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코프 일기로 본 북한역사 #11, 스탈린, 남북의 좌익 공산정당 합당 지시
스티코프 일기로 본 북한역사 #11, 스탈린, 남북의 좌익 공산정당 합당 지시
  • 윤희성 기자
    프로필사진

    윤희성 기자

    이메일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 최초승인 2019.01.13 09:19:57
  • 최종수정 2019.01.13 09: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46년 7월 하순 박헌영의 제5차 월북 및 박헌영-김일성 회담 계기로 김일성으로의 권력 정지작업 완료. 북에서는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이 유일 집권당으로 등장, 남에서는 좌익계 정당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단일정당으로 통합. 이로써 북한에서는 강력한 집권당 배경 아래 소비에트화와 공산당 정권 창출에 가속도 붙기 시작

[편집자 주] 티렌티 포미치 스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 1907년 2월 28일부터 1964년 10월 25일까지 살았던 소련의 군인. 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스티코프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남긴 일기를 발굴해 연구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스티코프의 일기를 통해 드러난 소련의 '북한 김일성 세우기 프로젝트'를 2004년 12월 30일 책으로 만들어 중요한 한국근현대사 자료를 보충했다. 전 교수의 '스티코프 일기' 연구는 미국과 일본에 집중됐던 해외소재 한국사 자료가 서유럽과 동유럽, 러시아 지역까지 확대됐다는 평가를 받는 연구 업적이다. 소련군 정치장교였던 스티코프가 남긴 일기는 단순히 개인사를 넘어 소련의 한반도 정책과 1945년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 경제 상황, 한국전쟁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적 원천이 되고 있다. 특히 스티코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는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의 사태전개에도 깊게 개입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티코프의 일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소련공산당이 38선 이북 지역에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 위성정권을 세우는 과정에서 얼마나 적나라하게 개입하여 괴뢰정부를 세웠는지를 입증하는 내용증명이기 때문이다. 스티코프는 일기 형식의 비망록을 통해 소련공산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정해준 사실, 북한 헌법을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직접 만들어준 사실, 심지어 북한의 역사를 기술할 때 지침이 되도록 역사책의 목차까지 짜 준 사실, 김일성을 바지 사장으로 내세워 북한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내각의 장차관은 물론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회의 대의원을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정한 사실 등을 적어놓았다. 따라서 이 자료를 독파하면 북한이 얼마나 소련을 추종하는 괴뢰집단인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내용증명이다.

절판이 되어 시중에서는 구하기 힘든 '스티코프 일기'를 펜앤드마이크(PenN)는 전 교수의 해제부터 책 그대로를 온라인 공간으로 옮긴다. 다만 책의 제목이 '쉬띄꼬프의 일기'로 되어 있는 것을 요즘 사용하는 용어로 바꾸어 '스티코프 일기'로 바꾸었다. 게재 순서는 전 교수의 해제를 시작으로 스티코프의 일기를 1946년 9월 6일부터 11월 13일까지를 제1부, 1946년 12월 2일부터 1947년 2월 4일까지를 제2부, 1947년 7월 7일부터 10월 4일까지를 제3부, 1948년 7월 26일부터 10월 2일까지를 제4부로 편집하고 있는 책의 흐름을 따를 예정이다. 책 후반부에 별도로 첨부돼 있는 1946년 9월 28일 여운형의 북조선 방문에 대한 스티코프의 보고나 소련 군인으로 1945년 해방 후 평양 소련군정에서 소장 계급으로 민정 사령관을 지냈던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로마넨코(Andrei Alekseevich Romanenko)와 여운형의 대화 기록도 순서에 따라 게재할 예정이다. 

