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임기, 신군부 초안은 6년, 전두환 장군 주장으로 7년으로 연장돼
신당 창당 작업은 권정달과 이종찬이 주도, 참여 인물 인선 및 접촉
군 지휘관들이 '탁월한 영도력 발휘해 국가 위난 수습'한 전두환 장군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

[편집자 주] 이 문건은 김영삼 정부 시절 진행됐던 5․18 사건 수사 과정에서 ‘서울의 봄’ 당시 보안사 핵심 5인방 중의 한 사람이었던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 검찰 진술의 일부 내용이다. 권정달 씨는 1980년 신군부의 집권 과정에서 <시국수습방안>을 작성 집행하여 전두환 권력 창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김영삼 정부에서 수사가 진행되자 검찰 진술에서 “시국수습방안은 실질적인 집권 시나리오였다”고 폭로함으로써 신군부(신군부) 측을 유죄로 몰아넣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권정달 씨의 진술 내용은 상하 2회로 나누어 소개한다. 이번이 마지막회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하다가 계엄군에게 연행되는 시민들. 권정달 씨의 검찰진술을 통해 신군부 집권 과정 및 정권 창출의 상세한 프로그램이 밝혀졌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하다가 계엄군에게 연행되는 시민들. 권정달 씨의 검찰진술을 통해 신군부 집권 과정 및 정권 창출의 상세한 프로그램이 밝혀졌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새로운 보도통제지침 발령

 

문 김대중, 김종필, 김영삼 등 당시 대권경쟁을 하던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 구속, 연금하고, 계엄포고령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은 이른바 집권계획의 일환인 舊 정치인의 제거조치라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답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문 그 후 5공화국 헌법 부칙에 따라 정치활동 규제 근거를 마련하고, 그에 따라 정치활동 규제법을 제정해 상당수 舊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것은 舊 정치인 제거조치의 연장선에 있는 조치라고 할 수 있지요.
답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문 1980년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포고령 10호가 발령됐을 때 진술인이 ‘5월 17일 계엄확대조치 및 포고령 제10호에 의한 보도통제지침’을 작성했나요.
(이때 검사는 ‘5월 17일 계엄지역 확대조치 및 포고령 제10호에 의한 보도통제지침’ 사본을 진술인에게 제시하고 조서 말미에 편철하다)
답 예, 비상계엄이 확대되고 포고령도 새로 발령된 마당에 새로운 보도지침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제가 이상재에게 지시해 당시 문공부에서 언론반에 파견 나와 있던 김기철이 작성했습니다.
문 이상재는 그 보도지침을 김기철에게 작성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요.
답 제가 직접 김기철에게 지시한 적은 없고, 업무체계상 이상재에게 지시해 이상재가 김기철에게 지시한 것입니다.
문 이 보도지침을 만들어 전두환 사령관의 결재를 받고 계엄사로 넘겼나요.
답 예, 1980년 5월 19일 전두환 사령관의 결재를 받은 후 이상재가 곧바로 계엄사 보도처, 아니면 서울시청에 있던 보도검열단장에게 넘긴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이런 보도지침은 계엄령 하에서 계엄사령관이 계엄사 보도처에 지시해야 하고, 설사 보안사령관이 그런 지침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을 계엄사령관에게 건의해 계엄사령관 명의로 하달되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답 절차상으로는 그것이 맞으나 당시 상황이 그러다 보니 보안사령관이 직접 보도처장에게 보낸 것입니다.
문 김기철 저(著) 《합수부 사람들과 오리발 각서》라는 책자 제52면을 보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이 보도지침을 결재하면서 그 표지에 ‘위반시 보도처 폐간’이라고 기재해 그 지침에 위반하면 폐간 조치하라는 취지로 지시했답니다. 이는 나중에 전개되는 언론인 해직, 언론사 통폐합까지 염두에 둔 불법적 지시가 아닌가요.
답 전두환 사령관이 그런 지시를 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해제를 논의하기 위해 여야 합의로 국회가 소집 공고되어 5월 20일 임시국회가 열릴 예정이었지요.
답 국회 쪽에는 제가 신경을 쓰지 않아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1980년 5월 20일 군 병력이 국회의원들의 등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답 그 당시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1980년 5월 23일경 국회의원 몇 명이 국회에 들어갈 수 없다면서, 좀 들어가 비품을 가져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가 확인해보니 군 병력이 국회를 봉쇄해 국회의원들을 출입하지 못하게 한 것을 알았습니다.

