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투입 11공수 61대대장 진술(下), “5월 21일 도청앞 시위대가 먼저 계엄군에 발포 ”
광주투입 11공수 61대대장 진술(下), “5월 21일 도청앞 시위대가 먼저 계엄군에 발포 ”
  • 김용삼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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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9.01.18 09:26:03
  • 최종수정 2019.01.1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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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시위대들의 숫자나 시위양상으로 보아 방석모, 방석복 등 진압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공수부대원들이 진압봉 하나만 들고 진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만 상부의 명령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이 시위진압을 하게 되었습니다. 숫적으로 열세인 저희들이 진압을 하려니 일부 과잉행위도 발생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5월18일 오후 광주에 투입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피의자 신문조서 요지다. 안부웅 대대장은 광주에 투입된 이래 계속 시위대에 쫓겨다니다 5월21일 도청 앞에서 포위돼 생사의 기로에 섰고, 시민과 총격전을 벌여야 했던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다.
  안부웅 대대장은 초기에는 “철수하는 31사단 병력에게 실탄을 얻었다”, “전남도청 앞에서 조준사격은 없었다”고 했다가 신문이 거듭되자 “62대대로부터 실탄을 얻었다”, “전남도청 앞 옥상 건물에 대원을 배치해 조준사격을 했다”, “상부 지시없이 중대장과 지역대장들에게 실탄을 분배했다”고 시인했다.
  안부웅 대대장은 “진압봉 하나만 가진 소수의 공수부대가 다수의 군중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가혹한 진압이 벌어졌다”면서 “공수대원의 진압도 강경했지만 광주 시민들의 공수대원 공격도 상당히 과격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 마디로 광주 사건에 관한 한 군도 피해자였다는 주장이다. 관련내용을 상하 두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1980년 5월 광주 시가지에서 계엄군으로 출동한 공수부대와 시민들이 충돌, 차량이 불타고 있다. 5월 18일 밤부터 격화된 시위는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의 차량 돌진,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격화되었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광주 시가지에서 계엄군으로 출동한 공수부대와 시민들이 충돌, 차량이 불타고 있다. 5월 18일 밤부터 격화된 시위는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의 차량 돌진, 이를 저지하기 위한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격화되었다.(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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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웅 제11공수 61대대장 피의자 신문조서(2회)

1995년 5월17일 국방부 검찰부 고등검찰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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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장에게 실탄 지급했다” 시인

  -전회에 잘못 진술한 부분이 어떤 내용에 관한 것인가요.
  “광주 현지에서의 실탄분배에 관한 내용입니다.”
  -어떤 점이 잘못 진술했던 것인가요.
  “전회 진술 시에는 5월21일 31사단 경계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얻었다고 진술했는데 사실은 5월20일 야간에 62대대로부터 실탄을 얻었습니다.”
  -그 부분에 관해 상세히 진술하시오.
  “제가 전회 진술 후에 돌아가 당시 정보장교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기억을 다시 더듬으며 생각해보니 5월20일 야간 시위대의 차량 시위를 진압한 뒤 22시~23시경 사이에 어느 지역대장이 와서 저에게 ‘62대대는 경계용 실탄을 소지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보고해 제가 62대대장에게 ‘실탄을 가지고 왔느냐’고 물으니 62대대장이 처음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실탄이 있다고 하는데 있으면 나누어 달라’고 하니 62대대장이 ‘2탄통(1탄통은 1백50발)이 있다’고 해 제가 ‘그러면 1탄통만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대대 정보장교인 장두혁 대위를 62대대장에게 보내 실탄 1탄통을 빌려 오게 했습니다. 빌려온 실탄은 저의 지프에 보관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실탄을 얻어 오는 것을 저의 대대 중대장들이 본 것 같았습니다. 조금 있으니 지역대장과 중대장 몇 사람이 저에게 와서 실탄을 분배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안 된다고 했으나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불안해 하고 또 ‘사격을 할 것도 아닌데 분배해 달리’고 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대장들에게 1탄창씩 지급했습니다.”
  -당시 실탄을 지역대장들에게 지급하여 지역대장들이 다시 중대장에게 지급한 것인가요. 아니면 중대장들에게 직접 지급했는가요.
  “기억이 정확히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시 어느 정도 분량의 실탄을 중대장들에게 지급했나요.
  “1탄통에 10탄창이 들었는데 1탄창에는 약15발 정도 들어 있습니다. 원래는 20발까지 장전할 수 있는데 20발을 전부 다 장전하면 탄창 스프링에 무리가 가서 15발씩 장전을 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때문에 총 1백50발정도 실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대장 9명에게 1탄창씩 돌아가도록 분배하고 나머지 1탄창은 탄통에 넣어 저의 지프 밑에 놓아두었습니다.”
  -중대장들에게 실탄을 분배할 때 어떤 지시를 했는가요.
  “이 실탄은 절대로 사격하라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 마음의 안정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중대장들이 휴대하라고 주는 것이지 절대 사격하라고 주는 것은 아니므로 대대장 지시 없이는 절대로 사격하지 말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그 실탄을 받은 중대장들이 자기 중대원들에게 다시 분배했는지 여부는 피의자가 모르는 것이지요.
  “지역대장들이 중대장들에게 ‘분배한 실탄은 너희 자살용이니 그렇게 알아라’라고 누차 강조했기 때문에 중대장들이 다시 중대원에게 분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격명령 없이 절대 쏘지 말라” 지시

