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성 계엄사령관 진술조서, "광주에 계엄군 증파는 내가 결정"(下)
이희성 계엄사령관 진술조서, "광주에 계엄군 증파는 내가 결정"(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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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2.21 09:45:51
  • 최종수정 2018.12.2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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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8일 16시경 시위군중이 점차 증가되어 1천여 명에 이르고, 파출소 7개, 차량 1대가 불탔다는 상황보고를 받고 계엄군을 추가 투입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김재명 육본 작전참모부장이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협의해 11공수 병력을 증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5월19일 11공수 병력 1천1백명을 광주에 투입했고, 5월20일 3공수 병력 1천4백여명, 5월21일부터 5월22일 사이에 20사단 약 4천4백여명을 증파했습니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79년 12․12 사태 다음날 신군부의 조종에 의해 정승화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이희성씨의 검찰 진술조서 일부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인 이희성 씨에게 결재를 받은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군 인사 등 일반 업무는 측근인 노태우나 정호용을 통해 직접 예하부대에 지시했고, 계엄사령관이 발령하는 포고령도 보안사 요원들이 알아서 발령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전두환이 관사를 도청하지 않는가 불안해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1980년 초에 참모총장을 그만 두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는 바람에 비겁하게 혼자 빠져나가는 것 같아 망설이다 사퇴 시점을 놓치고 1981년 1월24일 비상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계엄사령관으로 재직했다는 것이다. 관련 내용을 상·하 두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1980년 5월 광주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는 광주시민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광주에 계엄군 증파는 내가 결정한 것"이라고 검찰에서 진술했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광주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는 광주시민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광주에 계엄군 증파는 내가 결정한 것"이라고 검찰에서 진술했다.(연합뉴스 제공)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참석 비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이 회의에 참석했나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당시 중정부장 서리였기 때문에 육본 보안부대장이 대리 참석했고, 노태우, 정호용은 참석했습니다."
-보안사령관은 참석할 자격이 없는가요.
"보안사령관은 계엄하에 계엄 분소장이나 지휘관이 아니기 때문에 참석 범위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 회의에서 진술인이 한 발언 요지는 무엇인가요.
"계엄군이 조속히 계엄목표를 달성하고 군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겠다는 1979년 12월18일자 담화내용을 재확인하고 예하부대에 소요진압 준비태세를 지시했습니다."
-1980년 1980년 5월14일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 등과 육본에 모여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 및 야권 정치 지도자들을 불법체포하고, 5월17일을 전후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는 한편, 소요가 발생할 경우 이를 무력으로 진입하자고 모의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5월16일 22시30분경 귀국한 최 대통령에게 그 동안 국내에서 있었던 학생소요 등 당면문제에 대해 보고한 사실이 있나요.
"예."
-그 경위를 자세히 진술하시오.
"중동순방을 나갔던 최 대통령은 1980년 5월17일 귀국예정이었는데 일정을 앞당겨 5월16일 22시30분경 김포공항으로 귀국해 청와대로 직행했습니다. 그날 공항에 영접하러 나갔던 신 총리, 김종환 내무, 주영복 국방, 계엄사령관인 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청와대로 찾아가 그날 23시부터 24시까지 학생소요 등 당면문제를 보고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주영복 장관은 내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대책을 협의하겠다고 보고했습니다."
-1980년 5월17일에 개최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어떤 대책이 논의되었나요.
"그날 11시경 국방부에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 전인 10시경에 육본에서 주요지휘관과 간담회를 갖고, 10시20분경 국방부로 갔습니다. 다른 지휘관들은 회의실로 가고 저는 국방부장관실로 갔더니 주영복 장관, 유병현 합참의장, 김종곤 해군총장, 윤자중 공군총장 등이 있었습니다. 주 장관이 오늘 회의에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대통령을 보좌하기 위한 협의회를 구성하고, 국회를 해산하는 조치를 취하는 내용을 토의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병현 합참의장이 계엄확대는 군에서 논의할 수 있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정치적인 것이므로 논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주 장관이 '오늘 회의에서는 계엄확대만 논의하자'고 해 계엄확대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 장관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실시하고 국회 해산, 특별기구 설치 등을 토의하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나중에 주 장관에게 들은 바로는 회의 개최 전에 보안사 정보처장인 권정달 대령이 찾아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특별기구 설치 안건을 토의해 달라는 건의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날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1980년 5월17일 11시경에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주영복 장관의 주재로 개최해 전국비상계엄 확대실시에 대해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저는 육군참모총장으로서 회의에 참석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데 찬성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회의 참석자의 범위와 회의 목적은 어떤가요.
"후방은 관구사령관급 이상, 전방은 군단장급 이상이 참석했으며, 비상계엄을 확대 실시하기 위해 대통령에게 건의하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안종훈 장군만 비상계엄의 전국 확대 반대

