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독일 패전 후 여성들이 당한 일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독일 패전 후 여성들이 당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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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1

“棒子! 开门! (한국 놈아! 문 열어!)”

서울 시내의 한 아파트 복도. 중국 군인들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사납게 문을 때려댄다. 커튼을 잠시 열어 본 아내의 얼굴을 목격한 이들이 4층 우리집 문 앞까지 뛰어올라온 것이다. 112에 전화한다고 올 수 있는 경찰이 있을까? 

서울은 함락됐고 거리와 골목마다 점령군으로 넘쳐난다. 전기와 수도는 끊겼고 식량배급마저 중단됐다. 중국군 500만명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산에서부터 진입을 시작한 중국군은 여성은 나이를 불문하고 겁탈한다고 한다.

문을 부수고 대여섯명의 군인이 날카로운 땀냄새를 풍기며 거실로 들어왔다. 내 직업은 대한민국 검사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삶을 살았고 아내 역시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정복자들을 섬겨야 하는 피정복민에 지나지 않는다. 저들은 내 아내를 원한다. 넘겨주고 이 고비를 넘기자.

#상상2

전쟁은 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아내는 임신을 했다. 2달 전 ‘그 일’을 처음 당한 뒤 중국 군인들은 우리집을 숙소로 사용하며 지냈다. 누구 아이인지는 모른다. 셀 수 없는 병사들이 다녀갔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 아내와 침대를 사용하는 동안 나는 베란다에서 지냈다. 이 아이를 지울 것이다. 중국 군부는 군정실시를 위해 질서회복을 명령하고 병력을 서울 외곽으로 철수했다.

서울시내에 ‘그 일’을 당한 여성들을 위한 진료소가 문을 열었다. 체면 때문에 아무도 찾지 않을 줄 알았지만 예상외로 복도밖까지 줄이 늘어섰고 발 디딜 틈도 없다. 제대로 된 병원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찬밥 더운밥 가릴 상황이 아닌 것이다.

여성들은 우리 남성들을 혐오한다. 이 나라에서 남성은 철저하게 거세당했다. 눈을 뜨고 자기 여자를 헌납한 남성들에게 앞으로 설 자리가 있을까? 아내와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뻔뻔한 일상을 보낸다. 그러나 분위기가 바뀌었다. 우리 둘 다 영혼의 깊은 곳에 상처를 입었다. 이 상처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아물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의 존엄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부끄러운 역사는 잊혀질 수 있을까? 


지난달 신간도서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이 출간됐다. 기자는 책을 서점 페미니즘 코너에서 들어올렸다. 이 책은 지난 2008년 영화 ‘베를린의 여인’으로 제작돼 책의 내용을 생생하게 전했다. 책을 읽고나서 피해자가 겪었을 모욕감과 절망감을 대한민국에 대입해 상상력을 발휘해봤다. 너무 과장됐다고? 저 사건은 불과 100년도 안된 유럽 문명세계의 대도시에서 일어났던 참극이다. 독일인들이라고 살면서 '그 일'들을 상상이나 해봤겠나?

역사 공부는 상상력을 요구한다. 당시의 분위기를 상상을 통해 느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어난 사실들을 반성하며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역사는 반성학이다.

이 책의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독일 경내로 밀고 들어온 소련군이 수도 베를린에서 벌인 대규모 강간 사건을 다룬다. 일각에선 소련군에 유린당한 독일 여성이 100만명에서 200만명이라고 주장한다. 강간은 독일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기억이다.

저자는 ‘그 일(은 강간을 뜻한다)’이 쉴 새없이 진행되던 전쟁터의 한복판에서도 놀라울 정도로 감정이 절제된 일기를 써내려 갔다. 베를린 시내에 소련군이 없는 곳은 없었으며 독일의 모든 행정, 사법, 입법체계가 마비가 됐다. 나와 내 가족만이 사용하는 사적공간인 '내 집' 개념은 사라졌다. 소련군이 마음 내키는대로 들어와서 술판을 벌인다. 

