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코프 일기로 본 북한역사 #1, '괴뢰정부' 북한 세운 주인공의 고백
스티코프 일기로 본 북한역사 #1, '괴뢰정부' 북한 세운 주인공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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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코프의 일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소련공산당이 38선 이북 지역에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 위성정권을 세우는 과정에서 얼마나 적나라하게 개입하여 괴뢰정부를 세웠는지를 입증하는 내용증명이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티렌티 포미치 스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 1907년 2월 28일부터 1964년 10월 25일까지 살았던 소련의 군인. 전현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는 스티코프가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남긴 일기를 발굴해 연구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스티코프의 일기를 통해 드러난 소련의 '북한 김일성 세우기 프로젝트'를 2004년 12월 30일 책으로 만들어 중요한 한국근현대사 자료를 보충했다. 전 교수의 '스티코프 일기' 연구는 미국과 일본에 집중됐던 해외소재 한국사 자료가 서유럽과 동유럽, 러시아 지역까지 확대됐다는 평가를 받는 연구 업적이다. 소련군 정치장교였던 스티코프가 남긴 일기는 단순히 개인사를 넘어 소련의 한반도 정책과 1945년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 경제 상황, 한국전쟁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적 원천이 되고 있다. 특히 스티코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는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의 사태전개에도 깊게 개입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티코프의 일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소련공산당이 38선 이북 지역에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 위성정권을 세우는 과정에서 얼마나 적나라하게 개입하여 괴뢰정부를 세웠는지를 입증하는 내용증명이기 때문이다. 스티코프는 일기 형식의 비망록을 통해 소련공산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를 정해준 사실, 북한 헌법을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직접 만들어준 사실, 심지어 북한의 역사를 기술할 때 지침이 되도록 역사책의 목차까지 짜 준 사실, 김일성을 바지 사장으로 내세워 북한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내각의 장차관은 물론 우리나라의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회의 대의원을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정한 사실 등을 적어놓았다. 따라서 이 자료를 독파하면 북한이 얼마나 소련을 추종하는 괴뢰집단인지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내용증명이다.

절판이 되어 시중에서는 구하기 힘든 '스티코프 일기'를 펜앤드마이크(PenN)는 전 교수의 해제부터 책 그대로를 온라인 공간으로 옮긴다. 다만 책의 제목이 '쉬띄꼬프의 일기'로 되어 있는 것을 요즘 사용하는 용어로 바꾸어 '스티코프 일기'로 바꾸었다. 게재 순서는 전 교수의 해제를 시작으로 스티코프의 일기를 1946년 9월 6일부터 11월 13일까지를 제1부, 1946년 12월 2일부터 1947년 2월 4일까지를 제2부, 1947년 7월 7일부터 10월 4일까지를 제3부, 1948년 7월 26일부터 10월 2일까지를 제4부로 편집하고 있는 책의 흐름을 따를 예정이다. 책 후반부에 별도로 첨부돼 있는 1946년 9월 28일 여운형의 북조선 방문에 대한 스티코프의 보고나 소련 군인으로 1945년 해방 후 평양 소련군정에서 소장 계급으로 민정 사령관을 지냈던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로마넨코(Andrei Alekseevich Romanenko)와 여운형의 대화 기록도 순서에 따라 게재할 예정이다. 

[해제]

한국 현대사와 소련의 역할(1945~1948)
-쉬띄꼬프(스티코프)일기를 중심으로 

전헌수 경북대 사학과 교수

1. <쉬띄꼬프일기>의 편집 및 역주

필자는 1995년 중앙일보사 현대사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쉬띄꼬프일기(이하 일기로 약칭)를 발굴해서 그 내용의 일부를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일기는 언론을 통해 그 내용의 일부가 알려지자마자 한국현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정치학회 1995년 하계학술대회에서는 발표자들 상당수가 일기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1995년 중앙일보사 현대사연구소가 주최한 모스크바국제학술포럼에서도 일기는 발표자들과 토론자들의 열띤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쉬띄꼬프가 한국현대사에 남긴 커다란 족적을 고려하면 연구자들이 그의 일기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일기에 주목하는 것은 기록사료로서 일기 자체가 갖고 있는 사료적 경쟁력 때문이다. 북한정권의 형성에 관여한 소련 군인들이나 외교관들이 남긴 회상기들은 1960년대 이후 북한 역사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된 자력에 의한 조국해방과 소련군정 없는 북한사회의 자주적 발전이라는 주체적 역사해석을 비판하는데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그 자체로서 소련군의 해방자적 역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 냈다. 일기는 신화적 이데올로기적 접근으로부터 해방되어 역사적 현장의 내막을 생생하게 전해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진실에 한층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 이 점이 우리가 일기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필자는 쉬띄꼬프 일기의 발굴과 사료적 복원 작업을 주도해 왔지만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지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기가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국내에 소개될 당시 필자는 러시아과학원 동방학연구소 박사과정에서 유학중이었다. 당시로서는 언론의 보도 일정에 맞춰야 하는 시간적 촉박함 때문에 일기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번역과 해석에서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신문 연재가 끝나자 서중석 교수의 제안으로 역사비평에 일기의 전반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연구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 논문은 해방 직후 남북한 정치사의 전개를 소련군정과의 관련 속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 논문은 강규형 박사의 도움으로 미국의 우드로우 위슨 센터가 발생하는 계간지 국제냉전사 프로젝트에도 소개되었다.