쉬띄꼬프 일기 1부
(1946. 9. 6~1946. 11. 13)

[11월 1일부터 13일까지]

 

1946년 11월 1일

북조선의 평양으로 가다. 메레츠꼬프 원수는 바실레프스끼(바실래프스끼 알렉산드로 미하일로 원수,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장군들과 함께 비행기로 여순으로 향했다. 선거에 대해 로마넨꼬에게 제기할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읍·면 선거위원회까지 선거관련 서류들이 어떻게 전달되었는가?
2. 유권자수
3. 각 도의 선거사업을 전담할 전권위원들의 파견에 대해
4. 11월 2일, 3일자 신문에 대해
5. 11월 3일자 라디오방송에 대해. 무슨 내용과 어떠한 구호를 방송할 것인가?
6. 11월 2일의 집회에 대해. 어디서 어떻게 집회를 개최할 것인가? 이 문제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7. 영화촬영반의 활용과 그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 무엇을 촬영할 것인지 계획을 수립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8. 11월 2일과 3일에 배포하기 위해 인쇄해야 할 전단들
9. 투표결과의 발표 계획과 형식
10. 선거 총결보고 작성 임무를 하달한다.
11. 선거 결과에 대한 중앙선거위원회의 중간발표문과 최종발표문을 준비한다.
12. 투표함 개봉시 각급 선거위원회 회의에 언론 및 사회단체 대표들을 배석시킨다.
13. 선전원의 활동 강화와 선거선전실의 존속에 관한 결정서 초안을 준비한다.
14. 1946년 11월 3일 투표소 경비를 위한 경찰의 행동요령에 대해 어떠한 지시가 내려졌는가? 

로마넨꼬, 이그나찌예프와 회의를 진행하다.

1. 읍·면 선거위원회의 준비상태를 점검하다. 지방으로부터의 보고에 의하면 11월 4일까지는 선거관련 서류들이 모두 발송될 것이다.
2. 확인된 통계에 따른 유권자수
유권자수 4,343,062명. 선거권을 상실한 인원수 3,157명. 공민증 발급인원수 4,921,352명
3. 전권위원 파견 중앙선거위원회 -꼬네프스끼, 로마넨꼬 신의주-미정, 원산-예르미노프, 함흥-따르찐
4. 집회에 대해 1) 김일성의 연설문 낭독, 2) 당기관의 연설문 낭독
5. 신문에 대해
마르모르쉬째인(연해주군관구 정치지도부 제7과장), 그루지닌, 꼬븨젠꼬에게 11월 2~3일자 신문과 라디오방송에 대한 임무를 부여하다.

 

1946년 11월 2일

이그나찌예프가 보고하다. 모든 단체들의 선거 준비상태. 선거 준비상태, 선거관련 서류의 발송, 신문, 라디오를 점검했다. 

 

1946년 11월 3일

평양 현지 시각으로 6시 30분에 시내를 둘러보다. 이 시각에 투표소들에는 50~150명까지의 유권자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도시의 거리마다 인민들의 활기찬 움직임이 보였고, 학생들도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확성기를 설치한 자동차들이 많이 보였다. 학생들, 악단, 선전 차량들이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선전방송을 했다. 

7시에 선거위원 한사람이 나와서 종을 치며 유권자들을 투표함으로 인도했다. 시내 중심에 위치한 투표소들에는 500여 명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선거위원회가 민첩하게 사업하지 못하는 것 같다. 

진남포를 방문하다. 거기에는 도시 전체가 축제를 맞은 양 단장되어 있었다. 투표는 양호하게 진행되고 있다. 기독교 목사는 자신과 20명의 신자들이 1946년 11월 4일 0시 5분에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중에 농촌에 들러 농민들과 대화하다. 농민들의 기분은 양호하다. 모든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했다. 어떤 군에도 잠시 들렀다. 투표는 아무런 불상사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 

