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 혐의로 수감된 1공화국 국무위원들, 서대문형무소에서 간첩·살인범과 한 방에 수감. 간첩들로터 남한 적화 공작 이야기 듣고 망연자실. 5.16혁명 소식 듣고 “이제 대한민국 살았다. 이제는 적화 안 된다” 하고 만세 불러

[편집자 주] 이 내용은 지난 2007년 4월 작고한 고(故) 신현확 국무총리의 육성증언 녹음테이프 내용이다. 신현확 총리는 1979년 10.26 당시에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1980년 5월까지는 국무총리로 재직하며 10.26과 12.12, 5.17과 5.18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광풍과도 같았던 격류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 와중에 신현확 총리는 대통령 시해라는 초유의 비상사태를 맞아 “유신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치러 과도정부를 구성하고, 이 정부에서 헌법을 개정하고 선거를 실시하며, 선거를 통해 구성된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한다. 그 직후 유신헌법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퇴임한다”는 시나리오를 확정했다. 이 와중에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와 결탁하여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통해 실권은 신군부에게 넘겨주고 자신이 명목상의 대통령을 맡겠다고 나섰다.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씨들은 혹시라도 신현확이 대권을 차지하려는 것 아닌가 착각하여 자신들의 집권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한 신현확 총리가 이끄는 과도정부를 공격했고, 학생들을 선동하여 “전두환, 신현확 퇴진”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급기야 1980년 5월 17일 저녁, 최규하는 결국 신군부가 요청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해산 ▲주요 정치인 체포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로써 신현확 내각은 총사퇴했다. 최규하는 신군부 집권의 고속도로를 닦아준 것이다. 신현확 총리는 ‘현대사의 정리’ 차원에서 “나 죽거든 회고록을 출간하라”면서 구술증언을 남겼고, 기자는 이 구술증언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입수하여 월간조선(1999년 2월호)에 공개한 바 있다. 최근 들어 전두환의 5공 창출 및 광주사태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어, 역사의 증언을 위한 차원에서 신현확의 육성증언을 다시 공개한다. 관련 내용은 신현확 총리가 남긴 구술증언을 녹취하였고,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간중간에 기자가 박스기사 형식으로 해설을 붙였다. 분량이 길어 상중하 세 차례로 나눠 공개한다.
3.15 부정선거 혐의로 확정판결을 받고 수감된 신현확은 '부정선거 원흉'으로 지목돼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는 1공화국 국무위원 중 가장 먼저 특사로 풀려나 박정희 정부에서 일하게 된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3.15 부정선거 혐의로 확정판결을 받고 수감된 신현확은 '부정선거 원흉'으로 지목돼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는 1공화국 국무위원 중 가장 먼저 특사로 풀려나 박정희 정부에서 일하게 된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고등문관시험 합격, 일본 본국정부 상공성 근무

(기자 해설-신현확 총리는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경북 칠곡에서 자랐다. 총명했던 신현확 청년은 경성제대 법문학부(현재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에 합격했다. 그는 일본 본국정부 전시내각의 상공성(후에 군수성으로 개칭) 공무관보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이 산업발전에 총력을 기울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최우수 인재들은 거의 대부분 상공성 배치를 원했다고 한다. 일제 치하에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에서 군수, 조선총독부에 근무한 한국 인재는 많았어도 일본 본국 정부의 상공성에서 사무관으로 근무한 사례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드문 사례다. 그만큼 신현확 청년의 능력은 발군이었다. 신현확은 일본 전시내각의 군수성 군수관리담당관으로 전쟁을 치르는 일본 정부의 행정을 체험하면서 위기관리능력을 배우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해방되기 두 달 전인 1945년 6월, 조선으로 출장을 나온 길에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무단이탈하여 숨어 지내던 중 해방을 맞았다. 그 후 6.25 때 부산 임시수도에서 이승만 정부의 부름을 받고 상공부에서 일을 하게 된 이래 상공부 전기국장·광무국장·공업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대한민국 산업사를 정리할 때 신현확을 빼놓고 말하기 힘든 귀한 존재가 되었다. 이후 부흥부차관 겸 외자청장 서리, 제4대 부흥부장관으로 재직하던 중 3.15 부정선거 혐의로 체포 수감되었다. 대통령 암살과 군부의 하극상, 정치권의 대공세라는 국가 위기상황을 맞은 신현확 총리의 역할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그의 소신과 국가관, 시국의 흐름을 꿰뚫는 통찰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배짱과 통찰력, 현실인식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 답은 아마 신현확 총리의 감옥살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신 총리는 자유당 말기 부흥부장관(현 기획재정부)으로서 3.15 부정선거에 간여한 죄목으로 2년 3개월 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바 있다. 당시의 옥살이에 대한 체험을 신 총리의 육성증언을 통해 들어본다.)