  -당시 중대장들의 개인화기는 무엇이었는지요.
  “지역대장 이상만 권총을 휴대했고 중대장 이하는 M16을 개인화기로 휴대했습니다.”
  -피의자는 소속 대대의 중대장 이상에게 1백50발 정도의 실탄만 지급하고 나머지 실탄은 추가로 다시 지급한 적이 없는가요.
  “5월21일 도청 앞에서 발포가 있은 후 조선대에서 주답마을로 철수하면서 실탄을 지급했습니다.”
  -공수부대의 특정상 주둔지를 떠나면 대대단위 또는 팀 단위로 실탄을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아는데, 광주로 출동하면서 피의자 대대는 경계용 실탄을 가지고 가지 않았나요.
  “저희 대대는 서울에서 출발할 때 비행기로 급히 공수되는 바람에 실탄을 가져 오지 않았습니다. 열차편으로 투입된 저희 대대후발대 병력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저의 대대 부대대장이 실탄을 가지고 조선대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5월20일 조선대에 있는 실탄을 62대대는 갖고 출동했는데 어째서 61대대는 실탄을 조선대에 두고 시내로 출동을 했는가요.
  “5월19일 새벽 광주 시내에 병력이 배치될 당시는 실탄을 갖고 출동할 필요성을 못 느꼈고, 그 다음 5월19일 점심 때 조선대로 복귀하여 식사 도중 금남로에 시위가 있다고해 바로 출동했기 때문에 실탄을 가져 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급히 출동했습니다.”
  -5월20일 야간이 중대장들에게 실탄을 지급해야 할 불가피한 상황이었던가요.
  “실탄을 나눠 주지 않으면 안될 불가피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평소 훈련시에도 중대장들에게 실탄을 나누어 주는 경우가 가끔 있기 때문에, 당시도 시위대의 격렬한 차량 시위가 있은 뒤 중대장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실탄을 분배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분배된 실탄을 중대장들이 위급할 때 임의로 사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는가요.
  “저는 중대장들에게 실탄을 지급하면서 ‘사격명령 없이는 절대 사격하지 말라’고 누차 강조했고 지역대장들도 그 내용을 강조했기 때문에 중대장들이 저의 사격명령 없이 사격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시 62대대도 5월20일 야간에 실탄을 분배했던가요.
  “62대대가 언제 실탄을 나누어 주었는지는 저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당시 대대 정보장교였던 장두혁의 진술에 의하면 ‘실탄을 62대대로부터 얻어 온 뒤 약30분 지나니 지역대장 2~3명이 와서 대대장에게 “사태가 심각하고 폭도들도 실탄을 가졌는데 실탄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했으나 처음에는 대대장이 “안 된다”고 거절하며 지역대장들을 호통 쳐서 돌려보냈습니다.
  약 20분 정도 지난 뒤 지역대장들이 다시 와서 “중대장들과 병력들의 동요가 심하니 대대장님, 실탄을 나누어 주십시오”라고 재차 건의했으나 대대장이 또다시 거절했습니다.
  그때 중대장 6명 정도가 오더니 지역대장에게 “지역대장님, 폭도들은 무장도 했고 장갑차로 우리를 깔아뭉개려 하는데 철수를 하든지 다른 대책을 세워 주십시오. 중대원들이 중대장의 지휘통제에 따르지 않습니다”고 했는데 이 소리를 대대장도 들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대대장이 처음에는 “중대장들, 빨리 가서 병력 통제해”라고 지시했으나, 중대장들은 뭉기적 뭉기적 하며 돌아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공수부대의 평상시 군기로는 대대장이 그렇게 지시하면 “알았습니다” 하고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당시 사태가 심각했습니다. 대대장이 고민하다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을 전원 집합시키고 먼저 교육을 시켰습니다. “실탄을 나누어 주는데 중대장 이상만 소지하고 사격은 반드시 대대장 지시에 따르라”고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3개 지역대장에게 10탄창을 4개, 3개, 3개 정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때 지역대장들이 그 자리에서 돌아가면서 각 중대장들에게 한 탄창 정도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10탄창을 12명(지역대장 3명, 중대장 9명)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일부는 실탄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라고 진술했는데 당시 상황과 일치하는가요.
  “당시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저에게 실탄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은 기억이 나는데 상세하게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5월20일 야간에 광주역 쪽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있었는데 피의자는 당시 금남로에 배치되어 있으면서 광주역 방면에서의 총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예, 총소리가 많이 들리고 예광탄이 하늘 방향에서 보였습니다. 광주역 일대에서 사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광주역 쪽에서 상당한 양의 사격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들은 피의자는 상부에 보고하거나 문의를 해 본 적이 없는가요.
  “저는 우리 대대 병력 통제에 정신이 없었고 차량 시위가 워낙 격렬했기 때문에 주위 상황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엇갈리는 진술들