 

계엄해제 의결을 봉쇄하기 위해…

 

문 누구 지시에 따라 군인들이 국회의원의 등원을 저지한 것인가요.
답 그 부분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문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포고령 10호를 발표하고, 국회에 군 병력을 투입해 국회를 봉쇄 점거한 것은 결국 신군부 측에서 당초 계획했던 정치활동 규제 조치 내용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 아닌가요.
답 결국은 그렇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문 군 병력에 의한 국회의원 등원 저지, 임시국회 소집 무산 조치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에게 사전보고 하고 승인을 받았는가요.
답 제가 관여한 사안이 아니라 모르겠습니다.
문 당시 정치권이 계엄해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회를 소집해 놓고 있어 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더라도 임시국회에서 계엄해제가 결의되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므로 국회가 계엄해제를 결의하지 못하도록 국회활동을 봉쇄하는데 포고령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요.
답 결국 그렇게 됐습니다.
문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이 대통령 후보로 생각하고 있는 3김 씨를 체포․구속․연금하는 문제는 단순히 혼란한 시국을 수습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판을 완전히 바꾸는 혁명적인 조치입니다. 집권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인데요. 결국 3김 씨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정치판을 깨고 이들을 무대 밖으로 몰아낸 다음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판을 짜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답 결국 그렇게 됐던 것이 사실입니다.
문 계엄법에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계엄사령관이 행정․사법사무를 관장하도록 되어 있으나 입법권은 여전히 국회 권한에 속합니다. 포고령으로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등원하는 국회의원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것은 명백한 헌정중단 조치로 잘못이 아닌가요.
답 그렇습니다.
문 피의자가 광주사태 발생을 처음 안 것이 언제인가요.
답 1980년 5월 18일 보안사 보안처에 광주 보안부대로부터 보고가 들어와서 알았습니다.
문 광주사태 기간 동안 보안사의 최예섭 기획처장이 광주 현지에 파견되어 상황 종료 시까지 광주에 있었다고 하는데요. 최 처장의 광주에서의 역할이 무엇이었나요.
답 그것은 잘 모르고, 저는 그때 최예섭 기획처장이 광주에 내려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뿐입니다.
문 당시 홍성율(洪性律) 중령(편집자 주-다른 사람들의 진술조서에는 대령으로 되어 있음)이 진술인의 지시로 역시 광주에 내려갔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홍성율 중령은 당시 대공처 소속이어서 제가 지시할 입장이 아니었고, 또 광주사태 파악은 보안처에서 했기 때문에 제가 홍성율을 광주에 보낸 사실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왜 갔는지는 모릅니다.

 

사전에 과격진압 명령

 

문 진술인은 이른바 광주사태가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나요.
답 저는 광주사태에 직접 관여한 사실은 없습니다. 하지만 광주사태가 시국수습방안의 일환으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직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시국수습방안과 광주사태의 관련성에 대해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980년 5월 17일까지 시국상황은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격화되어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국수습방안을 실행에 옮겨 지역계엄이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전면에 나서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면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발과 저항이 예상됐습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저항과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계엄군 투입계획 등이 시국수습방안의 수립 및 그 준비단계에서부터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주도하에 황영시 참모차장, 정호용 특전사령관, 노태우 수경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장성들 사이에 이미 수립되거나 실행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시위 초동단계에서부터 강경진압 등 위력과시를 해 시위군중을 위축시킴으로써 시위 확산과 격렬화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을 그 기본 방침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비상계엄 전국확대 후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는 서울, 광주지역 등에는 주로 공수여단으로 편성된 진압부대 투입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는 곧 시위진압 과정에서 ‘과감히 타격하라, 끝까지 추적 검거하라, 분할 점령하라’는 공수여단의 시위진압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전두환, 황영시,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의 주도하에 진압병력 투입 및 그 강경진압 방침이 결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5월 18일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따라 미리 광주지역으로 이동해 있던 공수여단 병력이 시위진압에 즉각 투입되어 원래 예정되어 있던 방침대로 위력 과시를 위한 강경진압 작전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공수여단 병력에 의한 과잉, 과격진압은 충분히 예상되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며, 이 과정에서 광주사태가 악화일로를 걷게 됨으로써 무수한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컨대 광주사태의 근본원인은 공수여단이라는 과격한 부대를 시위현장에 투입해 강경진압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계획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겼던 전두환, 황영시,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진압에 투입된 공수여단 병력들은 이런 정치적 의도를 전혀 모르는 채 상부 명령에 복종했던 것에 불과하므로 그들 또한 광주사태의 희생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부마사태 당시 저는 부산지역 보안부대장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에 부마사태의 진압과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시위 초동단계에서 군 병력이 바로 투입되지 않아 시위가 대규모로 확산됐습니다. 그 후 3공수여단과 해병 1사단 1개 연대 병력을 투입해 강경 진압함으로써 시위를 평정했습니다. 부마사태 진압작전에 대한 평가 과정에서 시위의 대규모 확산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초동단계부터 공수부대 등을 투입해 강경진압을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반성론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이 교훈이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발생 예상되는 시위 진압작전의 기본방침을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공수부대에 의한 초기 강경진압’으로 설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됩니다.

