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경찰이 국민을 향해 발사한 총탄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가를 떠올리며 참모들과의 협의 끝에 무장하지 않기로 결정. 4.19때 김주열의 시체에 최루탄이 박힌 모습이 생생하고 경찰이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으며, 경찰이 피해를 당하더라도 민중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3회 내용은 ‘계엄군 투입 이후 경찰의 역할(5.18~5.21)’이다. 이 자료에서 전남경찰은 군이 투입된 다음날인 19일로 기억되는데 안병하 국장이 경찰관서 보관중인 모든 무기를 31사단으로 소산하라고 지시했고, 만약 그때 무기를 소산하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참혹한 일들이 생겼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남경찰은 “안병하 국장이 무기를 미리 소산시킨 것은 아주 잘한 일. 경찰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시민에게 발포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민과 적이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군과 시민들의 무장 충돌사태로 비화되자 경찰은 해산키로 결정하고 5월 21일 15시경 도청을 선회하는 경찰헬기에서 안병하 국장이 직접 무전기로 장비를 도경에 반납하고 해산하라는 무전을 몇 차례 반복했다. 지시를 받은 경찰들은 “작업복과 장비를 벗어 던지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청 담을 넘어 정신없이 어디론가 도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계엄군과 시민이 무장을 하고 맞서는 극한상황에서 경찰은 공권력의 임무를 포기하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주한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시민들이 점거했던 전남도청. 경찰은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시민들이 총격전을 벌이자 15시경 해산을 결정,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청 담을 넘어 어디론가 도주했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공권력의 지위를 포기하고 스스로 해산한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시민들이 점거했던 전남도청. 경찰은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시민들이 총격전을 벌이자 15시경 해산을 결정,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청 담을 넘어 어디론가 도주했다. 국가 위기 상황에서 공권력의 지위를 포기하고 스스로 해산한 것이다.

Ⅱ. 계엄군 투입 이후 경찰의 역할 (5. 18. ~ 5. 21)
 

○ 5.17. 22:00, 정부는 비상계엄확대선포를 의결하고 포고령 10호를 발표, 광주에 1,920여명의 계엄군 투입

※ 포고령 10호 주요내용 : ①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5.18. 00:00), ② 모든 정치활동 중지, ③ 언론․출판․방송 사전검열 ④ 각 대학 휴교 조치

○ 계엄군 투입 이후 해산위주 경찰작전과 달리 추격, 폭행 후 검거 및 연행으로 이어지는 계엄군의 공세적 진압작전이 전개되었고, 이후 시위군중 급속 증가

※ 공수부대의 초기 과격진압은 학생시위에 시민들이 적극 동참해 항쟁으로 나가는 주요 원인이 됨(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75쪽)

○ 경찰은 계엄분소장의 지휘감독을 받아 계엄군의 후미를 지원하는 2선을 담당하거나 연행된 시위대를 호송하는 역할을 하였고, 5. 20.부터는 노동청, 금남로 입구, 충장로 입구 3방향 1선에서 시위대의 도청방면 진출을 차단하는 임무 수행

○ 이 기간 중 12개 경찰중대로 계엄군의 작전을 지원하였으며, 시내 주요 지점에 정보센터(23개소)를 운영하며 시위 진행사항을 파악하였고, 입수한 관련 첩보는 치안본부에 보고함과 동시에 도지사, 31사단장, 보안부대장에게 통보하며 유관기관과 협조체제 구축

주요 상황

❍ 경찰, ‘예비검속’ 에 동원, 대학생 주요간부 등 검거작전 지원

❍ 5.18. 새벽 도내 대학 및 중요시설에 계엄군 배치(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 검찰부, 5 18관련사건 수사결과 56쪽)

※ 7공수여단 : 본부(장교 10, 사병 76) / 33대대(장교 45, 사병 321) <전남대> / 35대대(장교 39, 사병 283) <조선대>

31사단 : 장교 14, 사병 1,132(도내 16개 대학 및 중요시설)

❍ 5.18. 10:00 전대 정문 앞 200여명 집결, 계엄확대와 휴교조치에 항의하며 투석하다 공수부대의 강력한 해산조치에 도심으로 진출

❍ 5.18. 16:00경 금남로로 진출한 7공수여단 33대대가 최초로 광주 도심에서 시위대 해산작전 전개

※ 17:10 헌병대에서 광주서에 데모대원 100여명 검거, 인계한다고 함(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 2권,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28쪽)

❍ 5.18. 파출소 5개소 집기류 파손(투석), 페퍼포그 1대 전소 피해발생

❍ 5.18. 273명 체포, 시위진압과정에서 김○○(남, 28세)이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을 입고 치료 중 5. 19. 03:00 사망<최초사망자>(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검찰부, 5 18관련사건 수사결과 64쪽)

※ 5.18. 20:40 252명 수송하였음(계엄사)(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 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34쪽)

❍ 5.18. 야간부터 시위군중 급속 증가, 19일부터는 도심 곳곳에서 계엄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하였고, 21:15 경찰관서 최초로 임동파출소 방화

※ 5.19. 16:00 데모대원 216명 수용중임(보호실)(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 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36쪽)

※ 5.19. 22:31 임동파출소 방화범 13명 전남북 계엄분소 치안처로 인계지시(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294쪽)

❍ 5.19. 17:00 광주고 부근 동원예식장 길 건너편에서 공격을 받던 장갑차의 장교가 M16소총 발사하여 김○○(19세, 조대부고3년)이 대퇴부 총상(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검찰부, 5 18관련사건 수사결과 72쪽)

❍ 5.19. 22:00 광주권 2개서 무기 실탄 및 비밀문서 소산 완료

❍ 5.19. 22:00 연행자 계엄분소 인계 총 311명, 24:50 연행자 34명 추가(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 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38쪽)

❍ 시위군중 급속 증가로 5.20. 15:00부터 도청 주변 노동청, 금남로입구, 충장로 입구 3개 방향에 최후저지선 각 설정하고 방어작전 전개

❍ 5.20. 18:00 이후 차량시위 시작(택시200여대, 버스 등)(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 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46-47쪽)

❍ 5.20. 주요 피해상황 10개 파출소 파괴, 함평서 직원 사망(4명), MBC등 전소(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 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58쪽)

❍ 5.20. 22:30∼5.21. 02:00 광주역 인근 시위진압과정 발포로 4명 사망, 6명 총상(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검찰부, 5 18관련사건 수사결과 89-90쪽)

❍ 5.20. 오후, 광주세무서 CAR 17정 절취, 단 실탄은 가져가지 않음(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 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62쪽/ 광주서에는 5.20 오후로 기록)