  -당시 여단장인 최웅의 진술에 의하면, “피의자가 5월20일 저녁에 밥도 못먹고 잠도 못 잔 상황에서 시위가 격렬해 도저히 못 버티니 철수하든지 실탄을 지급하든지 해 달라고 건의했다. 5월21일에도 피의자가 여단 참모장에게 계속 철수 건의를 하고 철수하지 못하면 부대 안전에 위협을 받으니 실탄을 지급해 달라는 건의도 했으며, 여단에 ‘여기 부대원들이 계속 있으면 다 죽는다’고 철수를 강력하게 건의하고 실탄을 지급하든지 긴급조치를 취하라고 무전을 쳤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 11공수 작전참모였던 류상훈의 진술에 의하면 “5월21일 피의자가 나에게 실탄을 지급해 달라고 건의한 적이 있으며, 그래서 나는 CAC에 전화를 걸어 여단장님에게 보고 드리려 했는데 회의 중이라고 하여 화가 난 나머지 CAC 부관인가 누군가에게 욕을 하며 ‘도대체 위에서 이러한 상황을 아느냐’고 말을 한 적이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당시 참모장이었던 양대인의 진술에 의하면 “피의자가 5월21일 나에게 실탄을 분배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은 전혀 없고 철수 이야기만 되풀이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누구 말이 사실인가요.
  “5월20일에 여단장에게 제가 직접 무전을 한 적은 없습니다. 당시는 여단장님이 상무대에 계셨기 때문에 제가 여단장님께 무전연락을 할 수 없었습니다. 5월21일 여단 참모장에게 무전으로 교신하여 ‘전남도지사가 12시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고 시위대에게 방송을 하고 계엄대책회의에 갔는데 어떻게 돌아가고 있느냐’고 참모장에게 몇차례 물어 본 적이 있으나 철수시켜 달라고 강력히 건의한 것은 아닙니다. 당시는 5월20일 야간에 62대대로부터 얻은 실탄을 분배한 상태기 때문에 5월21일 참모장이나 작전참모에게 실탄을 지급해 달라고 건의한 적은 없습니다.”
  -당시 62대대장이었던 이제원의 진술에 의하면 ‘62대대 실탄은 조선대에 통합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62대대 자체에 실탄은 없었다. 도청 경계 병력인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으며 31사단 경계 병력이 철수할 때 받았는지 철수하기 전에, 인수했는지 알 수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피의자의 진술과 비교할 때 명백히 잘못되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청문회 당시와 전회 진술 시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저의 대대가 62대대로부터 실탄을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63대대장이었던 조창구의 진술에 의하면 ‘31사단 병력이 가지고 있던 실탄인지 알 수 없으나 63대대 작전장교 차정환 대위가 61대대장으로부터 실탄을 수령해 와서 저에게 보고하기를, 그 실탄을 장교들에게만 약 10발씩을 지급했다고 보고했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사실인가요.
  “62대대로부터 얻은 실탄은 모두 우리 병력에게 분배했고 63대대의 차정환 대위에게 지급한 적은 없습니다.”

“5월 21일 시위대가 먼저 계엄군 향해 발포”

  -피의자는 88년 당시 광주청문회 증언에서 31사단 예비 병력으로부터 1천6백80발 가량의 실탄을 얻어 장교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증언했는데, 그 땐 왜 사실과 달리 진술했는가요.
  “62대대로부터 실탄 1탄통을 얻은 것은 사실인데 실제 1탄통 안에 탄창 없이 탄환만 넣으면 1천6백 발 가량의 M16 실탄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제가 1천6백80발 가량이라는 진술을 했던 것입니다. 또 당시 도청 앞에서 어느 대대인지 모르겠으나 철수하던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얻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제가 청문회 증언 당시 경황이 없는 가운데 그런 내용이 기억나 진술했던 것입니다. 일부러 위증을 하기 위해 사실과 달리 진술했던 것은 아닙니다.”
  -피의자는 월간조선 1988년 7월호에 조갑제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우리 대대는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대장이 갖고 다니는 경계용 실탄조차 조선대에 두고 나왔었다.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렸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와 이것을 수령했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사화되어 있는데요. 이 기사대로 한다면 당시 조선대에 있던 피의자 대대의 경계용 실탄을 31사단 헬기가 수송해 와서 그 실탄을 수령한 것으로 되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조갑제 기자에게 31사단 경계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받았다고 이야기한 것인데 조갑제 기자가 약간 착오를 일으켜 그렇게 쓴 것 같습니다.”
  -당시 63대대 8지역대 6중대장으로 근무했던 신동춘의 진술에 의하면 계엄군의 사격이 있을 당시 이미 63대대 중대장에게까지 중대장 1인당 2탄창 정도 실탄이 분배되었다고 하는데 63대대는 실탄이 어디서 났었던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5월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 돌진하던 시위대 버스에서 먼저 계엄군을 향해 발포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예, 버스에서 카빈 총소리가 먼저 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시위대의 장갑차가 먼저 밀고 들어오자 저희 대대 병력들은 분수대 쪽을 향해 도망가 시위대 장갑차가 분수대를 돌아 나간 뒤 잠시 분수대 근처에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약 20분 정도 지난 뒤 갑자기 카빈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뭐야’ 하며 일어서 보니 시위대 버스 1대가 밀고 들어오며 계엄군을 향해 사격을 했고 그와 동시에 계엄군도 버스를 향해 사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대대의 병력이 먼저 시위대 버스를 향해 사격했는가요.
  “분수대 근처에 서로 섞여 있었기 때문에 어느 대대가 먼저 사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당시 여단장은 5월21일 발포가 있었다는 사실을 언제 알았었나요.
  “여단 상황실에서 여단장에게 보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5월22일 주답마을에서 여단장에게 보고한 것이 처음입니다.”