-전국비상계엄 확대실시에 대한 찬반 토론을 했나요.
"주영복 장관이 일방적으로 비상계엄 전국확대 실시에 대해 각 참석자들에게 찬반에 대한 의견만 물었고, 일체 토론은 없었습니다. 개인 이름을 거명하면서 찬반의견을 물어 계엄 전국 확대실시에 대한 결론이 났고, 그에 따라 참석자 전원이 백지에 연서명을 했습니다."
-반대의견을 개진한 사람도 있었나요.
"육군 군수기지사령관 안종훈 중장과 그 외 1명이 반대 발언을 했습니다. 그때 정호용 장군이 안종훈 장군 발언에 강한 반박을 했습니다."
-당시 백지에 참석자의 연서명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영복 장관이 회의 참석자들에게 백지에 연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날 회의에서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외에도 정치풍토 쇄신, 시위 등 배후조종자 색출, 군이 일치단결해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로 각하가 시국 수습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보안을 지킬 것 등을 결의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1980년 5월17일 10시경 국방부에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린 시각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학봉 대공처장을 대동하고 청와대에 들어가 최 대통령과 독대해 계엄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정치인 체포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계엄확대에 관한 전군 지휘관의 건의는 대통령 재가사항이 아니므로 국무회의로 넘기도록 하고, 비상기구 설치나 국회 해산과 같은 상황은 5․16 하나로 족하다, 군의 명예를 위해서도 다시는 헌정 중단 상태가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밝힌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 16시경 전두환은 김 모 변호사를 대동하고 청와대로 들어가 최 대통령에게 같은 취지의 건의를 했으나 최 대통령은 계엄확대를 제외하고는 현행 헌법 테두리를 벗어난다는 이유로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저로서는 모르는 일입니다."

 

최 대통령, 법전 직접 찾아보고 지시

-회의 결과를 대통령이나 국무총리에게 보고했나요.
"그날 16시30분경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결과를 저와 주영복 장관이 신 총리를 방문해 보고했습니다. 그때 주 장관이 신 총리에게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했는데, 그 결과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해 강력하게 계엄을 시행해야 된다'는 결론이 났다고 보고했습니다. 신 총리가 같이 가서 대통령에게 보고할 것을 권해 저와 주 장관이 신 총리와 함께 18시경 청와대로 가서 최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신 총리에게 보고하러 갈 때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연서명이 첨부된 신군부의 시국대책안을 들고 갔는가요.
"신군부의 시국대책안을 들고 간 사실은 없습니다. 다만 최근에 검찰에 소환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주 장관으로부터 그 당시 메모지와 주요지휘관 연서명부를 들고 갔다가 신 총리에게 보여주지 않고 구두로 보고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 총리에게 보고할 때 비상계엄 전국확대안만 보고했나요. 신현확의 진술에 의하면 그 당시 주 장관과 계엄사령관이 찾아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보위라는 특별기구설치, 국회 해산 등 세 가지 방안을 보고하여 특별기구 설치와 국회 해산은 반대하고 비상계엄 전국확대는 대통령이 결정할 문제이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자고 했다는데요.
"그날 저와 주영복 장관이 신 총리를 찾아가 비상계엄 전국확대방안에 대해만 정식 건의했습니다. 다만 대화과정에서 주 장관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보위라는 특별기구 설치안, 국회 해산 등의 얘기도 나왔다는 말은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최 대통령에게 누가 보고했으며, 그 당시 상황은 어떠했나요.
"제가 신 총리와 주 장관과 같이 청와대로 갔습니다. 최광수 비서실장이 최 대통령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 장관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국 비상계엄을 확대 실시해 강력한 계엄 시행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와 건의를 올립니다'라고 건의했습니다. 최 대통령은 한참 생각하고, 또 법전을 펴서 관련 조문을 찾아본 후, 신 총리에게 즉시 국무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국방부장관이 청와대를 나와 저는 제 사무실로 갔고, 장관도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 그후 국무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국무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심야 국무회의 참석

