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경찰의 5.18 체험기(2), 시위 학생들, 경찰 버스 오면 박수 치면서 마중
전남경찰의 5.18 체험기(2), 시위 학생들, 경찰 버스 오면 박수 치면서 마중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찰과 시위대간 다소 격렬한 공방은 있었으나,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었던 5. 14.∼16.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주최 측과 대화하며 불법행위 방지에 최선을 다하였고, 시위대는 경찰의 통제에 잘 따름으로써 관공서 습격, 방화 등 불법행위 없이 평화롭게 마무리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2회 내용은 ‘5·18 이전 시위상황 및 경찰의 대응(5월 초~5.17)’이다. 1980년 5월 17일까지 경찰은 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시위에 최루탄의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처했으며, 시위대는 진압 경찰와 인사를 하고 음료수를 나눠먹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고생하는 경찰관들을 위해 시위대가 위문금을 모금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평화적 시위는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전남대에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학생들과 충돌하면서 격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시위가 격화되었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시위가 격화되었다(연합뉴스 제공).

 

Ⅰ. 5․18 이전 시위상황 및 경찰의 대응 (5월초 ~ 5.17.)

○ 전남대, 조선대 등 대학가를 중심으로 교내에서 시국성토대회를 개최한 후 학교 밖 진출을 시도하였고, 일부는 시가지로 진출하여 산발적 시위를 벌이다 해산을 시도하는 경찰에 투석하는 등 대치 반복

○ 경찰은 기동대 3개 중대와 전경대 1개 중대를 기본으로 시위에 대처하였고, 상황에 따라 광주서·서부서와 광주 인근 경찰서 직원들로 구성된 임시편성부대를 운영하며 시위상황 안정적으로 관리

○ 경찰과 시위대간 다소 격렬한 공방은 있었으나,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었던 5. 14.∼16.에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주최 측과 대화하며 불법행위 방지에 최선을 다하였고, 시위대는 경찰의 통제에 잘 따름으로써 관공서 습격, 방화 등 불법행위 없이 평화롭게 마무리

주요 시위상황 및 경력운용

- 5.3. 어용교수 장례식(전대 150여명)

- 5.8. 교내 민족민주화 대성회(전대 2,000여명), 모의총장 장례식(조대 500여명)

- 5.13. 민주회복성토, 어용교수 퇴진 요구(전대 650명)

- 5.14. 13:00, 전남대, 5,000여명 참석, ‘민주화성회 비상학생회의 시국성토 대회’

※ 경력 1,500여명 배치, 시위대의 투석으로 경찰 부상자 54명(중상 6명)

- 5.15. 도청일대 9,600여명 참석, ‘시국성토대회’(경력 1,497명, 부상 11)

- 5.16. 19:40, 도청일대 8,000여 명(전남경찰국, 치안질서 회복을 위한 경찰의 조치, 377쪽)행진’(경력 1,699명, 부상 1)

※ 광주시 상황보고 15,000여명 / 안병하 국장 진술조서 20,000여명

❍ 경력(경찰병력-편집자 주) 운용

— 전남대 상황은 서부서, 조선대 상황은 광주서에서 주로 담당하였으며 진압전담부대로 기동 1·2·3중대, 118전경대 운용

— 상황에 따라 광산·화순·나주 등 인근지역 경찰서에서 순차적으로 동원하여 원거리 부대는 여관 등지에서 숙영·인근 식당 매식, 근거리 부대는 일일 이동 및 급식 추진

※ 5. 16. 야간 횃불집회 종료 후 전 지원경력 복귀

 

광주권 동원병력 현황(67/1,769) < 5.14~16. >(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 229쪽)

 

시위양상과 경찰의 대응 기조

❍ 5. 13.까지는 전남대, 조선대 등에서 교내 시위 위주로 진행하였으나, 5. 14. 이후에는 시가지 행진 등 도심권으로 진출

— 교내시위 위주로 진행할 때에는 교문에 각 2개 중대, 후문에 각 1개 중대씩 배치하여 학교 밖 진출 차단을 중점으로 집회관리(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안병하 진술조서 12쪽)하였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의 격렬한 투석으로 부상자 발생