  -여단장에게 보고할 때 발포 경위를 추궁하거나 사격명령 없이 사격한 데 대해 야단 맞거나 한 적은 없나요.
  “추궁 받거나 야단 맞은 적은 없습니다.”
  -당시 62대대 6지역대장이었던 유재영에 따르면 “5월21일 시위대 장갑차가 밀고 들어오면서 일단의 병력들이 피했다 다시 분수대 앞에 모였을 때 62대대장이 지역대장들에게 중대장 1사람당 1탄창 정도씩 돌아갈 분량을 주면서 위협사격을 하라고 했다. 그때 수협 건물 옥상과 건물 주변 및 분수대 근처에 배치할 일부 병력에게도 실탄을 분배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당시 62대대의 경우 시위대 장갑차가 밀고 들어 온 뒤에 실탄을 분배했던 것이 사실인가요.
  “62대대가 언제 실탄을 분배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5월20일 야간에 저희들이 62대대로부터 실탄 1탄통을 얻어올 때 62대대장 지프에 2~3탄통의 실탄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유재영의 진술에 의하면 자신이 실탄을 분배받은 저격요원(각 팀당 2명의 화기 사수중 1명) 4명인가를 데리고 수협 옥상에 올라갔으며, 다른 대대도 옥상에 저격요원을 배치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진술했는데요. 61대대의 경우에도 주변 건물 옥상에 저격수를 배치했는가요. 그리고 저격수들의 임무는 무엇이었는가요. 저격수들은 단순히 위협사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위 주모자나 차량에 대해 정조준 사격을 했던 것은 아닌가요.
  “61대대에서 저격수를 운용하여 도청 건물 위에 올라가도록 한 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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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응 제11공수 61대대장 피의자 신문조서(3회)

1995년 7월4일 서울지방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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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9일의 발포사건

  -지금까지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63대대가 광주고 부근에 배치되어 있을 때인 1980년 5월19일 오후 5시10분경 광주고 앞에서 장갑차 1대가 시민들의 강력한 포위 공격을 받자 궁지에 몰린 63대대 작전장교 차정환이 장갑차 문을 열고 M16 소총을 난사해 김영찬이 3군데 총상을 입었으며, 이것이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라고 하는데 어떤가요.
  “오늘 처음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5월20일 밤 차량시위 이후 도청 앞에 있던 대대장들인 피의자와 62대대장, 63대대장들이 자주 모여 향후 대처방안이나 협동 작전에 대해 논의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어떤가요.
  “5월20일 밤에 62대대장과는 바로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금남로의 차량 시위의 대처방안 등에 대해 모여 상의했으며, 그 후에도 만난 기억이 있지만 63대대장과는 5월21일에야 만났던 것으로 기업합니다.”
  -62대대장과 62대대 장교들은 5월20일밤 대대장이 탄창이 없었던 관계로 팀장들로부터 탄창을 제출하라고 하여 각 탄창마다 15발씩 넣어 1탄창씩 분배했으며, 분배하고 남아 있던 실탄은 5월21일 13시경 상황이 발생한 후 병력들이 임의로 가져가 사용했다고 합니다. 피의자 대대의 중대장이나 지역대장들도 중대장들이 피의자로부터 10발씩 받아 왔다고 합니다. 탄통에는 탄창이 20~30개는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피의자의 대대가 5월20일 밤 62대대로부터 빌려온 1탄통에는 실탄 15발씩이 들어 있는 탄창이 10개 담겨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실탄이 클립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으며, 그 수량은 8백40발 가량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지금 검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받은 탄통에도 실탄이 클립으로 보관되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정확한 기억은 없으며 분배하고 남은 실탄을 어떻게 했는지도 기억이 없습니다.”
  -5월20일 밤 피의자가 실탄을 분배한 시간은 언제였는가요.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23시를 전후한 시간이 아닌가 합니다. 당시는 차량 시위의 고비가 지나고 소강상태에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광주에 도착한 5월19일부터 여단장은 여단본부가 있던 조선대에 계속 위치하고 있었는가요.
  “최웅 여단장은 5월19일 낮까지만 조선대에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고 그 외에는 주로 전교사에 있었으며 5월22일 주답으로 철수한 그날 잠깐 동안 주답에 있으면서 대대장들로부터 철수전 상황을 보고받아 다시 전교사로 갔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전교사에 여단 상황실을 유지하면서 지휘를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전교사에 가 있었던 이유는 당시 정호용 사령관이 전교사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보고하고 지휘를 받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제가 일선 대대장이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유까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여단장이 전교사에 있으면서 병력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불평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5월20일 밤이나 5월21일 철수 전까지 광주도청에 있는 대대장들과 전교사에 있던 여단장이 상호 연락이 가능했는가요.
  “제가 5월21일 오전 시위대 대표인 전옥주와 대화한 결과를 여단장과 통화한 기억이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여단에 보고하기 위해 호출하면 주로 조선대에 있는 참모장이 무전을 받아 서로 통화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당시 여단 전체가 1가지 주파수에 무전기를 고정시켜 놓고 사용했는가요.
  “여단의 공용 주파수 외에 예비 주파수가 있었으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공용 주파수에 고정시켜 무전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62대대장의 진술에 따르면 5월20일 밤 실탄 분배 전 피의자와 만나 상황의 위급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실탄지급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던 것으로 확인되는데 어떤가요.
  “자세한 기억은 없지만 62대대장은 바로 인근에 있었고 5월20일 밤 서로 협의해 가면서 작전을 했으므로 그와 실탄 분배 문제에 대해 협의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실탄 분배

