 첫째 강력하게 위협적으로 제지하고, 둘째 공포를 발사하고, 셋째 무릎 밑을 향하여 사격5. 23.부터는 총기를 휴대하고 경찰서 자체 방어를 실시하였으며, 경찰서 옥상에 LNG를 설치 (김○○ 나주서 보안과)

— 특히, 전남경찰국에서는 자위권 발동 대상, 요건과 한계, 구체적 발동 방법을 세부적으로 적시, 해산과 방어목적 위주의 자위권 행사를 각 경찰서·예하 부대에 하달함으로써 시위대와의 유혈 충돌 방지에 최선을 다함

<자위권 발동 지시(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1~2쪽)>
1. 자위권의 정의 :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 및 재산을 보호함에 있어 급박 부당한 위해를 제거하기 위하여 부득이 실력을 행사하여 방위하는 관시
2. 자위권 발동대상
폭발물․화염병․흉기를소지하고건물이나무기를탈취, 점거, 파괴, 방화하고자 하는자
3. 자위권 발동지시
  가. 군부대, 경찰관서 공공기관 및 국가보관 폭약 등을 보호함에 있어 폭도 등이 무기 또는 위력물을 사용해 옴으로써 무기를 사용치 않으면 진압방법이 없을 경우
  나. 국민 또는 출동병력의 신체에 생명을 보호함에 있어 그 상황이 급박할 경우
4. 자위권 발동방법
  가. 경고를 발하고 3회 이상의 정지를 명할 것
  나. 가능한 위협발사를 하여 해산시킬 것
  다. 상황이 급박하면 생명에 지장이 없는 신체부위를 사격할 것
  라. 선량한 주민에게 피해가 없도록 유의할 것
5. 자위권을 발동하였을 경우에는 당해 계엄사무소를 통하여 그 상황을 보고할 것
6. 정당한 이유없이 직무를 태만하거나 기피하는 자는 계엄군정에 회부 엄중 문책할 것임

* 24일경 학교사거리 차단 지시에 따라 경찰관 칠 팔명이 무장하여 차단을 하였는데, 학야교 방향에서 올라오는 시위대 차량을 발견하고 100여 발의 공포탄을 발사하여 퇴각시켰던 기억도 있다.(임○○ 함평경찰서 경무과)
* 장흥 관산지역에서 해안경계를 하고 있었는데 대대장이 시민군이 내부로 진입하면 하반신 이하 사격을 지시하였음 (공○○, 212전경대)
❍ 광주시내 경찰서는 무기를 미리 소산시켜 무장이 불가능하였으나 전남지역 경찰서는 동원 경찰관의 복귀상황에 따라 순차적으로 자위권 발동태세 완비
  ※ 나주, 해남, 영광, 함평, 강진은 5. 23. / 목포, 화순, 영암은 5. 24. 자위권 발동태세 완비 (기타 경찰서는 22일 자위권 발동태세 갖추고 자체경비 실시)
 ※ 경찰서 및 기동대 무기 약 1,300여정을 도경 안전가옥에 이동, 소개시킴으로서 5.22 자위권이 발동되었음에도 광주시내에 근무하는 전 경찰의 무장을 불가능케 함(전남경찰국, 전남도경국장 직무유기 피의사건(기무사 383-1980-98) 391쪽)
* 5. 24. 10:00경 다시금 경찰서 자체무기를 전경대로부터 가져와 전 직원에게 분배하였음(정○○ 목포서 경무과)(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11쪽)
* 당시 경찰은 무기가 없었는데도 자위권 행사 차원에서 무릎 아래를 조준 사격하라는 식의 조금 엉뚱한 지시를 받은 기억이 있음(맹○○ 광주서)

시민군 점령기간 광주시내 치안상황

❍ 사건․사고 등 범죄발생 추이
— 계엄군에 의한 충격적인 유혈사태가 발생한 인구 73만의 대도시에 대량의 무기가 유출됨에 따라 총기관련 사건·사고가 발생할 개연성이 농후했지만, 경찰기록에 따르면 유일하게 서부서 상황일지에 구체적 피해기재 없이 강도사건 발생사실만 두 차례 기록(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서부서 상황일지 102, 108쪽)되는 등 전반적으로 안정된 치안상태 유지