  ※ 5.14.~16. 시위로 경찰 부상자 66명(중상 11)4) 발생

  ※ 전남데모학생 2,000여명이 당 서 및 118전경대, 담양서, 광산서 경비병력 494명과 대치, 계속 투석으로 인하여 당서 동원 42명 중경상 피해케 됨(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 234쪽)

— 5. 14.∼5. 15.에는 각 부대가 교문을 책임 저지하였으나, 시위대는 월담하거나 분산하여 학교 밖 진출, 전남도청에 집결하여 시위 전개

○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은 지휘부 대책회의를 주재하며 안전한 집회 관리를 강조하고 시위 학생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반복 지시

— 동원 지휘관 등이 참석하는 대책회의를 주재하여 안전한 집회관리를 강조하는 한편, 필요시 무전지시를 통해 안전진압 기조 유지

< 전남경찰국장 주요 지시사항(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217~218, 236쪽>

○ 시가지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플래카드 이용 시위 학생은 연행할 것

○ 시가지 운집학생은 해산지시에 불응시 전원연행

○ 학생에 대하여 부상 및 희생자 없도록 최대한 노력

○ 화학탄을 사용치 말고 부상사례가 없도록 적극 유의

○ 해산요령은 주력부대를 분산시킬 것

○ 주모자만 신속히 연행, 도주하는 학생은 추적치 말 것

  * 안병하 국장은 시위 진압 시 안전 수칙을 잘 지키라고 강조하였고, 특히 시위 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쫒지 말라고 하는 등 시위시민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한 생각을 갖고 있었음(김○○ 1중대장)

  * 국장 주재 회의에서 특별히 시위 시민에게 절대로 자극적인 언행을 삼가고 시민들의 야유와 비난이 있어도 절대 대응하지 말고 일절 말을 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등 시위 시민과 우리 경찰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었음 (이○○ 곡성서장)

  * 진압에 나서기 전에 부대 지휘관들이 과격한 행동을 금하고 시위대를 추격하지 말아라, 사과탄도 안면에 던지지 말고 공중에 투척하라, 최루탄도 각도를 유지해서 발사하라는 등 안전 진압에 대한 교양을 수시로 받음(모○○ 2기동대)

— 교문 밖 진출 차단이 불가능하여 부득이한 경우 화학탄 사용하고, 시내 대치상황 시 가스 사용 억제하여 학생들 자극하지 않도록 지시

 ※ 각 부대는 진압임무 수행중 학생들의 부상이 일체 발생치 않도록 안전 진압에 유의할 것(5.14. 12:10, 지시사항)(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230쪽)

< 학생 DM진압에 따른 특별 유의사항 하달(무전지시)(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231쪽>

1. 엄중한 각오로써 완벽하게 임무수행

2. 학생에 대하여 부상 및 희생자 없도록 최대한 노력

3. 상황판단과 정보적 조치사항 수시 보고

4. 무위도식 양아치 일제검거

5. 극렬행동 없도록 적절히 유도

6. 시민에게 겸손함으로써 불쾌감을 주는 일 없도록 할 것

7. 소방차 등 비상동원하여 적절히 활용할 것(단, 유색수 살수 금지)

8. 노조와 불량배의 합세를 최대한 방지

❍ 경찰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시위 주최 측과 대화하며 준법집회를 유도함으로써 과열된 5. 14. ~ 15. 상황과는 달리 횃불집회(5. 16)를 안정적으로 마무리

— 대학 측에서는 학교담당 정보 형사를 통해 평화시위를 약속하며 경찰이 시위대를 자극하지 않도록 당부

  * 횃불집회를 할 때 박○○ 총학생장에게 양해를 구했음. 시민들 보기에 평화롭게 해야 하니 감시조(자체 질서유지인)를 많이 둬서 질서 있게 하고, 나는 너희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경찰에게 이야기하겠다고 하고 학교에 상주하던 경찰 정보관을 통해 경찰국장과 통화를 함(김○○ 전남대 교수평의회 대변인)