-그날 주영복 장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안 외에도 일부에서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 해산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고 보고하자 최 대통령은 그날 19시경 총리에게 국무회의를 소집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방안을 회부하라고 지시하고 나머지는 언급하지 않은 것이 사실인가요.
"예."
-당시 국무회의 내용은 어떠했나요.
"신 총리가 전국비상계엄 확대에 대해 주영복 장관에게 제안을 설명을 하도록 한 후, 바로 '반대의견 있느냐'고 묻자 김옥길 문교부장관이 반대성 질의를 했을 뿐 만장일치로 가결을 선포해 금방 끝났습니다."
-진술인은 당시 국무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는데 어떻게 국무회의에 참석하게 되었나요.
"저는 국무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국무회의 참석대상이 아니지만 그 당시 어느 쪽인지 모르나 국무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배석했습니다."
-국무회의장 주변에 무장한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그 병력 배치는 계엄사령관인 진술인이 지시한 것이 아닌가요.
"저는 국무회의장에 병력 배치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상의해 경비병력을 배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노태우 수경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중앙청 정문에 탱크와 장갑차를 배치하고 정문, 동문, 서문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2층 계단과 복도에까지 집총한 수경사 병력이 약 1m 간격으로 양측에 도열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갔을 때에는 본 기억이 없으나, 그 후 주영복 장관으로부터 병력이 2층 계단과 국무회의장에 이르는 복도는 1m 간격으로 도열해 있었고, 김옥길 장관이 국무회의장에 들어가려고 하자 경비 병력이 장관인 줄 모르고 제지해 옥신각신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1980년 5월14일자로 군 병력 배치준비

-그날 회의장 복도에 배치된 병력이 출입자를 통제하고 전화선을 절단해 외부와 차단시켰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날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선포되기 이전에 계엄군 병력을 이동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는가요.
"당시 대학가 시위가 격화되어 있었는데 더 이상 시위가 격화되면 소요진압에 군병력을 투입해야 되겠다고 판단해 사전준비 차원에서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 대학에 대한 군병력 배치 준비명령은 이미 5월14일자로 전군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실제 소요사태 진압부대 투입지시는 5월17일 육작명(陸作命) 18-80호로 명령을 내렸으며, 그 내용은 5․18 02시까지 배치 완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계엄군 투입은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확대 재가를 받기 전에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날 저녁 국무회의 심의, 의결과 대통령 재가가 있기 전에 비상계엄 확대에 따른 계엄군 이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역 비상계엄이 발령되어 있는 상황에서 만약의 소요사태에 대비해 군부대를 배치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대통령 재가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상계엄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계엄사령관의 지휘체계는 어떻게 달라지는가요.
"그때까지는 지역계엄으로써 대통령→국무총리→국방부장관→계엄사령관 순으로 지휘를 받았으나, 전국계엄으로 확대됨에 따라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지휘체계가 변경되어 저는 계엄사령관으로서, 대통령으로부터 국방부장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지시를 받았습니다. 보고도 마찬가지로 국방부장관을 경유치 않고 대통령에게 보고하게 됐습니다. 계엄사령관의 주 임무는 전국 치안질서 확보이며, 이를 위해 군은 물론 행정, 사법사무까지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계엄포고 10호 대통령 재가 안 받아