❍ 5.21. 12:59~17:30, 계엄군의 집단발포, 경찰해산 및 계엄군 퇴각

※ 이에 앞서 12:00∼14:00 사이 전남대 앞에서 주부 최○○ 등 2명 총상으로 사망(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검찰부, 5 18관련사건 수사결과 96쪽)

※ 집단 발포 상황에서 진○○(남, 27세) 등 35명 이상이 총상으로 사망(서울지방검찰청 국방부검찰부, 5 18관련사건 수사결과 105-106쪽)

❍ 5.21. 14:52 국민은행 앞 군중이 AR 1정, CAR 40여정에 장전, 도청 앞쪽으로 거치(전남경찰국, 집단사태발생 및 조치사항(기무사 383-1980-99) 322쪽)

❍ 5.21. 15:00-15:03 학생 20명 총기(칼빈1정, 실탄30발) 휴대, 우체국 쪽으로 진격(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 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66-67쪽)

 

시위 상황 및 경력운용(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266~323쪽)

- 5. 18. 10:50, 전남대 정문 앞 200여명 계엄군에 투석

- 5. 18. 11:25, 학생 200여명, 충장파출소 유리창 7매 파손

- 5. 18. 14:55, 기동1중대 곡차, 학생이 던진 휘발유병에 지붕에 불

- 5. 18. 20:15, 카톨릭센터 앞 1,000여명 경찰, 계엄군에 투석

- 5. 19. 14:30, 학생 2천여명이 도청쪽으로 시위

- 5. 20. 18:50, 금남로 광주은행 앞 5만여명 시위

* 차량시위 전개 : 택시 200여대, 버스, 트럭 등

- 5. 20. 21:00, 버스 1대가 노동청 앞 저지선을 뚫고 진입, 경찰관 4명 사망

- 5. 21. 10:57, 시위 군중 20만명 추산

- 5. 21. 12:59, 계엄군의 시위대에 대한 집단발포

- 5. 21. 13:30~, 시위대, 무기고 및 화약고에서 무기․탄약 탈취 시도

- 5. 21. 16:00, 각 서 동원부대 동원해제

- 5. 21. 17:21~17:34, 기동대 철수지시 및 경비본부 철수

❍ 경력 운용

— 경찰 경력 현황(5.18~21)

광주권 동원병력 현황(101/2,156)(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283쪽)

— 전남권 타 경찰서 경력지원

경찰서별 60명 규모로 3개 서를 묶어 1개 중대를 구성하였으며, 근무·휴식시간 구분이 없었고 5.20. 포위된 이후 급식추진도 중단

* 별도의 휴식시간도 없이 선두에서 후미로 교대되면 길바닥에 쓰러져 자는 것이 전부, 20일부터는 급식 추진이 불가능하여 헬기로 주먹밥 공수(최○○ 1기동대)

* 처음에는 정상적으로 밥이 추진되다가 나중에는 단무지가 들어있는 김밥이 추진되고 마지막에는 소금으로 간을 한 주먹밥이 나옴(천○○ 1기동대)

— 시간대별 경력운용(전남경찰국, 치안질서회복을 위한 경찰의 조치(기무사 383-1980-98) 386~388쪽)

5. 19. 고등학생들의 시위 참여로 시가지에 경력 추가 배치, 5. 20. 오후부터 시위대가 도청주변으로 집결하자 도청주변으로 경력 집중배치(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297쪽)

— 시내 중심가 또는 집결용의 장소 23개소에 정보센터 운영, 각종 시위상황 파악 및 전파

* 시내중심가 내지 데모군중 집결용의장소 23개소에 경비전화를 가설, 1개소 당 경찰관 2명씩을 배치하여 군중의 조기집결 및 동태를 파악케 하는 정보센터 운영(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안병하 진술조서2회 61-62쪽)

 

계엄령 하 경찰역할 한계

❍ 계엄령이 확대된 시점에서 경찰은 계엄법에 따라 군의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시위관리․치안유지의 보조적 역할을 수행

* 5.18. 00:00 이후는 모든 작전지휘권이 군에 이관됨(안병하 전남경찰국장)

* 군인들이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경찰부대는 군인들의 후미를 받쳐주는 2선 개념으로 운영(군인들이 시위대 방향으로 돌격하면 경찰부대가 그 후미를 경계해주는 형태)(모○○ 2기동대)

※ 계엄법 8조 ① : 계엄지역의 행정기관 및 사법기관은 지체 없이 계엄사령관의 지휘감독을 받아야 한다.

— 보안사, 진입 전일 정보경찰 등 동원하여 ‘사전검속조’ 운영

※ 광주지구 보안부대는 보안사의 지시에 따라 5.17. 23:00부터 시위 주동자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 등 연행대상자 22명 중 8명을 체포(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 56쪽)

* 5. 17. 23시경 정보 외근형사들 40여명이 화정동 보안부대로 비상소집 되었는데, 전대 학생회 간부 등 요주의 인물들을 검거하러 가는 보안사 요원들의 길안내를 하게 하였음(장○○ 광주서 정보과)

* 5. 17. 22시경 광주서와 서부서 정보 형사들이 화정동 보안사로 비상소집되었으며, 감시조와 체포조로 나뉘어 활동을 하게 되었고, 경찰들이 보안사 요원들에게 협조하지 않았음(고○○ 서부서 정보과)

— 상황관련 입수된 첩보는 즉시 치안본부에 보고함과 동시에 도지사, 31사단장, 보안부대장에게 통보하며 유관기관과 관련첩보 공유

※ 5. 19. 10:20 경무계장, 공수여단 본부와 연락망 운영지시(간부2, 비간부2, 2명1조)

* 도청 철수 전에는 광주주둔군부대 31사단장과 직통전화를 가설하고 경찰국 상황실에 첩보전달을 위하여 31사단 연락장교가 수명 파견되어 있으며 중요첩보는 수시로 31사단에 통보. 계엄분소 정보참모인 임장군 실에 간부 1명을 연락관으로 고정적으로 파견, 업무연락을 취해옴(안병하 국장)

❍ 경찰의 병력지원 요청 관련

— 전두환 회고록 등 일부 자료에서는 전남경찰국의 요청으로 계엄군이 시위진압 전면에 나섰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 시위대가 파출소를 습격하고 순찰차를 전복 방화하는 사태로까지 악화되자 전남도경은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정식으로 요청(전두환 회고록 391쪽)