○ 5.23. 20:30 동명, 방림, 양림 등지에서 가정집에 무장강도 들이 침입, 현금과 귀중품을 여러 집에서 탈취하고 있음
○ 5.24. 15:30 폭도들이 공수부대 복장으로 위장 강도

 ※ “광주 일가 3명 총격피살” (동아일보 1980. 5. 26.)
  광주 시내에서는 무기류의 다량 유출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는 강력사건이 많지 않았으나 간간히 발생하고 있다.(이하 생략)
 ※ “광주 생업질서 서서히 되찾아”(동아일보 1980. 5. 26.)【광주 특별취재반】
  · 한국은행 광주지점장은 ‘최근사태로 제일은행 상업은행등 16개 점포의 건물 일부가 파손돼 재산피해를 입었으나 금융기관은 안전했다’고 말했다.
  · 중심가 상인들은 몇 몇 점포의 진열장 유리만 깨졌을 뿐 피해품은 거의 없다
  · 삼양백화점의 한관계자는 광주시내 백화점들이 5.18.사태로 약탈당하거나 피해본 것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당시 합동수사본부에서 바로 처리한 사건이 많아 범죄사건기록부를 통해서도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가운데 당시 법원 판결문 등으로 실제 확인된 강력사건은 다음과 같음(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32, 44, 45권)

○ 5.23. 01:00경 유동 소재 피해자 집에 침입하여 칼빈총으로 공포 1발을 발사한 후, 현금 12만원 강취
 · 동일 01:30경 신안동 소재 피해자 집에 침입 칼빈총으로 위협하여 현금 x만원 상당 강취(금액 판독 불가)
 · 동일 02:30경 임동 소재 김창길 집에 침입하여 칼빈총 16발을 발사하였으나 피해자 반항으로 미수(피고인 4명)
○ 5.23. 10:00경 양1동 소재 복개식당에 침입하여 주인 등 2명의 여자를 수류탄으로 위협하여 소주1홉을 무전취식하여 공갈
○ 5.26. 22:00경 주월동 테니스장 앞 길에서 피해자를 칼빈소총으로 위협, 금 114,000원 강취하고, 주월동 세탁소 골목길에서 또 다른 피해자로부터 시가 32만원 상당의 오토바이를 강취

* 5.21~27간 치안은 그 전보다는 오히려 나았으며, 그 때도 금남로는 금융가였고 한국은행, 상업은행, 조흥은행 등이 있었는데 한군데도 털리지 않았음. 은행에서 혹시 총을 들이대면 줄려고 준비하는데도 있었음(정○○ 前 5․18 유족회장)
— 하지만 국방부, 국가안전기획부에서는 특정사건을 반복해서 기재하거나, 구체적 피해사실이 확인되지 않는 사건을 나열함으로써 계엄군 철수 이후 무장폭도에 의해 광주 시내가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진 것처럼 기술

< 주요 사건 사고 >
○ 광주사태의 실상(국방부)(국방부, 광주사태의 실상(’85.7) 36~68쪽) 기재 내용
- 5.20 밤10시경 콘티빵 특약점에 불을 지른다고 위협하여 100만원 상당 빵 강탈
- 5.21. 09시경 풍광식품 난입 몽둥이 휘두르며 빵 5천개 탈취
        10시경 금성센타 난입 경상도 사람 운영한다며 전자제품 방화
        13시경 양림동 등대주점에 시위청년 침입하여 현금 1백만원 강탈
        시민 협박 오늘 밤 쌀과 돈을 가지고 나오라며 서명을 받음
        비폭력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폭도 난동 만류하다 폭행 당함
- 5.22 황금동 박순휴 외과병원 폭도 2명 침입, 현금 귀금속 등 2백만원 강탈
        양동 우진아파트 침입 폭도 침구 강탈
        삼익아파트 주민 등 식사 제공 강요
        주유소에 들어가 탈취 차량에 강제 급유
        학동 지원동 일대 폭도들이 집을 비우라고 총기 위협 내쫒음
        목포 보해양조 현금 35만원, 행남사 1백만원 아세아전자 시계 10개 강취
        상점마다 음료수 빵 요구, 거절하면 쏘아버리겠다고 총구 들이댐
        가가호호 방문하여 사망자들 장례비 명목 금품 요구
- 5.25 11시경 황금동 금은방 병원 침입, 공포 위협 후 3백만원 강취
       오후 3시20분 광천동 양곡수송차량 1대 탈취
- 5.26 새벽 학운동 거주 최득춘 일가족 3명 살해
       황금동 박비뇨기과병원 폭도 3명 침입 공포 위협 후 3백만원 강취
       동명동 3가구에 무장 폭도 침입 재물 강취

