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8월 21일 저녁 19시경 육군회관에서 전군 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약 2백50여명의 장군들이 부부 동반해 모인 자리에서 아직 대통령이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보안사 주선으로 윤셩민 1군사령관, 윤자중 공군총장이 전두환 장군을 앞에 세워놓고 "위대한 영도자 전두환 대장을 위해 건배를 하자"고 소리 지르자, 모두들 "위하여"라고 함성을 질렀다.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79년 12․12 직후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던 주영복 씨의 검찰 진술조서 일부 내용이다. 신군부 집권의 협조자였던 주영복 씨는 1979년~1980년 당시 전두환 장군의 압력과 자신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진술함으로써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과 함께 신군부 측을 유죄로 몰아넣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주영복 씨는 1980년 5월 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전두환 장군 측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었으며, 이날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문제까지 전 장군이 요청하여 시행되었음을 실토했다. 또 군 인사도 국방부장관이나 계엄사령관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은 상황에서 보안사가 좌우하는 등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고 했다. 주영복 씨의 검찰 진술은 격동기의 신군부가 어떤 과정을 거쳐 권력을 장악해 나갔는지를 적나라하게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다. 관련내용을 상하 두 차례로 나누어 소개한다.
1980년 광주사태 당시 공수부대의 광주 시위 진압 장면.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은 지역감정, 유언비어 난무, 과잉진압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쳐 광주 사태가 악화되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연합뉴스 제공)
1980년 광주사태 당시 공수부대의 광주 시위 진압 장면. 주영복 당시 국방부장관은 지역감정, 유언비어 난무, 과잉진압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쳐 광주 사태가 악화되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연합뉴스 제공)

 

참석자들에게서 백지 서명 받아

 

-그러면 진술인이 상정한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는 어떤 경위로 의결됐나요.
"회의 시작 직후 제가 인사말을 한 다음, 최성택 합참 정보국장이 북한 동향과 학생소요 등 국내외 정세를 브리핑했습니다. 다음에 참석자들에게 계엄확대에 대한 의견을 발언해 달라고 했는데, 발언 희망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알고 지내던 김인기 공사 교장을 지명해 먼저 발언하도록 한 다음, 돌아가며 의견개진을 하라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장성들이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해, 제가 그들 의견을 수렴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의결경위를 구체적으로 진술하시오.
"당시 회의에는 전군 지휘관 등 43명이 참석했는데 육군 군수사령관인 안종훈 중장만 계엄확대는 국민의 여론을 듣고 결정해야 한다면서 반대의사를 표명했습니다. 나머지 42명은 전부 찬성해 백지에 찬성한다는 서명 날인을 했습니다."
-권정달 정보처장은 회의 결과 나올 서명문까지 미리 준비해 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당시에 합참 정보국장 최성택이 서명용지를 돌렸던 것이지 권정달이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최성택 합참 정보국장이 서명용지를 돌린 것은 누구 지시에 의한 것인가요.
"제 지시였습니다."
-진술인은 왜 그런 지시를 했나요.
"참석자를 정확히 확인하고, 그들 의견을 수렴했다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반대의견을 제시한 군수사령관 안종훈은 그 후에 어떤 인사조치를 받았나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몇 개월 후 전역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군수사령관 안종훈이 불과 몇 개월 후에 인사상 불이익을 받은 것은 전두환 등 군부 실세들에 의한 것이 아닌가요.
"저도 그렇다고 짐작은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열자고 진술인에게 제의한 국방부차관 조문환은 그 뒤 어떤 보직을 받았나요.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단행된 개각에서 장관급인 국가비상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승진해 갔습니다."
-회의 전에 各군별로 모임을 갖고 분위기 조율을 했다는데요.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각군별로 09시에 따로 모임을 가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보위 비상기구 설치 문제와 국회 해산 문제는 다루지 않았나요.
"예,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유병현 합참의장이 반대하고, 저도 그에 동감했기 때문에 다루지 않았습니다."
-회의 당시 정호용 장군이 안종훈 장군의 반대의사 발언을 반박하면서 비상기구 설치와 국회 해산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나요.
"그 당시 정호용 장군이 군이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나 국회 해산 문제를 거론한 것은 아닙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회의록은 작성 안해

 

