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화공 최영철 씨의 5.18 체험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제화공 최영철 씨의 5.18 체험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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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제화공이었던 최영철 씨의 광주사태 체험기다. 공수부대원의 가혹한 시위 진압에 분노한 최영철 씨는 5월 19일부터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으며, 5월 21일 오후 3시, 광주공원에서 무기를 지급받고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이 와중에 5월 24일 송암동 효덕초등학교 앞에서 계엄군에게 체포되었다. 최 씨의 검찰진술을 통해 당시 계엄군의 진압과정, 시민들이 무장하는 과정, 그리고 송담동 효덕초등학교 부근에서 광주 시내에서 철수하던 공수부대와 잠복하고 있던 전교사 교도대 병력 간에 오인사격이 벌어져 공수부대원 9명이 숨지고 트럭 한 대가 불탄 사건 정황 등을 알 수 있다.
1980년 5월 장갑차를 앞세우고 광주 시가지에서 위력시위를 하고 있는 계엄군. 시민 학생들과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최영철 씨 같은 시민들이 무장을 하고 계엄군에 맞서기 시작했다. 특히 시민들은 얼룩무늬 군복을 착용한 공수부대에 큰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장갑차를 앞세우고 광주 시가지에서 위력시위를 하고 있는 계엄군. 시민 학생들과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최영철 씨 같은 시민들이 무장을 하고 계엄군에 맞서기 시작했다. 특히 시민들은 얼룩무늬 군복을 착용한 공수부대에 큰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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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조서(요약) 성명 최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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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인은 1980년 5월 당시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요.

그 당시 제 나이는 스무 살이었고, 광주 동구 금남로 4가에서 양화공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진술인이 근무하던 공장의 상호는 무엇이었나요.

제일갑피라고 구두가죽에 미싱을 박는 공장이었는데 금남로 4가에 있는 2층 건물 옥상에 공장이 있었습니다.

진술인은 광주 민주항쟁 시 가담했던 사실이 있는가요.

 네, 그러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기간은 어떤가요.

1980년 5월 19일부터 5월 24일까지 6일 간입니다.

광주 민주항쟁에 가담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공수부대원들이 광주로 와서 우리 광주시민들을 몽땅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를 스스로 지키기 위해 저도 자발적으로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1980년 5월 17일 밤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것은 알았나요.

예, 1980년 5월 18일경 방송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비상계엄이 확대된 후, 광주에서의 시위 및 진압 양상이 달라졌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어떤가요.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후 그 전에는 경찰들이 데모를 진압했는데, 5월 18일부터는 얼룩무늬의 공수부대원들이 데모를 진압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5월 18일은 일요일인 관계로 공장이 쉬어, 오후에 시내에 나와 보았더니 (그 당시 저의 집은 중흥동에 있었습니다) 공용터미널, 금남로 같은 곳에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반대편에는 얼룩무늬의 공수부대원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던 것입니다. 저는 5월 18일에는 학생들과 공수부대원들이 서로 충돌하는 장면은 보지 못하고 서로 대치하는 장면만 목격한 채 귀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인 5월 19일 출근하여 보니 데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있어서, 일을 하지 못한 채 건물 옥상으로 나가 데모를 구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데모하는 장면을 보니까 공수부대원들이 데모를 진압하는 방법이 종전의 경찰들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철모에 방석모를 쓰고, 소총을 등 뒤로 비껴 메고 손에는 진압봉을 들고 있었는데, 데모대를 향하여 돌진하여 시위 군중을 잡게 되면 진압봉으로 머리건 어깨건 가리지 않고 마구 때리고 군화로 짓밟아 아예 피범벅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학생들이 도망을 치면 끝까지 추격하여 붙잡아 마구 구타했습니다. 학생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 가게 주인이 셔터를 내려주면, 공수부대원들은 셔터를 발로 차 망가뜨린 다음 셔터를 올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학생들을 끄집어 내 진압봉과 군화발로 마구 구타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학생들 옷 벗겨 연행

공수부대원의 과잉진압 장면을 더 목격한 것이 있는가요.

예. 저의 공장 바로 옆에는 옛날 금호그룹 회장이었던 박인천의 집이 있는데, 어떤 여학생이 그 집 안으로 도망해 버리자, 공수부대원들은 그 집 안까지 쳐들어가 그 여학생을 끄집어낸 후 여학생인데도 마찬가지로 진압봉과 군화발로 마구 때려 피범벅을 만든 후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어떤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대의동에서 금남로 쪽으로 골목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저씨는 전혀 데모도 하지 않은 사람인데,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그 아저씨의 앞머리를 후려쳐 버려, 그 아저씨가 뒤로 자빠지자 그 아저씨도 붙잡아 가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그날 여학생들을 끌고 가면서 공수부대원이 여학생의 옷을 벗기고 끌고 가는 장면도 본 일이 있는가요.