신문과 학술지를 통해 일기가 소개되자 미국, 일본, 러시아, 한국 및 심지어는 북한의 연구자들로부터 일기를 공개해 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필자는 자신이 소장한 필사문서와 탈초자료를 연구자들에게 제공했지만 비러시아어권 연구자들에게는 언어적 장벽 때문에 일기를 학술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어려웠다. 일기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활용되려면 필사문서 원본에 대한 정밀한 탈초 및 교열 작업을 통해 텍스트 정본을 확정하고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여기에 치밀한 주석을 첨가하는 편집 및 역주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필자는 1995년 가을 이후로는 박사학위 논물을 집필해야 했기 때문에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을 진척시킬 수 없었다. 1998년 서울로 귀국한 이후에도 외환위기 상황에서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없어 2001년 2월까지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학예연구관으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2001년 3월 이후 경북대학교 사학과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필자는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게 되었다. 필자는 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 소형과제로 이 작업을 추진할 결심을 하고 1년 이상 준비를 했지만 본의 아니게 소속 대학의 대형과제에 참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어 다시 2년의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가까스로 2003년 9월 단독으로 소형과제를 시작하면서 약 109년간 중단된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을 다시 본궤도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이 지체된 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사정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1995년 일기를 발굴할 때 필자는 약 두 달간 빼째르부르크에 거주하는 쉬띄꼬프의 아들 빅또르 집에 출입했다. 이후에도 수십 차례 '끄라스나야 스뜨렐라'(붉은 화살) 열차를 이용해서 주말에 빼째르부르크에 다녀오곤 했다. 이 때 필자가 발굴한 일기는 4권이 전부였는데 한국전쟁과 관련된 1949년~1950년 시기의 일기가 없었다. 이 점을 참으로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빅또르의 부인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빅또르의 부인 잉가 니깔라예브나에게는 당시 빼째르부르크국립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강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필자가 쉬띄꼬프 부부에게 오기 1년 전쯤 이 친구가 1949년~1950년 시기 일기 4권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후 필자는 잉가의 친구에게 전화해서 일기를 가져간 사실을 확인했고 직접 만나서 이 일기 문제를 협의하자고 약속하고 약속장소에 나갔지만 상대방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이후에도 잉가를 통해 그 친구에게 계속 연락을 취하고 일기를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 친구는 곧 이사를 가고 자취를 감추었다. 1995년 가을 이후 2000년까지 매년 여러 차례 분실된 일기의 소재 파악에 나섰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이처럼 분실된 일지를 찾아 전체 짝을 맞추려는 집착도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을 지연시킨 요인이라 하겠다. 

2003년 9월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을 재개하면서 필자는 먼저 필사문서의 탈초작업을 전면적으로 새로 했다. 1995년 당시 필사문서의 탈초작업은 역사전문가가 아닌 미술사학도인 러시아 친구 박 에두아르드 박사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인명, 단체명 등 고유명사의 정확한 판독에서 오류가 많았고 전문용어의 약어나 탈자를 복원하는데도 한계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기록사료로서 일기의 편집 과정에서 통일된 기준을 확립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러시아연방기록관리청에서 작성한 역사자료의 편찬 규정이 있었지만 이것을 어떻게 적용해야할지 막막했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과학원 러시아역사연구소에서 러시아 현대사, 농업사 관련 기록사료의 편찬 작업을 수행해 온 빅또르 다닐로프 교수의 문하에서 이 작업에 10년 이상 참여해 온 숙력된 역사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은 필조라서는 커다란 행운이다. 다닐로프 교수의 비서로서 국제적인 사료편찬 프로젝트에서 편집 작업을 수행해 온 세르게이 먀낀꼬프 박사가 필사문서 원본에 대한 정밀한 탈초작업을 새로 해 주었다. 뺀자국립대학교 역사학부 교수인 빅또르 깐드라쉰 교수는 탈초작업의 결과를 필사문서 원본과 여러 차례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역사자료의 편찬 규정에 따라 편집 작업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인명, 단체명 등 고유명사를 정확히 판독하고, 전문용어의 약어를 복원하고 탈자와 문법적 오류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인명의 경우 한국어 발음이 익숙하지 않아 동일한 인명이 다양하게 표기되었는데 (예를 들면 홍명희의 경우는 홍명히, 홍며희, 호명희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이러한 오류를 탈초본에서는 그대로 살려두고 번역본에서는 매번 역주를 달아 오류를 바로잡았다. 한국지명은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을 러이사어로 표기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도 탈초본에서는 그대로 살려두었지만 번역본에서는 모두 역주를 달아 통일성을 부여했다. 

일기에는 소련군 내의 사소한 인사문제라든가, 군기위반 사건이라든가, 개개인의 사생활과 같은 잡다한 기록이 많은데 편집 과정에서 한국 현대사와 관련이 없는 내용들은 가능한 한 배제하고 한국 현대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기록만을 최종적으로 텍스트 정본으로 확정하는 방침을 고수했다. 일기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일기가 전해주는 정보들을 사료적 원천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매우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그것은 일기의 정보들이 대부분 단편적이고 압축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그것은 일기의 정보들이 대부분 단편적이고 압축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필자는 특히 번역과정에서, 일기의 단편적인 정보들을 그 전후맥락에서 가능한 한 정확히 독해하려 활용 가능한 사료로 복원하는데 노력을 집중했다. 

이하에서는 먼저 쉬띄꼬프의 생애에 대해 살펴보고 일기 독해의 기술적인 문제들에 대해 검토하고, 계속해서 북한 주둔 소련군의 성격, 소련군정과 남북한의 좌파정치, 미소공동위원회와 소련의 한국임시정부 수립 구상 등의 문제들을 중심으로 쉬띄꼬프일기의 주요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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