<3.15 선거(1960년)가 부정선거가 됐단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내 죄목이 “자유당 표가 너무 많으니까 국무회의에서 자유당 표를 줄여야 된다는 결의를 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을 받았지.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기자 해설-신현확 씨 측근의 증언에 의하면 3.15 선거 당시 국무위원들은 개표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부통령 후보인 이기붕 씨(자유당)와 장면 씨(민주당)와의 포가 92 대 8로 나오자 국무위원들이 최인규 내무장관을 불러 “이건 시중 여론과 너무 다른 것 같소” 하고 지적하자 갑자기 개표 결과가 70 대 30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것이 4.19 이후 국무위원들의 부정선거 개입 혐의가 된 것이다. 신현확 씨는 감옥에서 제2공화국 총리 장면 씨와 악연을 맺게 된다. 신현확 총리의 육성 증언을 들어본다.)

<전(全) 국무위원이 15년 구형 받았고 선고는 7년 6개월간으로 잘랐지. 그 중에 중심 되는 사람들은 무기, 최인규는 나중에 사형이 집행됐고 나머지는 전부 7년 6개월. 말하자면 정치 개판이지. 이래 가지고 있었는데 5.16 혁명 나기 전에 어땠나 하면 내 방에 간첩이 두 명 있었어. 1평7합3장이란 방 넓이에 아홉 명이 있었어. 그러면 어쩐지 알아? 아홉 명이 앉아서 자요. 거기에는 살인범도 있고, 쓰리꾼도 있고…. 전부 같이 넣었어. 그리고 우리 일행은 한 방에 한 사람씩 집어넣었어. 두 사람이 있으면 의논한다고. 말로 형언할 수가 없는 거요.

그래 지나는데, 장면 씨가 가톨릭 신자 아니오? 우리가 그때 국무위원으로서 부통령(장면 씨는 이승만 정권 하인 1956년 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으로 대하고 지났잖아. 장면 씨가 총리가 되어 순시를 왔어. 집권자가 순시 온다고 난리가 났어. 죄수들 방안까지 청소하고. 왜 이러나 했더니 장면 총리가 순시를 오셨다 이거야.

그래가지고 (장면 씨가) 방마다 다 들여다본단 말이야. 다 아는 사람, 거기 와서 들여다 볼 건 뭐냐 말이야. 내가 집권했으니 너 이놈들 봐라. 그것밖에 더 되느냐 이 말이야. “정좌를 하고 앉아” 이래 명령하고, 그래서 정좌하고 앞만 보았어.

한참씩 들여다보고, 다음 방에 가서 한 사람 한 사람씩 들여다보고….우리는 정좌하고 앞만 보고 있었지. 형무소 시찰이 아니라 우리 들여다보러 온 거요. 실컷 보고 갔어.

세상에 정권이 뒤집어지건 달라지건 어째 이럴 수가 있는가. 나는 이래 생각한다 이 말이요. 저렇게 존경받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 내가 상당히 비관했다고. 내가 그런 걸 당했어요.>

(기자 해설-하루아침에 장관 신분에서 죄수가 된 신현확은 간첩과 한 방에 투옥됨으로써 국가안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5.16이 일어났을 때 감방 안에서 “이제 적화는 면하게 됐다”면서 만세를 불렀을까. 다시 신현확의 육성 증언이다.)

<그(감옥) 내부는 어쨌느냐. 간첩도 같이 있었는데, 서울대학 졸업생도 한 놈 있었어. 서울대 졸업하고 월북해서 김일성대학 졸업하고 간첩교육을 5년을 받고 넘어와서 활동하다가 붙잡혀 들어왔다 이 말이야. 잡힌 것이 아니고 저희 형, 아버지가 알고 이놈을 억지로 붙잡아가지고 자수시켰단 말이야. 자기들 무사할려고. 그래 들어왔단 말이야.