  -조창구 63대대장의 진술에 따르면 5월21일 새벽 대대장들이 만났을 때 피의자가 자신에게 “지금 상황이 위급해 우리들은 이미 실탄 지급 등의 조치를 했다”고 해, 자신은 그 말을 듣고 5월19일 차 대위의 발포 때문에 보안대의 조사가 이루어지고 문책 문제가 거론된 것이 기억나 재차 “상부 지시를 받고 한 것이냐”고 물었던 바, 피의자와 이제원 중령이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는 취지로 답변하여 자신도 지프에 있는 실탄을 장교들에게만 나누어 주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62대대장도 조창구 중령의 말이 사실로 생각되며 자신도 5월20일 밤 피의자와 만났을 때 피의자가 여단장에게 보고하고 실탄을 분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5월20일 밤 실탄 분배 전 여단장으로부터 실탄 분배에 대한 지시가 있었든지, 아니면 피의자가 여단장에게 실탄 분배에 대해 건의 내지 보고하고 여단장 승인을 받아 실탄을 분배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제가 기억하기는 5월20일 밤 실탄을 나누어 주기 전 여단장으로부터 분배 지시를 받거나 사전 보고를 하고 분배하지는 않았습니다. 62대대장으로부터 실탄을 얻으려고 장두혁을 보냈을 때 처음에는 62대대장이 실탄이 없다고 하며 거절한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여단장으로부터 그런 지시가 있었거나 여단장으로부터 승인받은 사항이라면 그때 여단장의 지시나 보고를 거론하며 실탄을 얻어냈을 터인데 그러한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전 보고나 지시는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여간 5월19일부터 험악한 상황이 있었음에도 실탄을 분배하지 않다가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 보고받고 실탄 분배에 대해 승인을 해주었다면 그것은 위급시 사용해도 좋다고 포괄적이고 암묵적인 승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 좋은가요.
  “그러한 상황에 대비해 중대장 이상의 장교들에게만 분배하면서 재차 저의 명령에 따라서만 사용하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나 최악의 경우 사격을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상정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전보고 없이 실탄 분배한 것은 잘못

  -지금까지 진술한 바에 따르면 여단과 무전교신이 되는 상황이고 당시 상황이 급박한 상황은 아니었으며 더욱이 실탄을 분배하면 유사시 시민에 대한 사격이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피의자를 비롯한 대대장들이 독단적으로 실탄 분배를 결정했다는 것은 상식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사전보고를 하지 않고 실탄을 분배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인정합니다만 평소 훈련을 가서도 중대장들에게 실탄 분배를 해 왔기 때문에 심각한 생각 없이 실탄 분배를 한 것입니다.”
  -나아가 5월20일 밤 3여단의 실탄분배와 발포가 23시를 전후한 시간에 이루어졌던 상황과 최웅 여단장이 있던 전교사에는 정호용 사령관이나 최소한 장세동 특전사 작전처장이 있으면서 상황실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11여단의 실탄 분배와 3여단의 실탄 분배 및 사격은 개별 여단 차원이 아니라 최소한 정호용 사령관에게는 보고된 후 취해진 조치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개별 대대장인 저로서는 그러한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11여단의 지역대장들과 62대대장의 진술에 따르면 5월21일 사격이 있기 얼마 전 대대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격을 해야 할 것 같다”는 피의자의 주장에 대해 이제원이 극대 반대하여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인가요.
  “군법회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때가 아니고 13시경 상황이 발생하여 분수대 뒤쪽으로 병력들이 피한 상태에서 4개 대대장이 만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상황이 위급하니 철수를 해야겠다’고 하자 이제원이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국립묘지라도 갈 것 아니냐’며 반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마 그 당시 대화를 착각하고 진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5월21일 도청 앞에서 대대장들이 몇 차례나 만났으며 당시 대화내용은 어떠했는가요.
  “5월21일 아침부터 상황이 있을 때인 5월21일 13시경까지 몇 번인가 만난 것 같습니다. 전옥주라는 여자가 대화를 요구해 4개 대대장들이 모였고, 12시가 지나 상황이 심상치 않게 진행될 무렵 다시 대대장들이 만나 여단에 무슨 조치를 건의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최웅 여단장의 청문회 증언에 따르면 대대장으로부터 직접 또는 조선대 여단본부를 통해 발포건의가 수차 있었다는 것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상황이 위급하게 돌아갈 때 피의자가 여단장에게 건의한 조치내용은 철수 건의나 자위권 행사, 또는 발포에 대한 승인건의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도지사가 헬기에서 계엄군이 12시에 철수한다고 방송을 한 관계로 12시가 넘어 상황이 험악해졌을 때 제가 여단에 철수여부를 확인하며 ‘사수하라고 명령하는 마당에는 무슨 조치를 취해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건의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조치라는 말 속에 그와 같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만 ‘발포’나 ‘자위권’이라는 말은 사용한 기억이 없습니다.”