— ‘군 동원의 필요성을 외면한 채 단순 경찰병력만으로 저지 가능하리라는 안일한 판단으로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안 국장에 대한 수사결과와 ‘군에 최초로 병력지원을 요청한 시점은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작전으로 인해 시내상황이 악화된 후인 5. 19. 15:18경(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289, 302쪽)’이라는 경찰 기록 및 전남경찰국 경비과 관계자 증언 등으로 볼 때

○ 5. 19. 15:18, 시위군중 3∼4천으로 증가, 7공수여단 정보 참모에게 병력 지원요청

○ 5. 20. 19:49, 기동 3중대와 함평 장성부대가 의대 5거리에서 군중에 포위, 계엄군 지원요청(7공수)

* 19일로 기억되는데 노동청과 전대병원 사이에 우리 경력이 고립되자 공수부대에 지원을 요청하여 공수부대의 도움으로 포위망을 빠져 나왔으며, 20일 저녁 무렵 이미 시위대가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도청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군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경찰이 군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단 두 차례이며, 지시를 받아 내가 직접 요청(이○○ 전남경찰국 경비계)

— 5. 18. 새벽 계엄군의 대학 점령 및 공수부대의 시내 진압작전의 전면적 투입은 경찰의 요청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음

* 18일 새벽부터 예상치 못한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 산수파출소에서 공수부대 280명 정도가 조선대에 진주하였다고 전화 보고가 오고 서부서에서는 공수부대 320명 정도가 전남대에 진주하였다는 전통이 와서 안병하 국장에게 즉보를 하였는데 국장도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음(최○○ 전남경찰국 상황실)

❍ 안 국장은 시위가 확산된 후 강경대응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경찰이 시민과 정면충돌하여 경찰의 희생이 발생하면 계엄군이 강력한 진압을 위한 명분으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에 거부

* 5.19. 관계자 대책회의가 끝나고 안국장이 나에게 ‘경찰이 사태수습은 커녕 방관만 하고 있어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 계엄사의 시각이라며 경찰이 강력하게 보다 적극적으로 수습하라는 내무부장관의 불호령이 있었다’고 이야기 함(정○○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직무대리)

* 안국장이 시위진압과 관련, 무장을 해야 되느냐고 물어왔는데 당시 태도로 보아 상부로부터 무장할 것을 재촉 받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며, ‘5.20. 오전 상부에서 상황을 물어와 무장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했는데 또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난감해 하는 모습’이었음(안○○ 화순서장)

— 특히, 과거 경찰이 국민을 향해 발사한 총탄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가를 떠올리며 참모들과의 협의 끝에 무장하지 않기로 결정

* 4.19때 김주열의 시체에 최루탄이 박힌 모습이 생생하고 경찰이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없으며, 경찰이 피해를 당하더라도 민중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정○○ 중앙정보부 전남지부장 직무대리)

* 5.20. 안 국장이 참모회의에서 경찰도 무장을 해서 시위대에 대처하라는 치안본부장의 지시가 있어 많은 고민 중이라고 하자 참모들은 시위진압 경찰관을 무장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김○○ 기동1중대장)

— 당시 계엄당국은 경찰 책임자가 소임을 다하지 못해 사태가 악화되었다며 5. 18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의 책임을 경찰에게 전가

※ 5. 18. 계엄군 진주시 경찰은 도로변을 담당, 11:00부터 작전에 임하였으나, 계엄군에만 의존한 소극적 작전 계획과 협조 미비로 데모저지에 미진하였으며..(전남도경국장 직무유기 피의사건 수사결과)

※ 광주사태 초기에 경찰력이 무력화되고 그로 인해 계엄군이 시위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경찰국장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었다.(전두환 회고록 494쪽)

— 하지만, 안 국장이 취한 일련의 행동은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태도가 아닌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고 인권에 유의한 집회시위 관리’를 강조한 것으로 이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필요

< 전남경찰국장 주요 지시사항(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266~304쪽) >

․분산되는 자 너무 추격하지 말 것, 부상자 발생치 않도록 할 것(5.18. 11:00)

․연행과정에서 학생의 피해가 없도록 유의할 것(5.18. 11:55)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합동작전을 하게되니 각 부대장은 현장유지를 하고

가스차 피탈이나 인명피해가 없도록 조치(5.18. 15:32)

․가스는 가능한 사용치 말고 부득이할 때는1호와 3호차를 교대로사용할 것(5.19.11:20)

․화학탄 사용은 가능한 억제하고, 학생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하지 말고 교문으로 밀어 넣을 것(5.19. 12:55)

․군중 자극하지 말고 선무활동 하면서 침착하게 행동하도록(5. 20. 20:00)

․현 전선에서 사력을 다해 사수하도록 각 부대 지휘관은 책임감을 가지고 도청을 사수(5. 20. 21:27)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경찰의 대응, 시위의 확산

❍ 계엄군은 투입 시부터 해산위주가 아닌 체포위주의 진압방식을 취하는 등 과격진압 양상

— 투입 부대는 수개월 전부터 시위진압 훈련인 ‘충정훈련’을 받아왔으며, 훈련의 강도는 대단히 높았음

※ 많은 공수부대원들은 1980년 초반부터 이전보다 충정훈련 시간이 많아졌으며 부대에서 퇴근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충정훈련을 받았다고 진술(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조사결과보고서 64쪽)

* 당시 경찰은 국민 안전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시위 진압이 아니라 시위 해산이 목적이었고 달아나는 시위대는 절대 쫒지 않았으나, 공수부대는 소총을 뒤로 맨 상태로 시위대가 던지는 돌을 피하다가 공격명령이 떨어지면 미리 정해둔 시위대를 끝까지 추적하여 구타 후 연행(문○○ 광주서 학원계장)

* 경찰 부대 앞에서 공수부대가 1개 분대 12명 단위로 돌격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착검한 M16 소총을 등에 가로로 매고, 1미터 가량 되는 목봉(경찰봉은 50센티미터 가량의 플라스틱봉)으로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가격(조○○ 화순서 중앙파출소)

* 공수부대가 보이는 사람을 가격하여 길바닥에 쓰러뜨린 후 군홧발과 목봉으로 실신상태를 만든 후 기절한 사람의 다리와 머리 부위를 군인 두 명이 잡아서 트럭에 올리는 식으로 트럭에 태웠음(구○○ 전남경찰국 상황실 전경)

— 또한, 계엄군은 5. 20. 원래 사용하던 것보다 더 길어진 진압봉 2,313개를 공수하여 시위진압 중인 공수부대에게 배분하는 등 강경일변도의 작전 전개(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72∼73쪽)