-비상계엄 전국 확대 실시와 동시에 진술인 명의로 계엄포고령 10호를 발령한 사실이 있나요.
"1980년 5월18일 0시01분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 실시에 따라, 정치활동 중지, 정치목적의 옥내집회 금지, 언론보도 사전검열, 각 대학 휴교 등을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10호를 발령했습니다."
-계엄포고령 10호는 어떻게 발령하게 되었는가요.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이 문안을 작성해 계엄사령부로 보내와서 그 내용을 그대로 발표했습니다."
-진술인은 포고령 제10호를 발령하기 전에 대통령의 사전 재가를 받았나요.
"제가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에게 포고령 10호에 대해 결재 받은 사실은 없습니다. 아마 계엄사 실무자가 합수부에서 대통령 재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합수부에서 갖다 주는 포고령 문안을 그대로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포고령은 진술인의 명의로 발령됐는데 사전에 결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요.
"포고령이 제 명의로 발령된 것은 사실이나 포고령이 발령되기 전에 사전에 제가 결재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 후에도 제 명의로 계엄포고가 여러 번 나간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전에 제가 결재한 기억은 없습니다."
-그 내용 중에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포고령에서 말하는 정치활동 중지는 국회의 정상적인 활동도 포함되는 것인가요.
"그 내용에는 국회 활동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포고령 10호가 발령되기 이전인 1980년 5월17일 22시경을 전후해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인사 26명을 강제 연행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1980년 5월17일 합수부에서 소요 배후조종 혐의로 김대중, 김동길,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김진만, 이세호 등 주요인사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연행하겠다는 계획은 그날 합수부 수사 관계자로부터 보고를 받거나 결재한 사실이 없습니다. 나중에 연행 조사 중이라고 보고받은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합수부측에서 주요 인사들을 강제 연행하기 전에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하거나 결재를 받아야 할 사안이 아닌가요.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아야 할 사안이므로 사전에 계엄사령관의 결재를 받아야 할 사안이나, 전두환 장군이 제 마음대로 체포 계획을 수립해 연행한 다음 사후에 보고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정치활동 금지는 불법

-진술인은 1995년 1월25일 검찰에 출석해 진술할 때에는 1980년 5월17일 합수부 관계자가 찾아와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인사에 대해 조사하겠다는 결재가 올라와 이를 결재한 다음 장관에게 보고해 결재 받고,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진술했는데 어떤가요.
"주영복 장관이 1988년 말경 열린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그 때 보안사 요원이 5월17일 정치인 수사관련 결재서류에 국방부장관과 계엄사령관이 결재했다고 하므로 보안사 요원에게 그 당시 결재한 서류를 보자고 했습니다. 보안사 요원이 부속서류 없이 국방부장관과 계엄사령관 결재가 되어 있는 서류표지를 보여주자 이를 본 주영복 장관이 저에게 그 서류에 계엄사령관 결재가 되어 있더라고 얘기해 준 사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서류에 결재한 것으로 믿고 진술했습니다. 그 후 주 장관을 만나 다시 확인해 보니 그날은 결재할 시간도 없었고, 부속서류도 없는 표지 1장을 가지고 제가 그 서류에 결재한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당시 정치인 수사관련 서류에 결재한 기억이 없습니다."
-이학봉의 진술에 의하면 1980년 5월15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영복 장관과 진술인에게 '주요 정치인 연행보고'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그런 보고를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1980년 5월16일부터 5월20일 사이에 김대중, 문익환 등 정치인 및 재야 인사 37명을 합수부에서 연행해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24명을 계엄법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5월20일 08시경부터 김영삼 신민당 총재 자택에 M16으로 무장한 중대병력을 보내 연금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그런 사항은 전부 전두환 장군이 처리한 사항이며, 사전에 결재를 받고 시행한 사항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사항을 국방부장관에게 보고한 사실도 없습니다. 그 당시 이런 일들이 신문에 보도됐기 때문에 신문을 보고 안 것으로 기억됩니다."
-1980년 5월18일 12시경 김종필 공화당 총재 등 수십 명을 부정축재 혐의자로 연행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신문을 보고 알았습니다."
-진술인은 1980년 5월17일 지역계엄을 전국계엄으로 확대한 배경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요.
"제 생각에는 당시 학생시위나 노사분규가 과격화되어 전국계엄으로 확대했다고 발표하면 계엄시행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달라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렇더라도 1980년 5월17일 전국계엄으로 확대한 것은 전두환 장군의 의사에 의한 것 아닌가요.
"그것은 사실입니다만 본인도 계엄확대를 원했습니다."
-1980년 5월14일 신민당 의원 66명이 비상계엄 해제 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고 1980년 5월17일 오전 신민당 원내총무 황낙주 의원 등 1백86명의 요구로 제104회 임시국회를 같은 해 5월20일 소집하기로 공고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예, 당시 국회의사당에 배치되어 있는 부대로부터 보고받고 임시국회 소집 내용을 알고 있었습니다."
-국회의사당에는 어떤 부대를 배치했나요.
"국가주요시설 경비계획에 의해 수도군단 예하 33사단 병력이 진주해 있었습니다."

