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영 칼럼] '자유' 없이는 '혁신 포용국가'도 없다
[김인영 칼럼] '자유' 없이는 '혁신 포용국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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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정권 "악마의 발톱"이라 한 '박정희 패러다임'이야말로 '포용경제'였다
정부 배급 기대는 노예 아닌 자존하는 국민 만들기가 국가 목표 돼야
진정으로 성장하려면 정부의 '포용'에서 벗어나야…'자유' 없다면 노예의길
김인영 객원 칼럼니스트
김인영 객원 칼럼니스트

2019년 새해 앞에 놓인 국가 과제들

2019년 새해 앞에 놓여 있는 정치, 경제, 외교, 안보 과제가 가볍지 않다. 적폐청산의 칼날이 사법부를 깊이 찌를 것이고 결국 사법부까지 정치화될 것인데 앞으로 정치 논리가 법치 원칙을 압도할까 우려된다. 이어질 박근혜 대통령 재판 대법원 최종 판결과 이명박 대통령 재판 결과는 우리 사회를 다시 양분할 것이다. (보수)우파와 (진보)좌파의 분열과 대결이 해방 직후 좌-우 대결처럼 격렬해질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3월 또는 4월로 예정된 김정은 방한을 앞두고 있지 않은가.

경제는 진짜 큰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모두 ‘경제 위기’가 아니라고, ‘가짜 뉴스’라고 강변하지만 반대로 경제 현장은 위기임을 웅변하고 있다. 청와대의 비서들은 최저임금 인상 때문에 그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는데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공식 실업자가 107만 명에 이르고, 취업준비자와 구직단념자가 340만 명에 육박하고, 또 하루에 3,500여개의 자영업자가 문을 닫고 있는데 이것이 위기급 경제가 아니라면 그것이 바로 ‘청와대 정부’의 위기이며 대참사를 예고한다. 돌아보면 1997년 외환위기 때도 김영삼 정부는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했었다.

‘혁신 포용국가’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의 본질

문제의 핵심은 청와대와 여당이 경제 현실의 위급성을 인정하지 않고 꼼수와 변명으로 일관하며 정책 변경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핵심에는 이 정부가 지향하는 ‘혁신 포용국가’가 자리하고 있다. ‘혁신 포용국가’의 결과는 아마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일 것이다. ‘혁신 포용국가’로의 혁명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로 나아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정책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혁신 포용국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실체를 알기 위해서 『새로운 대한민국의 구상 포용국가』(성경륭 외, 2017년)를 일독해보기 권한다. 저자들 가운데 김현철 교수는 대통령 경제보과관으로 일하고 있고, 박능후 교수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또 나머지 저자 대부분이 현 정부에서 일하고 있거나 또는 간접적으로 정부를 돕고 있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목표가 무엇인지를 비교적 잘 알려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새로이 출범하는 문재인 정부가 ‘박정희 패러다임’을 실패한 패러다임이자 만악(萬惡)의 근원으로 인식하고 그 극복에 목표를 두고 있음을 적시하고 있다. 또한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방향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와 같은 북유럽의 복지국가임을 밝히고 있다. 물론 저자들은 북구 복지국가들의 인구가 스웨덴 1000만 명, 노르웨이 540만 명, 핀란드 556만 명으로 5,180만명의 대한민국과 인구에서 비교가 되지 않게 적고, 또 산업화 기간에 노사 갈등을 이미 경험하고 후기 산업사회로, 선진 복지국가로 진입한 역사와 현재까지도 남북한 군사적 대치상태에 있으면서 사회경제적으로 간신히 선진국 문턱에 있는 우리와는 ‘역사적 경로’가 같아질 수 없음을 간과하고 있다. 더 나아가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는 경제성장의 결과이지 복지가 경제성장을 초래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기껏해야 복지에도 불구하고 선진 경제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들 국가 기업들의 피나는 ‘혁신’ 노력이 있었음은 보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현 정부가 어떤 ‘혁명’을 꿈꾸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본문에서 직접 인용한 내용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비극적 현실을 희망의 미래로 바꿀 수 있는 사회경제 패러다임의 거대한 전환이다. 박정희 패러다임 이후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길이다... 박정희 패러다임은 여전히 그 악마의 발톱을 거두지 않았다. 이후 들어선 보수정부는 대한민국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 절차적 민주주의를 제와한 모든 분야를 독재시대로 회귀시켜 버렸다.

‘747’이니 ‘줄푸세’니 지키지도 못할 화려한 공약만 남발한 채, 박정희식 성장주의로 회군했던 것이다....배제와 약탈, 무한 경쟁과 적자생존의 사회경제 체제를 포용과 보호, 공정과 혁신의 사회경제 체제로 바꾸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pp. 49-50; 밑줄은 필자가 한 것임.)