-회의장 주변에는 예전과 달리 보안사 요원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고, 회의장 안에는 헌병들이 들어와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밖에 보안사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그들이 회의장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회의 결과를 보안사령관 등에게 알려 주었나요.
"예, 회의 후 국방부 내에 있는 보안부대를 통해 알려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의록은 작성됐나요.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작성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회의를 주재했던 것이라 의도적으로 회의록을 작성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요.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진술인은 회의 후 어떻게 했는지요.
"14시30분경 회의를 마치고 육군회관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한 다음 장관실로 돌아와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을 메모지에 기재하고 국회 해산 및 협의회 형식의 비상기구 설치 문제를 본인만 알아볼 수 있도록 국, 협이라고 메모지에 부기해 주머니에 넣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불러 함께 국무총리에게 보고하러 갔습니다."
-전두환 장군은 함께 가지 않았나요.
"예."
-신현확 총리를 찾아가서 무엇이라고 보고 했나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고 보고하면서 상의 주머니에 넣어 간 메모지와 백지서명을 꺼내려고 하니까, 서류는 필요 없으니 구두로 말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군 지휘관들이 회의한 결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의견수렴이 됐습니다'라고 보고한 다음, 목소리를 낮추어 '일부에서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문제와 국회 해산 문제도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취지로 질문 겸 보고를 덧붙였습니다."
-그 보고를 받고 신 총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비상기구 설치 문제와 국회 해산 문제는 필요 없다고 했고,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는 대통령에게 함께 가서 보고하자고 했습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비상계엄 확대결의만 있었는데 비상기구 설치 문제, 국회 해산 문제도 신 총리에게 보고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 문제가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된 것은 아니지만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후 심적으로 부담을 느끼게 되어 신 총리에게 은근히 보고를 해 본 것입니다."

 

최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도 보고

 

-보안사측의 요청에 따라 그런 부분도 함께 보고한 것은 아닌가요.
"전두환의 부탁을 받은 이후부터 심적 부담을 느끼게 됐고, 두 가지 안건은 회의에 상정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머지 두 가지 안건에 대해서 저의 부담을 덜기 위해 국무총리에게 간접적인 방법으로라도 보고했던 것입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 신 총리와 함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 확대건을 재가 받으러 갔는가요.
"예, 곧바로 3명이 함께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으러 갔습니다.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 먼저 신 총리가 '국방부장관과 계엄사령관을 데리고 보고 건이 있어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본인이 '군 지휘관들이 모여 시국대책을 논의한 결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의견수렴이 됐습니다'라고 보고하고, 이어 '비상기구 설치 문제와 국회 해산 문제가 거론되고 있는데, 비상기구 설치문제는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며, 국회해산 문제는 30일부터 60일 이내에 재선거를 해야 하므로 실익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대통령께서 저의 보고에 동감했던지 총리에게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계엄 전국확대 방안만 회부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진술인은 최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 문제와 국보위 설치 문제까지 왜 보고를 했나요.
"전두환 장군이 같은 날 오전에 세 가지 문제를 보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그와 같이 했던 것입니다."
-신 총리가 진술인과 이희성 사령관의 건의를 거부하자, 진술인이 군 지휘관들의 연서명을 꺼내놓고 '총리가 동의하든 안하든 우리는 한다. 전군의 뜻이다'라고 위협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나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국무총리를 위협한 사실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국무회의가 개최되고 비상계엄의 확대 실시가 의결됐는가요.
"예, 1980년 5월17일 21시40분에 신 총리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고 제가 그 자리에서 제안해 5월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기로 만장일치로 의결을 보았습니다."
-당시 중앙청 국무회의장 주변에 집총을 한 군인이 불과 1m 간격으로 건물 외곽에서부터 회의장 출입문 바로 앞까지 도열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예."
-군인들이 국무위원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회의장으로 들여 보냈다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은 자동차를 이용해 회의장 입구까지 갔으므로 신분확인을 받은 일이 없는데 다른 국무위원들은 어떻게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무위원들 전부 겁먹은 표정

 