❍ 계엄군의 공격적 진압 관련 문헌 내용

< 국방부,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64쪽) >

— 출동부대가 초동단계에 신속 진압, 군이 진압을 위해 투입되면 인명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감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타격, 데모대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 의지를 상실토록 위력을 보여야 한다는 내용의 ‘부마지역 학생소요사태 교훈집’이 5·18민주화운동 진압작전에 영향

※ 5.18. 23:00 2군사령관 강조사항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끝까지 추적하여 타격 및 체포’ 지시(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65쪽)

— 실제 7공수여단 33대대는 5.18. 15:40~16:30에 진압작전을 전개해 103명 체포, 35대대는 15:50~19:00에 173명 체포, 5.19 01:50에도 광주시내 골목을 다니며 가택을 수색하면서 시위진압(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65쪽)

※ 5.18. 17:10 헌병대에서 광주서에 데모대원 100명 검거 인계(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 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28쪽)

※ 5.18. 20:40 252명 수송하였음(계엄사)(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 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34쪽)

— 또한, 광주시내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은 진압봉이나 총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

< 서울지검, 5․18관련 사건수사결과(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 58쪽~64쪽, 68쪽) >

— 학생들은 계엄확대와 휴교 조치에 항의하면서 돌을 던지고,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향해 함성을 지르며 돌진하여 해산을 시도하였는데,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

— 공수부대원들은 돌격 명령이 내리면 함성을 지르며 시위대를 향하여 돌진하면서 진압봉으로 시위대를 가격하는 방법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는데, 시위대의 투석으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흥분한 공수 부대원들은 인근 점포나 골목, 건물 안까지 추적하여 시위대를 체포

— 5.19. 12:00경 시위 중이던 학생들이 공수부대원에 쫓겨 YWCA로 들어가자, 공수부대원들은 직원이 내린 셔터를 올리고 안으로 들어가 진압봉으로 가격하면서 학생들과 신용협동조합 직원들까지 끌어내 도로에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함

< 동구청 상황일지(광주 동구청, 5․18 사태일지 11~13쪽) >

— 조선대학 입구 철로변에서 공수부대 군인이 지나가는 학생 11명을 총 개머리판으로 구타(5.18, 21:00)

— 조선대학으로 군 트럭에 학생들을 연행, 갑바를 씌워 일어나면 발로 차고 감(5.19, 10:52)

— 금남로 통은 공수부대들이 곤봉으로 때림으로 시민들 없음(5.19, 11:00)

— 일반시민 15명 정도가 충금지하상가 쪽 및 각처에서 팬티만 입고 관광호텔 앞에 있으며 등·어깨·다리는 곤봉 및 워커발 태죽이 이며 빨갛게 되었음(5.19, 11:15)

❍ 경찰은 무차별적으로 강경 진압하는 계엄군을 제지하거나 항의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욕설과 폭행을 당하는 등 수모

* 금남로 일대에서 계엄군이 연행한 학생 4~5명을 경찰에 인계하였는데, 방했다는 이유로 공수부대 대위가 도경찰국 작전과장의 조인트를 까기도 함(염○○ 나주서)

* 전일빌딩으로 가는 길은 학원가가 많았는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목봉으로 구타하며 연행 하였고, 이를 목격한 광주서 경비과장이 제지하다 오히려 가격 당하자 이를 목격한 경찰관들이 공수부대원에 항의(맹○○ 광주서)

* 학생들을 잡으면 목봉으로 두들기면서 신체 아무 곳이나 가격하여 피투성이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무자비한 진압을 보고 당시 광주서 경비과장이 이를 제지하자 공수부대가 군화발로 두어차례 차기도 하였으며 이런 내용이 시민들에게 펴져 경찰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됨(최○○ 1기동대)

※ 20일 동구청 건물 1층에서 전투복을 입은 경찰국 작전과장 안수택 총경이 공수부대 장교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있었다. ‘왜 폭도들을 빼돌리냐’는 것이었다. 그는 ‘나도 공부수대 출신’이라고 말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김영택, 5․18광주민중항쟁연구 126쪽)

— 계엄군의 비인격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보조적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절감

* 공수부대들이 검거한 학생들을 싣고 와서 광주경찰서에 인수인계를 하였는데, 트럭 문을 열고 피투성이 상태인 학생들을 발로 차면 아래로 떨어지는 식으로 하차를 시켰음. 우리는 이럴 수가 있냐고 흥분을 하여 화를 냈으나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김○○ 영광서)

* 공수부대 진입 후 사복을 입거나 계급장도 없는 보안사 군인이 서장실에 들어가 안하무인 격으로 이래라 저래라 지시(안○○ 광주서 수사과)

* 경찰국 작전과장이 공수부대에 폭행당하고 경찰서 경비과장도 강경진압을 말리다 폭행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광주서 직원들은 공수부대와 자주 충돌하였으며 만약 경찰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공수부대와 교전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신○○ 광주서 청옥파출소)

❍ 계엄군의 공격적 진압방식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합세로 인해 시위 군중이 계속 증가하다 5. 21. 도청 주변에는 20만 명까지 운집

※ 군중 증가 추세 : 1천여명(5.18) → 3천여명(5.19) → 5만여명(5.20) → 20만여명(5.21)

— 시위군중의 급속 증가와 과격화 원인에 대해 군, 안기부 등 각 기관 보고서는 유언비어의 확산 때문이라고 분석한 반면, 현장을 목격했던 경찰관들은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방식이 근본 원인이라고 증언

* 공수부대의 과격한 진압으로 시위 양상이 전투적으로 바뀌었음. 경찰 부대 앞에서 공수부대가 1개 분대 12명 단위로 돌격 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착검한 M16 소총을 등에 가로로 매고, 1미터 가량 되는 목봉(경찰봉은 50센티미터 가량의 플라스틱봉)으로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가격함(조○○화순서)

* 공수부대가 진입하기 이전의 학생들의 시위를 경찰이 잘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공수부대가 진입하여 무자비한 시위 진압으로 구경꾼에 불과하던 시민들을 시위 주체로 만들어 버린 점에 아쉬움(장○○ 광주서 정보과)

* 정보 외근 형사의 관점으로 보면, 대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러한 민주화 운동을 잠재우기 위해 투입한 공수부대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자 시민들이 무장(우○○ 나주서 정보과)

* 공수부대가 나온 후, 상황이 달라졌음. 방패도 없이 긴 곤봉을 들고 젊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때려서 차에 실어서 서부서로 후송을 하면, 고개도 못 들고 차에서 내리면 또 곤봉으로 때려서 피투성이를 만들었음. 이러한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 방식에 시민들이 분노하여 거리로 나오고, 차량 등을 탈취하여 돌진하는 등 시위가 과격하게 변질(정○○ 광주서부서)