[편집자 주] 1946년 9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선거법령」을 공포했다. 민주선거라는 이름하에 공산당이 지명한 단일 후보자에게 형식적인 찬반 의사를 표시하는 흑백함 선거방식, 즉 단일 후보에 찬성하면 투표용지를 흰색 함에, 반대하면 검은색 함에 넣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 1946년 11월 3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민전)에서 추천한 단일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형식으로 도·시·군 인민위원회(남한으로 치면 지방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공산당이 내세운 후보들을 모두 당선시켰다.
이런 선거방식은 스탈린 시대에 고안된 것으로, 최대의 특징은 단일 입후보제다. 이른바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북조선노동당이 허가한 사람만 단일 후보로 입후보하여 당선되는 제도다. 단일 후보자가 입후보한 상황에서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표를 던졌는지를 식별할 수 있는 구조인 흑백함 투표제가 채용된 결과 단일 후보자가 패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김일성이 처음부터 선거를 남한의 제헌의원 선거처럼 자유로운 선거를 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지명한 단일 후보 지명식 흑백함 선거를 한 이유는 공산당 인사들이 모든 자리를 독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전 유권자 가운데 99.97%가 참가하여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추천한 후보자가 98.49%의 높은 찬성표를 획득할 수 있었다.

북한은 1962년 제3기 대의원 선거 때부터는 흑백함 선거 대신 ○×식 선거방식으로 변경했다. 즉 단일 입후보자에 찬성할 경우 투표용지를 그냥 투입하고, 반대하는 경우 연필로 ×표를 하여 투입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흑백함, ○×식 선거는 경제적 공산체제 확립(토지개혁 등)과 보조를 맞춰 정치적 공산체제 확립을 위한 획기적인 수단이었다.

 

1946년 11월 4일

1946년 11월 3일 24시 현재 선거 통계
전체 주민 4,480,627명
투표자수 4,423,383명(98.7 퍼센트)
도 별 투표현황
평안남도 687,748명(유권자의 99 퍼센트)
평안북도 942,322명(유권자의 97.7 퍼센트)
함경남도 765,146명(유권자의 99.3 퍼센트)
함경남도 (함경북도의 잘못된 표기로 보인다) 444,356명(유권자의 99.4 퍼센트)
황해도 891,413명(유권자의 98.5 퍼센트)
강원도 595,142명(유권자의 98.7 퍼센트)
평양시 167,256명(유권자의 99.6 퍼센트) 
투표시간이 지나 137,565명이 증가되다. 57,244명이 투표에 불참하다.
특별한 사고는 없었다. 주민들의 동향은 양호한 편이며, 투표에 대한 적극성이 매우 높았다. 

1946년 11월 4일 계획.

1. 선거 대책
1)선거결과에 대한 중간보도문을 점검한다.
2) 선거결과에 대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공식보도문을 점검한다.
3) 선거결과 집계 절차, 활동가들의 보강, 선거 관련서류의 보관, 유권자들과 선거 조직자들에게 감사를 표명하는 인민위원회의 결정서 등을 점검한다.
4)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 의사일정을 검토한다.
5)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가입한 정당·사회단체 단위로 선거총결사업을 진행하는 절차에 대해 점검한다.
6) 10~11일에 북조선 전역에서 집회를 개최하여 선거총결사업을 진행한다. 이 집회에서 소련군사령부와 미군사령부에 보내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요청하는 호소문을 채택한다. 호소문에서 조선인민은 민주주의를 염원하며, 김구나 이승만과 같은 반동분자들을 용인하지 않으며, 이 반동분자들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중앙정부의 수립이 지체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한다. 또한 북조선의 선거는 북조선 인민대중이 하나로 단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중해 주었다고 지적한다.
7) 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 문제를 확정한다.
8) 주민의 등록에 대해 점검한다.

김일성, 박헌영과 회담한다.

1.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제반 사태에 대한 평가를 전달한다.

