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코프 일기로 본 북한역사 #5, 남한 좌파들의 '보이지 않는 손' 소련군정
스티코프 일기로 본 북한역사 #5, 남한 좌파들의 '보이지 않는 손' 소련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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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영은 1946년 9월 총파업 당시 쉬띄꼬프에게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 쉬띄꼬프는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정간된 좌익신문들의 속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조건들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이 요구들이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을 권고했다.

[편집자 주] 티렌티 포미치 스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 1907년 2월 28일부터 1964년 10월 25일까지 살았던 소련의 군인. 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스티코프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남긴 일기를 발굴해 연구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스티코프의 일기를 통해 드러난 소련의 '북한 김일성 세우기 프로젝트'를 2004년 12월 30일 책으로 만들어 중요한 한국근현대사 자료를 보충했다. 전 교수의 '스티코프 일기' 연구는 미국과 일본에 집중됐던 해외소재 한국사 자료가 서유럽과 동유럽, 러시아 지역까지 확대됐다는 평가를 받는 연구 업적이다. 소련군 정치장교였던 스티코프가 남긴 일기는 단순히 개인사를 넘어 소련의 한반도 정책과 1945년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 경제 상황, 한국전쟁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적 원천이 되고 있다. 특히 스티코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는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의 사태전개에도 깊게 개입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티코프의 일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소련공산당이 38선 이북 지역에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 위성정권을 세우는 과정에서 얼마나 적나라하게 개입하여 괴뢰정부를 세웠는지를 입증하는 내용증명이기 때문이다. 스티코프는 일기 형식의 비망록을 통해 소련공산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정해준 사실, 북한 헌법을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직접 만들어준 사실, 심지어 북한의 역사를 기술할 때 지침이 되도록 역사책의 목차까지 짜 준 사실, 김일성을 바지 사장으로 내세워 북한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내각의 장차관은 물론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회의 대의원을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정한 사실 등을 적어놓았다. 따라서 이 자료를 독파하면 북한이 얼마나 소련을 추종하는 괴뢰집단인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내용증명이다.

절판이 되어 시중에서는 구하기 힘든 '스티코프 일기'를 펜앤드마이크(PenN)는 전 교수의 해제부터 책 그대로를 온라인 공간으로 옮긴다. 다만 책의 제목이 '쉬띄꼬프의 일기'로 되어 있는 것을 요즘 사용하는 용어로 바꾸어 '스티코프 일기'로 바꾸었다. 게재 순서는 전 교수의 해제를 시작으로 스티코프의 일기를 1946년 9월 6일부터 11월 13일까지를 제1부, 1946년 12월 2일부터 1947년 2월 4일까지를 제2부, 1947년 7월 7일부터 10월 4일까지를 제3부, 1948년 7월 26일부터 10월 2일까지를 제4부로 편집하고 있는 책의 흐름을 따를 예정이다. 책 후반부에 별도로 첨부돼 있는 1946년 9월 28일 여운형의 북조선 방문에 대한 스티코프의 보고나 소련 군인으로 1945년 해방 후 평양 소련군정에서 소장 계급으로 민정 사령관을 지냈던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로마넨코(Andrei Alekseevich Romanenko)와 여운형의 대화 기록도 순서에 따라 게재할 예정이다. 

[해제]

한국 현대사와 소련의 역할(1945~1948)
-쉬띄꼬프(스티코프)일기를 중심으로 

전헌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5. 소련군정과 남한의 좌파정치

해방 직후 남한의 좌파정치를 남한의 테두리 안에서만 탐구해 온 기존의 연구는 신전술의 등장, 좌익정당의 합당,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 등 정국의 변화를 주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쉬띄꼬프일기'는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소련군정을 통한 소련의 정책개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기'는 해방 직후 남한의 좌파정치에 대한 소련군정의 개입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해방 직후 남한의 좌파정치는 남한의 테두리 안에서만 탐구해서는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없고, 반드시 소련군정과의 관계 속에서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남한 좌익정당들의 합당문제가 논의되던 출발단계에서부터 소련군정과 북로당의 지도부는 여운형과 백남운 및 공산당 내 반대파를 합당반대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행동을 미군정과 연결된 것으로 인식했다. 더구나 합당 반대세력을 각 당에서 축출한다는 과격한 대응책을 선호했다. 그러나 소련군정과 북로당의 압력에 의해 '반대파들의 기세는 현저히 위축되었지만', 여운형과 백남운은 여전히 합당노선에 동의하지 않았다. 

합당이 지지부진하자 소련군정과 북로당은 남한의 좌익정차들을 북으로 불러 들여 직접 설득에 나섰다. 1946년 9월 24일 고찬보가 이끄는 신민당 대표단이 방북하여 김일성과 회담했다. 그러나 합당 지지자인 고찬보조차 당분간 통합을 중지할 것을 제기했다. 26-27일에는 신민당 대표단과 김일성, 김두봉, 최창익, 허가이 등 북로당 지도부의 확대회담이 개최되었다. 회담에서 인민당과 신민당은 합법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공산당은 비합법투쟁을 전재해야 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합당의 절차에 대해서는 합의가 도출되지 못했다. 