“조준사격도 있었다” 시인

   -피의자는 5월21일 시위대가 카빈이나 기타 총으로 무장하고 있는 모습을 본 사실이 있으며 시위대의 차량 돌진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사격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그 소리가 카빈인지 아니면 M16 소리인지는 모른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러나 6162대대 장교들을 조사한 결과 도청 앞에 있던 상당수의 장교들이 시위대가 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위대가 건물 옥상 등에서 먼저 선제사격을 했다면 당시 61, 62대대가 좁은 장소에서 밀집 대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상당수 사상자가 생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점을 고려하면 시위대가 선제사격을 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보이는데 진실은 어떠한가요.
  “병력들에 의한 사격이 있기 전 무장 시위대가 있다는 보고를 부하로부터 받고 저 자신도 직접 카빈으로 보이는 총을 가진 시위대 1명을 목격한 사실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들이 실탄까지 소지했는지 여부에 대해선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시위대 쪽에서 차량 돌진과 동시에 사격을 했다는 것은 당시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총소리를 들었으며 차량까지 돌진하는 상황에서 난 총소리라 막연히 시위대가 사격한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한 바를 그대로 진술한 것입니다. 저의 진술이 사실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지금까지 출석한 장교들의 진술에 따르면 1차 발포가 있은 후 공수부대원들이 전일 빌딩, 상무관, 도청, 수협 전남도지부 건물 옥상에 배치되어 차량 돌진자나 시위대열 선두의 주동자들을 겨냥해 사격을 실시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고소인들의 주장과 달리 공수부대엔 저격수 같은 직책은 없지만 당시 상황이 긴박해 도청 인근 건물 옥상에 병력을 올려 보내 그들이 경계병 임무와 차량 돌진자나 극렬주동자 및 옥상에서 사격하는 시위대에 사격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와 같이 최웅  여단장은 당시 대대장들로부터 발포건의가 있었다고 증언했으며, 정호용 사령관도 5월21일 서울에 있는 자신에게 사격건의가 들어와 “절대 안된다”고 말한 사실이 있었다고 했고, 5월20일 밤 3여단에 의한 사격과 11여단 일부대대에 의한 실탄 분배가 이루어진 직후 5월21일 04시경 계엄사령관 주재 회의가 열려 자위권 발동이 결정되었습니다.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5월21일 새벽에 자위권 발동이 결정된 이후(비록 정식 명령이 하달되기 전이었지만) 광주 현지로부터 도청 앞의 급박한 상황보고와 아울러 발포 건의를 받은 정호용 사령관이 자위권 발동을 금할 이유가 없으며, 그런 상황에서 여단장은 당연히 피의자에게 공수부대원들이 사격하기 전에 그와 같은 결정을 통보했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사격 전에 상부로부터 그런 지시가 전혀 없었습니다. 장갑차가 돌진하여 저희가 분수대 쪽으로 피하는 동안 사격이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대대장들이 병력이 일제 사격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저지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그런 지시가 없었다는 것은 확인이 될 것입니다.”
  -현재까지 참고인 진술과 11여단 전투상보에 따르면 효천역 앞 오인사격이 있기 얼마전에 야산으로부터 사격이 있자 병력들이 도로 양쪽으로 사격을 하며 진행했다고 하는 데 어떤가요.
  “제가 지금 말씀을 듣고 기억을 더듬어 보니 전투상보에 있는 대로 오인사격 지점 얼마 전 야산으로부터 선두의 63대대가 있던 차량행렬 중간에 사격이 있어, 앞장선 병력들이 차량에서 도로 양쪽으로 사격을 하면서 진행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병력들이 당초에는 소위 폭도들의 소행으로 생각하고 인근 마을을 수색하여 일부 총을 가진 시위대를 체포했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대와 무관한 동네 젊은이들을 소위 폭돌 오인, 현장에서 즉결처분한 사실이 있었는가요.
  “당시는 부상자 후송과 사후 처리에 정신이 없어 확인한 사실이 없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병력들이 갑작스러운 사고에 이성을 잃고 그러한 일을 했을 가능성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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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응 제11공수 61대대장 피의자 신문조서(4회)

