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당시 일본은 축제분위기였다. 나라 전체가 들떠 있었다. 근대화의 우등생인 일본은 서양이 수 백 년 걸린 개혁을 불과 십 수 년 만에 압축 달성했다. 그리고 300년만의 리턴 매치에서 숙적인 중국의 무릎을 꿇렸지만 그래봐야 결국 지역구였다. 그런 일본에 손을 내밀어 훌쩍 몇 체급을 끌어올려 준 나라가 영국이다. 1902년의 영일동맹으로 일본은 지역구에서 전구구로 올라섰다. 신의 선물과도 같았던 영일 동맹을 ‘메이지 다이쇼 견문사(明治大正見聞史’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영일동맹이 35년 무렵 체결되었다. 당시 이 소식에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시절 일본과 영국 간의 동맹은 전혀 격이 맞지 않는 결합이었다. 이 동맹은 누가 봐도 볼품없는 집 사람이 명문가에 시집가는 모양새였다.’

좋아 죽겠으면서도 쑥스럽기는 했던 모양이다. 당시 영국에 유학중이던 나쓰메 소세키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난감한 심사를 숨기지 않고 있다.

“이 동맹사건 이후 본국에서는 상당히 소란하다고 한다. 그만한 일로 그렇게 요란을 떠는 것은 마치 가난한 자가 부잣집과 혼담을 맺었을 때 기쁨에 겨워 종과 북을 치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과 같지 않은가”

50년 만에 재현된 비대칭 동맹

하필 동맹 당사국인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었으니 더 민망했을 것이다. 세계사적으로도 영일동맹은 사건 중의 사건이었다. 동맹의 전성시대인 19세기 말에도 영국은 그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았다. 심지어 그런 태도를 자랑스러워하며 이를 ‘명예로운 고립’이라고까지 불렀으니 오만이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그랬던 영국이 아시아의 변두리 섬나라 일본과 동맹을 맺었으니 전 세계가 경악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영국이 일본을 파트너로 선택한 것은 의화단 전쟁 때문이다. 의화단을 무찌르기 위해 서구 열강 여덟 나라가 뭉쳤는데 이때 제대로 실력발휘를 한 게 일본이었다. 물론 청나라와 가깝다는 지리적인 이점도 있었지만 기동성과 신속성이라는 면에서 일본은 영국의 눈에 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영국은 보어 전쟁이라는 구질구질한 이권 다툼에 50만 명이라는 병력을 밀어 넣고 있어 자유롭게 동원할 수 있는 병사 한 명이 아쉬운 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굳이 동맹이라는 형식까지 빌어 공식 파트너십을 체결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사건이었던 것이다. ‘볼품없는 집 사람이 명문가에 시집가는’ 이 사건은 50년 후 그 근처 나라에서 다시 재현된다. 한미동맹이다. 물론 경우는 좀 다르다. 우리가 먼저 덥석 잡고 놔주질 않았으니까. ‘볼품없다’고 하면 기분이 나쁘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국제정치에서 쓸데없는 자존심만큼 해로운 것도 없다. 그리고 이 ‘볼품없는’이라는 형용사는 2019년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1950년대의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것이다. 솔직히 좀 볼품없었던 건 사실 아닌가.

한미동맹을 반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그 동맹이 미국의 이익에도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며 의미를 축소한다. 물론 의화단 전쟁에서의 일본처럼, 한국 전쟁을 통해(미국의 입장에서 본 명칭이다) 미국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다시 보고 대한민국 군대의 정신력에 깊은 인상을 받기는 했겠지만 이 역시 동맹이라는 시스템으로 이어질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미국 역시 고립주의라면 영국에 뒤지지 않는 나라 아니던가. 적당히 지원하면서 적당히 활용하면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그 동맹이 가능해진 것은 아시다시피 이승만의 업적이다. 동맹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동맹의 효과는 바로 경제로 이어진다. 언제 망할지 모르는 가게에 외상을 주는 사람은 없다. 나라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앞날이 불안한 나라와 교역을 하는 정신 나간 나라는 없다. 우리에게 한미동맹은 일종의 보증서였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다