— 5.16. 분수대 앞 시위 시작 전 윤형용 광주서장은 대학생 대표 2명을 만나 평화행진을 한다면 에스코트를 해주겠다고 약속하며 평화시위 유도

  * 대학생 대표가 집회가 종료되면 횃불을 들고 행진하려는데 안전사고의 위험이 있으므로 경찰이 에스코트를 해달라고 부탁. 서장이 흔쾌히 평화행진을 한다면 당연히 에스코트를 해주겠다고 하였고, 행진이 시작되자 경찰차가 선두에서 에스코트를 하고 좌우측에 기동대가 엄호하고 시위대 후면을 경찰 동원 병력들이 따라가면서 보호 (김○○ 영광서)

— 5. 16. 야간 횃불집회 전 행진 시에는 김○○ 서부경찰서장이 직접 시위 주최 측과 접촉하여 방화 및 화염병 투척 등 불법행위 없도록 유도

  * 안 국장이 나에게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만나 불법행위를 하지 않고 경찰관의 뜻에 따르겠다면 시위를 허가해 주겠다고 이야기 하라고 하여 내가 직접 박○○을 만났으며, 그 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겠다고 하면서 각서를 기록해주어 시가지 행진을 허용(김○○ 서부경찰서장)

  * 5.16. 야간에 학생들이 횃불을 들고 도청을 출발하여 금남로, 유동사거리, 양동시장을 거쳐 천변으로 행진하였는데 학생들의 요청으로 기동대원들이 행진 좌우를 보호하는 등 평화롭게 진행(고○○ 서부서 정보2계)

  * 광주경찰서 경찰차가 선두에서 에스코트를 하고 금남로 중앙을 행진하는 시위대를 기동대가 좌우에서 보호해주면서 평화적인 시위를 유도하는 등 경찰만으로 충분히 시위를 관리할 수 있었음(안○○ 광주서 수사과)

❍ 한편, 치안본부는 교문저지를 고수하지 말고 도심권에 저지선을 설정하라는 ‘학원데모 진압에 대한 긴급 추가 지침’(경찰청 감사관실, 전남사태 관계기록1 64~65쪽)을 전국적으로 하달(5. 14)하였는데, 현장에서는 지시배경에 대해 의아해 하기도 함

< 학원데모진압에 대한 긴급 추가지침 시달 >

1. 교문저지를 고수하지 말고 현지 상황을 적절히 판단하여

가. 교문저지가 가능하면 교문에서 진압하고

나. 역부족으로 교문저지가 불가능한 때에는 도심권에 저지선을 설정하여 진압부대를 합동 운용할 것

2. 도심권 설정은 시,도청이 위치하거나 국가 공공시설이 위치한 지역을

저지선으로 설정하여

가. 주간에는 08:00부터 배치하되, 도로와 골목 중심으로 진압중대를 배치하고

나. 야간에는 17:00부터 배치하되 주간보다 폭을 줄여서 조밀 배치할 것(이하 생략)

  * 80년도 5월 들어 잦은 시위로 감찰 업무를 담당하던 나도 동원을 나가 조대(조선대) 앞에서 학생들을 차단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 대학교 정문 앞 차단을 하지 말라는 지시에 의해 철수를 하였음. 그래서 학생들이 시내로 몰려들어 시위를 하게 된 것(김○○ 광주서)

  * 사실 4월말인가 5월초에 전통(전언통신문)이 내려왔는데 대학생들의 시위를 학교 정문에서 차단하지 말고(교문 봉쇄를 풀어라) 사람이 많은 곳이나 관공서 밀집 지역, 즉 시가지로 끌어 들이라는 것이었음. 국장에게 이를 즉보하자 ‘큰일 났다, 왜 그런 지시를 하는 거냐’고 걱정을 하셨고, 우리 상황실 직원들은 무슨 일이 터지고야 말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음(최○○ 전남경찰국 상황실)

 

