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의 소련 vs. 히틀러의 독일(上)[유태선]
스탈린의 소련 vs. 히틀러의 독일(上)[유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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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수많은 독재자들 중에서 전체주의 독재체제의 전형 (archetype)을 보여준 인물, 소위 극좌(極左)와 극우(極右), 공산주의 (Communism)와 파시즘 (Fascism)을 대표하는 인물, 세계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단연 스탈린과 히틀러이다. 그들이 이끌어 가던 소비에트 연방과 나치 독일의 사례는 후대의 독재자들이 자신의 체제를 유지해 가는 과정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스탈린 체제와 히틀러 체제는 국민들을 억압하던 독재체제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그 이념적 기반은 완전히 다르다. 굳이 한가지 공통점을 들자면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 양국 국민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지도자들이라는 점이다. 언론에 대한 성공적인 통제 또는 조작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반 국민들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던 체제였으며 두 독재자들의 사후에는 아무도 그들의 시대를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는 면에서도 놀라운 일치를 보인다.

그들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높은 지지율의 비밀은 국가 내부에 가상의 적들을 설정하여 국민들을 끊임없이 분열시키면서 대다수의 적개심을 적절하게 활용하였다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스탈린은 인간의 후천적 요소에 기반하여 소련의 적을 규정한 반면 히틀러는 인간의 선천적 요소에 의하여 독일의 적을 설정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경우 사회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국내의 반동분자들과 국외의 자본주의 국가들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반면 나치 독일의 경우 우수한 독일민족의 혈통을 더럽히는 유대인, 집시, 슬라브 민족의 존재에서 모든 국내 문제의 근본원인을 찾으며 이 중에서도 독일계 유대인들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여 독일인들을 단결시키려고 하였다.

즉, 스탈린은 칼 마르크스 (Karl Marx)의 유물론적 역사관 (Materialistic Historical View)에 입각하여 역사의 순리에 저항하는 국내의 부농(富農)과 자본가(資本家)를 반동분자로 부르며 억압하였고 영국, 미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을 소련의 적대국가로 규정한 반면 히틀러는 허버트 스펜서 (Herbert Spencer)의 사회 다원주의 (Social Darwinism)에 기반하여 우수한 게르만족이 열등한 슬라브족을 지배하도록 만들고 그 중에서도 열등하면서도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한 유대민족을 절멸(絶滅)시키려고 하였다. 즉, 소련의 적은 사회학적, 후천적, 이념적, 개방적, 동태적인 개념인 반면 나치 독일의 적은 생물학적, 선천적, 민족적, 폐쇄적, 정태적인 개념으로 정의되었다.

러시아사와 독일사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스탈린은 사회주의 혁명은 전세계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트로츠키 (Trotskii)의 세계혁명론 (世界革命論)에 대항하여 소련을 먼저 혁명의 모범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일국사회주의론 (一國社會主義論)을 주장하였고 히틀러는 비스마르크 (Bismarck)로 대표되는 독일 민족으로만 구성되는 하나의 독일을 주창한 소독일주의 (小獨逸主義)가 아니라 게르만 민족이 거주하는 영토라면 모두 포함하는 - 과거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역까지 포함하여 - 하나의 독일을 주창하는 대독일주의 (大獨逸主義)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다만,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세계혁명론에 비하여 소련의 현실에 적합하다는 측면에서 일국사회주의론을 선택한 반면 히틀러는 대독일주의라는 이상론적 입장에서 유럽 내의 모든 독일인 거주지역을 독일 영토에 편입시키는 한편 해당 지역의 슬라브 민족을 다른 지역으로 추방하여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두 지도자의 대조적인 측면은 소련과 독일 국민이 아닌 외부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소련은 실제보다 긍정적으로 평가된 반면 나치 독일은 장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부정적인 정치 시스템으로 평가되도록 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사상자들을 제외하고 계산해 볼 때 스탈린이 죽음으로 몰고 간 소련 국민들의 수가 적어도 1,200만명 이상인 반면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들의 숫자는 600만명에 미치지 못 한다는 사실, 독일 민족으로 태어난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치하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는 -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불가능했던 - 자유로운 일상생활을 영위했다는 사실 등은 후대의 역사가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실로 인식되고 있다.

