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율 시민기자
김원율 시민기자

어느 수도원에서 한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취해야 할 첫 번째 태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제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과 마음,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스승은 “틀렸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취해야 할 첫 번째 태도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신명기(6,4-5)와 레위기(19,18), 복음서(마르코 12,29-31)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목적과 이유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장미나 화려한 백합이 아니라 광야에 핀 이름 없는 작은 들꽃에 지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우리의 가치를 조금도 훼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약의 창세기(1,26)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써 창조되었으므로 있는 그대로 그 무엇보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나 자신의 존재,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잊고 자신을 남보다 뛰어나게, 또는 비범하게 가꾸고 포장하기 위하여 모든 힘과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우리들 거의 모두는 자신이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되었다는 하느님의 계시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까닭에 비범해지려고 안간 힘을 쓰게 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안해하면서 하느님의 사랑보다 훨씬 못한 재화, 권세, 명예와 같은 세상의 온갖 가치를 얻기 위하여 안달합니다. 이러한 허망한 것들이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사람의 존경과 신뢰를 얻게 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온갖 거짓과 탐욕, 분노와 증오심으로 삶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지 못하고 그저 내가 남에게 무엇이라고 평가되는가, 남에게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가, 나는 존경받고 있는가, 나는 유능한가, 나는 다른 사람만큼 멋진가, 그저 남의 생각 속에 비쳐지는 이런 모습에 온갖 신경을 쓰고 모든 힘과 정력을 낭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神性)을 지니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신약성서에서 자신의 신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굳게 믿으셨기에 그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예수님처럼 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고, 둘째, 그저 자기 자신이 되는 일, 즉 다시 말하면 평범해지려고 하는 일의 본질적인 가치를 깨닫고, 셋째, 거짓된 자화상을 만들어내고 싶은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가 평범성(平凡性)을 주관하는 성령(聖靈)을 제대로 우리 안에 모신다면 우리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고 참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범성이 바로 참된 나입니다. 우리는 나의 뛰어남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아 속에서, 나의 평범함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의 평범한 모습 안에 하느님의 모상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거짓 자아를 만들고 이를 통하여 남의 인정과 존경을 이끌어 내려고 하지만 이는 장미 위에 붉은 덧칠을 하는 것만큼이나 허망된 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이미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콜로새 서 3,12-14) 에서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겸손과 온유를 입으십시오. 또한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바오로 사도의 말씀 같이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받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평범성 안에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고 뒤틀린 자신의 자화상에 매달리는 자기도취적인 믿음과 오만(傲慢)에서 해방됨을 뜻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방어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한결 남을 겸손하게 맞이할 수 있고 온유해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사랑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난 나의 참된 모습은 거짓된 자화상, 나의 위대한 모습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나의 모습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평범성(平凡性) 안에 존재하는 위대(偉大)한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김원율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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