-중앙청에서 야간 근무 중이던 공무원들이 무장군인들에 의해 별관으로 쫓겨났고, 외부와 전화선도 단절됐다는데 사실인가요.
"그 사실은 광주청문회를 통해 알았는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런 사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당시에 전화선이 단절됐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당시 분위기로 보아 반대의견을 내기 어려웠던 것이 아닌가요.
"예, 당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권을 완전 장악한 상황에서 강권정국을 조성하고 있어 사회 전체적으로 공포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집총한 군인들이 국무위원장 출입문 계단까지 도열하고 있어, 국무위원들의 표정이 공포감을 느낀 듯 굳어 있었기 때문에 의견을 내기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당시 국무위원들의 표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겠나요.
"제가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한 후 국무회의가 갑자기, 그것도 그렇게 늦은 시간에 열린 경우가 없었습니다. 당시 분위기는 긴장감이 돌았고, 국무위원들의 표정들은 전부 약간 겁먹은 상태였습니다."
-국무회의는 어떻게 진행됐나요.
"국무총리가 사회를 보고 제가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대한 제안설명을 한 다음 토의에 들어갔습니다. 김옥길 문교부장관이 이건 뭐예요라고 말했을 뿐 다른 국무위원들은 말 한마디 없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신현확 총리가 반대의견이 있느냐고 묻자 모두 겁먹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을 뿐, 아무도 반대의견을 내지 않아 만장일치로 가결됐습니다."
-1980년 5월17일 19시경에는 비상계엄 확대실시에 대한 국무회의의 의결도 되지 않았는데 대규모 진압부대 투입을 미리 지시한 것은 계엄법에 저촉되는 것이 아닌가요.
"전국계엄이든 지역계엄이든, 비상계엄에 있어서는 병력투입이나 이동에 대해서는 계엄사령관 재량으로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1980년 5월18일 00시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 중지와 휴교령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10호가 계엄사령관 명의로 발령됐습니다. 진술인은 포고령 발령 사실을 사전에 알았나요.
"당시에는 몰랐습니다만 계엄사에서 최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기 위해 계엄포고령 제10호 관련문건을 보내면서 본인에게도 참조용으로 보냈다는 것을 당시 국방부에 근무하던 직원을 통해 나중에 확인했습니다."

 

전두환 마음대로 정치활동 금지

 

-그러면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사전에 대통령 재가를 받아 포고령 제10호를 발령한 것인가요.
"포고령 제10호는 비상계엄 확대에 따른 조치로서 계엄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공포하는 사안입니다. 국방부장관인 저의 소관이 아니므로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피의자 전두환의 진술에 의하면 포고령 제10호의 핵심내용인 정치활동 중지 조치에 대해 최 대통령에게 사전보고를 했는지 기억이 없다고 하는데요.
"전두환은 자기 마음대로 이런 조치를 취하면서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계엄사령관도 저에게 보고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포고령 제10호에 의해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킬 수 있는가요.
"제가 알기로는 헌법에서는 몰라도 포고령에 의해 의사당 내에서의 정치활동까지 규제할 수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계엄포고령 제10호가 발령되기 전인 1980년 5월17일 22시를 전후해 김종필 등 수십명이 연행됐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신문보도에 의하면 부정축재를 하고 소요를 배후조종한 혐의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조치는 전두환 등의 군부 실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한 정치인 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예, 정권장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중요인사 연행 사항은 국방부장관의 사전 결재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혀 보고를 받지 못했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도 보고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내란음모 사건이 신군부측에 의해 조작됐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보안사에서 수사했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보안사에서 김대중을 연행 조사할 때 진술인에게 보고했나요.

"사전에 보고받은 바 없습니다"

 

광주사태 때 지휘선상에서 제외돼 있었다

 

-진술인이 광주사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인가요.
"1980년 5월18일 10시경에 계엄사에서 올라온 문건을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국방부장관에 대한 공식적인 보고계통이 없었나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이후이므로 공식 보고계통은 없었고, 다만 계엄사에서 광주사태와 관련된 상황을 여러 기관에 전파해주었기 때문에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단편적으로밖에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광주사태 진압과 관련해 진술인이 지시한 내용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지휘계통에서 배제됐기 때문에 지시는 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이틀에 한 번 정도 합참의장, 계엄사령관, 해군총장, 공군총장, 연합사 부사령관 등이 국방부장관 응접실에 모여,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광주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자문을 해주었습니다. 본인은 특히 인명피해가 없도록 조언한 일은 있습니다."
-광주사태 기간 동안 광주 현지를 방문한 일이 있는가요.
"1980년 5월25일과 5월27일 두 차례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광주사태 진압과 관련해 현지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은 형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고 실질적인 지휘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전두환 보안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등과 협의해 강경진압을 주도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본인은 지휘선상에서 제외되어 지휘체계가 이원화되어 있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시에 강경진압을 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으며,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지휘체계를 일원화하라고 지시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습니다."
-진술인은 1980년 5월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시위대들이 계엄군을 향해 장갑차와 버스를 타고 돌진해오자 계엄군들이 발포했다는 설명을 들었나요.
"그런 소리를 들었지만 계엄사령관 소관이므로 저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발포명령권이 없었기 때문에 발포명령을 한 사실이 없었다는 점을 명백히 하고 싶습니다. 누가 발포명령을 했는지에 대해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광주사태의 발생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1980년 5월18일 아침 전남대 앞에서 학생 2백여 명이 학교 출입을 요구하다 계엄군에 의해 거절당하자 책가방 속에 준비해 온 돌을 던져 투석전을 전개한 것이 시발이었습니다. 그것이 지역감정, 유언비어 난무, 과잉진압 등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쳐 악화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망자 5백 명 이상이면 권총으로 자결하겠다!