이하에서 스탈린과 히틀러의 성장과정, 집권과정, 통치의 기술, 개인의 숭배, 정당과 국가의 관계, 국가 차원의 테러리즘, 유토피아 건설, 민족과 종족, 언론 정책, 도덕과 종교, 문화와 예술, 경제의 운용, 국민들의 저항, 강제수용소의 운영에 대하여 간략히 두 체제를 비교해 보기로 한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성장 과정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두 사람 모두 중산층 가정에서 독재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지닌 반항적인 성장과정을 거쳐서 당시 반체제적인 정당에 합류하여 마침내 정당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 나아가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스탈린은 자신을 구두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난 프롤레타리아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시벨리 (ქეთევან გელაძე)는 구두 제화공으로 시작하여 구두를 수선하는 가게를 소유하게 된 중산층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다만, 그는 술에 취하면 아내와 자식들을 구타하는 매우 거칠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반면 히틀러는 병역기피를 위하여 독일로 이주한 오스트리아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한 것을 계기로 독일의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총선거를 통하여 국가의 최고지도자에 오르게 된다.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 (Alois Hitler)는 초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 했지만 오스트리아 세관의 간부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단, 그는 직장에서는 성실하고 유능한 간부였으나 가정에서는 무례하고 난폭하며 권위주의적 가장이었다.

스탈린은 젊은 시절에는 퉁명스럽고 난폭하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장년 이후에는 조용하고 과묵한 성격의 인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스탈린은 마음 속의 분노를 자신의 언행에 나타나지 않도록 관리하는 방법을 배워갔던 것이다.

스탈린은 배우자를 마음속 깊이 사랑했으나 상대방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남편이었다고 한다. 첫번째 부인 카테리느 스바니드제 (Catherine Svanidze)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사망하였고 두번째 부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Nadezhda Alliluyeva)는 스탈린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한 후 자살했는데 스탈린은 두 경우 모두 감정을 조절하지 못 하고 모든 공적 활동을 중단하려고 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전 생애에 걸쳐서 일관되게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공간에서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는데 공적인 장소에서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로 보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공손하고 신사적이었으나 활기가 없었고 비사교적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와 같이 직장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다른 이중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 피해를 주는 일이 없는 모범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여성과의 관계를 두려워 하는 의외의 모습이 있었는데 평생 동안 결혼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연인이었던 겔리 라바울 (Geli Rabaul)은 히틀러의 권총으로 자살하였는데 그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그녀가 히틀러를 깊이 사랑하였으나 히틀러의 냉담함에 좌절하여 자살했다는 견해와 그녀가 결혼을 원하지 않는 히틀러에게 탈출하여 새로운 삶을 찾고 싶어서 괴로워 하다가 자살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의 두번째 연인이었던 에바 브라운 (Eva Braun)은 히틀러를 젊잖은 신사로 생각하고 존경하였으며 1929년에 만나서 10년 넘게 교제하다가 마침내 1945년에 결혼식을 올렸으나 그 다음날 히틀러와 동반자살하였다고 한다.

스탈린은 자신의 능력보다는 적들을 분열시키는 노련함을 통하여 공산당 내부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최고지도자가 된다. 그는 1901년 그루지아의 티플리스 (Tiflis)에서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고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 (Baku)시의 석유 노동자 파업을 주도하였으며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 (Lenin)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였다. 스탈린은 러시아 제국 내의 소수민족인 그루지아인에 속한다는 이유로 레닌의 집권기에 소비에트 연방 내의 소수민족 문제를 맡으며 비러시아인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을 시작으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레닌의 사후 공산당 내에서 유력한 차기 지도자로 인정되던 트로츠키를 제거하기 위하여 지노비에프 (Zinoviev), 카메네프(Kamenev)와 연합하고 트로츠키의 실각 이후에는 부하린 (Buharin)과의 연대를 통하여 두 사람을 제거한 후 모스크바 시의회 선거를 조작하여 부하린의 지지기반을 고립시킨 후 그를 우익 반대파로 몰아 숙청하였다.

이에 비하면 히틀러의 집권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Mussolini)를 모방한 1923년의 뮌헨 맥주홀 폭동의 실패 후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2등, 1933년 힌덴부르크 (Hindenburg) 대통령에 의한 수상직 임명, 1934년 힌덴부르크의 사망에 따른 대통령직 승계와 국민투표에 의한 총통 취임이라는 헌법적 절차에 따른 합법적이고 정당한 것이었다. 다만, 이러한 히틀러의 선거운동에 있어서 파울 요제프 괴벨스 (Paul Joseph Goebbels)라는 거짓도 필요에 따라 진실로 보이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천재적 선동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히틀러의 정치입문과 관련하여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후일의 나치스 (국가사회주의당)가 되는 독일 노동자 단체에 가입하게 된 계기인데 1919년 뮌헨에서 정훈장교의 신분으로 해당 단체에 잠입하여 감시하다가 누군가가 바이에른 독립을 주장하자 격분하여 그에 대하여 반박하였다가 독일 노동자 단체의 지도자인 드렉슬러 (Drexler)의 적극적인 입당 권유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유태선 시민기자(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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