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사관 3명이 폭도들의 돌진 차량에 중상을 당한 이후에는 계엄군도 공격적인 자세로 돌변했다. 폭도들이 달려오면 육박전을 한 후에 10여 명 정도를 체포한 후 두 손 모아 비는 사람은 집에 돌아가라는 경고와 함께 보내주었으나, 대드는 사람은 (2명 정도) 차량으로 호송해 기관원에 인계토록 했다.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시위진압작전에 투입됐던 김완배 3공수여단 12대대장의 체험기다. 김완배 대대장은 광주 출신으로서 1980년 5월 20일 새벽 광주에 도착하여 시위 진압에 나섰으며, 이후 광주교도소 방어작전 등에 참여했다. 특히 김완배 대대장의 광주 대의동 본가는 광주MBC방송국이 불타면서 집의 일부가 불타는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이 체험기는 육군본부가 발간한 『역사자료』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서, 김영삼 정부 하에서 5.18 특별법에 의해 수사가 진행되었을 때 참고자료로 검찰에 제출된 것이다.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는 공수부대. 광주 출동 공수부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공수대원들은 시위대의 돌진차량 공격을 받은 후 공격적으로 돌변했다고 한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는 공수부대. 광주 출동 공수부대장의 증언에 의하면 공수대원들은 시위대의 돌진차량 공격을 받은 후 공격적으로 돌변했다고 한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
광주소요사태 참가기(1985년 6월 1일)
김완배 3공수여단 12특전대대장(대령)

---------------------------------------------------

1980년 5월 15일부터 우리 12특전대대는 서울 국립묘지(서울 동작동 소재-편집자 주)를 경계보호 중에 있었다. 그 당시 첩보에 의하면 일부 데모대들이 고(故) 박정희 대통령 묘역을 파헤치려고 시도한다는 첩보가 있었다. 일부 극렬 학생들은 이수교 부근 사거리에 나타나기도 했다. 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 묘지 참배객은 일일 3만~5만 명이었으며, 휴일에는 10만 명이 넘기도 했다.
5월 19일까지 국립묘지에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다가, 야간열차로 광주로 내려가 5월 20일 새벽에 광주역에 도착하여 전남대학으로 곧바로 이동하여, 지정된 교실에서 군장을 풀고서 명령을 기다렸다.
중식 후에 각 대대는 시내 배치를 명받았다. 우리 대대는 내가 광주 출신이고 광주에서 초등학교(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녀서 도로망을 잘 안다고 해서, 광주시청에서 예비 임무를 수행하라는 지시에 의해 트럭으로 이동하여 광주시청 뒤뜰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8시경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광주역 앞 KBS 방송국을 경계하라는 지시를 무전으로 접수하여 즉시 전 대대원을 도보로 이동시켰다.
광주역 앞은 큰길이 넓게 뚫려 있었는데, 전남대학으로 가는 도로를 제외하고 광주시청 통로, KBS 건물 앞 등 4곳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고 일부를 예비대로 확보했다. 21시경 여단본부 지시에 의거, 15대대, 이어서 13대대, 11대대가 상당한 시간 간격으로 광주역 앞으로 집결, 폭도들의 내습을 방어했다. 15대대는 KBS 앞 도로를 경계방어했으며, 11대대는 시청 도로 쪽을 경계했다.
폭도들이 21시 전에 시청 쪽으로 각목을 들고서 갑자기 기습, 광주역 유리창을 10여 장 깨뜨리고 도주하여 경계를 더욱 강화해야 될 긴박성을 인지했다. 폭도들은 간헐적으로 달려와서 돌을 던지곤 했다. 우리 대대는 이에 맞서 근엄한 자세로 대했으며, 돌에 맞는 대원들이 많을 때는 최루탄으로 격퇴시켰다.
5월 21일 00시경부터는 폭도들이 차량으로 돌진하기 시작했으며, 고속으로 달려오는 차량은 부단하게 위험을 주고 있었다(누계 50여 대). 일부는 광주역 앞 로터리에 곤두박질되기도 했다(4대 정도).
운전하는 폭도를 생포해 보니 16세 내지 18세 정도의 아이가 술에 만취되어 주위에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차주 3명이 다가와서 차량 돌진을 제지해 달라고 애원했다.
일부 화물차량의 적재함에 탑승한 폭도들이 화염병을 던지기 시작했다(누계 15대 정도). 미친 듯이 고속으로 달려오는 돌진 차량을 “차 온다” 하는 고함 경고에 의해서 몸을 민첩히 움직여서 피해야 했다. 2~3대가 동시에 돌진해 올 때 가장 위험했다. 대대 하사관 3명(하사 2명, 중사 1명)이 공용터미널 방향에서 돌진한 차량에 중상을 당해 곧장 전남대학으로 후송시켰다. 그들은 5월 21읽 오전에 헬기로 전교사로 공중 후송되었으며, 후에 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됐다. 돌진 차량과 폭도들이 돌을 던지고 각목을 들고서 내습해 우리는 수세에 몰려 있었다.
하사관 3명이 폭도들의 돌진 차량에 중상을 당한 이후에는 계엄군도 공격적인 자세로 돌변했다. 폭도들이 달려오면 육박전을 한 후에 10여 명 정도를 체포한 후 두 손 모아 비는 사람은 집에 돌아가라는 경고와 함께 보내주었으나, 대드는 사람은 (2명 정도) 차량으로 호송해 기관원에 인계토록 했다.
5월 21일 01시경 광주역 앞 KBS 건물을 경계방어하는 중에 광주 고속버스 터미널 도로 근처 스피커에서 여자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대는 가지고 있던 최루탄을 전부 소모해 버리고, 단지 충성된 사명감을 갖고서 근엄한 자세로 대처하면서 여단본부에 상황보고를 계속했다.
02시경 여단 작전참모, 정보참모가 지원 차 도착했는데, EE-8 가스발사통을 차량에 싣고 왔다. EE-8 가스발사기를 활용하여 폭도들을 멀리 물리치고서 그 사이 틈새를 이용하여 전남대학으로 복귀했다.