* 경찰이 충분히 학생 시위를 관리할 수 있었음에도 어떤 이유인지 공수부대가 투입되었고, 이들이 광주 시민을 자극하여 불행한 사태가 터진 것(오○○ 서부서)

*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을 하면 부마사태처럼 끝이 날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광주는 부산과 다른 양상을 보였음(문○○ 광주서)

— 인원이 증가하고 시위가 격해지자 도청을 중심으로 금남로, 노동청, 충장로 3개 방면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며, 최후저지선 방어작전 수행

* 노동청 앞에서 무안병력과 함평병력이 배치되어 서로 교대(1선․2선) 하면서 도청으로 진입하려는 시위대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하루종일 계속(장○○ 무안서)

* 5. 20. 밤에 우리 2기동대가 노동청 방향을 선두에서 차단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돌진하는 바람에 선두에 서있던 우리는 피하였는데, 우리 뒤에서 잠을 자던 경찰관을 덮쳐서 4명이 현장에서 즉사하는 것을 목격(모○○ 2기동대)

 

경찰의 사전 무기 소산

❍ 계엄군 투입에 따라 사태가 확산되고, 무기 피탈로 인해 피해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안 국장은 사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무기 소산을 지시(5.19. ~ 21.)

— 합수단의 ‘직무유기 피의사건 수사결과 보고서’(전남경찰국, 치안질서 회복을 위한 경찰의 조치(기무사 383-1980-98) 389~392쪽)에 따르면, 안 국장은 치안본부장에게 건의하여 경찰서 및 기동대 무기를 별도 장소로 이동

※ 경찰 무기를 폭도들로부터 피탈을 방지하겠다는 소극적인 발상하에 치안본부장에 건의한 후 경찰 2개서 및 4개 기동대의 무기 약 1,300정을 도경 안전가옥에 이동, 소개(疏開)시킴으로서 5.21. ‘진돗개 둘’이 발령되고 5.22. ‘자위권’이 발동 되었음에도 광주시내에 근무하는 전 경찰의 무장을 불가능(직무유기피의사건 결과 보고서 中)

* 무기 소산 관련해서는 도경국장이 심오한 판단에 의해 작전과와 협의하여 시위대에 총기 피탈을 대비하여 소산하도록 작전2계에서 예하 경찰서에 직접 전통처리(배○○ 도경찰국 작전2계장)

* 군이 투입된 다음날인 19일로 기억되는데 안병하 국장이 경찰관서 보관중인 모든 무기를 31사단으로 소산하라고 지시하였고 만약 그때 무기를 소산하지 않았다면 여러 가지 참혹한 일들이 생겼을 것이라 생각함(안○○ 광주서 수사과)

* 생각해보면 안병하 국장이 무기를 미리 소산시킨 것은 아주 잘한 일. 경찰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시민에게 발포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시민과 적이 되었을 것(최○○ 전남경찰국 상황실)

— 예비군 무기에 대하여는 5. 21. 09:35경, 장성·담양·화순·광산·나주·영암 6개서 예비군 무기․탄약 군부대 소개 지시, 이후 전 관내 예비군 무기․탄약 군부대 이관조치 지시 하달(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75쪽)

< 경찰무기 소산 조치 >(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316~323쪽)

․광주권 2개 경찰서 무기․실탄 및 비밀문건 소산완료(5.19. 22:00)(광주서, 치안일지(’80.5.19))

* 무기(경찰국 대공분실) / 실탄(담양서) / 비밀문건(화순서) / 유치인(나주서)

․경찰국․1중대․118중대 무기를 CAC(전교사) 병기창고에 입고(5.21. 09:36)

․화순무기고 소산조치 지시(5. 21. 11:18)

․각 경찰서 무기고 소산지시(5. 21. 15:46)

* 총기는 노리쇠, 공이 제거 조치하여 안전한 곳에 묻고 노리쇠와 공이는 별도보관

시위대의 경찰관서 등 무기 탈취

❍ 전반적 피탈 상황

— 최초 무기피탈 관련 경찰자료는 ‘5.21. 05:13 광주세무서 무기탈취(실탄 없음)’로 CAR이 아닌 M1 17정만 분실확인(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313쪽)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탄은 탈취당하지 않아 ‘무장’으로 보기는 곤란하고, 이 역시 계엄군의 최초 총격 사망자 발생시간대(5.20.22:00∼5.21.02:00) 이후인 것으로 확인

※ 피탈무기는 다수의 기록으로 볼 때 CAR이 맞으나, 탈취시간은 기록별로 다소 상이 (5. 20. 23:00 <서울지검 국방부 5․18 관련사건 수사결과> /

5. 21. 03:00 <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사건 조사 결과보고서> /

5. 21. 03:20(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관서별 무기피탈 현황표 228쪽) <경찰청, 전남사태 관계기록>)

※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에는 ‘5.20. 오후 광주세무서 무기고 CAR 50정 중

17정 데모군중이 절취하였으나 실탄은 가져가지 않음’으로 기록(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62쪽)

— 실질적인 무기탈취 시점은 5.21. 12:59경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로 시위대는 계엄군에 대응하기 위해 광주 외곽지역 경찰관서․예비군 무기고 등을 습격, 총기·실탄을 탈취하였으며 근거리에 위치한 나주·화순지역의 피해가 컸음(광주권 경찰관서는 기(旣)무기 소산)

— 이외에도 시위대는 조를 편성하여 ‘영암 - 강진 - 해남’ 방면, ‘광산 -함평 - 무안 - 목포’ 방면 등지로 이동하며 5.22 오후까지 무기 탈취

— 이에 반해, 담양서는 5. 21. 15:30, 1차례 피습 당하였을 뿐 피해가 발생치 않았는데, 계엄군이 담양으로 가는 시위대를 광주교도소 길목에서 차단하였기 때문으로 보임

※ 5.21. 14:25 데모대원 트럭 5대로 담양, 창평으로 무기 탈취하려(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66쪽)

* 담양을 가려면 구도로든 고속도로든 모두 문흥동 쪽을 거쳐야 하고 그 쪽에 광주교도소가 있음. 5.21.17:00 이후 3공수가 오면서 사망자도 발생하고 문제가 심각해짐(정○○ 전 5․18유족회장)

— 광주권 경찰서는 대부분 무기를 소산시켜 피해가 없었으나, 전남권 각 경찰관서에서는 무기를 소산 과정 중에 피탈당하거나 이미 소산시킨 무기가 발각되어 피탈