1995년 12월31일 서울지방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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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진압으로 사태악화

  -자료에 의하면 5월19일 첫 충돌시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자 2백여명, 관광호텔 앞에서 1백7명을 체포했고, YWCA 건물에 난입 과잉진압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시위자 체포는 지원 나왔던 62, 63대대에서 한 일로서, 체포된 시위자들을 모두 경찰에 인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YWCA 건물에 난입하여 과잉진압을 했다는 것도 62, 63대대에서 한 일인지는 모르나 저희 대대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위 진압 시 강경진압이 있지는 않았나요.
  “광주사태가 악화된 데는 위 진압에 있어서의 심한 강경진압도 큰 몫을 담당했습니다만,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강경진압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당시 강경진압에 대해 상부에 보고한 사실이 있나요.
  “그런 사실 없었습니다. 저희들로서는 심했다는 생각은 했으나 강경진압이라고 생각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7공수뿐만 아니라 진술인 소속의 11공수도 처음부터 과잉진압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이는 31사단에 형식상 작전통제는 되어 있으나 실제 작전수행에 있어서는 31사단의 시위진압 방식을 따르지 않고 공수부대 방식을 택한 때문으로, 이러한 과격진압 방식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광주시민의 정서를 생각지 않고 게릴라전을 전문으로 심한 훈련을 받아 온 공수부대를 사용한 것은 군 수뇌부의 잘못이라 생각됩니다. 저희로서는 훈련한 대로 시위진압을 하려 했으나 시위 주동자를 끝까지 추적해서 이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군중들의 저항을 물리쳐려다 보니 과격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자료와 기록에 의하면 위 터미널에서 시위진압을 하면서 격렬한 투석전이 있었고, 61대대에서는 장갑차를 시위대에 돌진시키고 백병전을 치렀으며, 시위자 3백여명을 체포하고 대검으로 시위대를 찌르고 마구 구타하는 등 과격진압을 한 사실이 인정되는데요.
  “저희 대대도 투석전을 한 것은 사실이나 장갑차는 있지도 않았고(당시 장갑차는 62, 63대대에만 있었습니다),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저희 대대는 대검을 사용한 적도 없고 시위자를 체포한 사실도 없습니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에 대해 사전에 상부의 승낙을 얻거나 사후 보고를 한 적이 있나요.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그러면 다른 대대장도 보고 한 사실이 없나요.
  “당시 상부 보고는 선임대대장인 제가 주로 했으므로 다른 대대장들은 보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총을 사용하는 것은 엄청난 파국을 몰고 오는 중대한 문제임에도 여단 본부에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인가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왜 보고를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당시에 너무 상황이 급박하여 미처 보고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검, 화염방사기 사용한 적 없다

  -피의자의 부대가 시위진압을 하던 현장에서 대검에 찔린 사람이 있는데 대검을 사용한 적이 없는가요.
  “저희 대대에서는 대검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제가 광주사태 당시 사진을 보니 대검을 착검한 병력들은 호로(천 덮개)를 씌운 트럭에서 내리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저희 대대 병력은 호로를 씌운 트럭을 타고 다닌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착검한 군인들은 다른 부대 소속 군인 들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61대대 병력이 대검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요.
  “충정 교범에 의하면 대검은 총에 착검하여 사용하게 되어 있으나, 저희 대대는 착검을 시킨 사실이 없고, 부대 전체가 대형을 유지하면서 진압을 했기 때문에 저희 대대에서는 대검을 사용한 사람이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진압작전 시 화염병사기를 사용했고 실제 화상을 입은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이 있는가요.
  “저희 대대에서는 진압 현장에 화염병사기를 가져간 사실조차 없습니다. 설사 화염병사기를 가져갔다 해도 시위자를 가려내기 위해 물감을 섞은 물을 넣어 뿌리는 데 사용하는 것이지 어떻게 시위대를 향해 화염을 방사하겠습니까.”