영화 '베를린의 여인' 中 [인터넷 캡처]
영화 '베를린의 여인' 中 [인터넷 캡처]

자기 집 안방과 침실까지 들어온 적군 병사들의 눈치를 보는 독일 남성들은 아내와 딸을 헌납한다. 전쟁은 현실이었다. 당연하게 여기던 확보된 치안과 사회간접자본의 혜택은 패전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졌다. 점령군이 경찰이 됐다. 성폭행을 당해도 달려와줄 경찰이 없다.

때로는 영웅적인 행동도 나온다. 그나마 남아 있던 남자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은 짐승과 같은 살기로 러시아 군인들을 막았다(책 속에선 이 남성의 부인이 남편의 용기있는 사랑의 표현을 한참을 자랑하고 돌아 다닌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소수다. 대개 총으로 가볍게 쏴 죽이고 여자를 겁탈하기 때문이다.

책은 나치 독일의 범죄나 전쟁의 원인은 다루지 않는다. 이 책은 강간 피해자 자신의 수기이고 역사 그 자체다. 저자는 전쟁을 직접 몸으로 겪었다. 이 책의 가치는 저자의 용기 있는 고백을 통해 전쟁의 실상을 보다 적나라하게 후대에 전해주는 데 있다. 패전이 무엇인지를 단 두 글자의 단어 이상으로 설명해준다.

“슈베린-크로지크 백작은 한 연설에서 독일인들에게 실상을 직시하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우리 여자들은 오래전부터 이미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이제 철십자가 훈장을 단 이와 장군, 대관구 지도자 들까지 다 그렇게 산다면 이 나라는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최근 독일인의 자살자 수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235페이지)”

패전에는 신분고하가 없다. 강간과 약탈은 오히려 귀족들에게 집중된다. 사냥감으로서 그들이 더 탐나기 때문이다. 패전은 한 나라의 모든 보수적 가치를 박살낸다. 더 이상 존귀한 귀부인은 없으며 더 이상 품위있는 신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모두 ‘만신창이가 된 오물덩어리’들이 되는 것이다. 모욕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은 음독 자살한다.

이 책이 페미니즘 도서 코너에 있는 게 맞는 일일까? 만약 페미니즘이 여성의 책임있는 민주시민화를 위한 사상이라면 매우 합당한 분류이다.

대한민국 경제와 안보를 파탄으로 몰고가는 문재인 대통령의 20대 여성 지지도가 60%가 넘는다는 기사를 몇 주 전 읽었다. 지난 2013년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한 날 네이버 포털 인기 검색어는 ‘화장품 할인’이었다. 이 책은 여성들이 전쟁을 보다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아무리 남녀가 유별하다지만 국가안보가 걸린 중대사에 있어서는 국민관심이 함께 집중돼야 한다.

북한 3차 핵실험보다 중요한 화장품 할인 [인터넷 캡처]
북한 3차 핵실험보다 중요한 화장품 할인 [인터넷 캡처]

이 책을 남성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고발한다고만 이해하면 잘 받아야 'C-'학점이 아닐까 싶다. 책의 주인공들은 스스로가 자초한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피해 그 자체는 학술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저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전쟁이 어떤 원리로 발생하는지, 어떤 나라가 대한민국에 위협인지, 지금의 평화는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남녀노소 모두가 역사를 읽고 대한민국이 경제-군사-문화적으로 더 강력한 나라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좌파 포퓰리즘 정권을 탄생시킨 베네수엘라에서 여성들이 머리카락, 모유, 몸까지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고 있다고 한다. 남미에서 가장 잘 살던 나라의 국민들이 국민소득 6000달러에 불과한 이웃나라 콜롬비아로 건너가 몸을 팔고 있다. ‘경제 패전국’의 참상이다.

“세련되고 충실한 연애는 규칙적이고 풍족한 식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망한 나라의 국민들에겐 존엄은 없다. 1인 1표의 참정권을 행사하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이 냉혹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가슴속에 새겨야 한다. 패전국민이 한달 남짓 기록한 일기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조준경 기자 calebcao@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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