 

국보위마저 강제하다

 

문 1980년 5월 21일 신현확 총리를 비롯, 11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개각이 단행됐습니다. 광주사태가 진행 중인 동안 개각을 단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문 신군부에서 신현확 총리가 국보위 설치를 반대하는데 불만을 품고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할 듯한 태도를 보이자 신 총리가 지레 겁을 먹고 사퇴한 것이 아닌가요.
답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문 당시 광주사태가 악화일로에 있는 과정인데도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을 소준열(蘇俊烈) 당시 행정학교장으로 교체하고 윤흥정은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했습니다. 이런 정황을 보면 전두환 사령관이나 보안사측에서 내각 구성에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닌가요.
답 전두환 사령관이 어떻게 건의하거나 관여했는지는 모르지만 보안사 참모차원에서 그런 문제가 논의된 적은 없습니다.
문 1980년 5월 27일 국무회의에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설치령안이 의결됐지요.
답 예.
문 비상기구의 명칭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로 정한 경위는 어떤가요.
답 5․17 당시만 해도 명칭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비상기구라고만 했는데 그 뒤 광주사태가 발생한 직후인 5월 20일경 전두환 사령관이 명칭에 ‘국가보위’라는 말을 넣자고 하면서 논의된 것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였습니다.
문 국보위 설치 계획을 최 대통령에게 처음 보고한 때가 언제이고, 누가 어떤 경로로 했는가요.
답 제 기억으로는 1980년 5월 20일경 전두환 사령관이 그 명칭을 국보위로 정하고 5월 22일 아니면 5월 23일경 제가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있던 이원홍(李元洪)에게 국보위 설치령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 만든 국보위 설치령(안)을 가지고 제가 5월 26일 국방부장관을 수행해 박충훈(朴忠勳) 국무총리 서리에게 보고했습니다. 그 뒤에 대통령에게 보고된 것으로 아는데, 누가 보고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김용휴(金容烋) 총무처장관이 보고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문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직접 보고하지는 않았나요.
답 대통령 결재를 받는 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문 최광수 비서실장이나 이원홍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의 진술에 의하면 보안사 측에서 처음에는 비상기구를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을 발동하는 형식으로 설치하려 했답니다. 그런데 최 대통령이 “얼마 전에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는데 또 다시 다른 긴급조치권을 발동할 수 없다. 이런 일은 5․16 한번으로 족하다”면서 거절하고 최광수를 비롯한 청와대 수석비서관들도 호응하지 않아 할 수 없이 형식은 대통령령에 의한 자문기구로 하고 실질은 혁명평의회 성격의 국보위를 만든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답 전두환 사령관으로부터 시국수습방안 수립을 지시받고 그 입안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허삼수, 허화평, 이학봉, 정도영 등 보안사 핵심참모들과 신군부 핵심장성들과 협의한 결과 국보위 설치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에 의해 하기로 했으며, 그 성격은 비상권력기구적인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에 따라 5월 19일경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을 찾아가 ‘군의 주요지휘관들의 한결 같은 의견이 계엄확대에 따른 시국에 대처하기 위해 대통령 긴급조치권을 발동해 비상기구를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대통령의 결심을 받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최광수 비서실장은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초비상사태 하에서 국가, 안보, 경제 등에 발동되는 것인데 불분명한 상황에서는 발동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저는 전두환 사령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 후 전두환 사령관이 최광수 비서실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 군의 일치된 의견이니 대통령께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를 건의해 달라고 재차 요청했던 것입니다. 제가 최 대통령께서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 건의에 대해 위와 같은 말씀을 했는지 듣지는 못했지만 최광수 비서실장의 그와 같은 진술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문 최 대통령은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대통령 긴급조치권을 발동해 비상권력기구 성격을 가지는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를 강력히 주장하자 노태우를 청와대로 불러 직접 설득했다는데요.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가요.
답 잘 모르겠습니다.
문 그렇다면 최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대통령 자문 보좌기관의 성격을 갖는 국보위를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하기로 원래 방침을 변경했다는 말인가요.
답 그렇습니다.
문 국보위의 법적 성격을 변경하게 된 경위를 자세히 말하시오.
답 최 대통령이 긴급조치권 발동을 통한 비상권력기구로서의 국보위 설치에 완고히 반대하자, 보안사 핵심참모들과 신군부 핵심장성들 사이에 국보위의 법적 성격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습니다. 긴급조치권을 발동해 비상권력기구적 성격으로 설치하자는 주장과, 대통령령을 제정해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적 성격으로 설치하자는 주장이 대립됐습니다. 그러던 중 육사 11기 출신으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보안사에 자주 출입해 신군부 측의 법률자문에 응하고 있던 김영표(金永均) 변호사, 이원홍 청와대 민원수석 등과 논의한 결과 여러 가지 여건상 대통령 긴급조치권으로 하기는 어려우니 대통령령 형식으로 하자고 결론을 내려 결국 대통령령에 의한 자문․보좌기구로 국보위를 설치하게 된 것입니다.

 

“꼭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하나”

 

문 그렇다면 1980년 5월 26일 주영복 장관과 함께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를 찾아가 국보위 설치 계획을 보고할 때도 이미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하기로 결정된 이후라는 말인가요.

답 그렇습니다.

문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답 박충훈 총리는 ‘꼭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하느냐’면서 매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특히 설치령(안) 제4조에서 상임위원회가 조정 및 통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은 적절치 못하니 삭제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제가 ‘비상계엄 하에서 그런 표현은 넣는 것이 적절하고 또 그런 표현이 있다고 해 문제될 것은 없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무 말씀 없이 결재해 주었습니다.