 

-신군부 세력들이 최규하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국민들 속에 정국안정을 책임질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정부에 대한 요구를 불러 일으켜 이를 기화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고의로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요.
"진압 유공 군인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등 예우를 받은 것은 사실이나, 군 주도세력들이 정권을 잡기 위한 계획 아래 의도적으로 광주사태를 유발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의자는 당시의 국방 책임자로서 시위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민간인들이 살상된 광주사태에 대해 어떤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유야 어찌됐든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저로서는 광주사태에 대해 도의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위 진압과정에서 희생이 극소화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했습니다. 저는 1980년 5월21일경 국방부장관실에서 국방부차관보 박찬긍 중장에게 '사망자가 5백명 이상이면 권총으로 자결하겠다'라고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도 희생자를 최소로 줄이라고 여러 차례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때 검사는 위 박찬긍의 자택으로 전화해 통화한 결과, 진술인의 위와 같은 진술이 사실임을 확인하다.)
-진술인은 1980년 5월27일 국보위 설치를 의결한 국무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나요.
"예, 광주에 갔다 돌아와 그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누가 국보위 설치령을 제안했나요.
"김용휴 총무처장관이 제안했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설치한다고 했나요.
"내각과 계엄사 간의 협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대통령 자문 보좌기구로 설치한다고 했습니다."
-진술인은 전의 검찰진술에서 국보위 의장이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그 회의를 직접 주재한 횟수는 2회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당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전두환이었는데 상임위에서 모든 업무를 전적으로 처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법령상의 권한을 넘어 행정부 소관 사항을 입안하고, 집행한 것은 위법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어떤가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당시 국보위에서는 관계부처를 무시하고 직접 관계부처 소관업무를 관장하고, 대통령 결재를 얻은 후 시행케 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잘 모르겠습니다."
-1980년 10월27일 5공 헌법 공포 이후 국보위는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국보위원은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으로 변경됐는데 진술인도 입법회의 의원으로서 권한을 행사한 사실이 있나요.
"남덕우 총리 주재 회의에 한 번 참석한 사실이 있을 뿐 그 외에는 관여한 사실이 없습니다."
-고발인측은 당초 대통령의 계엄업무를 보조하기 위한 자문기구로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된 국보위를 국가보위입법회의로 이름을 고친 다음 입법권한을 행사하도록 한 것은 결국 헌법상의 입법기관인 기존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국가보위입법회의의 설치, 운영은 위헌이고, 나아가 내란 행위라는데 어떤가요.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의 권능을 대신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법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피의자 전두환의 진술에 의하면 자신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에 임명된 것은 국방부장관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한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가요.
"저는 전혀 모릅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시 국보위를 설치한 것은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권정달이가 총무처와 청와대 비서실 등과 협의해 입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야 전날 최 대통령과 만나

 

-진술인은 최 대통령의 하야 소식을 하루 전에 알았다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예."
-어떻게 알았나요.
"1980년 8월15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행사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데 최 대통령이 급히 찾는다고 전갈이 와 오후 2시경 청와대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최 대통령이 하야하기로 했다고 말해 처음 알게 됐습니다."
-최 대통령이 진술인만 불렀나요.
"본인뿐만 아니라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 당시 중요한 지위에 있던 여러 사람들을 따로 부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최 대통령이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본인과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그동안 국방장관의 수고가 많았다. 책임정치 구현과 평화적 정부 이양의 선례를 남기기 위해 사퇴를 결심했다'는 취지의 말을 해, 저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자꾸 나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을 한참 동안 흘리다가 '제대로 보필을 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습니다."
-그 때에 최 대통령의 눈 부위 등에 어떤 폭행을 당한 자국이 있지 않던가요.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모르지만 한쪽 눈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는가요.
"그 전에는 한쪽 눈이 부자연스러웠던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진술인은 최 대통령이 스스로의 판단과 결심으로 하야했다고 보는가요.
"참 진술하기 곤란한 질문입니다."
-진술인은 1979년 12월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 대통령을 10․26 사건과 관련해 조사한 사실이 있는데 아는가요.
"몰랐습니다."
-최 대통령이 하야할 무렵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권과 실권을 모두 장악해 행사하는 바람에 최 대통령은 사실상 힘이 없었지요.
"그렇습니다. 전두환 장군은 12․12 이후 군권을 탈취하고 1980년 5월경 국보위를 설치해 행정상의 실권까지 거의 장악해 신군부 세력을 주축으로 모든 권한을 좌지우지했습니다. 대통령은 물론 본인이나 계엄사령관인 이희성 장군까지 전혀 실권이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위대한 영도자 전두환 대장을 위해 건배를…