예, 금남로 서울신탁은행 부근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여학생 2,3명을 끌고 가는데 겉옷을 위아래 모두 벗긴 다음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으로 끌고 가는 것을 제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습니다.

남학생들은 어떻게 끌고 가던가요.

남학생들도 모두 옷을 벗겨 팬티 차림에 손을 뒤로 묶은 채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끌려가는 학생들이 모두 피범벅이었나요.

예, 모두 피범벅이었습니다. 너무 처참했습니다.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그렇게 심하게 진압을 해야 할 만한 상황이었나요.

제 생각으로는 그렇게까지 과잉진압을 해야 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고, 그들이 그렇게까지 한 이유도 전혀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술인도 광주 민주항쟁에 가담하게 된 것인가요.

예,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공수부대원들의 짐승만도 못한 행동을 보고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5월 19일 16시경 퇴근하는 길로 금남로 1가 가톨릭 센터 앞으로 가서 저도 시위 군중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는 어떤 방법으로 데모를 한 것인가요.

가톨릭 센터 앞에 많은 군중들이 있었는데, 저도 합류하여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해제하라”, “계엄군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고, 공수부대를 향해 돌을 던지고 했습니다.

그 때 공수부대원들에게 붙잡히지는 않았나요.

앞으로 갔다가 뒤로 피신했다가 하여 그때는 붙들리지 않았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은 술에 취해 있었다

5월 19일에는 귀가를 했나요.

예, 5월 19일에는 19시경 귀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귀가를 하면서 공수부대원들의 옆을 가까이 지나치는데 보니, 공수부대원들은 술에 많이 취한 상태였습니다.

공수부대원들이 술에 취했는지 어떻게 아는가요.

제가 공수부대원의 바로 옆을 지나쳤는데, 그들에게서 술 냄새가 많이 났고, 또 말할 때에도 술에 취한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5월 20일의 상황은 어떠했나요.

5월 20일 08시30분경 직장에 출근했더니 헬기에서 “모든 직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 방송을 듣는 즉시 빨리 퇴근을 하라”는 안내방송을 했습니다. 저는 그 방송을 듣고 퇴근은 하지 않은 채 직장 동료들과 함께 공장 건물 옥상에 가서 시위하는 광경과 진압하는 과정을 구경했습니다. 그런데 공수부대원들의 진압 방법이 그 전날보다 더 심해져 있었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대한민국의 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라고 볼 수 없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5월 20일에도 시위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인가요.

예, 건물 옥상에서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보면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 길로 다시 금남로로 가서 전날과 마찬가지로 시위 군중들 사이에 끼여 시위를 하게 되었습니다. 구호도 외치고 돌도 던졌습니다. 각목도 하나 구해 들고 있었습니다. 다른 군중들과 함께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거쳐 광주역 방면으로 가는데, 광주역 쪽에서 총소리가 나기에 겁이 나서 바로 집으로 갔습니다. 귀가 시간은 20시경쯤이었습니다. 그날 하루 종일 데모를 했던 것이지요.

5월 21일 상황은 어떠했나요.

5월 21일 08시30분경쯤에 집에서 나와 출근하지 않고 막바로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가서, 그곳에 있던 시위군중들과 함께 시외버스, 미니버스(25인승 버스를 말함)를 타고 다니면서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 “신현확 총리 물러가라”, “계엄군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했습니다. 계엄군들에게 돌을 던지고 했습니다.

주민증 확인 후 총기 지급

5월 21일의 특이한 상황이 있었나요.

예, 5월 20일까지는 공수부대원들이 경상도 말투를 많이 썼는데, 5월 21일에는 공수부대원들이 전라도 사람들로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니, 공수부대원의 구성원이 5월 21일을 기하여 경상도 사람들로부터 전라도 사람들로 교체되었다는 것인가요.

그렇게까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그 전날까지는 공수부대원들이 경상도 사람이 많았는데, 5월 21일에 금남로 같은 데서 공수부대원을 붙잡아 때리려고 하면 옆에 있는 학생들이 “저 군인은 같은 학교(전남대나 조선대) 학생이니 때리지 말라”라고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5월 21일 도청 앞의 총격 사건에 관하여는 알고 있는가요.