 

군 병력 국회 투입 사전에 몰랐다

-1980년 5월18일 육군 33사단(사단장 전주식 소장) 101연대 1대대가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동원해 국회를 봉쇄, 점거하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나요.
"당시 제가 계엄사령관으로 재직한 것은 사실이나 5월18일 3군사령관이나 33사단장 전주식 소장에게 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 점거하라고 지시한 사실은 없습니다. 지휘계통을 통해 그러한 사항을 보고받거나 결재한 사실도 없습니다."
-진술인이 33사단 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하려면 어떤 지휘계통을 거쳐야 하는가요.
"3군사령관 유학성, 수도군단장 박노영 중장, 33사단장 전주식 소장을 통해 지시해야 합니다."
-검찰 수사과정에 입수한 육본 상황일지에 의하면 1980년 5월18일 국회 봉쇄상황이 기재되어 있는 점에 비추어 진술인을 포함한 군 고위층은 그 당시 사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어떤가요.
"육군 33사단 101연대 1대대가 국회를 봉쇄, 점거한 상황이 육본 상황일지에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지난번 검찰 조사를 받을 때 담당 검사님이 보여주는 육본 상황일지를 보고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1980년 5월20일 황낙주 총무, 손주항 의원 등이 국회사당으로 들어가려 하자 군 병력이 물리력으로 저지해 국회가 열리지 못했으며, 그 과정에서 황락주 의원이 귀에 상처를 입는 폭행을 당한 사실도 있으며, 결국 제104회 임시국회가 개회조차 못한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이 행정, 사법사무는 관장하도록 되어 있으나 입법권은 국회 권한에 속합니다. 따라서 포고령으로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시키고 등원하는 국회의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해 임시국회 소집을 무산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케 한 명백한 헌정중단 조치라고 보여지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저는 지휘계통을 통해 국회를 봉쇄하거나 국회의원들의 등원을 저지하라고 지시한 사실이 없습니다. 신군부 측의 누군가에 의해 그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데,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의 광주 상황에 대해 파악된 내용은 어떠했으며, 광주사태가 발생한 것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처음 알았는지요.
"1980년 5월18일 오후 광주 시가지에서 계엄군으로 출동한 7공수여단 병력과 대학생들이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황계통을 통해 보고받았습니다."
-출동명령은 누구 지시인가요.
"계엄사령관으로서 제가 지시를 한 것입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한 목적과 그 작전 지휘계통은 어떤가요.
"주요 시설 경비목적으로 공수부대를 투입했고, 이 부대는 31사단에 배속시켜 작전지시는 31사단장인 정웅 소장 지휘를 받도록 조치했습니다."
-광주지역에는 31사단 병력도 있었는데 굳이 전북 금마에 있는 7공수여단 병력을 광주에 투입한 이유는 무엇인지, 광주의 상황이 타 지역보다 심각한 소요가 예상되었기 때문은 아닌지요.
"광주지역이 타 지역보다 심한 소요가 예상되는 상황은 아니었으며, 광주 이외에 대전에도 7공수 병력이 투입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광주에 병력 증파는 내 결정"