1) 파업, 시위, 무장투쟁
2) 입법기관의 창설에 대한 남조선 인민의 반응
3)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의 남조선로동당으로의 합당 진행 상황. 일반문제들, 남조선로동당의 이론, 목표 및 과제, 민주주의조선 건설의 전망

2. 북조선의 정세

1) 농업경제에 대한 일련의 조치들 -농업경제의 발전 전망, 축산, 알곡생산, 관계시설, 기계화의 확대, 2~3개년 전망의 수립, 비료문제
2) 공업문제, 공업경제의 발전 전망
3) 문화사업 문제
① 국민교육
② 기술인텔리의 양성
③ 민족예술의 건설
④ 민족문학의 건설
⑤ 교과서 편찬
4)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구조에 관한 문제들
① 외무국
② 계획과, 회계·통계과
5) 곡물과 식료품에 대한 국가예비의 조성. 곡물투기의 방지 대책

박헌영과 아래 문제들에 대해 협의한다.

1. 남조선의 정세, 파업투쟁과 무장투쟁에 대한 평가
2. 남조선 좌익 3당의 합당 문제
3. 남조선 민주단체들의 과업
4. 조선의 발전 전망과 개혁
5. 대중들에 대한 당의 이데올로기 사업, 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모든 사태에 대한 과학적인 해명

 

1946년 11월 10일

로마넨꼬에게 북조선인민위원회 선거의 공식적인 결과에 대해 문의한다.

 

1946년 11월 12일

로마넨꼬가 작가들에 대해 보고하다. 남조선 3당 합당 상황에 대해 보고하다. 도 수준까지 통합이 완료되었다.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고, 중앙위원회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중앙위원회 대표가 허헌을 만나 박헌영의 지시를 전달했다. 1946년 11월 10일 합당대회가 개최되었지만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었다. 대회에서 준비위원회로 하여금 대회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는 결정이 채택되었다. 준비위원회는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반대파들은 사회로동당을 결성했다. 사회로동당의 강령이 발표된 후 대중들은 이 당을 거부하고 있다. 사회로동당이 우익과 합작을 도모하고 입법기관의 조직을 지지하고 있어 좌익 정당의 비판을 받고 있다. 사회로동당은 파업과 무장봉기를 이유로 공산당을 비난했다. 백남운은 자신의 사회로동당의 입장에서 동의하지 않으며 사회로동당의 선언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강진도 자신의 오류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여운형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주-박헌영은 1946년 7월 하순 월북하여 평양에 나타났다(5차 월북). 박헌영이 불과 며칠 만에 또 다시 허겁지겁 평양에 나타난 이유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최고 지도자로 낙점한 이래 긴급 현안이나 전략 등은 평양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박헌영-김일성의 5차 회동에서는 남과 북에 산재하는 좌익 및 공산계열 정당들의 합당 문제, 정판사 사건 수습, 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후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대응, 미군정의 좌우합작에 대한 대응, 미군정과의 투쟁 문제 등이 의제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슈는 남북한에 존재하는 좌익 및 공산계열 정당들의 합당 문제였다. 현안 문제는 두 사람이 회의를 열어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결정된 것처럼 발표되었지만, 결론은 김일성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그것이 곧 소련군정의 뜻이고, 크레믈린 ‘당 중앙’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의 합당은 7월 23일 신민당이 먼저 북조선공산당에게 합당을 제의하는 형식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지방당별로 합당대회를 가진 후 북조선노동당(이하 북로당)이 8월 30일 공식 출범했다.

남한에서는 8월부터 합당절차가 시작되어 우여곡절 끝에 1946년 11월 23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남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했다. 남북한에서 좌익 정당들의 통합은 크렘린궁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최종 낙점한 후 벌어진 의미 있는 결과다.
박헌영의 제5차 월북 및 박헌영-김일성 회담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회동을 계기로 스탈린의 지시에 의한 김일성으로의 권력 정지작업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회담을 계기로 북에서는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이 유일 집권당으로 등장했고, 남에서는 좌익계 정당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라는 단일정당으로 통합했다. 이로써 북한에서는 강력한 집권당의 배경 아래 소비에트화와 공산당 정권 창출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946년 11월 13일

조선의 영화그룹에 대해 논의하다.

[#12에서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