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코프 일기로 본 북한역사 #2, 소련군정, 북한은 물론 남한 좌익까지 조종
스티코프 일기로 본 북한역사 #2, 소련군정, 북한은 물론 남한 좌익까지 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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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2.28 09:28:41
  • 최종수정 2018.12.3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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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것은 일기가 쉬띄꼬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의 사태전개에도 깊게 개입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점이다. 어쩌면 이 점이 일기가 지닌 최대의 사료적 가치인지도 모른다. 일기는 해방 직후의 남한정치사, 특히 좌파정치사를 소련군정과의 상호연관 속에서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하고 있다.

[편집자 주] 티렌티 포미치 스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 1907년 2월 28일부터 1964년 10월 25일까지 살았던 소련의 군인. 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스티코프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남긴 일기를 발굴해 연구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스티코프의 일기를 통해 드러난 소련의 '북한 김일성 세우기 프로젝트'를 2004년 12월 30일 책으로 만들어 중요한 한국근현대사 자료를 보충했다. 전 교수의 '스티코프 일기' 연구는 미국과 일본에 집중됐던 해외소재 한국사 자료가 서유럽과 동유럽, 러시아 지역까지 확대됐다는 평가를 받는 연구 업적이다. 소련군 정치장교였던 스티코프가 남긴 일기는 단순히 개인사를 넘어 소련의 한반도 정책과 1945년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 경제 상황, 한국전쟁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적 원천이 되고 있다. 특히 스티코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는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의 사태전개에도 깊게 개입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티코프의 일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소련공산당이 38선 이북 지역에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 위성정권을 세우는 과정에서 얼마나 적나라하게 개입하여 괴뢰정부를 세웠는지를 입증하는 내용증명이기 때문이다. 스티코프는 일기 형식의 비망록을 통해 소련공산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정해준 사실, 북한 헌법을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직접 만들어준 사실, 심지어 북한의 역사를 기술할 때 지침이 되도록 역사책의 목차까지 짜 준 사실, 김일성을 바지 사장으로 내세워 북한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내각의 장차관은 물론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회의 대의원을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정한 사실 등을 적어놓았다. 따라서 이 자료를 독파하면 북한이 얼마나 소련을 추종하는 괴뢰집단인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내용증명이다.

절판이 되어 시중에서는 구하기 힘든 '스티코프 일기'를 펜앤드마이크(PenN)는 전 교수의 해제부터 책 그대로를 온라인 공간으로 옮긴다. 다만 책의 제목이 '쉬띄꼬프의 일기'로 되어 있는 것을 요즘 사용하는 용어로 바꾸어 '스티코프 일기'로 바꾸었다. 게재 순서는 전 교수의 해제를 시작으로 스티코프의 일기를 1946년 9월 6일부터 11월 13일까지를 제1부, 1946년 12월 2일부터 1947년 2월 4일까지를 제2부, 1947년 7월 7일부터 10월 4일까지를 제3부, 1948년 7월 26일부터 10월 2일까지를 제4부로 편집하고 있는 책의 흐름을 따를 예정이다. 책 후반부에 별도로 첨부돼 있는 1946년 9월 28일 여운형의 북조선 방문에 대한 스티코프의 보고나 소련 군인으로 1945년 해방 후 평양 소련군정에서 소장 계급으로 민정 사령관을 지냈던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로마넨코(Andrei Alekseevich Romanenko)와 여운형의 대화 기록도 순서에 따라 게재할 예정이다. 

[해제]

한국 현대사와 소련의 역할(1945~1948)
-쉬띄꼬프(스티코프)일기를 중심으로 

전헌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2. 쉬띄꼬프의 생애와 일기

쉬띄꼬프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주고 있는 전기적인 저술은 아직 없다. 한국 현대 정치사와 관련된 쉬띄꼬프의 행적과 그의 사상적 면모를 전해주는 글도 존재하지 않는다. 쉬띄꼬프 자신도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그 흔한 회상기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나 한 듯 말년에 회상기 집필에 착수했지만 유년 시대의 편린을 추억하는 단계에서 집필을 중단해야 했다. 이것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그의 운명에 연유한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우리는 쉬띄꼬프의 생애에 관한 한 가장 공식적인 정보를 전해주는 쏘비에트 군사백과사전을 인용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삶에 대한 추적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쉬띄꼬프 쩨렌찌이 포미치. 1907년 3월 13일 류쁘꼬에서 출생. 1964년 10월 25일 사망. 대장(1944년). 1929년 소련공산당 입당. 1927년 직업기술학교 졸업. 1938년 이래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 제2비서. 1939-40년 소련·핀랜드전쟁 시기 제7군 군사평의회 위원. 제2차 세계대전 시기 1942년-43년 레닌그라드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1943-44년 볼호프스끼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1944년 까렐스끼이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1945년 4월 이래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전후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1945-47).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1947-48). 1948-195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특명전권대사. 1951년-1959년 당 사업에 종사, 소련공산당 노브고로드주위원회, 연해주변경위원회 제1비서 역임. 1959년 4월 이래 헝가리인민공화국 주재 소련특명전권대사, 1961년 이래 러시아사회주의공화국연방 내각 국가검열위원회 위원장. 1963년 2월 이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당·국가검열위원회 부위원장. 1939-1952년 전연방공산당(볼)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1956~196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제1·2·4·5대 소련최고회의 대의원. 레닌훈장 3회 수상, 적기훈장 수상. 1급 수보로프훈장수상. 1급 꾸뚜조프훈장 3회 수상. 메달 수상.