문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는 개헌을 하든지 아니면 국보위를 국무회의 아래에 두어 국보위가 결정한 사항에 대해 국무회의 최종심의를 거치도록 해야 한다면서 재가를 거부했다는데 어떤가요.

답 그렇게 말씀하시지도 않았고, 결재를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문 국보위 설치령을 보면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국보위의 위임을 받아 실제로 조정․통제업무를 담당하는 상임위원회, 그리고 각 부처에 대응한 분과위원회 등 3단계의 내부기구를 설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요. 처음부터 그렇게 구분해 설치하기로 되어 있었나요.

답 그렇습니다. 시국수습방안 수립단계에서 전두환 사령관은 저에게 국가보위 비상기구 내에 상임위원회를 설치할 것과, 그 위원장으로는 자신이 되도록 하라는 지침을 주었습니다. 적어도 상임위원회 설치나 그 위원장을 누가 할 것인가는 이미 방침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다만 나머지 세부적인 조직체계는 1980년 5월 23일경 설치령 성안작업을 담당했던 이원홍 민정수석, 김유후(金有厚) 비서관 등과 논의 과정에서 결정했습니다.

문 국보위의 내부기구를 3단계로 나누기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우선 비상대책위원회는 외관상 대통령을 의장으로 하고 각부 장관 및 계엄사령관 등을 위원으로 하기 위해 일단 필요하다고 생각됐습니다. 상임위는 상임위원장으로서 사실상 전권을 행사할 전두환 사령관을 위해 필요했고, 분과위원회는 상임위에서 사실상 전권을 행사해 결정되는 주요정책을 내각을 통해 집행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입니다.

문 결국 전두환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은 원래 비상권력기구적 성격의 기구를 설치하려다 최 대통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외관상으로는 대통령 자문․보좌기관적 성격의 국보위를 설치하게 됐지만, 그 후 운용과정에서는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내각을 사실상 조종․통제해 헌법기관인 내각의 기능을 형해화시켰고, 특히 전두환 사령관은 상임위원장이라는 자리를 이용해 사실상 국정을 장악한 것 아닌가요.

답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식으로 보입니다.

 

"국보위 통해 군부가 권력 장악하려는 의도"

 

문 결국 국보위를 만든 것은 사실상 최 대통령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상임위원장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권력을 장악해 국정을 직접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답 그렇게 보는 것이 무리는 아니라고 봅니다.

문 국보위원, 상임위원, 분과위원, 전문위원은 누가 어떤 방법으로 선정했는가요.

답 국보위원 중 당연직을 제외한 임명직 10명은 총무처장관이 전두환 사령관과 협의해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민간인은 김용휴 총무처장관이 보안사측과 협의해 관료와 대학교수를 중심으로 선정했습니다. 군인들은 보안사 보안처 존안자료를 중심으로 보안사 참모 5명이 선별한 후 국보위에 통보했습니다.

문 국보위가 공식 발족한 것은 1980년 5월 31일이지만 5월 17일 직후 이미 국보위 분과위원들이 결정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때는 우선 운영위원장으로 이기백(李基百), 운영윈 간사로 최평욱(崔枰旭)만 임명됐으며, 그 두 사람이 총무처와 보안사에서 보내온 명단을 받아 국보위에서 절차를 밟아 구성한 것입니다.

문 운영위원장으로 이기백, 운영위 간사로 최평욱을 임명한 경위는 어떠한가요.

답 전두환 사령관이 임명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회 회원들인 것만 알지 자세한 경위는 모릅니다.

문 1980년 5월 31일 국보위 의장인 최 대통령이 국보위 상임위원 30명의 명단을 발표하면서 분과위원 84명과 전문위원 33명의 명단을 발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답 그때는 총무처와 보안사에서 넘어온 자료를 이기백과 최평욱이 취합단계였기 때문에 결정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문 1980년 6월 13일 국보위가 확정 발표한 안보태세 강화, 경제난국 타개, 정치발전과 내실도모, 사회악 일소를 통한 국가기강 확립 등 4대 기본목표와 권력형 비리 등 공직자 축재 부조리 척결과 불신풍조의 불식, 문란해진 정치풍토의 쇄신과 도의정치의 구현, 민주화의 추진을 위해 사리사욕과 빗나간 주장을 일삼는 일부세력 배격, 학원의 자율성은 보장하되 불법시위와 소요행위로 북괴를 이롭게 하는 행위 근절, 윤리와 도덕이 존중되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종교를 빙자한 정치활동 통제, 학원의 기업화와 과열과외 등 교육 풍토 쇄신, 기업인의 비윤리적 행위와 노조의 불법시위 활동 시정, 국익우선의 언론 지향, 밀수․마약․부정식품 등 각종 사회악 근절 등 추진지침은 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마련한 것인가요.

답 국보위 운영과 관련해서 제가 관여한 사실이 없습니다.

 

절차상 문제 있었다

 

문 국보위 또는 상임위원회와 행정부 각 기관과의 상호 연락이나 업무협조는 어떻게 했는가요.