< 주요 사건 사고 >
○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안전기획부)(국가안전기획부,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85.6) 62~89쪽) 기재 내용
- 5. 21.
 ․17:00∼20:00 한국낙농 급습, 매일우유 9백상자, 요구르트 1백만원 상당
 ․20:00∼23:00 삼립식품 식빵 676상자, 영일식품 식빵 86,592개
- 5. 22.
 ․08:45∼09:35 광산 서창, 아파트 침입 군인가족 색출
 ․10:00∼11:45 광주 일원, 민가 및 방위산업체 기습 약탈
 ․15:00∼20:00 도내 일원, 무장 폭도 도내 주민 살상
               해남, 식칼소지 폭도 10여명 계엄분소장 공관 침입 기도타 검거
               지산동, 광주 법원 앞 민가 침입 약탈(쌀 생필품 및 현금)
 ․ 20:00∼22:00 풍향동, 민가 약탈 강도 자행
- 5. 23.
 ․00:30∼05:00 함평, 문장고개에서 행인 대상 금품 탈취(계엄군 1명 검거)
               목포 응해, 민가침입 강도 약탈 자행(현금 40만원, 다이아 1개 등)
 ․06:00∼12:00 도청 앞, 무장폭도 시체 59구 전시 후 호별방문 장례비 강제징수
- 5. 25.
 ․08:00∼14:00 도청, 무장폭도 강경파간 내분 발생 총격전(민간인 2명 사망)
               황금동, 무장폭도 금은방 및 병원 침입 현금 3백만원 탈취
 ․14:00∼22:30 지원동, 무장폭도 민가침입 1가구 3명 사살
- 5. 26.
․07:55∼08:10 학운동, 무장폭도 민가침입 최득춘 등 일가족 3명 사살
              학운동, 무장폭도 의상실 침입 및 가족 3명 사살
              황금동, 폭도3명 청자여관 영향약국 해동식당 침입
              총기 난사 후 금품 약탈

— 학운동 일가족 3명 사망사건은(동아일보, 일가 3명 총격 피살(’08.5.26)) 실제 가족 내 원한에 의한 일회성의 우발적 사건이었음에도 군과 안기부 기록에는 무장폭도에 의한 여러 개의 사건처럼 기재하는 등 사실을 왜곡하고 있음
* 사건이 있긴 있었으나 시위대가 죽인 것은 아니며, 젊은 방위병이 개인적 감정으로 계모, 이복동생, 친아버지를 죽인 사건. 가해자는 현직 군인이었기 때문에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이 되었는데 5․18 시민군 중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없었음. 5․18을 비하하는 세력들은 이 사건을 시민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는데 엄연히 잘못된 것(정○○ 前 5․18 유족회장)
* 상무대 영창에서 가해자 최○과 4~5개월 정도 함께 수감생활을 함. 당시 최○에게 사건 경위를 물어보았는데 새벽에 자기집 담을 넘어 들어가다가 계모와 이복동생이 뭐라고 하니까 깜짝 놀라서 방아쇠를 당겼다고 했음. 이후 남한산성으로 이감되어 사형이 집행됨(윤○○ 現 5·18구속자회 지회장)
* 침입강도가 3명을 총으로 살해했다면 수사본부가 꾸려졌을 것이며, 폭력반장이라 항상 무전기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시내 상황을 다 알 수 있었는데 그런 일은 없었음(전○○ 광주서 수사과)
— ‘광주사태의 실상’에서도 21일 발생한 황금동 박승휴 비뇨기과병원 강도 사건을 22, 25, 26일 세 차례나 발생한 것으로 반복 기재

< “광주 일가 3명 총격피살”(동아일보 1980. 5. 26.) >
· 26일 새벽4시 광주 동구 학운동734-1 최득춘씨(52) 등 일가족 3명이 카빈총에 난사당해 숨진 시체로 발견.. 피해금품이 없는 것으로 보아 원한관계...
· 지난 21일 밤9시 광주황금동 76-3 박승휴씨(43)의 비뇨기과병원에 20대 청년 3명이 카빈총을 들고 들어와 공포 5발을 쏘는 등 간호원과 가족들을 위협, 현금1백만원과 다이아반지등 모두 3백여만원어치 금품 빼앗아 달아났다.