불타는 MBC·KBS 방송국

최초 지정된 교실에 도착하니, 04시경이었는데 시내를 둘러보니 사력을 다해서 지켰던 KBS 방송국이 타면서 큰 연기를 내고 있었다. KBS 직원 11명과 함께 대동해서 피신시켰는데 오전에 다시 돌려보냈다. 나는 대대본부에 가설된 체신전화로 대의동에 살고 계시는 어머님께 전화 통화를 해 보니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서 몇 번 시도해 봤지만 불통이었다.
다시 화정동 처갓집에 전화통화를 해 보았다. 장인이 받으시면서, 대의동 집 뒤의 MBC 방송국이 불에 타면서 집 뒤채가 일부 탔고, 더불어서 전화선이 탔다고 하시면서 “어머니는 별일 없으시다”면서 옆집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셨다. 어머니와 전화를 통하고 나니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약간 가면(假眠)을 취한 후 가벼운 조식을 마치고 08시부터 전남대학교 정문 경계임무를 인수했다.
폭도들은 버스와 군용트럭으로 시민들을 계속 나르고 있었으며, 외국 사진기자들이 폭도들의 강압에 의거, 계엄군들을 사진촬영하기도 했다. 버스 외부의 플래카드는 붉은색 일체였다. 대치하고 있던 폭도들에게 내가 광주 출신이라는 것을 말하면서 대화를 시도했으나 허사였다.
폭도들이 물밀 듯이 밀려옴에 따라 우측 고지 후사면에 배치되었던 지역대가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때 EE-8 가스발사통을 발사하니 64발이 총소리같이 연달아 나는 소리와 최루성 가스에 의거 폭도들은 도망갔다. 적시에 도착한 13대대의 증원에 의해 폭도들을 큰 도로까지(1km 정도) 격퇴시켰다.
금번 격퇴에서 폭도들이 타고 다녔던 군용 트럭 5대, 장갑차 1대, 페퍼포크 1대를 노획했으며 13대대에 정문을 인계한 후 중식을 실시했다. 14시경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서 우리 대대는 전남대학 후문을 경계했다. 정문에서 경계중인 16대대가 후문을 통과 후, 여단 후미에서 경계를 하면서 이동했다. 호남고속도로 도보 이동 중 후미로부터 “차 온다”는 경고가 발령됐다. 즉시 대대원들을 고속도로 좌측 높은 지대로 진지를 잡게 하면서 사격자세를 취하게 했다.
폭도들은 군용트럭 2대에 각각 10여 명씩 LMG 및 소총으로 무장한 채 전면 유리창을 눕히고 모래주머니를 비치하고, 시속 120km 이상 돌진해 오면서, 우리에게 사격을 가해 왔다. 대대원들의 집중사격으로 폭도 트럭 1대가 전복되었다. 사상자는 없고, 폭도들은 도망했다. 1대는 담양 방향으로 질주해 버렸다.