답 제가 관여한 사실이 없어 잘 모릅니다.

문 1980년 6월 4일부터 이른바 공무원 숙정작업이 시작됐는데 알고 있나요.

답 국보위 사회정화분과위원회에서 주관해 시행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진술인은 공무원 숙정작업에 전혀 관여한 사실이 없나요.

답 전혀 없습니다만, 당시 총무처에서 각부 간부들 인사이동을 할 때 대통령에게 결재를 올리기 전에 국보위 운영위원회를 통해 상임위원장 의견을 묻도록 조치가 취해져 있었습니다. 전두환 상임위원장이 보안사령관실에 있을 때 국보위 운영위원회에서 그 결재안을 가지고 와 상임위원장의 결재를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것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문 국보위 설치령 어디를 봐도 입법기능은 커녕 행정기능을 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공무원 숙정, 사회악 사범 일소, 과외금지 등 행정과 입법기능을 수반하는 조치들을 국보위에서 어떻게 추진할 수 있는가요.

답 절차상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문 전두환 장군이 5․17 조치로 대권경쟁을 하던 3김 씨를 체포․구속․연금 등으로 사실상 제거하고, 정부조직과 비슷한 분과위원회를 거느린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서 국가 중요 정책을 결정하는 등 내각을 조종․통제하면서부터 실질적으로 집권을 한 것과 다름없는 권한을 행사했던 것이 아닌가요.

답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문 1980년 9월 29일 국보위 설치령을 국가보위입법회의설치령으로 개정했는데 알고 있나요.

답 제가 듣기로는 국보위에서 입법기능을 주는 과정에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압니다. 자세한 경위는 우병규가 알고 있습니다.

문 5공화국 헌법 준비과정에서 기존 국회를 해산하고 새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국회 권한을 대행할 기구로 국보위를 설정하고 있다가 국보위 구성원 등에 문제점이 있어 최종단계에서 우병규 정무수석비서관의 제안으로 각계 대표자로 구성하는 국가보위입법회의를 구상하게 됐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문 국회 권한을 대행할 기구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구성하기로 계획한 배경은 어떤가요.

답 저는 법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문 실제로 5공 헌법 개정안에 처음에는 국보위가 국회권한 대행기구로 되어 있었는데 최종단계에서 우병규 정무수석비서관의 아이디어로 국가보위입법회의로 변경됐던 것으로 보아 국보위는 설치 당시부터 비상권력기구로서 5․16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이 입법권한도 행사할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닌가요.

답 글쎄요, 전두환 사령관이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저는 입법기능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헌법개정에 간여하다

 

문 1980년 10월 27일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삼청동 국보위 사무실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대리한 남덕우 국무총리 주재로 첫 회의를 열어 국가보위입법회의법을 통과시켰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대통령령에 의해 설치된 국가보위입법회의가 입법권한을 갖게 된 근거가 무엇이었는가요.

답 제가 관여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제 듣고 보니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문 입법의원 선정은 어떻게 했는가요.

답 우병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이 주도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81명의 입법위원 가운데 국보위와 보안사에서 50여 명을 선정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저는 모르는 사실입니다.

문 진술인도 입법회의에 참여했나요.

답 내무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문 내무위원으로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가요.

답 그때는 저는 민정당 창당작업에 바쁠 때여서 입법회의에서 활동한 기억은 없습니다.

문 국보위에 속한 법사분과위원회에서 헌법개정 작업을 진행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문 진술인이 헌법 개정 작업을 실무적으로 총괄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답 저는 법사위 활동에 관여한 것은 아니고, 1980년 7월경에 전두환 사령관이 법사위원인 우병규, 박철언(朴哲彦)을 지명하며 두 사람을 보안사에 데려다 사무실을 내주라고 해 사무실을 내주고 두 사람의 헌법관련 업무를 제가 총괄했습니다.

문 우병규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전두환의 지시로 진술인의 통제 하에 우병규, 박철언이 보안사에 별도 사무실을 내고 국보위 법사위에서 작업한 것을 가져와 진술인에게 보고하면 진술인은 그에 따른 지침을 주어서 처리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렇습니다.

문 결국 개헌작업과 관련해 진술인은 전두환 등 신군부 측의 의사를 우병규, 박철언 등을 통해 정부 개헌안에 반영한 것이라는데 사실인가요.

답 예.

문 헌법 개정작업과 관련해 전두환 장군으로부터 특별히 지시받은 내용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관철시켰는가요.

답 헌법은 전문적인 일이어서 제가 전두환 사령관에게 갈 때는 대부분 우병규, 박철언과 같이 가서 지시 받았고, 두 사람이 알아서 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국보위 법사위에서 헌법 개정안 골격이 마련된 뒤인 1980년 7월 15일경 전두환 장군이 정도영 보안처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사령관 비서실장 그리고 중정의 이종찬 총무국장, 허문도 중정부장 비서실장을 사령관실에 소집한 다음 노태우 장군을 모셔오라고 해 진술인에게 개헌안 골격을 설명하도록 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사실입니다. 당시 보안사에 와 있던 우병규, 박철언 등이 만들어 준 개헌안 골격을 제가 설명한 기억이 납니다.