* 지서 차석과 주민들이 합세하여 무기를 지서 앞 블록공장에 숨기는 등 한참 무기를 소산중일 때 유리가 깨진 버스 여러 대를 타고 온 시위대 수십 명이 습격, 무기고 문이 열려진 상태에서 시위대가 들이 닥쳤기 때문에 속수무책(한○○ 나주 남평면 예비군소대장)

* 반남지서에서 경찰관들과 함께 일을 하였는데 지서장이 무기를 숨기라고 전화를 하여 총을 지서 뒤에 묻었는데 몇 시간 후 데모대가 와서 다 파가지고 가버렸음(김○○ 나주 반남지서 사환)

❍ 무기피탈 관련 사실의 왜곡

— 시위대의 무장 시점에 대해 계엄군의 집단발포(5.21.12:59) 이후 계엄군에 대응하기 위해 무장하였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고, 여러 5․18 수사결과나 조사결과 등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으나,

※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5. 21. 13:00경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으로 총기와 실탄을 탈취(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5․18관련 사건수사결과 206쪽)

—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집단발포 이전 무기탈취를 기록한 검증되지 않은 자료를 인용함으로써 사실 왜곡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

※ 나주 반남지서 칼빈3정(5.21.08:00), 나주 남평지서 탈취하려다 체포(5.21.09:00)(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조사결과보고서 90쪽)

※ 13:00경 광산 하남파출소에 시위대 80여명이 차량 3대를 타고 와 칼빈 9정을 탈취하였고, 고속버스, 트럭 등 10여대의 차량에 탑승한 광주 시위대가 함평에 도착하여 군중시위를 벌이고, 신광지서에서총기 1백여정, 실탄 2상자를 확보(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5․18관련 사건수사결과 101쪽)

— 국방부과거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에 인용된 ‘전남도경 상황일지’(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조사결과보고서 90쪽)는 5. 21. 08:00~09:00, 나주 반남지서와 남평지서에서 무기가 피탈되었다고 기재하고 있는데,

— 보안사가 보존하고 있는 ‘전남도경 상황일지’는 집단발포 이전시간대에 시민에 의한 총기피탈을 기록(인쇄)하고 있으나, 당시 경찰이 보유하고 있지 않던 ‘경찰 장갑차’가 피탈되었다는 등 상황에 맞지 않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문서의 불완전성(생산기관․년도 미기재, 표지와 본문의 내용 상이 등), 무기피탈 관련 치안본부 감찰기록 및 당시 근무 경찰관의 증언 등으로 볼 때 조작된 것으로 판단됨

※ 5.21.13:30경 광주방향에서 몰려온 데모대 150여명이 남평지서를 습격하였다는 보고를 13:50경 일반전화로 수리(김○○ 나주서 경무과장 자술서)(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299쪽)

※ 반남 예비군무기 5. 21. 17:40 CAR 35, 반남 지서 자체 무기3, 실탄27(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2, 322, 331쪽)

* 광주에서 내려 온 시위대가 지서를 습격했을 텐데, 지리적으로 나주 끝에 있는 반남지서가 8시에 피탈 당하고, 광주에서 가까운 남평지서가 9시에 피탈됐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음(염○○ 나주서)

* 지서장이 경찰 무기를 땅에 묻자고 하여 무기고에서 칼빈을 뒤뜰 마당에 묻은 기억이 있으며, 그 다음날 오후 무렵 시위대들이 와서 무기를 찾아 가지고 가버렸음. 그 날짜가 21일인지, 22일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오후 시각이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음(나○○ 나주 반남 예비군 소대장)

* 9시에 지서 경찰관 무기가 털렸다는데 21일은 남평 장날이었고 시간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으나 점심 무렵에 지서장이 나에게 빨리 무기를 소산시켜야 한다고 했음(한○○ 나주 남평 예비군 소대장)

* 도경찰국 상황일지라고 한문으로 표지를 작성하였는데, 경자를 보면 아래 말씀언(言)이 빠져있음. 경찰관이라면 경(警)이라고 쓰지 이렇게 경(敬)으로 쓰지는 않음. 당시에는 타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타이핑 문서도 흔하지 않았고, 활자체도 이렇게 진하게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글자체도 이렇게 세련되지는 않았음(김○○ 나주 경무과)

* 이 문건은 당시 경찰 타자기에 없는 활자체라는 생각이 들며 아무리 보아도 80년도에 만들어진 문건으로 보여지지 않음. 제목을 한자로 써 놓았는데, 경찰이 ‘敬’이라고 쓰지 않고 도경이란 표현은 다른 기관에서 부를 때 쓰는 명칭(이○○ 광주서 경무계)

— 이는 시민의 무기탈취가 집단발포 이전에 이루어짐으로써 시민에 대한 군의 발포행위가 ‘자위권 행사 차원의 정당한 행위’라는 논리를 구성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왜곡한 것으로 추정

* 나도 그 자료를 봤는데 명백히 군에서 경찰자료를 조작한 것. 시민군이 먼저 무장한 것으로 하여 군의 집단발포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이며 급박한 순간을 기록하는 상황일지가 타이핑으로 되어있는 자료는 추후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정○○ 前 5․18 유족회장)

— 여러 관련자 증언에 따르면 ‘전남도경 상황일지’는 ’88년 5․18 청문회를 앞둔 시점에서 군 내부에 설치된 ‘511 분석반’에서 조작했다는 가능성(說)

* ’88년 5․18 청문회를 앞두고 군 내부에서는 511분석반이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거기서 청문회에서의 답변을 위해 조직적으로 관련 자료를 조작, 집단발포 이전에 무기피탈이 있었다는 자료 역시 조작된 흔적이 여럿 보인다는 것이 전문가와 관계자의 입장(정○○, ○○신문 기자)

* 5․18에 대한 모든 조작은 511에서 이루어졌다. 88년경 국정감사와 청문회를 대비해서 만들어진 조직이 511이다.(정○○ 前 5․18유족회장)

* 당시 이런 타이핑 문서는 보기 힘들었으며, 전동타자기로 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듬. 반남지서는 나주경찰서 관내에서 가장 안쪽에 있으며, 지서에 예비군 무기가 있는데 경찰무기와 따로 털렸다는 것은 조작된 것으로 생각됨(김○○ 나주 보안과)

— ‘광산 하남파출소’ 와 ‘함평 신광지서’ 무기 피탈 역시 경찰 감찰기록 등 관련 자료와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지며 실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음