똑똑하긴 똑똑한 놈이야. 그게 학생조직 안에 들어가 어떻게 활동했고 4.19를 어떻게 조직하고,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다 하는 거야. 내가 그 얘기를 다 들었지. 이놈은 그 안에서 나에게 얘기해주려고 하는 게 아니요. 그 안에 있는 다른 놈들 교육시키는 거야. 절도, 강도, 살인범 이런 놈들 교육시키는 거야. 사흘만 지나면 전부 간첩 지지자가 되는 거야.

그 안에는 이 체제에 대해 찬성하고 좋다고 하는 놈 한 놈도 없는 거야. 간첩 한 놈만 있으면, 사흘만 있으면 간첩이 오야붕이 되는 거야. 그래 얘기를 죽 하기에 내가 질문을 했지.

네가 넘어왔을 때 처음 어딜 갔느냐. “서울 시내 명동에 갔습니다” 명동에 가서 어떻게 느꼈느냐 하니 그 놈 말이 명동에 가 보니 시골에서 닭을 기르면 새벽에 나와 닭장을 열어준다 이 말이야. 그럼 닭이 와 하고 닭장에서 나가는 거와 똑같다는 거야. 무슨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 닭이 몰려나가는 거하고 똑같은 짓이지 무슨 사람 사는 사회냐. 이렇게 말하더라고.

5.16 일어나자 만세 불러

내가 북은 어떻더냐 하니까 “평양은 다 목적이 있어서 사람들이 나오고 줄서서 다니고, 목적에 따라 움직이지 닭떼처럼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러는 거야. 자유가 뭐고, 통제가 뭐라는 걸 전혀 모르는 거야. 그 놈이 “(남한 적화가)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거야. 오래 가야 두 달 남았다. 신문도 안 들어오고 라디오도 없는 콘크리트 방 안에 앉아 있는 데도 정보가 다 들어온다는 거야. 온갖 기술 동원해 통신이 24시간 계속되는 거야.

내가 2년 7개월 살아서 잘 알아. 1평7합3장의 방에 목침이 두 개, 모포가 두 장 있는데 벽은 전부 콘크리트고. 목침을 벽에 대고 말하면 전화랑 똑같애. 옆방에서 말하면 다 들리는 거야. 이런 식으로 모든 게 다 전달되었어.

사회상을 판단해보니 정말 간첩들 말하는 것처럼 우리나라 뒤집어지겠구나. 2년 3개월 동안 거기 들어앉은 우리가 최대로 걱정한 것은 “이 나라가 언제 뒤집어지나” 이거야. 대한민국 망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다가 5.16이 떡 났을 때 그 안에서 모두 만세를 불렀다니까. 이제 대한민국 살았다. 이제는 적화 안 된다 하고. 이게 진짜요. 아, 죄수들 중에서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지. 대부분은 저짝이었고. 군사혁명을 누가 했는지도 모르고, 그 소식만 듣고 “이제 적화를 면했다”고 만세를 불렀다니까.>

(기자 해설-5.16으로 군정이 시작되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기결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혁명재판을 위해 또 한 차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신현확 총리의 육성증언을 들여다본다.)

<그런 상태로 지나는데 5.16 혁명이 나니까 혁명재판 한다고 또 새로 붙잡혀 나갔단 말이야. 세 번째 재판을 받는 거야. 혁명검찰에 끌려갔는데 조사를 얼마나 받았느냐. 내가 혁명검찰에서 조사를 3분 받았다니까 하하. 그러고 기소, 그러고 언도, 7년 6개월 이렇게 된 거지.

이건 또 뭐냐. 우리는 “한국은 적화 안 되고 살았다” 이러카는데 아무 조사도 안 하고, 나한테는 3분 조사하고. 혁명정부라는 이건 또 도대체 뭐냐. 엉터리도 분수가 있지. 내가 꼭 한 마디 해야 할 건, 이건 내가 부탁하는데 반드시 뭘 쓰더라도 이건 써줘야 되겠어.