5월 21일 오후에는 저는 도청 앞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 곳에서 무장을 하고 있었기에 그 사건 이야기는 나중에 말을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5월 21일 15시경 시위 군중들과 함께 광주공원으로 가서 이미 와 있던 다른 시위대와 함께 구호를 외치면서 한 시간 가량 시위를 하고, 일부 군중들은 도청으로 가고 일부 시위대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때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위대를 지휘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자가 핸드마이크로 “무기를 곧 지급하겠으니 신분증을 소지하고 공원 정문 해태상 앞으로 모이라”는 안내방송을 하기에, 저는 그 말을 듣고 위 장소로 가서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M1 소총과 실탄 48발을 배급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총을 나누어 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는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총과 실탄을 함께 나누어 주던가요.

바로 옆에서 한쪽은 총을 주고, 다른 한쪽은 실탄을 주었습니다.

위 무기는 어디서 구한 것이라고 하던가요.

제가 듣기로는 화순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고를 털어가지고 온 것이라고 했습니다.

총기를 배급받으면서 주민등록증은 왜 보여 주었나요.

총기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은 안 된다고 하면서 주민등록증이 있는 나이 든 사람에게만 총기를 준다고 하여 주민등록증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럼 총기를 분배하면서 주민등록증을 보고 그 인적사항을 일일이 기재하던가요.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총기를 분배받을 때, 광주시민에 한한다든가 하는 등의 일정한 제한이 있었나요.

제한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총기를 지급받은 후 어떻게 했나요.

군용 트럭을 타고 자원동 다리 부근으로 가서, 예비역 중대장이었다고 하는 문장우한테 총 조작 방법과 총 사격 등에 관한 교육을 받은 다음 부대 편성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진술인은 어느 부대에 소속되었나요.

중대는 잘 기억나지 않고, 소대만 기억나는데, 저는 3소대였습니다. 그냥 서 있는 줄에 따라서 소대를 지명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어떻게 했나요.

부대 편성을 마친 후, 계엄군이 방림동 산에 있다고 하여 걸어서 시민군 40여 명이 그곳으로 가서 광주천 다리 위에서 경계근무를 했지만, 이 정보는 잘못된 정보로 계엄군은 없었습니다. 그 후 광주 고속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중흥교회에 가서 총을 쏜 일도 있는가요.

그 부분은 ‘광주항쟁사료선집’에 잘못 기재되어 있는데,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던 중 중흥동 소재 중흥교회에 계엄군이 있다는 무전연락을 받고 그곳으로 급히 가보았습니다. 먼저 온 시민군이 증흥교회의 담벼락을 향해 총을 쏘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갔고, 저는 밖에서 경계근무를 했으나, 교회 안에도 역시 계엄군은 없었습니다.

위 사료선집을 보면 진술인도 교회를 향해 총을 쏜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어떤사요,

그 부분은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서, 저는 총을 쏜 일이 없고 다른 시민군들이 교회에다 총을 쏘았던 것입니다.

연세대·고려대 학생들도 시민군 활동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중흥교회에서 나와 타고 왔던 버스를 이용하여 시내를 돌다가 저녁때가 되어 다시 광주공원으로 가서 저녁 내내 광주공원에서 경계근무를 섰습니다.

그 다음날인 5월 22일의 상황은 어떤가요.

5월 22일에도 그 전날과 마찬가지로 고속버스나 군용트럭을 이용하여 광주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계엄군이 나타났다는 무전연락을 받으면 그것으로 급히 가서 시민군으로 활동하다가 저녁 때가 되어 무등경기장 뒤편 공터에 모여 경계근무를 했습니다.

그날 경계근무는 누구와 함께 했나요.

무등경기장에서 처음에는 저를 포함하여 3명이 근무를 섰는데 잠시 후 연대생 1명, 고대상 1명이 와서 그들과 함께 5명이 근무를 했습니다.

위 연세·고려대 학들은 어떻게 하여 광주까지 왔다고 하던가요.

그것은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총기를 계속 소지하고 있었나요.

아닙니다. 5월 23일 오전에 수습대책위원회에서 “총기를 반환하라”는 가두방송을 하기에, 그 방성을 듣고 도청으로 가서 경비실에 마련된 무기 회수 장소에서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총기를 반환했던 것입니다.

총기를 반환할 때 주민등록증을 보여준 이유는 무엇인가요.

총기를 반환하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한다고 하기에 주민등록증을 보여 주니 그들이 일일이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총기를 반환받았습니다.