공식적인 정보가 전해주는 바와 같이 쉬띄꼬프는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의 제2비서와 소련군내의 정치활동가로 본격적인 정치적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22살에 공산당에 입당하고 9년 후인 31살에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 제2비서가 되었다. 파격적인 승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도약은 1934-37년 스탈린 대숙청 시기 고참 볼쉐비키 혁명가들이 대거 숙청된 이후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스탈린 집권기에 정치적 세례를 받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급속히 등용된 사정과 관계가 있다. 확실히 쉬띄꼬프는 스탈린 시대의 정치적 산물이었고 그만큼 스탈린주의의 열렬한 지지자로 성장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쉬띄꼬프의 정치 입문 시기에 그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 쥐다노프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대독전선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있을 때 쥐다노프의 직접적인 지도 밑에 활동했다. 쉬띄꼬프는 개인적으로도 쥐다노프와 친밀한 사이였다. 1948년 8월 31일 쥐다노프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쉬띄꼬프는 밤새 잠도 못자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던 안드레이 알렉산드로 비치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절규했다. 쥐다노프는 강성 이미지의 소유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전 연방공산당(볼) 이데올로기사업부장으로 전쟁 기간 느슨해진 이데올로기적 긴장성을 회복시킨다는 구실로 전쟁의 종결과 함께 문학예술가들과 자연과학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을 주도했다. 쉬띄꼬프는 바로 이러한 인물과 함께 자신의 정치적 삶과 지향을 공유했다. 

우리는 이미 쉬띄꼬프이 사상적 면모를 보여주는 몇 가지 일화를 잘 알고 있다. 쉬띄꼬프는 1946년 2월 말 평양을 방문하여 소련군사령부 지도자들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조만식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한국에 조만식 같은 사람이 한 사람 뿐이겠는가. 그들의 수는 100명 가까이 될 것이며 그들은 이번이 공격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 조선 동지들에게 계급투쟁의 본질에 대해 보다 많은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쉬띄꼬프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막식 연설에서 일제 잔재를 완전히 숙청하고 국내의 반동적, 반민주적 분자들과 결정적으로 투쟁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쉬띄꼬프의 사상적 면모는 계급투쟁의 신봉자라는 과격한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쉬띄꼬프는 북한에 대해 비교적 공정한 태도를 견지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츠꼬프는 북한의 공업을 소련에 유리한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 대외무역성 전권위원 슬라뜨꼬프스끼는 북한에서 목재와 비료를 소련으로 수출하는 무역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쉬띄꼬프는 이들의 주장과 제안을 배격했다. 그는 조선인들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비료와 목재는 북한 주민들이 사용하기에도 부족하다는 것을 들어 불공정한 무역협정에 반대했다. 

쉬띄꼬프가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그의 정치적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1945년 9월 20일 스딸린이 연해주군관구와 25군 사령관에게 하달한 명령서에는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을, 즉 쉬띄꼬프가 총괄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북한 주재 소련민정청장이었던 레베제프의 회고에 의하면, "해방 직후 북한에서 이루어진 일들 가운데 쉬띄꼬프가 관여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쉬띄꼬프의 생애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시기 북한 주재 소련대사의 직을 맡고 있던 쉬띄꼬프는 1951년 초 갑자기 모스크바로 소환 당했다. 이후 그는 노브고로드주위원회, 연해주 변경위원회를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쉬띄꼬프의 부관이었던 끄라프초프의 회고에 의하면 쉬띄꼬프가 국방상 쉬쩨멘꼬에게 미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을 여러 차례 보고하며 이에 대비할 것을 건의했지만 쉬쩨멘꼬는 이 사실을 당 중앙에 전달하지 않았고,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당 중앙에서는 이것이 쉬띄꼬프의 직무태만에 기인한다고 하여 그에게 견책처분이 내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대 말에 그의 정당함이 확인되어 1960년대에 들어서면 쉬띄꼬프는 이전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쥐다노프 사후 당 중앙에서 견고한 지반을 상실한 쉬띄꼬프에게 1950년대는 확실히 정치적 시련기였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쉬띄꼬프의 전기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64년 10월 25일 사망했다. 그는 1964년 여름 휴가를 레닌그라드에서 보냈다. 평소 사진광이었던 그는 운명의 날에도 레닌그라드 시내에 있는 노일전쟁기념비를 촬영하러 갔다가 심장마비가 일어났다. 당시 그와 함께 있던 운전사의 말에 의하면 심한 증세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병원에 의사도 없었고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쉬띄꼬프는 맹렬한 정치활동가이자 타고난 기록광이었다. 그는 1938년 레닌그라드주 당위원회 제2비서가 된 이래 1964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거의 매일 자신의 행적을 일기로 기록했다. 현재 그가 작성한 일기 60여 권(각각 150~200쪽)이 남아 있다. 장성 급의 군인이 매일 업무일지를 작성하는 것은 습관처럼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빈번한 정치적 박해 때문에 사적인 기록을 남기는 것을 극히 자제해 왔던, 1940-50년대를 살아 온 소련정치가들의 삶을 고려할 때 쉬띄꼬프의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그는 사적인 일기만을 작성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무수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스딸린, 당중앙위원회, 국방상, 외무상 앞으로 발송했다. 쉬띠꼬프는 이러한 사적 공격 기록행위와 함께 자신이 개입한 사건들과 관련된 자료도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그의 문서보관소에는 정치적 현장을 담은 수 장의 자료사진이 수집되어 있다. 