시위대의 외곽진출과 교도소 습격설

❍ 계엄군은 5.21 오후 시내에서 철수하면서 광주외곽 지역을 차단하기 위해 외곽봉쇄작전을 수행(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조사결과보고서 93쪽)
※ 3공수 : 광주교도소 경계, 남부고속도로 차단 / 7․11공수 : 광주-화순 도로 차단 / 20사단 : 광주-목포 도로 차단
❍ 일부 문헌에서 ‘시위대의 폭도화’를 주장하기 위한 핵심 사건으로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을 들고 있으나 사실관계 왜곡 추정

무장 폭도들의 가장 위험하고 대담한 시도는 광주교도소에 대한 공격이었다. 당시 간첩 및 좌익수 170여명을 포함한 2,700여명의 복역수가 수용되어 광주교도소는 낮 12시20분경 폭도들의 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가담한 폭도의 대부분은 과거 이 교도소에 복역했던 전과자, 당시 수용중인 복역수의 가족 및 이들을 탈옥시키려했던 극렬시위자 등이었다.(국방부, 광주사태의 실상(’85.7) 47쪽)

— 5. 21. 오후부터 다음날까지 6차례의 공격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당시 시위대의 무장 수준을 볼 때 실제 교도소 1개 공수여단이 무장한 채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던 교도소를 습격하여 재소자의 탈옥을 계획했다고 보기에 현실성이 떨어지며
 ※ 5. 23. 11:00경 칼빈 소총 1정과 실탄15발을 휴대하고 교도소 전방 약 500미터 지점인 학산중학교 앞 노상까지 계속 싸이렌을 울리면서 질주(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46권 207쪽 판결문)
 ※ 22일10시20분경에는소방차를몰고와총격을가하는등공격양상이매우집요했다.(전두환 회고록 520쪽)
*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냐,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당시 광주교도소장 한○○)(5․18 당시 시민군 광주교도소 습격 사실무근(연합뉴스 1995.12.14.))
— 시위대는 집단발포 이후 계엄군에 대응하기 위해 화약고․광업소 등 무기보관 장소로 이동 중이었으며, 광주 교도소 방면 진출 또한 재소자 탈옥 목적이라기 보다 무기확보를 위한 것으로 보여짐
※ 15:00 지산 화약고에 갔던 폭도들이 교도소 무기 탈취하러 출발했다 함(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322쪽)
— 또한 담양방면으로 진출하려는 시위대를 교도소를 향해간다고 전파한 사례가 확인되는 등 오인, 또는 왜곡 가능성 농후
※ 5.20. 01:25 ‘차량 2대가 담양 쪽으로 사람 싣고 가며 노래부르고 병 등을 가지고 간다는 것’을 ‘데모군중이 교도소를 향해 간다’고 통보(교도소 이○○에게 연락)(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광주서 상황처리 기록부 57쪽)
5.21. 14:25 데모대원 추럭 5대로 담양, 창평으로 무기탈취하러(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광주서 상황처리 기록부 66쪽)
5.21. 16:00 이후 군추럭 및 버스 20대 30여 명씩 승차 담양 쪽으로 진행(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광주서 상황처리 기록부 68쪽)
* 광주교도소 쪽에서 총격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갔더니 아마 계엄군들이 광주교도서 인근에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러 나가는 사람들을 못나가도록 저지하면서 그 쪽을 뚫고 나가려는 저희 시민들을 향해서 무차별 총격을 가한 것 같음. 도로변에 군데군데 시체가 널려있는데 계속 사격을 하기 때문에 시체를 가져올 수 없었음(5․18 청문회시 시민군 박○○)(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5권 315쪽)
— 오히려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배치된 3공수여단의 연행자 강경진압 및 단순 통행자 등에 대한 총격으로 다수 사망자 발생
* 광주교도소에 31사단이 주둔하고 있다가 5.21. 17:00 이후에는 전남대에 있던 3공수여단이 들어오게 된다. 31사단은 향토사단이라 과격하게 하지 않았는데 3공수가 오면서 사망자도 발생하고 문제가 심각. 담양 대덕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집에 가다가 먼 거리에서 쏜 총에 맞아 숨지기도 함(정○○ 前 5․18 유족회장)

