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나가는 우리말 [이창우 독자]
너무 나가는 우리말 [이창우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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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상은 그것을 느끼는 주체마다 각각 주관이 다르다. 빨간색이라고 모두가 같은 느낌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 느낌의 차는 뚜렷하기도 하고 미묘하기도 하다. 글은 대체로 3가지 방향의 주관에 따라 해석될 수 있다. 필자의 주관, 독자의 주관, 글 자체가 가지는 주관이 각각 다르다. 필자에게는 의도한 대로 글을 구성하느냐가 중요하고 독자에게는 필자가 의도한 대로 생각하면서 읽어 주느냐가 중요하다. 또 글 자체가 갖는 주관은 필자의 주관이나 독자의 주관과는 사뭇 다를 수가 있다. 필자가 자기 주관에 따라 글을 쓰더라도 문법의 구성이 필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표현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요즘의 언어로 뭔가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 때를 지칭하는 말로 '그렇다'와 '완전 그렇다'로 그것을 표현한다면 어느 쪽이 더 사실과 가까울까? 물론 그냥 ‘그렇다’보다는 완전하게 그렇다고 강조하는 것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아니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그 사람, 거기서 죽었다."와 "그 사람, 거기서 완전 죽었다."는 그야말로 그 뜻이 '완전' 다르다. 여기서는 강조된 '완전 죽었다'보다는 강조되지 않은 '죽었다'가 사실과 더 가깝다. 여기서 '완전'의 의미는 경상도 사투리로 '얼반~'과 동의어이다. 즉, ‘완전 죽었다’는 거의 죽음에 가까웠다는 뜻일 뿐 실제로 죽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같은 말이라도 골라서 쓰는 것이 중요하다. 노년에게는 행복하게 노년을 '보내시기를' 바란다는 말은 참 쓸쓸하게 느껴질 수가 있다. 같은 말이라도 행복하게 노년을 '맞이하시기를' 바란다는 말이 청춘을 소진해버린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위로가 될 것이다. 90 노인은 노년을 이미 맞이했으므로 전자가 더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청춘은 칠십부터라는 말이 있다. '칠십부터'는 칠십 살의 주관일 뿐이다. 아흔 살의 주관으로는 인생은 아흔 살로부터 살게 되는 것이다. 아흔 살이 100살이 되려면 아직 10년이나 남았을지도 모른다. 노인에게는 남은 인생을 ‘보내시라’는 것보다는 ‘맞이하시라’고 권하는 게 더 듣기가 좋다는 뜻이다.

얼마 전 히말라야 산악사고로 산악인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던 적이 있다. 방송에서는 연일 이 사건을 특집뉴스로 보도하고 있었다. 희생자의 유가족이나 지인들에게는 청천벽력이랄 수 있는 사고였을 것이다. 뉴스진행자 특유의 숨이 막히는 듯한 바쁜 음성으로 첫 멘트를 날린다. “산악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첫 대목에서 문법에 어긋난 듯한 이상한 부분이 발견된다. ‘심심치 않게’란 무료하지 않게, 즉 ‘재미가 느껴지게’로 바꿀 수가 있는 말이다. 인명이 희생되는 사건을 전하면서 심심한지 그 여부를 따지는 듯한 낱말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방송언어가 우리에게는 표준말로 각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쳐버렸다' 또는 '돌아버렸다'는 정신병이 발병했다는 뜻의 과거형이다. 정신병은 정신분열증, 정신착란증, 우울증 및 불안증, 강박증 및 결벽증, 자폐증, 여타의 정신질환을 아우르는 말이지만 정신분열증이라는 명칭으로 대표되는 질병이다. 정신분열증의 극단적인 증세는 정말 정신이 분열된 듯한 증세로서 사실 ‘정신분열’이라는 단어보다 어울리는 표현은 없을 것이다. 내용을 따져보지 않고 정신과 분열, 단어의 연결 하나만 보고도 그 내용이 바로 짐작이 간다. '정신' '분열' '정신분열' '정신분열증' 분해를 하든 조립을 하든 그 낱말 자체가 그토록 혐오스럽거나 천박하지도 않다. 그런데 그 병명을 어감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조현병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조현이라는 말은 우리가 잘 쓰지도 않을 뿐더러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신분열증보다는 조현병이라는 이름이 더 불편하게 느껴질 뿐이다. 조현병이라는 단어만으로는 그것이 무슨 과자이름 같기도 하고, 액체를 담는 그릇 같기도 하면서 그 뜻을 선뜻 짐작할 수가 없다. 병명으로 따진다면 정작 바꿔야할 이름으로는 ‘무도병’이라는 병명을 들 수가 있다. 환자의 비틀리는 움직임이 때로는 춤사위 같아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어떤 병이든 증세가 심각한 환자에게는 농담도 신중해야 한다. 하물며 비틀거리는 환자에게 춤을 춘다고 표현을 한다면 조롱으로 들릴 수가 있다.

서울시 교육청에서는 ‘수평적 호칭제’라는 이름으로 선생님을 쌤 또는 님으로 호칭을 공식화하자는 의견이 공론에 부쳐져 있다고 한다. 교장선생님을 ‘교장쌤’, 김대중선생님을 ‘김대중쌤’, 이렇게 말이다. 파문이 일면서 학생이 교사에 대해서는 '선생님'으로 계속 부른다고 서울교육청이 발표해 '진화'에 나서긴 했지만 국어를 사랑해도 너무 한쪽으로만 사랑하는 것 같다. 학생들에게는 이름자 뒤에 ‘님’자를 붙이는 것도 고려되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호칭의 위계질서가 엉망진창이 된다. 국어가, 아니 사람들의 정신이 망가져도 이토록 망가져 가고 있을 줄이야! 이러한 현상은 매사에 간편한 것만을 지향하고 생략을 즐기며, 보수적이거나 낡은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현 세대의 이기심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국어가 그들의 이기심으로부터 무사하기를 바란다.

이창우 독자 (한국건설감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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