마지막에 재판 언도하기 전에 우리한테도 “최후진술을 해라” 이렇게 되었어. 우리끼리 나가서 국무위원 순으로 하는데, 부흥부는 차례가 저 뒤에 있단 말이야. 앞에서부터 하는 걸 주 보는데 “우린 절대로 나쁜 의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 선의로 했습니다” 뭐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 이런 말을 듣고 내가 속이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말이야. 뭐를 관대하게 처분해달란 말이냐. 뭐를 잘못했는데.

내가 제일 젊었어. 그 때 (국무위원들) 60대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래서 내 별명이 내각 안에서 막내장관이었어. 재판 받을 때 마흔 한 살이었으니까. 도중에 한 사람이 “재판장님, 저는 절대 자유당 정권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장면 씨 지지했습니다” 이러카는 거야. 당시 장면 씨가 집권자니까. 저 놈이 어떤 놈이냐 하면 제일 이 박사에게 아부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그러던 엉망진창의 사람이었단 말이야. 나는 그 때 “이 인간성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래 느꼈단 말이야.

신현확의 최후진술, “나에게 사형을 언도하라”

내 차례가 왔어. 최후진술 하라 해서 “자유당 정권에 의해서 조직적인 선거부정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고, 그것 때문에 나라가 뒤집어졌고, 그것 때문에 정권이 무너졌고,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데 책임자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국무위원이 책임을 안 지면 누가 지는가. 나는 국무위원의 한 사람으로 책임 져야 되겠다. 나한테 사형을 언도하시오. 나는 책임이 있다고 인정하고 달게 받겠소” 그래 이야기했어.

그러면 됐지. 그 대신 내가 책임지겠다는데 거기에다 덧붙여서 내가 몰랐던 것을 알았지 않느냐, 내가 안 한 것을 했지 않느냐고 만들 필요가 뭐 있느냐. 이것이 내 최후진술이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겠다.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가정을 하나 하겠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나한테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지금까지 해온 거와 똑같이 하겠다 그랬어. 내 고마 그래 해뻐렸어. 한참 동안 방청석에서 아무 소리도 없었어. 그러다 2년 3개월 만에 나왔지.

내가 1차 사면으로 나왔어. 이게 무슨 일이냐, 무엇 때문에 사면을 하는 거냐, 그냥 나가라 하니 나왔다 이 말이야. 우째 됐는지 모르고.>

(기자 해설-후에 알고 보니 신현확 장관의 사면은 군사 쿠데타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

<머리 홀랑 깎았으니 밖에 나갈 수도 없고, 석 달 반쯤 되니 해병대 머리 정도로 자랐단 말이야. 그날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빨리 받으라”고 난리더라고. 청와대에서 왔다고 하는 거야. 청와대에서 전화 올 리가 뭐가 있느냐. 도로 감옥에 들어가란 말인가 하는 생각까지 나더라고. 전화를 떡 받으니 “청와대 아무개 비서관입니다. 지금 당장 청와대로 들어 오십시오” 이러칸단 말이야.

택시를 타고 갔지. 택시가 청와대 안에 어찌 들어가냐 이 말이야. 청와대 바깥에서 내러서 걸어 들어갔지. 나는 오늘날까지 청와대를 걸어 들어간 일은 그 때 한 번밖에 없어. 대문에 가서 “내가 아무개인데 오라고 해서 왔다” 하고 걸어서 올라갔지. 안내를 받아 가니 박 대통령 방이야. 박 대통령이 “이리 오십시오” 해서 마주 앉았지. 그때가 (박 대통령이) 두분째 조각할 때인가 그랬어.

박 대통령이 처음 하는 말이 “신 선생은 마를 아십니까”하는 거라. 전연 모르거든. 나는 모릅니다 그랬지. ㅂ솔직히 말해 나는 칠곡군 양곡면이고 자기(박정희)가 선산군 구미면이고, 그 거리가 2km밖에 안댔는지를 나는 몰랐거든. 그랬더니 “나는 신 선생을 압니다” 나를 신 선생이라 그래. 내가 장관 했으니까 아나 보다 그러고 말았지.

그랬더니 “내가 신 선생에게 부탁이 있어서 불렀다” 그러더라고. 이래 얘기가 시작됐지. 박 대통령이 느닷없이 “내각의 상공장관을 맡아주시오” 하는 거야. 내가 한참 생각하고 “안 되겠습니다” 그랬지. “왜 그렇습니까” 이카는 거라.