○ 5.21 오후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면서 연행 시위대를 천막을 씌운 트럭으로 수송하였는데 흥분한 일부 공수부대원들이 호송트럭 안으로 최루탄과 가스를 집어넣고 진압봉으로 가격·군화발로 구타, 질식사 등으로 6명 사망
○ 5.21. 오후 교도소 앞 주유소에서 31사단 병력과 임무교대중 버스 2대에 칼빈을 장착한 시위대의 기습사격으로 공수부대원 1명 부상
○ 5.21. 19:30경 차를 타고 교도소를 지나가던 담양 주민 4명이총격을 받아 2명 사망
○ 5.22. 00:40경 시위대가 차량 6대에 분승, 군과 교전이 벌어져 시위대 3명 사망
○ 5.22. 10:00경 교도소 옆 진입로 입구에서 트럭을 타고 통과하던 3명이 총격을 받아 1명 사망(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 106~112쪽, 213쪽)

— 철수과정에서 발생한 시체 및 교도소 인근 교전과정에서 사망한 시체 등 12구의 사체를 교도소 부근에 가매장(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 213, 214쪽)
❍ 특히,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던 주요지점에서 계엄군에 의한 피해가 발생했던 점으로 보아 외곽 통제를 위한 무력행사를 정당화하기 위한 시도로 추정
 ※ 5. 23. 11:30, 지원동 주남마을에서 외곽봉쇄중이던 11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주민 17명 사망(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조사결과보고서 96쪽)

5․18 당시 북한군 개입설

❍ 일각에서 북한군 개입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으나, 5 18의 전 과정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었던 정보 형사의 증언, 거동수상자의 신원 확인 등 당시 시민군의 자구노력과 관련 기록 등을 검토한 바, 신빙성이 떨어짐

< 전두환 회고록 북한군 개입설 >
○ 전개된 일련의 상황들이 지금까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북한 특수군의 개입정황이라는 의심을 낳고 있는 것이다. (406쪽)
○ 5·18사태 당시 광주 현장에 있던 군 관계자들의 증언이나 진술, 기자 등의 목격담 이외에 관련 자료나 정황증거 등을 들어 연 고대생으로 알려졌던 600명의 시위대가 북한의 특수군이라는 주장이 몇몇 연구가들에 의해 그동안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533쪽)