* 당시 하남파출소는 없었고 하남지서가 있었음. 당시 광산경찰서에는 동부, 명동, 서부, 역전 등 4개 파출소가 있었다(임○○ 광산서 수사과)

*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피탈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라 생각함. 그 이유는 당시 4명이 근무하는데 총이 9정이 있을 필요가 없으며 도로 포장도 안 되어 있고, 버스가 하루에 서너번 다니는 오지였으며, 당시 시위대에 의해 피해를 입은 것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기억(양○○ 광산서 하남지서)

* 시위대 오기 전날 지서 무기와 예비군 무기를 공항 무기고로 전부 가져다 놨으며 실탄은 면사무소 민원실 창고에 보관하고. 그 다음날 지서장하고 둘이 지서에 앉아 있는데 자네(홍○○)가 시위대가 온다고 전화를 해줘서, 참외밭으로 도망을 갔으며 하남은 무기 하나도 안털렸음(이○○ 하남면 예비군중대장)

* 지서 무기고는 지서 바로 뒤편에 있었고, 예비군 무기고는 지서 바로 옆에 있었으며 지서 직원이 3~4명에 불과하고 야간에는 우리 소방대원 2명이 지서에서 함께 잠을 자며 근무를 했기 때문에 신광지서 무기가 피탈 당했다면 내가 모를 수 없음(김○○ 함평 신광 의용소방대장)

* 오일팔 당시 함평경찰서 무기는 하나도 피탈당하지 않았음. 날짜는 모르겠지만 관내 지파출소 무기를 경찰서 무기고로 소산하게 한 후(경찰서에 올 때 대로를 이용하지 말고 소로를 이용하여 가지고 오라함) 지파출소 무기와 경찰서 무기를 양림리에 있는 702 전경대대로 옮겨 놓았다가, 다시 함평 예비군대대로 옮겨 놓았기 때문(임○○ 함평서 경무계)

❍ 무기피탈 주요 현황

—주요 경찰관서 무기피탈 현황

❍ 경찰관서별 무기피탈 시점 조사결과

— 당시 감찰기록, 나주서 경찰관과 예비군중대장, 전투소대장 등 관련자 증언 등 종합한 바, 5 18과정 경찰관서 최초 무기 피탈은 13:30경 나주경찰서 남평지서에서 발생하였고, 하남지서와 신광지서에서는 무기 피탈이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됨

※ 15:00경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가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에 도착, 20여정의 총기를 분배하였고(서울지검,국방부검찰부 5 18관련 사건 수사결과 102쪽)

※ 남평지서 등 피탈 기록 : 전남사태관계기록 나주경찰서 분 296∼351쪽

— 또한, 전남도경 상황일지(보안사) 및 동 기록을 인용한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의 결과보고는 화순광업소 예비군무기고가 5.21. 13:00경 피탈(칼빈 64정)된 것으로 기재(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조사결과보고서 90쪽)하고 있으나, 화순서 상황일지 및 전남경찰국 상황일지(집단사태발생 및 조치상황)에는 5.21. 14:30 이후로 기재하면서 피탈 과정을 보다 세부적으로 나타내고 있음

※ 5. 21. 14:30, 700명 가량이 버스에 분승, 화순 광업소 및 지파 무기 탄약 탈취코저 이동(전남사태 관계기록 2, 196쪽)

※ 화순광업소 피습 관련 상황기록

* 14:25 화순광업소 TNT는 광부들이 생명처럼 보호 중...

* 15:15 화순경찰서 소각 중이며 폭도들이 광업소 폭약탈취 진행 중(전남사태 관계기록 2, 광주서 상황처리기록부 67쪽)

* 15:17 화순서 방화 후 폭도들이 화순광업소로 가고 있다고...(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322쪽)

— 5.21. 11:00 영산포지서에서 칼빈 1정(실탄 없음)이 피탈되었다는 기록(전남사태 관계기록 2, 322쪽)도 있으나, 피탈된 무기가 없다는 기록(전남사태 관계기록 2, 330쪽)도 있고, 당시 지서장에 대한 감찰 또는 징계기록 확인되지 않는 등 시위대의 무장관련 기록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됨

* 영산포지서장 오삼렬이고 영산포 지서는 무기가 피탈당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엉터리다. 영산포지서장이 그 해에 승진을 했는데 무기 피탈당했다면 승진을 하지 못했을 것(나○○ 나주서 경무계장)

 

계엄군의 발포와 경찰의 해산

❍ 발포 직후 현장상황(시위대의 사전 무장 관련)(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320~322쪽)

— 군은 사전 무장한 시위대에 대응하기 위해 자위권 발동차원에서 발포했다고 주장하나

— 군 기록에는 시위대의 발포와 계엄군의 사상에 대한 내용은 있으나 공수부대원의 발포로 인한 시민들의 사망보고는 없으며, 군의 여러 기록(7공수여단․11공수여단 전투상보, 육군본부․31사단․전교사 상황일지)에는 도청 앞 발포상황이 일괄적으로 누락

※ 5. 21. 13:00경 전남도청 앞 상황이 교전으로 보고되거나 시위대의 총격에 의해 계엄군이 사망 또는 부상당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일부 공수부대원들은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기 전에 시민들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다고 진술하나 계엄군 사상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5. 21. 전남 도청 앞에서 총상에 의한 부상자나 사망자는 없음(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5․18 조사결과보고서 89쪽)

— 경찰의 진상보고(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166쪽)도 5. 21. 12:00 계엄군이 철수한 것으로 기록하는 등 계엄군의 발포상황을 의도적으로 누락하였음을 알 수 있음

※ 12:00 계엄군 철수 / 12:00∼14:00 경찰 단독 대치

   14:30 일부 계엄군 재투입 자구위한 발포

   16:00 경찰, 계엄군 전원 철수 (도청, 광주서, 서부서 피점)

< 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 >

○ 5. 21. 12:59 연속 총성(계엄군 공포 난사)

○ 13:15 진압부대 도청 안에서 부대 재정비 완료

○ 13:16 연속 총성

○ 13:20 연속 총성, 각 동원부대 소대장 경비과 집결지시

○ 13:27 연속 총성

○ 14:10 군중이 광주 지산동 TNT를 탈취하려함

○ 14:17 광주 지원동 TNT가 없어 군중은 화순으로 갔다 함

○ 14:25 화순서는 13:00부터 자체경비중, 차량 20대 수송(버스, 트럭) 군중이 침입 시도 최후조치로 무기와 비밀문건 보호

○ 14:50 금남로쪽 연속 총성(5~6회 연속 단발 또는 산발)