나는 형무소 안에서 이 나라가 적화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뿐 아니고 자유당 출신 사람 모두 형무소 안에서 그걸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5.16혁명이 나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적화를 면했다고. 그리고 내가 1차로 특사를 받아 나올 때 모든 일행이 나에게 부탁하기를 “혹 박 대통령한테 전달할 기회가 있으면 이 고마움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을 받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내각에 들어가면 어떤 결과가 나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원흉 면회소

서대문 형무소가 어떤지 아십니까. 우리들 가족 면회는 보통 죄수 가족면회와 다릅니다. ‘원흉 면회소’ 이런 게 따로 있습니다. 간판이 ‘원흉 면회소’라고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원흉입니다. 모든 국민이 우리를 원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집에 돌아오고 나서 석달 남짓한데 편지가 오는데 전부 ‘신현확 원흉 귀하’ 이렇게 봉투에 써 옵니다.

이런 사람이, 원흉이, 모처럼 적화를 막고 새로운 정부를 세웠는데 거기의 내각에 나갔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움이 되겠습니까, 마이너스가 되겠습니까. 나는 그런 마이너스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자숙하고 있어야 될 입장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

박 대통령 첫 마디가, “아니 신 선생. 신 선생이 그래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뭐 조사 안해봤는 줄 압니까. 신 선생은 아무 일도 한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단 말야.

아니 대통령,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째 됐든 원흉 아닙니까. 아무 것도 안했으면 왜 원흉입니까. 원흉이 내각에 나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니 아무 말 안하더라고. 한참 생각하더니 “그 말씀 옳습니다. 그러면 이러캅시다. 1선은 그만두고 당분간 2선에서 일을 좀 도와 주십시오”

2선이라면 뭡니까. 그러카니 “지금 경제과학심의회라는 것을 대통령 자문기관으로 맨들어서(만들어서) 하려는데 거기 위원을 맡아주십시오. 상임위원을 임명하고 비상임위원을 임명하는데 그걸 해주십시오”

그래서 비상임위원 같으면 협력하겠습니다. 이래서 비상임 경제과학심의회 위원을 하기로 합의를 하고 나왔단 말이야. 한 달쯤 지나고 위촉장을 받으러 갔더니, 그 때만 해도 권위주의가 안 되고 그랬어. 사람이 20~30명 서 있는데, 우리가 나가서 받는 것이 아니고 박 대통령이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와서 자기가 전달하는 거야. 내 앞에 오더니만 “저 내가 좀 생각해 봤는데요. 그거 뭐 상임이나 비상임이나 별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마 상임으로 했으니 양해하십시오” 이러카고 (위촉장을) 떡 주니 그 자리에서 “이거 약속이 틀리지 않소” 할 수 없는 것 아니오. 그래서 고마 내가 상임이 되뻐린(되어버린) 거야.

“혁명정부는 자유당보다 10배 더 부패했습니다”

그 후에 간혹 가다가 서로 얘기를 했는데 그 중 두 가지만 얘기할게. 한번은 하는 얘기가 “지금 세상에서 혁명정부가 부패했다는 말들이 많이 도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러칸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일언지하에 “부패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듣고 알고 있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박 대통령이 가만히 생각하더니 “어느 정도 부패했습니까” 그래서 내가 “부정부패의 대표라고 말하는 자유당 시대에 비해서 최소한도 열 배는 부패했습니다” 그랬어.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라고.

한 일주일 지나고 전경련 하신 김용완 씨 그 어른을 만났지. 만나 뵈니까 날 좀 보자고 옆에 데려가서 “당신 요전에 박 대통령 만난 일 있나” 하더라고. 그래 일주일 전에 만난 얘길 했더니 “내가 만나니까 지금 정부가 부패했느냐” 묻기에 “부패했습니다” 하니까 박 대통령이 “요전에 신현확 씨도 그러카던데” 라고 말하더라는 거야.

박 대통령은 초기부터 그 문제를 계속 걱정하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이 사람에게도 물어보고 저 사람에게도 물어보고. 그게 훌륭하다 이 말이야. 국가를 다스리는 입장에서 그걸 여기저기 크로스 체크를 하고 그랬단 말야.