총기를 반환하면서 지금 총을 반환하면 되느냐고 따진 일이 있는가요.

예, 총기를 반환하면서 계속 총을 갖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위와 같이 따지니까, 그들이 “총기 관리가 되지 않아 그러니 나중에 관리를 제대로 하면서 다시 총을 주겠다”고 하면서 총기를 반환받았습니다.

진술인은 총기를 소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총을 쏜 일은 없는가요.

딱 한 번 있습니다. 5월 22일 군용 지프차를 타고 시내를 돌던 중 헬기가 보이기에 헬기를 향해 총을 세 방 쏴본 일이 있습니다.

“창녀들도 밥 해줘”

총기로 사람을 쏘거나 한 일은 없었나요.

그런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진술인은 총기를 휴대하고 경계근무를 서고 했는데, 만약 군인들이 나타나면 총을 쏠 생각이었나요.

물론입니다. 공수부대원들이 나타나면 총을 쏠 생각이었습니다.

다른 군인들에게는 총을 쏠 마음이 없었나요.

물론입니다. 공수부대가 아니면 다른 군인들에게는 총을 쏠 마음이 없었습니다.

왜 공수부대만 총을 쏠 생각이었던 것인가요.

공수부대는 전두환의 명령을 받고 우리 광주 사람들을 죽이러 왔기 때문입니다. 공수부대는 우리 광주 사람들을 무참히 때리고 짓밟고 죽였습니다. 따라서 저희도 저희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무장을 한 것이고, 공수부대롤 보면 총을 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진술인은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서 경철서 등지에서 탈취한 총을 들었던 점에 대하여 정당하다고 생각하는가요.

물론입니다. 저희는 정당했습니다. 공수부대는 처음부터 우리 광주시민을 죽이려고 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저희가 총은 든 것은 저희들의 생명을, 광주 동료 시민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무장을 하고 다니면서 집에도 가지 못했는데 식사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요.

광주는 모든 시민들이 저희 시민군을 도와주었습니다. 다니는 데마다 밥을 해서 저희가 밥을 달라고 하면 밥을 주었습니다. 대인동에 가면 창녀촌이 있는데, 그 창녀들도 밥을 해서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무장을 하고 있는 동안 별다른 사고는 없었나요.

예, 별다른 사고가 없었습니다. 그 점이 저희 광주시민들이 자부하는 것입니다. 경찰이 물러가고 저희가 광주를 장악한 가운데에서도 별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제가 듣기로 최철이라는 사람이 자기 계모 등을 쏴 죽였다고 하는데, 그 사람도 저희 시민군이 잡았던 것이고, 어느 장소에서 4인조 강도가 있다고 해서 시민군이 가서 잡았습니다. 간첩이 있다고 하면 그 간첩부터 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5월 23일 무장을 해제한 후 어떻게 했나요.

도청에서 무기를 반환한 후 바로 집으로 가서 쉬었습니다.

또 다시 소총과 실탄 지급받아

5월 24일의 상황은 어떠했나요.

5월 24일 10시경에 두암동에 사는 친구 유일근을 만나러 갔으나 그가 없어 백운동에 살고 있는 사장 김종록을 만나기 위해 도청 앞으로 갔습니다. 도청 앞에서 차를 타려고 했는데 (당시 일반차량은 다지니 않고 시민군이 운전하는 군용차량이나 버스 등만 다니고 있었습니다) 마침 군용트럭 한 대가 왔는데, 그 트럭에 타고 있는 이강갑이 그전 며칠간 저와 같은 소대의 시민군으로 활동했기에 저를 알아보았고, 백운동 쪽으로 간다고 하여 그 트럭을 얻어 타게 되었습니다.

위 트럭에는 누가 타고 있었나요.

저와 같은 소대원이었던 이강갑이 있었고, 운전수 김태창, 그리고 최진수, 이정남, 성명불상, 아주머니 1명 그 외 남자 2명이 타고 있었고, 시체가 든 관이 있었습니다. 이 관은 아주머니의 남편 시신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 트럭을 탄 후 유동에 있는 수창초등학교 후문 쪽에 관과 아주머니를 내려놓고 전남방직 앞을 지나 광천동을 거쳐 백운동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운동에서 내렸나요.

아닙니다. 백운동에 이르러 제가 타를 세워달라고 했으나, 당시 제가 트럭 짐칸에 타고 있어서 그런지 운전사가 그 말을 듣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쳐 진행하다가 그 길로 송암동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송암동에 도착하여 어떻게 했나요.