❍ 5․18 전후 정보형사 및 현장경찰관 의견
— 정보형사들은 지정 장소에 배치되어 상황을 전파하거나, 시위대를 따라 이동하며 이동상황, 주요참가자, 시위내용, 특이사항 등을 공중전화나 정보센터(23개소)를 이용하여 전파
* 당시 광주서 정보과 학원반 형사 4명은 전남대 부근에 여관방을 얻어 놓고 기거하면서 전남대 시위상황을 파악하여 서에 보고하였고, 시내 진출 이후에도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동향을 수시로 유선보고(장○○ 광주서 정보과)
— 5.21 계엄군 철수 이후에도 정보형사들은 광주 시내에 남아 관내 상황을 수시 전파하였고, 재진입시 지리 안내 역할을 수행할 정도 현장에 밀착된 근무를 하여 누구보다 상황파악이 정확했음
* 광주서 정보과에 외근형사가 15명, 정보2과에 15명 정도가 있었는데 시위가 발생하면 사복으로 시위대와 함께 이동하며 상황을 보고하였고, 경찰 해산한 이후에도 정보형사들은 시내에 나가서 지속적으로 시위대 움직임을 파악하여 보고(김○○ 광주서 정보2과)
* 경찰이 해산되고 계엄군이 들어올 때까지 나와 정보2계 외근 형사들은 시내 상황을 파악하여 보고하였고, 일부 직원들은 계엄사에 동원되어 비무장으로 목숨을 걸고 계엄군을 안내하기도 하였음(한○○ 광주서 정보2계장)
— 5·18 시작부터 계엄군이 들어오는 전 과정의 현장에 있었으나, 관계기관이나 현장 경찰관들끼리도 북한 관련 첩보는 전혀 거론된 바 없었다고 증언
* 5․18 당시 북한군 600명 광주 침투설은 말도 안되는 소리. 600명이나 내려왔는데 경찰들이 모를 수 없는 일이며, 설령 당시에 몰랐을 지라도 나중에라도 파악이 됐을 것(정○○ 전남경찰국 인사계장, 전○○ 광주서 수사과 폭력반장, 김○○ 광주서 감찰)
* 안기부에서 공작비, 활동비, 수사비 등이 모두 나왔음. A급 공작(간첩 검거 공작)도 해야 했는데 공작비가 아니라 실적 때문에 없으면 억지로 만들기도 했는데 북한군이 나왔다는 첩보가 있었으면 완전 A급 공작이 되는데 그것을 그냥 넘어갈 대공형사가 어디 있겠나(강○○ 전남경찰국 정보과 대공분실)
* 5․18당시 북한군 600명이 내려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광주 시민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민주화를 위한 것이지 북한을 동조하기 위함은 아니었음. 북한군이 왔다는 것은 순 엉터리(박○○ 광주지검 수사관)
* 5‧18때 정보형사들이 시위대에 근접해 따라 다녔고, 군과 경찰이 철수한 뒤로는 먼발치에서라도 다 지켜보았다. 그 당시 경찰 근무한 사람들한테 물어봐라. (북한군을) 봤다는 사람이 없었음(고○○ 광주서부서 정보과)
* 그렇다고 북한군 특수요원 600명이 광주에 들어 왔다고 하는 것도 너무 터무니없는 말. 내가 경찰 재직 기간 동안 정보와 대공 업무를 오래 했는데 5․18 당시 전혀 들어 보지 못했음. 당시 경찰보다 정보력이 강했던 보안사나 정보부에서 북한군이 들어 왔다면 그 사실을 인지하였을 것이고, 인지하였다면 어떻게든 경찰에게 지시하여 소정의 조치를 하게 하였을 것임(한○○ 광주서 정보2계장)
❍ 북한군 개입설의 신빙성을 상쇄하는 정황 및 기록
— 나주․화순 등지에서 시민군들이 간첩용의자를 잡아 경찰에 신고·인계하였고, 서부서 강경섭이 간첩으로 오인받아 끌려간 사실 등 시민군들이 당시 대공 용의점을 가진 사람을 내부적으로 적발하는 활동을 펼침
* 5. 22. 6시경 데모대 차가 경찰서 앞에 정차하므로 총을 겨누고 접근하면 발포한다고 고함을 지르자 간첩을 잡았다며 인계를 받으라고 하여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한 사람을 인계받아 정보3계 나천일에게 인계한 기억도 있음(김일성 운운하며 횡설수설하는 여자로 당시 대공혐의점 없어 석방)(염○○ 나주서 보안)
* 5.24. 15:40 농성동에서 주민들이 경장 강경섭을 붙잡아 폭도 찝차에 태워 어디로 가버렸음 / 16:15 경장 강경섭을 간첩으로 오인하여 체포 후 집에 가서 주민등록증 확인 후 석방함 (서부서 상황일지)
* 5.24. 00:15경 신고자 최○○(55년생)의 거동수상자 출현 신고에 따라 군부대와 합동 수색한 결과,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212에서 2명을 발견하였으나 대공상 용의점 없음으로 확인됨(화순서 상황일지)
— 전남경찰국 통신 요원들은 시민군으로부터 출입증을 받아 대간첩 작전에 필요한 통신망을 회복시킨다는 명목으로 도청을 출입
※ 5. 23. 09:10경 경감 박○○ 외 34명이 도청 정문에서 경찰관의 신분증을 제시 대간첩 작전 통신망을 소통키 위하여 통신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고지하고 출입증을 발부받아 3차례에 출입(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96쪽)
— 전남경찰국에서 작성한 「광주사태진상」(80. 5. 30경)(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157∼168쪽)을 보면 5. 18. 16:00 계엄군 투입, 강력히 해산시키던 중 부상자 속출로 시민들 자극하였고, 유언비어 유포 등으로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가세하여 계엄군에 폭력으로 대항한 것으로 정리하였을 뿐, 북한군 관련 내용 전혀 없고,
—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85)」에는 시민군의 세세한 활동까지 시간대별로 기재될 정도로 상세한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관련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음
— 결국, 5 18직후 어떤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북한군 개입설’의 의도적 거론은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려는 시도로 보임
※ 국방부, 백군기․진성진 의원실에 제출한 국회 요구자료에서 5․18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는 공식 입장을 밝힘(’13)(5편으로 계속)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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