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간 대립은 자본주의와 봉건주의의 대립…지금 북은 사회주의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南청년학생 북이 봉건주의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

[편집자 주] 북한 정치인 황장엽(黃長燁)은 1997년 1월 2일에 대한민국에 귀순했다. 북한을 유지하는 사상체계인 주체사상을 확립한 황 씨는 김일성의 사망(1994년 7월 8일) 후 3년도 채 지나기 전에 주중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황 씨는 함께 귀순한 김덕홍(金德弘) 씨를 통해 망명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글로 정리해 한국인 이연길 씨에게 전달했다.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인 이연길 씨는 황 씨와 직·간접적으로 접촉을 유지하면서 황 씨의 귀순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황 씨가 귀순 직전(1997년 1월 2일)에 작성한 글을 비롯해  1997년 2월 12일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귀순 소감을 담은 자필 진술서, 귀순 두 달 전인 1996년 11월(10일, 13일, 15일)에 남긴 메모 등에는 지금은 사망한 김정일에 대한 비판과 지금과 같이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 실정, 남북통일에 대한 자신의 견해, 북한을 다루기 위한 남한의 전략 등이 담겨있다. 황 씨가 손글씨로 쓴 글들을 상·중·하로 펜앤드마이크(PenN) '현대사 자료실'에 게재한다.  

황장엽.(연합뉴스 제공)

1997년 1월 2일 황장엽이 귀순 직전 작성해 같이 탈북한 김덕원 씨와 한국인 이연길 씨를 통해 세상에 알린 글 전문(全文)

남북간의 대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봉건주의 사이의 대립이다. 지금 북은 사회주의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인민들, 노동자, 농민들, 지식인 등이 굶어죽는 사회가 어떻게 사회주의 사회로 될 수 있겠는가. 쏘련(소련)식 사회주의하에서 독재가 심했다. 하지만 오늘 북에서와 같은 세습적인 1인 독재는 없었다.

후계자(김정일)는 날때부터 '광명성'으로 태어나 자기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하기로 하늘이 결정한 것으로 선전하고 있다. 이들 부자들을 신격화하기 위한 형용사가 모자라게 되자 자연현상까지 '위대한 장군님'과 결부시켜 신비화하고 있다. '위대한 장군님'이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비오던 날씨도 개이고 '장군님'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는 안개가 갠다고 하는 따위의 미신을 소위 로동당(노동당) 기관지인 '로동신문'(노동신문)에서까지 공공연히 선전하고 있다. 

쏘련에서는 쓰딸린(스탈린)에 대한 개인숭배가 비판되고 그후 다른 사회주의 나라 등에서도 민주화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나 북은 반대로 개인에 대한 숭배를 절대화하고 이른바 수령에 대한 절대적 숭배를 요구하는 수령관을 당 건설과 모든 당 활동, 모든 정책 작성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북에서의 상황은 '위대한 수령'을 찬양하고 수령에 대한 충성과 효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아침부터 밤까지 일상화되어 있다. 참으로 놀라운 지경이며 '위대한 장군님'에게도 실증(싫증)이 나지 안(않)겠는가 의심될 지경이다. 

소위 조직생활이 되는 것은 아침부터 수령을 찬양하고 수령께 충성을 맹세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남(南, 대한민국)의 청년학생들이 북이 사회주의가 아니고 봉건주의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북에 대하여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위대한 장군님'이 얼마나 교만하고 안하무인격으로 되었는가 하는 것은 지난해(96년) 12월 7일 자기 측근자들에게 한 담화를 정리하여 당 조직들이 내려 보낸 문건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인민들이 당중앙위원회의 지시를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권위 때문이지 당 조직들과 당 일군(일꾼)들이 일을 잘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나의 사업을 똑똑이(히) 도와주는 일군이 없습니다. 나는 단신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장군님'은 위대하다, 천재다 하고 자화자찬하다가 이제는 자기가 정말 천재인가 생각하기까지 되었고 자기만을 절대 숭배하는 것을 강요하고 무조건 복종하도록 독재체제를 세워 놓고는 그 충실한 부하들한테서도 도움을 받는 것이 없이 단신으로 일하고 있다고 뻔뻔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로는 다 자기 개인의 것으로 돌리고 잘못은 다 자기 부하가 저지른 것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위대성'의 정체이다. 

북의 인민들은 지금 최악의 고통을 겪고 있다. 량곡(양곡)이 약 200만톤이 모자라는데 군량미는 무조건 내야한다 하니 농민들이 자기 식량으로 남겨놓은 몫에서 3개월분을 떼서 군량미로 바치고 있다. 무단결석하는 아이들이 부지기수다. 이럴수록 신문과 방송은 북은 지상락원(지상낙원)이며 온세계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회주의 모범의 나라이며 '위대한 장군님'은 세계 혁명의 수령이고 구세주라고 떠들고 있다. 무자비한 탄압과 허위와 기만으로 충만된 암흑의 땅에서 인민들은 전전긍긍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위대한 장군님' 만세를 부르고 있다. 

봉건사회라도 이 정도 되면 농민폭동이라도 일어날 수 있겠지만 독재체제가 너무나 째이고 탄압이 너무나 무자비하다 보니 북의 인민들이 자체의 힘으로 이 도탄 속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거진 기대하기 어렵다고 본다. 

황장엽 씨 친필서신 복사본.(윤희성 기자)
황장엽 친필서신 복사본.(윤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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