송암동에 있는 효덕초등학교 앞에 도착하자, 운전사가 모두 내리라고 했고, 그래서 저와 이강갑, 최진수, 이정남, 그리고 성명불상 등 5명이 내렸습니다. 저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처음부터 무장을 하고 있었고, 저는 차에서 내린 후 트럭에 있던 M1 소총 1정, 카빈 소총 1정, 철모, 그리고 카빈 실탄 15발, M1 실탄 3발을 지급받았습니다. 그런 후 트럭은 운전사 및 조수와 함께 떠났습니다.

진술인은 처음부터 이강갑 등과 위 장소에서 무장 근무를 할 생각에 위 트럭을 탔던 것인가요.

아닙니다. 처음에는 백운동에 가려고 위 트럭을 얻어 탄 것인데 가다 보니 송암동까지 가게 되어 이강갑과는 그전에도 함께 시민군으로 활동을 했기에 그들을 도와줄 생각에 효덕초등학교 앞에 내려서 무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 옆 산속에 군인들이 매복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들이 그 장소에서 경계근무를 선다고 하여 저도 도와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공수부대원들, 민가 향해 총기 난사

효덕초등학교 앞 도로 상황은 당시 어떠했나요.

아스팔트 포장의 왕복 2차선 도로였습니다.

효덕초등학교 앞에 도착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5월 24일 12시에서 14시 사이입니다.

효덕초등학교 앞에서 별일이 없었나요.

아닙니다. 트럭이 막 떠나고 조금 있는데, 초등학교 옆 골목에서 국민학생 1명이 나오면서 “군인이 온다”고 고함을 질러,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저를 비롯한 5명의 시민군들은 피신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저는 길 건너 도랑으로 몸을 숨기는데 제일 앞에 오던 장갑차에서 기관총이 발사되더군요. 제 철모에 기관총알 1발을 맞았는데 다행히도 철모 때문에 살았지요. 도랑에 있다가 들고 있던 M1 소총은 보리고 카빈 소총만 들고 그 앞 민가 화장실에 몸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갔던 사람들 역시 모두 일제히 민가 쪽으로 숨었습니다.

그러자 계엄군들이 어떻게 하던가요.

계엄군들은 효덕초등학교 옆 골목길에서 장갑차를 선두로 하여 트럭 10여 대가 나왔는데 제가 민가 화장실(화장실보다는 뒷간이라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에 숨어 있으면서 보니, 어느 트럭에서 군인들이 내리는데 그 군인들은 얼룩무늬의 공수대원들이었고, 제가 숨어 있는 민가를 향하여 일렬로 늘어선 후 민가를 향해 일제히 무차별 연발로 난사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총격을 가한 군인들의 숫자는 어떤가요.

제가 뒷간 사이 틈으로 조금만 보았기에 모두 몇 명인지는 모릅니다.

그 군인들이 어디를 향해 총격을 가했나요.

민가를 향해 총격을 가했습니다.

군인들이 민가를 향해 총격을 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제 동료 4명이 민가 쪽으로 숨었기에 민가를 향해 총을 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민가를 향해 총을 쏘면 아무 죄도 없는 양민도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그런데도 공수부대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민가를 향해 총을 연발로 해서 무차별 집중사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뒷간에 숨어 직접 목격한 것입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제가 뒷간에 숨어 밖을 보다가 뒷간의 안쪽으로 몸을 피하자 조금 전 제가 있었던 장소로 총알이 빗발쳤습니다. 그래서 안쪽에 몸을 숨기고 한참 있었습니다. 숨어 있는데 정말 총소리가 많이 들리더군요. 작은 폭탄 같은 소리도 들었는데, 밖을 쳐다 보니 논바닥 흙이 하늘로 올라가고 땅이 움푹 파이고 할 정도로 작은 포탄도 떨어지고 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M16 총렬 아래에 장착하여 쏘는 포탄 같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무차별 난사를 10여 분 정도를 하고 난 후 군인들이 민가로 들어오면 메가폰으로 “총을 머리 위로 들고 투항하라”고 하여 화장실에 숨어 있던 저는 총을 모리 위로 들고 밖으로 나가 투항을 했던 것입니다.

당시 공수부대 선두에 있던 장갑차이 기관총도 발포했나요.

예, 물론입니다.