사진광이었던 그는 풍경사진도 많이 수집했다. 그는 자신이 썼거나 자신에게 발송된 편지, 전보, 엽서도 꼼꼼히 보존했다. 그는 신문들도 빈틈없이 스크랩했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던 서울에서조차 남한의 좌우익 신문들을 수집했다.

쉬띄꼬프가 남긴 공식 비공식 기록은 쉬띄꼬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소련의 대한정책과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경제 상황, 한국정쟁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적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쉬띄꼬프가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쓴 일기는 현재 일부만이 남아 있다. 그는 1945년 여름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한 이래 1951년 초까지 한국문제에 대해 개입했는데, 이 시기가 그가 쓴 일기는 모두 4권만이 남아 있다. 

현재 발굴된 일기의 집필시기와 그 분량은 다음과 같다.

제1권 1946년 9월 5일-1946년 11월 16일(149쪽),

제2권 1946년 12월 1일-1947년 2월 5일(141쪽),

제3권 1947년 7월 7일-1947년 8월 29일(193쪽),

제4권 1948년 7월 26일-1948년 9월 6일(72쪽).

일기는 외형상 1946년 9월에서 1948년 7월까지 약 16개월의 기록은 누락되어 있다. 또한 1945년 8월에서 1946년 9월 초까지와 1948년 이후의 기록도 빠져있다. 

일기는 우선 순수한 군사적인 문제들에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일기에는 연해주군관구 예하부대들의 군사훈련, 정치교육, 보급, 인사, 행정, 위생, 규율, 선거, 재정 등의 문제들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일기의 압도적인 부분은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제1권에는 남한의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및 남한 좌익정당의 합당이, 제2권에는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선거와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가, 제3권에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경과가, 제4권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구성이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일기가 쉬띄꼬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의 사태전개에도 깊게 개입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점이다. 어쩌면 이 점이 일기가 지닌 최대의 사료적 가치인지도 모른다. 일기는 해방 직후의 남한정치사, 특히 좌파정치사를 소련군정과의 상호연관 속에서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하고 있다. 

일기는 그 자체로서 사료적 원천으로 활용하기에 문제점들이 많다. 일기는 모두 필사본이어서 필체를 판독하기가 쉽지 않다. 기록자의 까다로운 필체는 서로 다른 판독을 가능하게 한다. 일기에는 필자에게만 의미가 분명한 약자들이 무수히 등장하며,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운 인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문법적으로도 오류가 많아 해석상 다툼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논지의 전개가 대단히 압축적이어서 전후맥락이 분명치 못한 곳도 많다. 서술자에게는 사태의 전개가 분명한 것이지만 제삼자에게는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가 명확치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일기의 서술시점과 관련해서도 일정한 주의가 요구된다. 대부분의 경우 일기에는 화자가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화자는 늘 스토리 전개의 중심에 서있기 마련이고, 모든 사건의 시발과 종결이 화자의 의도대로 해석되고 기술된다. 이 점은 쉬띄꼬프의 일기도 예외가 아니다. 일기에서 쉬띄꼬프는 늘 사건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는 예외적으로만 극소수의 상급자들에게 지시를 받아 행동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지도자나 교사의 지위에서 주변 인물들에게 조성된 상황을 설명해 주고 이에 대처할 계획을 수립하여 구체적인 방침을 지시하는 특권을 누린다. 이러한 시점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일 경우 남북한의 좌파지도자들은 쉬띄꼬프의 지시에 따라 단순하게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되고 만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 점이 일기를 활용할 때 연구자들이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 대목이다.  

[#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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