-그 뒤 광주지역에 병력을 증파한 사실이 있나요.
"예, 1980년 5월18일 16시경 시위군중이 점차 증가되어 1천여 명에 이르고, 파출소 7개, 차량 1대가 불탔다는 상황보고를 받고 계엄군을 추가 투입해야겠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김재명 육본 작전참모부장이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협의해 11공수 병력을 증파하기로 결정했습니다. 5월19일 11공수 병력 1천1백명을 광주에 투입했고, 5월20일 3공수 병력 1천4백여명, 5월21일부터 5월22일 사이에 20사단 약 4천4백여명을 증파했습니다."
-이와 같은 병력 증파 결정은 진술인 단독으로 결정한 것인가요.
"작전참모부장이 상황을 파악해 병력 증파에 대한 필요성을 건의하면 제가 국방부장관과 각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등과 상의했습니다. 여기서 병력 증파가 결정되면 작전참모부장에게 지시했고, 작전참모부장이 소속 부대장과 상의해 증파부대를 결정한 다음 보고하면 결재를 하여 명령이 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등과 상의해 병력 증파를 결정한 것이 아닌가요.
"광주지역 병력 증파 문제에 관해 전두환이나 노태우 수경사령관과 상의한 기억이 없습니다."
-진술인은 광주에 처음 투입되었던 7공수 2개 대대 이외에 11공수, 3공수, 20사단을 축차 투입했는데, 현지 지휘관인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으로부터 증파 요청을 받은 사실이 없음에도 병력을 투입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광주에서 올라오는 상황보고를 보고 병력증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국방부장관, 각 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등과 협의해 추가로 병력을 증파했습니다."
-진술인은 1980년 5월18일 14시경"다른 지역에는 시위가 없는데 광주에만 시위가 있느냐. 빨리 진압하라"는 명령의 진종채 2군사령관과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내려 보낸 사실이 있는지요.
"그런 명령을 내린 사실이 없습니다."
-진술인은 1980년 5월20일 24시경 윤흥정 전교사령관으로부터 공수부대의 시 외곽 철수를 건의받고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원래는 윤흥정 사령관이 2군사령관에게 건의하여 지휘를 받아야 하는데, 2군사령관을 거치지 않고 저에게 보고하여 망설였으나 윤흥정 사령관이 총장 관사로 전화를 걸어 시간을 끌면 피차간에 유혈충돌이 일어날 것 같다고 하여 공수부대의 시 외곽 철수를 제가 승인했습니다."
-1980년 5월21일 09시경 육본 계엄사령관실에서 진술인의 주재로 열린 계엄사 대책회의에서 계엄군을 광주 시내로부터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하고, 1개 연대 추가투입, 폭도 소탕작전은 5월23일 이후 의명 실시하며, 전투력 공백 보전책을 2개 훈련단 훈련소집 결정 및 자위권 발동 결정에 따라 10시49분 계엄사령관인 진술인이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사실이 있는가요.
"예."

 

자위권 발동 천명

-이 계엄사 대책회의에 누구 누구가 참석했는가요.
"참모차장 황영시,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소장 등과 대책회의를 한 다음 그날 오후 국방부장관실에 가서 주영복 장관, 각 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진종채 2군사령관, 정도영 보안사 보안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자위권 발동 등에 대해 논의한 다음 육본으로 돌아와 제가 자위권 보유를 천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자위권 보유 천명은 이와 같은 과정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고 최웅 11여단장이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보고해 정호용이 전두환 장군과 의논해 계엄사 대책회의에서 결정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 5월21일 13시경 11공수여단 병력이 전남도청 앞에서 대치하고 있던 시위대에 발포했고, 이로 인해 시민 다수가 사망했는데 그에 대해 언제, 누구로부터 처음 보고받았는지요.
"그 무렵 상황계통을 통해 보고받은 것은 사실인데 발포로 인한 사망자수가 몇 명인지, 언제 누구로부터 보고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도청 앞에서의 발포가 그날 오전 계엄사 대책회의에서 결정된 자위권 발동조치에 따라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요.
"그날 전남도청 앞 발포는 13시경에 이루어졌고 제가 자위권을 천명한 것은 그날 저녁 19시30분경이므로 자위권 발동조치에 따라 발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현지에 수 차례 내려갔는데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현지에서 어떤 임무를 수행했고, 그와는 언제 어떤 경위로 광주상황을 의논하고 대책을 협의했는지요.
"제가 정호용 장군과 직접 광주상황을 의논하고 대책을 협의한 사실은 없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다만 육본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소장이 정호용 장군과 광주상황을 의논하고 대책을 협의한 사실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동안 정호용 장군이 2회에 걸쳐 광주에 내려가 특전사 예하 공수여단의 상황을 파악하고 군수․인사지원에 관한 상황을 확인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웅 당시 31사단장에 의하면 공수부대는 형식적으로 31사단에 작전 통제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휘를 받았다고 하는데 사실인지요.
"잘 모르겠습니다."
-1980년 5월21일 15시30분 진술인이 광주에 투입된 부대의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라는 지시를 했는데, 이는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이 형식적으로는 31사단이나 전교사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작전을 하는 등 지휘체계라 이원화되어 있었다는 증거라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육본 작전참모부장 김재명 소장이 그런 지시를 내려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광주에 소속이 다른 여러 부대가 출동해 있어 노파심에서 그와 같은 지시를 한 것으로 짐작합니다."