위의 내용만 보더라도 지금 나타나는 모든 나쁜 현상은 오직 ‘박정희 패러다임’ 때문이며, 때문에 앞으로 ‘(박정희식) 성장주의’ 정책은 다시는 없을 것이며, 오직 ‘포용’과 ‘보호’, 공정, ‘혁신’만 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몇 일전에 있었던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의 기자회견 내용도 위의 내용과 다르지 않고 또 쉽게 그의 발언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한 마디로 문재인 정부는 ‘박정희 패러다임’에 찌든 국가를 개조하는 혁명을 하고 있는 중이므로 누가 요구하더라도, 무슨 부작용이 있더라도 현재의 정책을 변화 없이 그대로 쭉 갈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니 신문 기자들이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혁신’을 많이 이야기한다고 혹시 기업친화적인 정책이 나올 수 있을까 짐작했지만 결국 잘못 이해한 것이다. 문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포용’, ‘보호’, ‘공정’, ‘혁신’은 같은 문장 속의 연관된 개념들이다. 국가는 (노동자를) ‘포용’함으로써 ‘보호’하고, (일부 재벌 대기업들을 때려잡음으로써 다른 기업들에게) ‘공정’한 경제 환경을 만들며 그렇게 되면 당연히 ‘혁신’이 따라오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포용경제’의 ‘포용’의 대상은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들뿐이다. 왜냐하면 과거 박정희 시절 노동자는 ‘배제’되어 피해를 본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영업자들도 ‘포용’의 대상이 아니어 보인다. 그 동안 자영업자는 저임금으로 노동자를 착취해 배를 불렸니 시간당 최저임금 1만20원도 주지 못하는 한계 자영업은 도태되는 것이 옳다고 또 우리 자영업 비율이 너무 높아 산업 고도화에 방해가 되니 그만 줄어도 된다는 말없는 주문으로 이해된다. 결국 현 정부의 포용정책은 노동자만 포용이고 조그만 가게라도 소유한 자영업자와 특히 기업들을 소유한 대기업들은 영원히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포용정부’라고 자영업자가 그리고 대기업이 모두 ‘포용’ 해달라고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진짜 ‘혁신 포용국가’는 박정희 정부가 만들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과거 박정희 정부가 진정한 ‘포용경제’를 실현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대기업들은 그 시작은 모두 자그마한 중소기업이었고, 대기업으로 도약한 과정이란 대한민국 좁은 땅에서는 먹고 살 것이 없으니 넓은 국제 시장에서 외국 기업들과 경쟁하며 수출로 키워낸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박정희 정부 시절 대기업들의 성장은 어설픈 정경유착 때문이 아니라 해외시장에서 미국, 일본, 유럽 등의 유수한 외국기업들과 진검 승부를 벌이며 살아남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기업들 속에서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즉 우리의 ‘공돌이’, ‘공순이’는 기술자가 되었고, 공장의 과장이 되어 중산층으로 올라섰고, 동생들을 그리고 자신의 자식들을 공부시켜 더 잘사는 중산층을 만들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이를 류석춘 교수는 최근 저작 『박정희는 노동자를 착취했는가 - 대한민국 기능공의 탄생과 노동귀족의 기원』(기파랑, 2018)에서 실증적으로 증명했다. 류석춘 교수는 1960년대 청계천 봉제 노동자들이 받던 임금상승률을 분석하여 6년 동안 4.7배에 달하는 임금상승률을 기록하며 당시 1인당 평균소득에 가깝게 다가갔음 밝혀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대거 육성된 기능공들이 결국 우리나라의 중산층을 형성하게 되었음을 기능공의 계층이동 실태를 통해 밝히고 있다. 박정희 정부의 노동정책의 결과가 지금의 젊은이들이 알고 있는 ‘노동 착취’였다면 우리의 ‘공돌이·공순이’는 여전히 가난과 빈곤에 찌들어 있어야 하는데 많은 기능공들이 노동자 칭호를 떼버리고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고, 부장이 되고, 또 이사로 회사 경영에 참여하며 한국경제를 이끌어 간 과정, 또 중산층으로 자리 잡게 되는 과정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가난한 시골에서 일거리가 없어 도시로 올라온 빈곤층을 중산층으로 밀어 올린 박정희식 ‘포용경제’가 무엇이 나쁜가?