광주교도소 복역자가 교도소 기습에 가세

5월 21일 17시경 광주교도소에 도착하여 20사단 62연대와 교대했다. 여단본부에서 지시한 대로 우리 12대대는 교도소 관리사무소가 위치한 구역 일대의 외곽 철조망을 연해서 3개 지역대를 배치하고 1개 지역대를 관리사무소 내 빈 사무실에 예비대로 확보했다. 각 지역대는 교대제 경계를 실시하면서, 비번인 대원은 가면(假眠)을 실시케 했다.
22시경 순찰을 실시하여 대대원들을 격려하고서, 대대본부로 돌아와서 지역대정 및 대대참모들과 지금까지의 분석 및 여단회의에서 강조했던 사항을 세세하게 지시하고 난 후(특히 사격통제) 교도소 숙직실에서 가면을 실시하던 중 5월 22일 00시경 갑자기 총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교도소의 높은 벽 때문에 울리는 총성이 매우 크게 울리고 있었다.
상황을 확인해 보니 차량 3대에 탑승한 수 미상의 폭도들이 고속도로로 사격을 하면서 교도소로 달려오다가 고속도로 상에 설치해 놓은 바리케이드 앞에서 정지를 하게 되었고, 우리 대대원들은 200~600m 거리에서 위협 사격을 실시하고 있었다. 사격을 중지시킨 후 04시 30분경에 날이 새면서 접근시켜 확인해본 결과 폭도 1명이 다리에 총상을 입고 지프 앞좌석에 앉아 있는 것을 생포해 응급치료를 하고서 교도소에 와 있던 기관원이 올 때까지 심문했다. 생포한 폭도는 2월경에 광주교도소에 출옥한 사람이었다. 4월 중 교도소로 면화를 온 내용이 폭도의 수첩에 적혀 있었으며, 주위에 있던 교도관 몇 사람은 안면이 있다고 표시했다.
다시 여단 작전회의에서 원거리 경계를 지시받고, 우리 12대대는 400m 떨어진 ‘백설표 설탕’이라는 간판이 있는 고지에 각각 중대 규모의 경계전초를 내보냈다. 대대원들은 ‘철탑고지’ ‘설탕고지’라 부르기 시작했다. 설탕고지 쪽은 광주시내 방향에서 폭도들이 접근을 시도해 왔다. 부단하게 2~3명이 1개조가 되어서 고지를 향해 접근해 오므로 200~300m 거리에서 공포와 지면 사격으로 쫓아 보냈다. 도망가면서 흘린 실탄을 주워 오기도 했다.
철탑고지에는 폭도들의 접근은 없었으니 전초병들이 교대차 이동 중 고속도로 건너편 숲 속에서 청년 2명을 발견했다. 그들을 조사해 본 결과 8절지 크기 갱지에 교도소 주변의 상황과 헬기 이륙 상황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아 그것을 증거로 하여 기관원에게 인계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주간에는 전초 경계까지, 야간에는 철조망선 경계로 5월 24일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해 갈 때까지 교도소를 보호했다. 그 동안 식량보급의 단절로 죄수들의 밥, 간식 등 이상드런 빵도 먹어봤다.
좌측에 배치된 11대대는 정문도로를 돌진해 오는 폭도들과 10여 차례 총격전을 실시하여 많은 폭도들을 생포, 또한 많은 무기를 노획했다.
광주비행장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 진입 완료 후 평정을 찾았다는 보도가 있은 후 나는 어머니의 안부가 걱정이 돼 여단장 승인을 얻어서 본가에 가서 화재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집 뒤편의 MBC 방송국이 폭도들에 의해서 불에 타면서 뒤채에 불이 붙게 되었던 것 같다. 당시 어머니와 누나가 집에 계셨는데 동네 사람들의 도움으로 불길을 잡아서 본채에 불이 붙게 된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보상금으로 300만 원을 책정했고, 150만 원은 수령했으며, 150만 원은 물자로 수령하게 돼 있었다.
광주비행장 격납고 1개에 1개 대대씩에 숙영하면서 신체단련, 정신교육, 정비 등으로 대기했다. 그 당시 비행장 정문에는 중장비와 비행기, 소방차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단이 5월 28일 야간에 기차로 서울 본대로 복귀함에 따라서, 일정한 기간 정비한 후에 평상시와 같이 교육훈련에 전념했다.

국가를 혼란에서 건졌다고 자부한다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의 하나인 광주사태는 유언비어에 현혹된 광주시민들이 처음에는 동조의 표시가 있었지만, 무질서와 혼란이 야기됨으로 인해서 생명과 재산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시민들은 폭도들이 대부분 거리의 양아치 등 하류 생활자들로 구성된 것을 보고, 곧 후회를 하고서 대문을 걸어 잠그고 질서를 원상태로 회복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 계엄군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무법과 폭력이 난무해, 교도소가 폭파되고, 사상범과 범죄자들이 날뛰었을 것은 당연하며, 전라남도뿐 아니라 전국이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본인은 계엄군 대대의 지휘관으로서 광주시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국가를 혼란으로부터 구제했다는 데 긍지를 갖고 있다. 근래 와서 일부 선동 정치가들이 광주사태를 왜곡 선전하면서 일부 불평볼만자들을 부추기고 있는데, 내 고향 광주시민들은 그와 같은 혼란과 무법천지가 또 일어날까보 걱정하고 있다.(끝)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