문 그 자리에서 노태우 장군은 안정론을 내세워 간선제를, 허화평 비서실장은 국민들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이유로 직선제를 주장해 논란을 벌이다 전두환 장군이 간선제에 낙점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렇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직선제를 주장한 사람은 허화평이 아니라 허삼수인 것 같습니다.

문 대통령 선출방법과 관련해 당시 국민적 합의가 직선제였고, 대부분의 법사위원들도 직선제를 선호하고 있었다는데 미국식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를 채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전두환 사령관이 국력낭비, 지역감정 등의 이유를 들어 간선제로 하자고 결정한 것 같습니다.

 

“알아서 잘 하라” 지시

 

문 대통령 임기와 관련해 당초 신군부 내의 합의는 6년이었는데, 전두환 장군의 주장으로 7년으로 연장됐다는데 그 경위에 관해 진술하시오.

답 그 무렵 신문에 대통령 임기를 6년으로 한다는 내용이 크게 보도되자 전두환 사령관이 저와 우병규, 박철언 등을 부르더니 ‘처음 1년은 취임준비를 해야 하고 마지막 1년은 퇴임 준비로 사실상 일하기 어려운데 실제로 일할 기간은 적어도 5년은 되어야 한다’며 임기를 7년으로 하라고 지시해 우병규, 박철언 등이 정부 측과 협의해 7년으로 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 그 때가 전두환 사령관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이지요.

답 그렇습니다.

문 우병규 위원이 전두환 장군으로부터 임기를 7년으로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진술인에게 통보했다고 하는데, 그 통보를 받고 어떤 생각을 했는가요.

답 7년은 너무 길지 않나 하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문 5공 헌법 부칙으로 기존의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키고 정치활동 규제의 헌법적 근거를 마련했는데 알고 있나요.

답 저는 창당 작업에 바쁠 때이고, 전두환은 이미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에 다른 수석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관여한 사실이 없어 내막은 모르겠습니다.

문 최 대통령이 1980년 6월 12일 특별담화에서 밝힌 10월 중 개헌, 1981년 봄 선거 실시, 1981년 6월 정권이양 등의 정치일정은 곤란하고 일정을 앞당기기로 결론이 모아졌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기억이 없습니다.

문 정치일정을 앞당기기로 함에 따라 최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문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거 준비 및 신당 창당 문제도 논의됐다고 하는데 결론이 어떻게 났는가요.

답 최 대통령 하야 과정은 제가 아는 바 없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대통령 선거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최 대통령이 1980년 8월 16일 하야하자 그 당시 박충훈 국무총리 서리가 미처 서리도 면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보안사에 자주 드나들던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정호용, 노태우, 박준병 등이 우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그 뒤에 개헌을 해 다시 대통령 선거를 치르자고 결정한 모양입니다.

그 무렵 박영수(朴英秀)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이 어떤 경위로 왔는지는 모르지만 보안사에 와서 사령관을 뵙고 제 방에 와서는 저에게 자기가 직책상 선거관리를 한다고 소개해 처음 봤습니다.

문 그래서 진술인은 무어라고 했나요.

답 그 때는 전두환 사령관이 단독으로 입후보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에 관리만 잘하면 당선에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판단해 박영수에게 ‘알아서 잘하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문 그렇다면 박영수가 실제 어떻게 관리해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는지는 모르나요.

답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사무처에서 버스를 동원해 대의원들을 투표 장소인 장충체육관으로 동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터 선거 있을 때마다 취해진 조치이고, 원래 단일후보로 입후보했기 때문에 투표에 참가하면 대의원들 성향을 볼 때 찬성할 것은 당연히 예상됐습니다.

문 당시 서울지역 보안부대장 이상연(李相淵)이 서울 퍼시픽 호텔로 통일주체국민회의 서울지역 지역회 간부들을 초청해 전두환 후보에 대한 추천서를 대의원들로부터 받아달라고 요청했다는데 알고 있나요.

답 지시를 했다면 제가 이상연에게 지시했을 터인데 저는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그 무렵 유학성이 김종환 내무장관에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이 압도적 찬성으로 당선되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요청했다는데 알고 있나요.

답 전혀 모르는 사실입니다.

문 1980년 8월 중순경 보안사 직원들이 내무부 직원들에게 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은 최소 85% 이상 지지를 받아야 하니 각 지방에 지지를 부탁해 달라고 요청한 사실도 모르는 일인가요.

답 예, 처음 듣습니다. 그때는 전두환 사령관이 혼자 입후보했기 때문에 당선에 문제가 없었을 때입니다.

 

이종찬과 함께 신당 창당

 

문 신당 창당을 처음 검토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나요.

답 1980년 9월 초순경부터 신당 창당을 하기 위해 보안사와 정보부에서 보관하고 있던 자료들을 중심으로 참여대상 인사 선정 작업을 했습니다. 실제 그 대상자들과의 접촉은 제가 전역한 뒤 정치활동 규제조치가 풀린 10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문 신당 창당을 결정한 배경이 무엇인가요.