당시 철수하던 공수부대와 잠복하고 있던 전교사 교도대 병력 간에 오인사격도 있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진술인 등 시민군이 총격을 당한 것이 먼저인가요, 아니면 공수부대와 교도대 간의 오인사격이 먼저인가요.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희가 효덕초등학교 앞에 도착하여 하차할 때까지 그 부근에는 군인도 없었고 전혀 총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때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으니 공수부대와 교도대 간의 오인사격이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저희가 하차한 지 얼마 안 되어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가 오면서 저희를 발견하고 먼저 장갑차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그 후 공수부대원들이 하차하여 민가를 향해 M16 소총으로 난사를 했던 것입니다. 저는 뒷간에 숨어 있는 중 총격이 심하고 작은 포탄이 터지고 했던 것으로 보아 그때 공수부대와 교도대 간의 오인사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분명히 저희가 공수부대로부터 총격을 받기 이전에는 교도대와 공수부대 간이 오인사격은 없었습니다.

체포 후 무수히 구타 당해

진술인은 공수부대에 투항한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가요.

계엄군한테 체포되자마자 계엄군들로부터 무수한 구타를 당하고 (한 30분 정도 구타를 당하는 것으로 기억되며, 너무 아파 기절을 하면 물까지 뿌려 깨운 후 또 구타를 했습니다) 포승줄에 묶인 채 걸어서 계엄군과 함께 헬기장으로 갔습니다.

당시 몇 명이 포승줄에 묶여 헬기장으로 갔는가요.
저, 최진수, 이정남, 성명불상 등 모두 4명이 그 당시 함께 체포되어 끌려가 헬기를 타고 광주국군병원으로 가서 1차 조사를 받은 다음 상무대로 갔습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이강갑도 그 당시 바로 체포가 되었으나, 505보안부대로 가서 조사를 받고 뒤늦게 상무대로 왔다고 했습니다.

진술인은 공수부대에 체포되어 헬기장으로 가는 동중에 시체를 본 사실이 있는가요.

네,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누구였으며, 시체는 몇 구이던가요.

죽은 사람들은 모두 군인이었고, 기체는 9구이었습니다.

죽은 군인들은 공수부대원이던가요.

네, 모두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있는 공수부대원들이었습니다.

진술인은 죽은 군인이 9명인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요.

포승줄에 묶여 헬기장으로 가면서 제가 죽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세어 보니 9명이었고, 군인들끼리 하는 말을 들었는데 군인들도 9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죽은 시체는 어디에 있었고, 그 상태는 어떠하던가요.

죽은 사람들은 도로 우측 변에 일렬로 쭉 늘어 놓았고, 그 위에 가마니로 덮어 두었습니다.

진술인은 군인이 어떻게 하여 죽었는지를 아는가요.

그들이 죽게 된 경위는 모릅니다.

민간인들의 시체는 보았나요.

민간인들의 시체는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민간인들이 얼마나 죽었다고 하던가요.

그것은 모릅니다

폭격에 부서진 차량은 보았나요.

예, 앞서 진술한 바와 같이 제가 헬기장으로 끌려갈 때 군인들의 시체를 본 바로 그 장소 옆에 트럭 한 대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앞에서 트럭에 여러 대 정차해 있었고 그 앞에 장갑차도 한 대 정차해 있었는데,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불타고 있었던 것은 트럭 한 대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현장 약도가 이와 같은가요.

(이때 검사는 진술인에게 ‘송암동 양민 학살 요도’를 제시한다)

검찰이 최영철 씨에게 제시한 송암동 양민학살 요도.
검찰이 최영철 씨에게 제시한 송암동 양민학살 요도.

 

 

예, 맞습니다.

“사살해 버려”

통합병원으로 간 후 어떻게 되었나요.

통합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군인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한 후 상무대로 가서 합동수사본부에 무장 경위 등에 대하여 조사를 받은 후 상무대 헌병 영창에 구속되어 있다가 1980년 9월 5일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것입니다.

당시 조사받은 내용 중 기억나는 것이 있는가요.

예, 앞서도 검사님이 여러 번 물어보았으나, 당시 조사관이 저희에게 “당신들이 먼저 총을 쏘았고 그 후 군부대 간에 오인사격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했으나, 저희는 “저희가 먼저 총을 쏜 것이 아니라 공수부대가 먼저 저희에게 총을 쏘았고 그 후 군부대 간에 오인사격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통합병원에 도착했을 때 군인들이 저희를 폭도라고 보고하니까 준장인지 소장인지는 모르겠으나 장군인 사람이 “사살해 버려” 라고 지시했는데, 중령인 사람이 저희를 그냥 살려준 것이 기억납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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