 

전교사령관 교체 이유

-1980년 5월21일 광주지역 계엄분소장인 전교사령관 윤흥정 중장을 소준열 소장으로 교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1980년 5월20일 신현확 내각이 물러나고, 박충훈 국무총리가 임명되면서 내각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중정부장 서리 전두환으로부터 중장 급의 입각 추천 의뢰를 받고 윤흥정 장군을 신임 체신부장관으로 입각시키기 위해 윤흥정 장군 대신 호남사람인 소준열 소장을 전교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당시 윤흥정 장군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시국 수습을 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상부지시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교체한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직접 내려간 이유는 무엇인가요.
"광주지역에 출동시킨 7공수 2개 대대, 11공수, 3공수를 배속해제하고 작전통제권만 전교사령관에게 부여했기 때문에 군수․인사지원은 모체부대인 특전사에서 시행하게 되므로 감독차 내려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특전사 부대에 대해 전교사령관이 작전통제 자체를 하지 못하거나, 형식적인 작전통제권만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요.
"저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으로서 지휘계통은 전교사에 작전통제권을 부여했으나 현지에서는 어떤 지휘가 이루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광주에 출동한 부대에 발포 명령을 한 사실이 있는가요.
"저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1980년 5월21일 19시30분경 자위권 보유에 대한 천명을 담화문 형식으로 발표를 했는데, 그 내용은 군이 자위권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군에 대한 위해 행위가 있을 때 군은 자위권을 발동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왜 자위권 발동에 대해 담화문을 발표하게 되었는가요.
"시위를 진압하는 초병들이 데모대에 의해 무기나 탄약을 탈취당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으나 초병들이 자위권을 발동하지 않으므로 이를 시행토록 담화문으로 발표하게 됐습니다."
-당시 하달한 자위권 발동 요건과 절차는 어떤가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초병의 임무수행이 불가능할 때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고, 절차는 처음에 구두로 3회 이상 경고하고, 그래도 불응할 때는 공포로 위협사격을 하고, 그래도 불응할 때는 사람을 향해 사격하되 생명의 위험이 적은 하퇴부를 향해 발포를 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자위권 발동 담화는 진술인이 기획해 발표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건의나 압력에 의해서 발표한 것이 아닌가요.
"국방부장관과 각군 참모총장이 모인 자리에서 자위권 발동에 대한 문안이 검토가 되어 그곳에서 작성됐습니다."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 및 광주 시내 재진입작전(충정작전)을 결정한 경위는 어떠한지요.
"1980년 5월25일 11시경 국방부장관실에서 주영복 장관, 각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5월27일 00시01분 이후 실시할 것을 결정해 바로 전교사 사령관에게 지시했습니다."
-광주사태와 관련해 현지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은 형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을 뿐이고 실질적으로는 현지에 상주한 최례변 보안사 기획처장의 보고를 받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수시로 광주에 내려간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이른바 신군부 실력자들이 별도로 대책을 협의해 발포명령을 하는 등 공수특전부대를 직접 지휘했으므로 광주사태의 최종 책임은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에게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 5월24일 서울에 갔다온 정호용이 전두환의 메모를 소준열에게 전달한 바 이 메모에는 '소 선배님 공수부대의 사기를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기재되어 있고 전두환의 사인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그런 사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광주진압작전은 모두 내 책임