답 그때는 이미 전두환이 대통령이 된 이후여서 새로운 여당이 필요해 착수한 것입니다.

문 1980년 6월 20일 전두환 장군이 진술인과 이종찬 중정 총무국장, 이상연 보안사 정보처 보좌관, 윤석순(尹碩淳) 중정 총무부국장 등에게 진술인을 팀장으로 해 창당 작업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사실무근입니다. 이종찬도 제가 1980년 9월 초순경부터 참여인사 선정 작업을 할 때 불러서 같이 작업을 한 것이고, 그 때까지 윤석순은 부르지 않다가 10월 들어 이종찬이 중정 총무국장 자리를 윤석순 당시 부국장에게 넘기고 본격적으로 창당 작업에 전념한 것입니다. 윤석순은 총무국장이 된 이후에 비로소 이종찬 지시로 중정 관련 자료를 보안사로 가져오는 등 관여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윤석순이 본격적으로 창당 작업에 관여한 것은 제가 전역을 하고 곧바로 삼청동 안가(安家)에서 창당 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한 뒤 비로소 합류시켰습니다.

문 위에서 말한 우병규도 1980년 7월 초 박철언과 함께 보안사에서 별도로 사무실을 내고 진술인의 통제 하에 개헌작업을 할 때 같은 건물 2층에서는 이종찬, 윤석순 등이 신당창당 작업 중이었답니다. 한용원도 같은 취지로 말하고 있는데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요.

답 이종찬 등에게 별도 사무실을 내주지는 않았고, 다만 이종찬이 1980년 9월부터 창당과 관련해 보안사에 자주 드나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우병규가 보안사로 옮겨 올 때는 개헌안을 만드는 데 바빠서 정당을 만드는 일에는 시기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때입니다.

문 1980년 6월부터 신당 창당 작업에 착수해 최기홍 중령은 연락간사, 최재림 소령은 서류작업, 허삼수와 윤석순은 기성 정치인을, 이상연 보좌관이 기성 정치인 및 군 출신 인사를 접촉하기로 역할 분담을 했다는데 아닌가요.

답 허삼수는 창당 작업에 관여한 사실이 없고 나머지 사람들도 제가 전역하고 삼청동 안가에서 창당 작업에 착수한 10월 중순 이후에 합류한 사람들입니다.

문 또 작업진행 사항이 노출되지 않도록 서린 호텔, 프라자 호텔, 하이야트 호텔 등 3개 호텔에서 팀을 나누어 작업을 진행했다는데 어떤가요.

답 팀을 나누어 작업을 진행한 사실은 없고, 다만 이 호텔을 이용한 것은 사실이나 제가 1980년 10월 16일 전역한 후에 신당 창당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때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장소로 이용한 것입니다.

문 신당에 참여할 인물의 인선과 접촉은 누가 담당했나요.

답 저와 이종찬이 주로 했습니다. 그 시기는 제가 전역한 이후입니다.

 

창당자금 적게 들었다

 

문 신당창당 작업과 병행해 정치활동 규제자 선별작업도 함께 추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 작업도 진술인이 주도했는가요.

답 제가 전역한 후 현홍주(玄鴻柱), 박배근, 한용원 등이 한 것으로 압니다. 저는 이에 관여하거나 지시한 사실이 없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인 우병규가 관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문 한용원 보안사 정보1과장 진술에 의하면 진술인의 지시로 정치활동 규제자 선별작업을 하면서 진술인으로부터 舊 정치인 중 신당 참여 대상자를 선정 받은 후 면담해 신당 창당에 동참하겠다면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놔두고, 거절하면 정치활동 규제자로 구분했다는데 아니란 말인가요.

답 아닙니다. 저는 한용원에게 그런 지시를 한 적이 없습니다.

문 창당 자금은 어떻게 마련했는지요.

답 솔직히 말씀드려 돈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종찬과 제가 전별금으로 가지고 있던 2,000만 원도 채 안되는 돈으로 발기인 대회를 할 때까지 사용하고, 그 뒤 창당준비위원회와 전당대회에서 모금해 추가로 사용한 것 같습니다.

문 전두환 대통령이 창당을 지시하면서 자금을 주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답 전당대회 전까지는 받은 적이 없습니다.

문 중정에서 120억 원을 가져다가 창당 작업에 사용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저는 알지 못하는 일이고, 하여간 창당과 관련해 제가 받은 돈은 없습니다.

문 김원기 전 부총리는 1980년 초여름 무렵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부터 잠깐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부총리 자리를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가 보다라는 생각을 갖고 전 장군을 찾아갔더니 돈 100억 원을 달라고 해 최 대통령에게 보고한 다음, 다음날 국무회의를 열어 예비비에서 100억 원을 지원하도록 결의해 주었다고 하는데요. 그 돈은 어디에 사용됐는가요.

답 모르겠습니다.