  -피의자의 부대가 도청 앞에서 시위진압을 하고 있을 때인 5월20일 10시 전교사에서 열린 2차 기관장회의에서 공수부대 철수 내지 복장교체가 건의되었는데 진압작전 중 일반 군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은 없었습니다.”
  -당시 1군단 보안부대장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로 상황파악 차 광주로 내려갔던 홍성률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시민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일반군복으로 갈아 입었다는데 아니란 말인가요.
  “다른 부대원들이 갈아입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도청 앞에 나가 있던 저희 대원들은 식사조차 조달받지 못했고, 옷을 갈아입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홍성률의 진술에 의하면 자신이 ‘광주로 내려가 시위 격화 원인을 파악해보니 초기 시위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이 서로 형님 아우하며 친족처럼 지내는 광주 시민의 정서를 무시한 채 시위대 해산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끝까지 시위 주동자를 추적, 체포하며 강경하게 진압하는 바람에, 이를 본 광주 시민들이 격분하여 시위가 확대되었습니다.
  따라서 공수부대를 통한 강경 시위진압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광주 시민 정서를 감안한 선무활동 등을 통해서 사태를 수습해야 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현지 보안 부대인 505보안부대의 판단과도 일치하여 보안사령부로 보고했으나 사령부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강경 진압만 고집해 사태가 악화된 것‘이라고 하는데 피의자의 생각은 어떤가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저도 현지에서 시위진압에 임하면서 광주 시민의 정서가 다른 지역의 경우와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휘부에서는 너무 현지 사정을 무시한 채 전년도에 있었던 부마사태 당시의 진압사례만 생각하고 그저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되기만 하면 사태가 가라앉을 것으로 안이하게 생각하고 아무 준 비없이 병력부터 출동시킨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광주 상황이 공수부대가 투입되어 강경한 진압만 하면 진정될 것으로 보이던가요.
  “우선 시위대들의 숫자나 시위양상으로 보아 방석모, 방석복 등 진압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공수부대원들이 진압봉 하나만 들고 진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습니다만 상부의 명령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이 시위진압을 하게 되었습니다. 숫적으로 열세인 저희들이 진압을 하려니 일부 과잉행위도 발생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태 당시에 찍은 사진들이나 여러 자료들을 보면 단순히 현장에서 우발적으로 과잉진압이나 발포가 있었던 것이라기보다는 공수부대의 특성상 원천적으로 과잉진압을 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고, 제도적 조직적인 과잉진압이나 살상행위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공수부대가 유사시 적 후방에 침투하여 교란작전을 하는 게릴라부대로서 성격상 시위진압에는 적절치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공수부대를 시위진압에 동원한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양민 학살의 진상

  -5월22일 주남마을에서는 무슨 임무를 수행했는가요.
  “5월23일 08시경 주남마을에서 62대대 병력에 의해 시위대가 탄 버스가 총격을 받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희 부대원이 여단본부 지시로 매장을 하는 것을 지원해 준 사실이 있었을 뿐 그 외 다른 상황은 없었습니다.”
  -당시 몇 명이 사망했는가요.
  “정확한 숫자는 모르나 12~16명이 사망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위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홍남숙의 진술에 의하면 사망자는 15명이고, 부상자는 3명이었던 것 같은데 어떤가요.
  “저는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주남마을에서는 두 번에 걸쳐 주민학살이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저희 대대가 22일 새벽 가장 먼저 도착하여 24일 다른 대대와 같이 철수했으나, 그 동안 위와 같은 사고는 한 번밖에 없었습니다.”
  -주남마을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보병학교 교도대와 11공수 병력 간에 오인총격 사건이 있었지요.
  “예, 5월24일 13시경 20사단 병력과 교대하고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하는 도중에 13시55분경 맨 앞에 가던 63대대 병력을 시위대로 오인해 교도대 병력이 총격을 가해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선두에 가던 장갑차와 트럭 2대가 완전히 파손되고 63대대 대대장도 부상을 입고 대대원 9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위 사건이 있고난 직후 63대대 병력이 송암동 주민 4명을 사살한 사실이 있는데 알고 있었는가요.
  “저는 여단장의 지시로 위 63대대의 사망자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후송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몰랐고, 그런 사실은 광주청문회 때 듣고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전두환이 공수부대에 격려금 보내

  -시위대에 대한 과잉진압 과정에서 발생한 살상행위 등에 대해서는 그 상황을 31사단에 보고한 사실이 있는가요.
  “31사단에는 보고한 사실이 없고 여단본부에만 보고했습니다.”
  -특히 실탄 분배 및 발포 사실에 대해서조차 31사단에 사전보고 및 즉각적인 사후보고가 없었지요.
  “예, 없었습니다.”
  -피의자 등 대대장들이 위와 같이 여단본부에 보고했다면 본부에서는 이를 다시 31사단과 전교사에 보고해야 함에도 거의 보고된 사실이 없는데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요.
  “솔직히 말해 공수부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정예부대로서 여단장 정도 되면 직속상관인 특전사령관 외에는 후방에 있는 향토방위사단인 31사단이나 전교사령관 등을 가볍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희 대대장들도 31사단장을 실질적인 지휘관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있는데 사령관의 말을 듣지 힘없는 31사단장 말을 듣겠습니까.”
  -96년 1월호 ‘신동아’에 ‘전두환은 공수부대장에게 진압 격려금을 내려보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린 사실이 있는데, 광주사태 기간 중 또는 그후 격려금을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광주에서 받은 사실이 없고, 광주사태 종료 후 서울 경희대에 주둔하고 있을 때 대통령 하사금 명목으로 상당액이 내려와 제가 중대장급 이상을 데리고 청량리 맘모스호텔 식당에 가서 여러번 회식을 시켜주었고, 운동경기도 여러번 했으며, 남는 돈으로는 전 부대원이 티셔츠를 만들어 입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돈이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공수부대원에게 격려금으로 전달한 돈이 아닌가 합니다.”
  -유리한 증거나 더 할 말이 있는가요.
  “당시 광주시민의 정서를 무시한 채 시위진압에 맞지 않는 공수부대를 무계획하게 투입한 것도 잘못이지만 현지에서도 지휘부가 급박한 현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발포까지 가는 상황을 초래한 점이 아쉬울 뿐입니다.”(끝)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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