한미동맹은 대한민국에게만 아름다운 일이 아니었다. 불씨만 보이면 그 즉시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던 동북아에 장기 평화를 가져온 게 한미동맹이다. 물론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1970년대 전반까지 우리는 GNP의 4%라는 저렴한 국방비의 지출로 경제에 매진할 수 있었다. 외교망은 넓어졌고 대한민국은 해양 지향의 태평양국가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다. 영일동맹처럼 우리 역시 비대칭 동맹이다. 비대칭 동맹은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의 안보를 보장하고 대신 약한 나라는 국가의 자율성을 일부 포기하는 동맹을 말한다. 해서 비대칭 동맹에서는 안보와 국가의 자율성이 반비례한다. 안보 위기가 심각할수록 자율성은 더 줄어든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 자율성 침해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 분하고 눈물 나는 시절을 겪은 것이 사실이다. 한편 작은 나라의 성장이 부실해도 자율성은 줄어든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은 끊임없이 그 자율성을 높여갔던 세월이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 핵이라는 안보 문제는 다시 우리의 자율성을 끌어내렸다. 비대칭 동맹의 불편한 속성이 되살아 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영일동맹과 한미동맹은 그 질이 살짝 다르다. 영일동맹은 이익동맹이었다. 한미동맹은 가치동맹이다. 국토를 피로 물들인 3년 전쟁을 통해 다져진 혈맹끼리의 동맹인 것이다 비대칭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동맹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다. 그 동맹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이전에도 충돌은 있었다. 박정희는 카터와 파국직전까지 갔다. “반미 좀 하면 어때?” 했던 노무현의 호기는 이라크 파병으로 덮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들어온 이 빨간 불은 그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수준이 하도 낮아 이런 게 문제가 된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바로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다. 다들 아시는 얘기니까 간단히 적겠다(숫자도 대략으로 표기한다). 우리는 지금 9천 6백여 억 원을 부담하고 있다. 그걸 4천억 원 정도 더 내라는 얘기다. 그리고 분담금 협상을 매년 하자는 게 미국의 주장이다. 이걸 놓고 협상 결렬이 열 차례나 반복되었다. 지엽적인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원래 사소한 문제가 커지고 커진 끝에 폭발하는 게 세상일이다. 방위비 분담금이 한미동맹을 허무는 뇌관이 될 일은 절대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해결이 아니라 결단의 문제

협상 결렬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미 충분히 줄만큼 주고 있다며 이참에 아예 방위비를 삭감하자고 주장한다. 부지의 임대료나 각종 세금 면제 같이 보이지 않거나 누락된 비용을 따지면 이미 그 이상을 지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주일미군은 이들이 애용하는 사례다. 절대 액수는 일본이 많지만 GDP대비로 보면 우리가 더 훨씬 높다는 이야기다. 미군수도 우리는 2만 8500명인데 일본은 거의 6만 명이니까 미군 1인당 지원비도 우리가 훨씬 더 많다는 설명이다. 참 꼼꼼하고 알뜰해서 좋기는 한데 이분들, 안보에 대해서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북한이 그나마 대한민국을 협상 대상으로 여기는 이유는 미국 때문이다. 주먹이 근질거리는 중국이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미국 때문이다. 한미동맹은 두 불량배의 끓어 넘치는 의지 실현 욕구를 차단하고 있는 현실적인 힘이다. 이걸 대체 어떻게 비용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꼭 비대칭 동맹의 특징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안보는 비용으로 산출될 성질이 아니다. 해서 방위비 분담금에 ‘공평’하거나 ‘정확한’ 액수 같은 건 없다. ‘적절한’이 방위비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적절’의 수준이다. 얼마 전 여야 중진 의원들이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 지연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며 한미 양국이 상호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합리적이고 공정한 수준에서 조속히 타결할 것을 촉구했다. 이게 하나마나 한 소리인 게 ‘합리적이고 공정한 수준’이 대체 뭐냐는 거다. 결국 이 문제는 ‘결단’할 문제지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외교부와 국방부가 협의하고 국회에서 승인받고 하는 절차가 있다지만 그러나 그 절차에 앞서 협상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양국 지도자의 생각과 의지다. 결국 트럼프와 문재인의 문제이니 최종적으로 책임을 질 사람이 ‘결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오해하지 마시라. 무조건 들어주라는 얘기 절대 아니다. 올려주기 싫으면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고 당신들도(미국)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통보하라는 얘기다.

50조원 대 4천 억 원

정권의 입장에서는 머리가 복잡할 것이다. 올려주자니 지지층이 돌아설 것 같고 협상을 발로 차자니 후폭풍이 두렵다. 판을 깰 각오로 뻣뻣하게 나갈 경우 우리의 선택은 몇 가지가 있다. 안보의 자체 강화, 다른 동맹의 모색, 안보 위협 자체를 줄이는 것이 그것인데 하나같이 쉽지 않다. 안보의 자체 강화? 현재보다 돈이 더 든다. 한미동맹을 대체할 또 다른 동맹? 맺을 나라가 없다. 일본하고 삐걱거리는 걸 보면 전혀 가능성 없는 방안이다. 안보 위협 자체를 줄이는 것? 이제껏 그게 안 돼서 이 상황까지 온 것 아닌가. 결론적으로 아무런 대안이 없다는 얘기다. 방위비 협상을 놓고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협상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안을 미국 측에서 불쑥 제시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안’이 혹시 4천 억 원을 말하는 거라면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목으로 50조 원을 허공에 날리면서 안보를 위한 4천 억 원이 아까워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간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또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돈 몇 푼 아끼겠다고 동맹을 깨고 생존을 포기한 나라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 대표)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