문 1980년 단행된 언론인 해직조치도 진술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것이 아니라 1980년 7월경 이상재가 언론인도 정화가 필요하다고 해 그렇다면 명단을 작성해 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 약 50~60명에 대한 명단을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보기에 너무 부실한 것 같아 중정과 치안본부 자료를 포함해 좀 더 충실하게 작성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상재가 다시 작성해 왔는데 100여 명이 채 안되는 숫자였습니다. 저는 그 명단을 받아서 당시 문공장관 이광표에게 주면서 정리되어야 할 언론인이라고 말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문 이상재가 먼저 언론인 해직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말인가요.

답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당시 이상재는 허문도 등과 수시로 접촉하면서 언론 문제에 대해 상의했는데, 언론인 해직문제도 이상재가 허문도 등과 사전에 논의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언론 통폐합은 이상재가 주도

 

문 허문도는 구체적으로 보안사 측에 어느 정도로 관여하고 있었나요.

답 글쎄요. 당시 허화평, 허삼수 등과 자주 어울리면서 각종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는 모르겠고 하여간 언론분야에 대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문 해직 대상자 선정은 어떻게 했는가요.

답 저는 이상재가 작성해 온 명단을 이광표 장관에게 건네 준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이상재가 알고 있습니다.

문 언론인 해직과 더불어 언론사 통폐합도 진술인이 주관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것이 아닙니다. 자세한 경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1980년 10월 16일 전역했는데 전역하기 직전에 이상재가 찾아와 언론사도 통폐합을 해야겠다며 ‘언론건전육성 종합방안보고’라는 문건을 내밀며 전두환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언론사 통폐합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어서 며칠간 그 보고서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저는 10월 16일 전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역한 후에도 이상재가 계속 찾아와 그 보고서에 대한 결재를 대통령으로부터 받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상재의 부탁으로 10월 하순경 청와대에 찾아가 대통령에게 보고를 드렸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말씀이 무슨 언론사까지 정리하려고 하느냐면서 결재를 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대통령의 결재를 받지 못한 채 도로 가져와 이상재에게 돌려주고 그 뒤에는 관여한 사실이 없습니다.

문 청와대에서 보고할 때 진술인 혼자 보고했나요.

답 아닙니다. 노태우, 우병규, 허문도, 허화평, 허삼수, 이광표, 김경원(金瓊元), 이웅희(李雄熙) 등이 배석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 사전에 연락을 해 모이게 한 것이지요.

답 제 생각에는 당시 허문도는 청와대에 있었는데 허문도 역시 이상재와 마찬가지로 언론사 통폐합을 찬성하는 사람이라 제가 보고하러 청와대에 오는 것을 알고 연락을 취해 배석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 그러면 진술인이 지시해 이상재가 언론사 통폐합안을 만든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답 아닙니다. 이상재가 만들어 와서는 대통령 결재를 받아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문 그 뒤 실제로 언론사 통폐합이 이루어졌는데 진술인은 관여한 사실이 없나요.

답 일절 없습니다.

문 1980년 8월 21일 군 지휘관들이 모인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전두환 장군 대통령 추대를 결의했는데 그 모임은 누구 요청으로 소집된 것인가요.

답 솔직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 군 지휘관들이 모여 현역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자고 결의하는 것이 적법한 것인가요.

답 절차상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문 그 회의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탁월한 영도력을 발휘해 국가의 위난을 수습하고 새 시대 새 역사의 지도자로 국내외에 뚜렷이 부각된 전두환 장군을 차기 국가원수로 추대할 것을 전군적 합의로 결의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발표한 사실을 알고 있나요.

답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문 보안사 문관 윤두열의 진술에 의하면 자신이 진술인의 지시로 그 결의문을 작성해 진술인에게 주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윤두열이 그렇게 진술한다면 그것은 사실일 것이고, 윤두열이 작성했다면 제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문 이번 진술에서 전회의 진술과 일부 다른 진술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전회까지의 진술서에는 저의 개인적 입장과 주변 사람들의 입장 등을 고려해 사실대로 진술하지 못한 사항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차제에 역사적 사실을 밝힐 것은 명백히 밝힘으로써 저는 물론 본 사건과 관련된 주변 모든 사람들이 참된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사실대로 진술한 것입니다. 다만 워낙 오래된 일이라서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 상세한 진술을 말씀드리지 못한 점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문 결국 이번 사건은, 12․12 사태로 인해 군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군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가지 않은 채 자신들이 장악한 군권을 바탕으로 국정을 장악하고 집권했으며, 그 과정에서 헌법기관인 국회, 내각 등의 권한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고, 국헌(國憲)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진술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답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보안사 정보처장으로서 본의 아니게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시국수습방안을 수립하고, 언론통제 등에 깊숙이 관여하게 됐던 것입니다. 저 스스로도 전두환 등 당시 신군부 핵심세력들이 원래부터 정권찬탈 의도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시국수습방안 실행과정에서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그 과정에서 괴로운 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전두환 등 신군부 핵심 세력들의 내란행위에 저도 모르게 동참해 중요한 일역을 담당하게 됐던 점에 대해 국민 여러분에게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앞으로 저의 여생은 이러한 죄송스러운 마음을 씻어버리기 위해서라도 국민을 위해 무엇인가 봉사하면서 보내려고 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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