현 정부는 박정희 시절의 경제는 ‘혁신경제’가 아니라 ‘따라가는 경제’였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남 따라가기가 그렇게 쉬운가? 따라 해서 잘 되었다면 세상에 공부 못하는 학생은 없었을 것이고, 또 실패하는 기업도 없어야 한다. 나는 당시 기업들에 수많은 작은 혁신(innovation)들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를 미국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경제학자 앨리스 앰스덴(Alice H. Amsden)은 한국의 공업화 과정을 설명하는 『아시아의 다음 거인 - 한국의 후발공업화』(시사영어사, 1990)라는 책에서 당시 한국 기업이나 기업가들이 외국의 신상품 그리고 그 신상품의 생산과 공정기술을 모방하고(copying), 빌려오고(borrowing), 차용하고(adapting), 개선시키는(improving)데 뛰어난 학습(learning) 능력을 가졌음으로 설명했다. 앰스덴은 한국의 대기업들이 현장의 경험을 비용절감이나 신제품 개발에 적용하는데 혁신적이었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기업가가 특히 경영과 관리에서 현장(shop floor) 경영을 강조했는데 이는 기업가가 현장의 엔지니어를 경영과 관리에 차용하여 현장에서의 혁신을 실현하고 ‘수동적인 학습’에서 ‘창조적인 학습’으로 나아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기업 혁신’은 박정희 정부 시절 이루어진 것으로 남을 모방하면서 조금 씩 현장에서 개선하여 만들어낸 것이라는 설명이다. 어떻게 가능했나? 박정희 대통령은 기업인의 ‘사치’와 ‘외화도피’와 같은 부패는 엄격히 제어했지만 기업 내부의 경영은 기업가에게 자율로 맡기는 ‘경제적 자유’를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유’의 대가를 수출에서의 성과로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혁신’은 기업가-기술자가 하나가 되어 스스로 죽도록 노력할 때 그 성과가 자신의 것으로 주어질 때 만들어 진다. 현 정부가 ‘혁신’을 강조하지만 정부가 강요한다면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요약하면 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아니라 경제적 자유 속에서 가능한 것이 ‘혁신(innovation)’인데 크던 작던 기업이라면 모두 초고속 임금상승과 각종 규제로 휘어잡으면서 ‘(기업) 혁신’을 기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을 구하는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하다.

정부에 ‘포용’ 당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하고 자유 찾기

과거부터 살아남은 대기업 집단(재벌)은 초기에는 정부의 자본에 의지하였지만 점차 대기업 집단 구조를 통하여 자본 및 인력 조달을 이루어냈다는 특징을 가진다. 우리 기업들은 초기에 정부를 통해, 즉 관치 금융을 통해 자본을 조달하였지만 성장하면서 대부분 보험업이나 백화점 사업 등 현금 사업을 자회사로 확보하며 스스로 금융 독립을 도모하고 점차 국제 금융으로부터 직접적인 차입에 나서기도 하며 정부로부터 금융 간섭에서 벗어나게 된다. 요약하면 정부의 관치금융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존을 찾았기에 지금까지 국제 경쟁에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렇게 정부의 자금 배급에서 벗어날 때, 즉 정부로부터 가능한 경제적 자유를 많이 만들었을 때 기업은 혁신했고, 성장했고, 지속 가능성을 확보했다.

정부는 국민을 의존하는 국민으로 또 정부의 배급에 기대어 사는 노예로 만들지 말고 스스로 독립하고 스스로 자존하는 국민으로 만드는 것을 국가 목표로 삼아야 한다. 국민도 진정으로 성장하려면 정부의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정부의 ‘포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미 망해버린 사회주의 경제, 공산주의 배급 경제로의 길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정부가 나눠주는 (복지) 배급에서 벗어날 때 국민의 자유(自由)와 자존(自尊, self-esteem)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배급에만 의존하는 자립심 없는 국민이 된다면 그에게 자유가 있을 리 없다. 국민에게 자유가 없다면, 궁극적으로 ‘노예로의 길(road to serfdom)‘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구정이 다가오니 한 번 더 새해 소원을 말할 수 있다면 단 하나 말하고 싶다. 32살의 청와대 행정관이 군의 참모총장을 청와대 근처 카페로 불러 군(軍) 인사와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고 그것을 청와대는 모두가 대통령의 비서이니 문제가 없다고 두둔하지 않는 나라다. 김태우 전 수사관의 ‘민간인 사찰’ 폭로와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의 ‘부당한 업무’ 폭로에 국민이 모두 몇 날 몇 달을 촛불을 드는 일관성이 있는 나라다. 그리고 촛불을 주도했던 시민단체가 관변단체로의 길에서 벗어나 일관되게 공적 권력이든 시장의 권력이든 모든 권력을 견제하는 나라다. 이 나라에 과연 윤리, 도덕, 정의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든다. 때문에 내 소원은 대한민국이 자유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 그리고 원칙과 기본이 서는 선진국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저들은 뻔뻔했기에 정권을 찬탈했고, 뻔뻔했기에 이중 잣대에도 아무렇지도 않고, 그래서 답도 없다”고 한 만화가 윤서인의 ‘윤튜브’ 지적이 가슴을 후벼 판다. 새해부터 현실의 답답함에 마음이 무겁지만 그래도 ‘자유’만은 지고 갈 것이다. 앞으로도 ‘자유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김인영 객원 칼럼니스트(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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