또 한 번은 점심을 먹는데 “무슨 얘기지 좋으니 할 얘기가 없느냐” 이러는 거야. 내가 “경제과학심의위원회 관련 없는 얘기라도 좋습니까” 했더니 무슨 이야기든 하라고 그러는 거야. 그래 내가 첫째 이 대통령이 제1공화국 때 사욕이라는 것은 일전도 없고, 정부에서 떠나고 보니 여비도 없고 입원비도 없고, 지금 하와이 교포들이 매달 3백불씩 모아 주어서 입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만큼 청렴결백한데도 임기 중에 말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분은 대통령 할 때 여당 간부들이 “정치자금이 여의치 않아서 정치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하면 “애국하는 데 돈이 왜 필요하냐” 이래서 “사회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는 평이 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대통령이 돈을 알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통령이 돈에 관여하면, 아무리 순수한 정치자금에만 관여하더라도 국민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돈에는 절대 관여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랬더니 알겠다고. 그 취지를 알겠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둘째, 나라가 위험해졌을 때는 군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군사 쿠데타도 필요할 때는 되지 않겠습니까. 나라가 망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5.16을 그렇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적화를 막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적이 달성되었으면 그걸로서 된 것입니다. 이제 군인들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라를 전리품처럼 대위는 군수하고, 소령은 뭐하고, 대령은 뭐하고 나라를 점령하는 식으로 그런 거는 그만두어야 합니다.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애국 아닙니까.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거야. 내가 한 마디 더 했지.

“대통령은 나라의 기본 대강을 정하고, 정책을 정하고 시달하면 그걸 집행부인 내각이 집행해 나가는 것이 원리 아닙니까. 그런데 집행 내부에 관해서 대통령이 관여하기 시작하면, 대통령은 아무리 순수한 입장에서 올바로 하기 위해 그랬다 하더라도 말 한 마디에 하기에 따라서 장관한테 내려가면 장관은 차관에게, 차관보에게, 국장에게, 과장에게 ‘대통령이 이렇게 하라 한다’ 이렇게 된단 말입니다. 대통령이 구체적인 집행문제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박정희, 신현확 최후진술 듣고 가장 먼저 사면

내가 이랬다고. 박 대통령이 알았다고,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그러더라고. 한 번은 저녁을 먹으면서 술을 한 잔 하는데 내가 물었지. 저를 어떻게 알고 일을 하라고 했습니까. 저는 형무소 안에 있었는데. 제1차로 특사를 해 주시고. 왜 그러셨습니까. 이렇게 물었지.

박 대통령이 씩 웃더니 “아니 왜 몰라요. 고향이 20리 사이에 있는데. 나는 전부터 얘기 듣고 다 알고 있었는데” 이러는 거야. 그것도 그렇고 그 때는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신 위원이라고 그랬어. “신 위원이 최후 진술한 것 녹음을 다 들었습니다. 사람이 일을 하면 다 신념을 갖고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최후진술을 듣고 내가 특사도 먼저 하고 정부 일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는 거야.

그 뒤로는 박 대통령 권위가 계속 올라갔어. 박 대통령 앞에서는 누구 하나 담배 피는 사람 없었어. 아무리 담배 많이 피는 사람도 담배를 안 피워. 그렇게까지 됐어. 나는 끝까지 피웠지. 내가 담배 꺼내 물면 자기가 라이타(라이터)로 불 붙여주고 그랬지. 나중엔 자기가 담배를 끊었지. 막판에.

한 번은 내 담배를 피고 싶다는 거야. 그래 내가 “담배 끊으셨는데 뭘 또 피우려 하십니까” 그랬더니 “한 대 좀 피우면 어떠냐고” 하면서 피우겠다는 거야.

내가 싸움도 많이 하고 논쟁도 많이 하고 그래도 다 받아들여진 것이지. 국가 일이라는 것도 일방적으로 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지. 서로 주고받고 자제하고 이해하고, 자제해야 옳게 가는 것이지. 박 대통령과 나는 끝까지 그랬어. 나야 한번 죽었던 사람인데. 뭐 오늘이라도 안 하면 그만인데. 박 대통령이니까 그렇게 잘 지냈던 것이지. 그 분이니까 최후진술을 듣고 같이 일하자고 한 거고. 이런 것이 박 대통령과 나와의 인연이지.>(끝)

정리=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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