계엄군 투입 직전 시위현장 분위기

❍ 5. 13.까지는 학교별 100∼500여명 수준의 대학생 중심의 시위였고, 5. 14.∼5. 16.에는 고등학생과 일반시민이 가세하여 최대 1만여 명이 운집하였지만, 경찰은 주최 측과 소통을 통해 평화롭게 마무리

  * 당시 시위 양상은 학생들이 정문을 나오려고 하면 우리 경력이 이를 차단하는 수준으로 최루탄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끝나면 서로 고생했다고 하면서 내일 보자고 인사를 나누고 음료수를 나눠먹기도 함(모 ○○ 2기동대)

  * 5․18 당시 전남대 학생이었는데 경찰들이 강하게 진압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며, 시내 방면으로 행진할 때는 시위대가 불법행위를 못하게 하는, 소위 옆길로 새지 않게 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음 (김○○ 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 대학생들이 개학한 이후 통상적인 시위와 진압(투석을 하면 최루가스를 분사하는 정도)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5.16.은 학생들의 횃불행진과 화형식을 하는 등 평화적으로 끝나고 경찰들 정말 고생하였다면서 즉석에서 모은 돈 십만 원을 위로금으로 전달(박○○ 전남경찰국 경비계)

  * 횃불집회는 평화시위를 조건으로 경찰이 시위를 보호하였으며, 이 자리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의 요구조건에 대한 정부의 화답이 있을 때까지 시위를 중단한다고 선언. 즉석에서 고생하는 경찰관들에게 준다면서 위문금을 걷었음(이○○ 전남경찰국 경비계)

  * 전남대와 조선대 정문을 경찰이 차단하면 그 안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시위를 마치고 기동대원들에게 빵과 우유를 나눠주기도 하는 등 원만한 관계를 유지, 정문봉쇄를 해제하자 분수대 앞으로 진출하여 시위를 하였던 것이며 이때도 경찰과 큰 충돌은 없었는데 공수부대가 투입(최○○ 전남경찰국 상황실)

  * 5‧18이 일어나기 전 광주로 많이 동원을 나갔는데 시위 학생들이 경찰 버스가 오면 박수를 치면서 마중도 하였고, 경찰봉급 올려주라고 구호를 외치기도 함(한○○ 화순서 수사과)

※ 5. 13. 전대 650명 시위 시 ‘민주경찰 봉급인상’ 구호 제창(전남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기무사 383-1980-99) 212쪽)

  * 5.16 시위행진이 심각한 상황으로 경찰력으로서는 진압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증언했으나, 시위 자체는 폭력화되거나 확산된 상황은 아니고 평화적인 시위는 사실(5․18 청문회시 임○○ 31사단 중령 증언)(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4권 696쪽)

❍ 하지만, 일부 자료에서는 5. 16. 야간상황을 극도로 혼란한 것으로 묘사하며, 계엄군의 투입을 정당화하고 있음

야간에는 시내 고교생까지 가세한 1만5천여 명의 시위대가 도청 앞 광장에 재집결하여 횃불 시위를 하는 등 사태는 더욱 극렬해져 갔다. 2,000여명의 기동경찰대가 시위 저지를 위해 간헐적으로 최루탄을 발사해 보기도 했으나 속수무책이었고 시가지는 그 기능이 거의 마비되어 버리고 말았다.(국방부, 광주사태의 실상 19쪽)

❍ 5.17. 경찰은 동원부대에 대하여 휴식을 주거나 지원부대를 복귀시키는 등 광주시내는 안정을 되찾음

  * 5. 17은 경비계 분직근무를 섰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로운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박○○ 도경찰국 경비계)

  * 5. 16. 집회가 끝나고 부대원끼리 백양사로 야유회를 갈 정도로 치안엔 문제가 없었는데 18일 광주로 돌아오려 하니 군이 시내 전역에 배치(최○○ 3기동대)

  * 5. 16. 학생들의 대규모 시내 횃불집회가 끝나자 부대 특박이 떨어져서 고향인 무안으로 갔는데, 5월 18일 아침에 긴급 소집 명령이 떨어져서 부대 복귀를 하였음(모○○ 2기동대)(#2로 계속)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