 

-1980년 8월21일 진술인의 주도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해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는 결의를 한 사실이 있는가요.
"제가 주도한 것은 아니고 당시 보안사측에서 국방부장관 보좌관을 통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해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결의를 해 달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제 입장으로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라서 지휘관회의를 개최한 것입니다. 그 날 저녁인지 그 다음 날 저녁인지는 몰라도 저녁 19시경 육군회관에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약 2백50여명의 장군들이 부부 동반해 5백여 명이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아직 대통령이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보안사 주선으로 윤성민 1군사령관, 윤자중 공군총장이 전두환 장군을 앞에 세워놓고 '위대한 영도자 전두환 대장을 위해 건배를 하자'고 소리를 지르자, 모두들 '위하여'라고 함성을 질러 축배까지 한 사실이 있습니다."
-진술인은 그 회의 훈시를 통해 "구국일념으로 탁월한 영도력을 발휘해 국가의 위난을 수습하고 새 시대 새 역사의 지도자로 국내외에 뚜렷이 부각된 전두환 장군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할 것을 여기 모인 육해공군 지휘관과 더불어 제의하고 전군적 합의로 결의를 다짐한다. 오직 이 길만이 우리 국가 목표인 항구적 안정과 보람찬 민주 복지 국가 건설을 앞당길 수 있음을 확신한다."고 했지요.
"예."
-그 훈시는 전두환이 시켜서 한 것인가요.
"예, 보안사측에서 저의 보좌관 조 모 육군 준장을 통해 훈시문을 가져와 '장관님 훈시문'이라며 읽으라고 해 읽은 것 뿐입니다."
-강제로 읽으라고 했다는 말인가요.
"강제적이라기보다는 당시에 전두환 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기 때문에 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군인복무규율 제37조는 군인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한 선거에 있어 자기 선거권을 행사하는 이외에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해 군의 정치개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군 지휘관들 몇 명이 모여 그런 결의를 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 점에 대해는 잘못했지만 당시 제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진술인이 국방부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전두환이 소장에서 중장으로,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했지요.
"예."
-국방부장관은 군 장성이 진급할 때 어떤 식으로 관여하는가요.
"소장에서 중장으로 진급할 때에는 육본 심사위원회에서 심사를 해 국방부장관에게 상신하면 장관이 결재 후 대통령에게 보고해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합니다. 중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할 때는 국방부장관이 대통령에게 제청해 대통령이 결정하는 것이므로 두 번 다 본인이 관여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전두환의 진급은 진술인의 제청에 의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보안사에서 각군 참모총장에게 지시해 승진자를 선정, 통보하면 각 참모총장들은 지시에 따라 승진을 시켜주곤 했는데, 특히 육군이 더욱 심했습니다. 전두환 진급도 보안사에서 전부 지시해 이루어진 것이지 본인이나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은 지시에 따라서 움직인 것 뿐입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이외에도 진술인이 국방부장관으로 있는 동안 장군 인사권은 전부 보안사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전부는 아니지만 하나회나 중요직 장군들은 전부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본인이나 이희성 총장은 실권이 없었습니다."

 

여생을 조용히 살고 싶다

 

-진술인은 더 할 말이 있나요.
"사실 저는 12․12 사건 이후 대통령으로부터 장관직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를 수락하고 그 동안의 군에서 익힌 모든 지혜를 짜내어 군의 발전을 위해 헌신 노력하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국방부장관직에 올라 업무처리를 해 보니 각종 중요사항들은 한결 같이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 처리됐습니다.
전두환은 12․12 신군부 세력을 등에 업고 10․26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을 연행, 구속하고 심지어 노재현 국방장관까지 거의 연행하다시피 해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보위 설치, 국회 해산 등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군 인사까지 포함한 거의 모든 중요사항의 결정을 전두환의 지시에 의해서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튼 이제 고령이라 나머지 인생을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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