-12․12 사건으로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탈취하려는 사전 계획 하에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야기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주장입니다."
-광주사태 진압 과정에서 계엄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무고한 인명이 많이 살상되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광주사태 발생 후 진압하기까지 全 과정에 걸쳐 제가 계엄사령관으로서 병력투입을 결정하고, 작전지시를 한 것은 사실이므로 진압과정에서 잘못된 점은 전적으로 제가 지휘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등 신군부측에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이 광주사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사실상 군권을 장악해 군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직접 제가 진압작전을 수행하는 것에 관여해 간섭한 사실은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보안사 지휘계통을 통하거나 육본 참모들을 통해 광주사태 진압 과정에 관여했는지 여부는 저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진압 작전을 최종적으로 지휘한 저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영복 장관은 광주사태에 대해 진술인으로부터 보고받은 바 없으며, 진압과정에도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사실인가요.
"당시에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 발령되어 제가 국방부장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통령으로부터 지휘, 감독을 받아 계엄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국방부장관이 책임질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술인은 광주사태가 진행되는 도중인 1980년 5월23일경 최 대통령으로부터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國保委)를 설치하겠다는 방침을 통보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예."
-그 경위를 자세히 진술하시오.
"1980년 5월23일경 최 대통령이 불러서 청와대로 갔더니 '계엄사령관이 정상적인 북괴 對南침투에 대한 업무도 벅찬데 행정, 사법에 대한 것까지 일일이 어떻게 관여하겠느냐. 그러니까 국보위라는 특별기구를 설치해 행정과 사법에 대한 사안을 맡겨 보필을 받도록 하겠다'는 말을 해서 비로소 국보위 설치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개최 전에 주영복 장관이 비상기구 설치에 관한 논의도 하자는 말을 한 적이 있어 예상은 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진술인을 불러 국보위 설치방침을 통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계엄사령관의 관장업무를 빼앗아 가는 것이므로 사전에 알려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보위는 언제 어떤 근거로 설치된 것인가요.
"1980년 5월27일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에서 총무처 의안으로 제출한 국보위 설치령을 의결해, 5월31일자로 발족하게 되었습니다."

 

책무 다하지 못해 한스러워

-국보위를 설치한 것은 보안사 계획에 의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주도적으로 설치한 것이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계엄사와 국보위와의 관계는 어떠했는가요.
"국보위가 설치된 이후에 저는 국보위에서 결정한 정책을 통보받아 시행만 했습니다. 즉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군에서 맡아서 훈련을 시켜야 되겠다는 통보를 받고 그대로 시행하는 등 국보위 결정을 집행했을 뿐입니다."
-당시 대통령의 자문, 보좌기구로 설치된 국보위에서 사실상 계엄사령관의 권한을 행사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저는 계엄사령관으로서 전국계엄에 대한 시행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국보위에서 시행한 공직자 숙청, 삼청교육, 사회악 일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조치들이 비상사태하에서 국가안보 및 사회질서 회복이라고 하는 협의의 계엄업무와는 직접 관계가 없는 행정업무입니다. 국보위에서 이런 조치를 실시한 데 대해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는가요.
"조금 지나쳤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국보위는 최 대통령에 대한 자문, 보좌기구라기보다는 대통령 긴급조치에 의한 비상기구와 같이 행정 각부를 조정․통제하는 권력기구로 운영됨으로써 국보위를 주도한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국정의 실질적 주도자임을 내외에 과시하는 데 이용된 것은 사실이지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6월19일 11시40분부터 14시까지 보안사령관 주최 오찬이 있었는데 당시 참석자는 누구였으며, 그 자리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나요.
"국방부장관과 같이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8월16일 최 대통령이 하야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8월15일 낮에 최 대통령이 불러 청와대로 찾아가자 내일 사임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시면서 광주사태 등 여러 가지 현안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나기로 했다고 말해 준 다음 1980년 8월16일 최 대통령이 사임했습니다."
-1980년 8월21일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키로 결의한 것이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참고로 더 할 말이 있는가요.
"불행한 사건을 당해 계엄사령관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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