신민당 대표단이 방북한 시기에 여운형도 평양에 와 있었다. 9월 25일 여운형과 김일성의 회담이 진행되었고, 28일에는 로마넨꼬와 여운형의 회담이 개최되었다. 쉬띄꼬프는 여운형과의 회담에서 소련군정 지도부가 취해야 할 입장을 로마넨꼬에게 하달했다. 쉬띄꼬프는 여운형에게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말 것과 입법기관 선거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여운형에게 남조선민전이 공산당 지도부의 체포령 취소와 감옥으로부터 좌파의 석방 및 테러중지를 미군정에 요구하도록 했다. 쉬띄꼬프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공산등을 합법적으로 활동하게 할 것과 3당합당을 잠시 중단할 것을 약속해도 좋다고 했다.  

로마넨꼬는 여운형이 미·소공동위원회 사업을 신속히 재개할 것을 요청했고, 상호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문제에서 소련군정과 북한 지도부에 대해 매우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로마넨꼬의 낙관적인 평가와는 달리 여운형은 서울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동요하는 입장을 보였다. 남조선민전 회의에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선거 참여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허헌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여운형은 동요하는 태도를 보였다. 

공산당과 신민당 내의 반대파의 활동도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았다. 9월 28일 강진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 대회파는 170명의 당원들을 소집하여 당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에서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대회파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었고, 박헌영 이강국 강진 등을 성원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 백남운은 미군정과 경찰의 보호하에 당에서 제명당한 사람들을 출석시켜 당대회를 소집했다. 대회에서는 공산당 지지자들을 모두 당에서 축출하는 결정을 채택했고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 10월 16일에는 사회로동당 준비위원회가 공식 발족되었다. 

사회로동당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자 10월 22일 김두봉은 백남운을 만나 "왜 좌우합작에 동조하고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 추궁했다. 김일성은 강진을 만나 합당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그가 "미제국주의의 주구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위협했다. 백남운과 강진에 대한 각개격파가 일단락되자 합당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10월 22일 쉬띄꼬프, 김일성, 박헌영의 회담에서 남도당 결성이 공식화된 것이다. 회담에서는 허헌을 위원장으로 박헌영과 이기석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하고 7명의 성원으로 정치위원회를 구성하며 13개의 국을 설치하고 45명(공산당 20명, 인민당 8명, 신민당 7명, 사회단체 10명)의 성원으로 중앙위원회를 조직할 것이 결정되었다. 11월 23일 남로당 결성대회가 소집되었다. 

소련군정과 북로당의 비난에 직면하자 백남운은 입법기관의 창설을 지지하고 파업을 비난하는 사회로동당의 선언이 자신과 무관한 일로 자신은 사회로동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남로당이 결성되자 여운형은 사회로동당의 지도적 지위에서 물러났다. 그는 "좌우합작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나는 정치적으로 준비가 덜 된 사람이다. 나에 대한 좌익단체들의 비판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은퇴의 뜻을 밝혔다. 강진도 자신의 오류를 자기비판했다. 그는 한걸음 더 나가 사회로동당 해체의 주동자로 나섰다. 

남한 좌익정당의 통합과정에서 소련군정과 북로당은 남한 죄익정파들 사이의 이견을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단순한 중재자가 아니라 통합의 주도자로 활약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련군정과 북로당은 합당과정에서 시종일관 박헌영을 지지했다. 쉬띄꼬프는 '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을 축하하는 전문을 박헌영에게 보낼 것을 로마넨꼬에게 지시할 정도였다. 소련궁정과 북로당이 다른 정파들로부터 극심한 반발을 사고있던 박헌영을 지지한 것은 박헌영이 남한내 좌익정파들 가운데 최대정파의 오너였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박헌영이 제출한 신전술이 소련군정의 대한정책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기'는 공산당 지도부가 소련군정과 협의하면서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대구 폭동을 뜻함-편집자 주)을 이끌어간 사실도 보여준다. 1946년 9월 9일 박헌영은 쉬띄꼬프에게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 확실히 9월 9일은 10월로 예정된 총파업이 9월로 앞당겨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박헌영의 문제제기가 예사롭지 않다.

쉬띄꼬프는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정간된 좌익신문들의 속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조건들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이 요구들이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을 권고했다. 또한 파업투쟁의 조직자들과 참가자들에 대해 미군정이 탄압을 가하지 말도록 요구할 것도 충고했다. 그러나 그는 인민위원회로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정과 계속 협상하겠다고 성명할 것'을 권고했다. 이 점은 매무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인민위원회로의 권력이양'을 총파업을 요구조건에서 사실상 배제하도록 권고한 것이다. 이것은 총파업을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수준으로 제한하고, 투쟁이 미군정타도의 직접적인 정권투쟁으로 전화할 가능성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총파업이 폭동으로 전화하는 전혀 새로운 정세에 직면하여 공산당 지도부는 쉬띄꼬프에게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다. 조두원은 빨치산부대들이 조직되어 '민주진영과 반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고 전하고 빨치산 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해야 할지 자제해야 할지를 문의했다. 박헌영은 빨치산부대에 보급할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고 언급하고 향후 투쟁방침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쉬띄꼬프는 북한이 무장투쟁의 배후기지로 전화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는 남한에서 무장대오들이 탈주하여 북으로 넘어와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자, 이들을 "무장해제시켜 조사하고 잠시 동안 붙잡아 두었다가 남한으로 귀환시키든지 혹은 억류하라"고 지시했다. 

[#6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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