○ 14:52 군중이 AR 1정, CAR 40여정에 실탄 장전, 도청 앞쪽으로 거치

○ 15:00 지산 화약고에 갔던 폭도들이 교도소 무기 탈취하러 출발했다 함

○ 15:00 나주 산포, 영강, 금성, 노안에서 총과 실탄을 탈취, 버스 7대로 광주진출 중이라 함(14:15경 출발했다 함)

○ 15:00 화순에서 무기 40정 피탈, 폭도들이 광주로 총을 쏘면서 오고 있다함

○ 15:17 화순서 방화 후 폭도들이 화순광업소로 가고 있다고 함

○ 15:18 시가전 전개

❍ 시위대에 대한 집단발포(5. 21. 12:59) 이후 경찰은 동원경력 인명피해를 줄이기 위해 해산명령 및 경력소산 조치

— 계엄군의 집단발포 이후 시위대가 무장을 하고 도청을 향해 반격을 취하며 다가오자 경찰 지휘부는 동원경력의 안전을 위해 해산 결정

※ 시민군, TNT 탈취시도 및 전일빌딩·전남대 의대 옥상에 LMG(경기관총) 거치(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323쪽)

* 5.21.15:00경 치안본부장에게 병력을 철수하겠다고 건의한 바, 현지 계엄분소장과 상의하여 결정하라고 지시하므로 계엄분소장에게 지방지원 3개 중대 우선 철수를 건의하고 지원 중대장에게 원대복귀 지시함(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안병하 진술조서 24,25쪽)

— 안 국장은 15:00경 9개서 지원부대 복귀지시 하달, 15:40경 광주서부서장, 4개 기동중대장에게 군의 철수 상황에 맞춰 철수 지시(16:15경 공수단과 함께 철수)한 후 경찰헬기를 이용 항공대로 철수한 것으로 진술(치안본부, 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안병하 진술조서 26,25쪽)

* 21일 17:30경 경비과장이 무전으로 호출하여 1,2중대장과 국장실로 갔음. (3중대장은 고립되어 오지 못함) 경찰국장은 부대해산을 지시하면서 계엄군에 의해 삼사일 내에 회복될 것이니 대원들을 잘 소산시켜서 피해가 없도록 하고 무등산 일대가 괜찮을 것이므로 그쪽으로 소산하여 부대관리를 하라. 자신은 송정리 경찰항공대에 있을 것이다. 소집 지시하면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음(송○○ 118전경대장)

* 5.21.16:30경 경찰국장님께서 강진서장님을 위시한 출동했던 각 서장님께 폭도는 무장포위하고 있고 도청을 경비하는 군부대도 철수한다고 하니 각서별로 철수하여 귀서하라는 지시..(양○○ 강진서)

— 상황일지에는 15:30∼17:21에 순차적 경력 해산지시 후 17:34에 경비본부가 최종적으로 도청에서 철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323쪽), 당시 동원 경찰관은 15시경부터 해산을 시작했다고 증언

* 5. 21. 15시경 도청을 선회하는 경찰헬기에서 안병하 국장이 직접 무전기로 장비를 도경에 반납하고 해산하라는 무전을 몇 차례 반복(김○○조 영광서)

— 경력소산 지시는 무전이나 구내방송으로 하달되었으며, 급박한 상황에서 일부 직원들은 전달받지 못하고 주변상황에 따라 해산

* 시민군이 도청으로 진입하려 하니 빨리 대피하라는 취지의 구내방송이 울려 사복으로 갈아입고 도청 담을 넘어 대피. 지방에서 동원된 직원 또한 작업복과 장비를 벗어 던지고 사복차림으로 정신없이 어디론가 도망(강○○ 전남경찰국 대공분실)

* 5. 21. 16시에서 17시 사이에 경비계 직원들이 해산하였는데 별도의 해산지시를 들은 것은 없으며 총소리에 놀라서 알아서 도망가는 식으로 해산(박○○ 전남경찰국 경비과)

❍ 한편 2천여 명이 넘는 대규모 동원경력이 단시간에 피해 없이 해산하는데 시민들의 도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 동원 경력의 일치된 의견

* 장비와 진압복을 벗어 던지고 츄리닝 차림으로 문화방송과 전남여고를 지나 동명동 인근에 다다르자, 주민들이 전투경찰대원인 것을 알아보고, 내 새끼들 고생한다며 서로 집으로 데려갔으며 복귀 후 들은 이야기지만, 각기 흩어져 들어간 집에서 하루 이틀 밤을 자고, 옷을 얻어 입고 귀가하였다고 함(이○○ 기동3중대장)

* 도청 뒷담을 넘어서 골목길로 몰려드는 경찰들에게 광주 시민들이 사복을 내주었음. 어떤 시민들은 골목길로 대피하도록 안내까지 해주었고 나는 나주병력 서너명과 함께 대인동 인근 민가로 대피. 집 주인은 생면부지인 우리들에게 저녁과 아침은 물론 잠까지 재워주고 사복도 주었음(김○○ 나주서)

* 당시 시민들은 경찰에 매우 우호적이었음. 기동대원들에게 물도 떠다 주고, 화장실도 이용하게 해주었으며, 천명이 넘는 경찰관들이 도청을 탈출하는 과정에서 대다수가 사복을 얻어 입었으며, 그 무렵 시위대가 총을 들고 중요 사거리 등을 모두 장악하고 있었으나, 탈출하는 과정에서 한 사람의 경찰관도 다치지 않았음(김○○ 전남경찰국 경비과 경비계)

— 만약 경찰이 계엄군과 같은 진압방식을 취했다면 해산과정에서 많은 경찰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

* 시위대들이 총을 들고 도청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도청 뒷담을 넘어 도망쳤으며, 골목길로 뛰다가 아무 집에나 들어갔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반지하 같은 연탄 창고로 들어가라 해서, 들어가 보니 도청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2~3명과 경찰복을 입은 사람 4~5명이 있었음(구○○ 전남경찰국 상황실 전경)

* 도청에서 빠져 나올 무렵 2천명 가까운 경찰이 안에 있었는데, 동시에 탈출하면서도 모두 사복을 갈아입을 수 있었고 한 사람도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당시 경찰과 시민과의 관계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천○○ 1기동대)

* 광주로 동원됐던 경찰관들은 걸어서 경찰서로 복귀하였고, 그들은 하나 같이 시민들의 도움으로 사복을 얻어 입고, 밥도 얻어먹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시민들이 경찰을 적대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음(우○○ 나주서 정보과)(#4로 계속)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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