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얼마 전 남북한이 공동으로 화살머리고지에서 전사자들의 유해를 발굴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화살머리고지는 철원에 있는데, 이 지역은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라 불렸을 만큼 치열한 싸움들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화살머리고지’는 ‘Arrowhead Hill’을 직역한 것입니다. (Arrowhead의 옳은 번역은 ‘화살촉’입니다.) 원래 이 지역이 미군 1군단의 작전 구역이어서, 중요한 지형들은 영어 이름을 얻었습니다. White Horse Hill, Porkchop Hill, Eerie Hill 및 Old Baldy가 대표적이죠. 이들 가운데 Arrow Hill과 White Horse Hill은 한국군이 싸운 적이 있어서, 각기 ‘화살머리고지’와 ‘백마고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1950년 겨울 북한으로 진격했던 국제연합군은 매복했던 중공군의 기습으로 많은 손실을 입고 밀려났습니다. ‘1.4 후퇴’라는 말이 가리키듯, 연합군은 서울을 다시 잃고 중부 이남으로 밀려났습니다. 아군을 지휘한 월튼 워커(Walton Walker) 중장이 교통 사고로 사망하면서, 아군은 공황에 빠졌습니다.

다행히, 후임인 매슈 리지웨이(Matthew Ridgway) 중장이 상황을 잘 수습했습니다. 특히 1951년 2월의 ‘지평리 싸움’에서 미군이 중공군에 크게 이기면서, 전황이 반전되었습니다. 이 결정적 싸움에서, 미군 2사단 23연대와 배속된 프랑스군 대대는 중공군 4개 연대의 포위 공격을 막아내면서 아군의 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에 5천 명의 손실을 입혔습니다.

덕분에 전선은 차츰 북쪽으로 올라갔고, 1951년 9월엔 마침내 임진강과 그 지류인 한탄강에 이르렀습니다. 한탄강의 지류인 역곡천은 옛 철원읍의 북쪽을 흐르는데, 이 시내의 북안에 화살머리고지(Arrowhead Hill)와 백마고지(White Horse Hill)가 있습니다.

화살머리고지의 유해들을 발굴한다는 기사를 읽노라니, 가슴에 향수 비슷한 감정이 일었습니다. 저는 그 지역에서 여러 번 사탄 관측을 했습니다. 겨울 밤 매서운 바람에 빗겨 낙하하는 조명탄의 금속성 불빛에 드러난 황량한 들판에서 사탄을 유도하던 기억은 반 세기가 지났어도 선명합니다.

그 기사 끝머리엔 유해 발굴을 위해서 남북한이 비무장지대에 12미터 도로를 내서 연결한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거듭 읽어보았습니다. 역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지 둘레의 유해를 발굴하는 데는 도로를 새로 낼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고지의 초소마다 보급로가 놓였으니, 지뢰를 제거하고 유해를 발굴하면 됩니다.

유해 발굴 사업을 위해 넓은 도로를 낸다는 얘기는 들여다볼수록 비합리적이었습니다. 결국 남북한 정부들과 군부들의 목표는 ‘유해 발굴’이 아니라 ‘남북한 도로 연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국방부의 발표가 제대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먼저, 유해 발굴이 목적이라면, 화살머리고지가 아니라 백마고지를 발굴해야 합니다. 표고가 395미터인 백마고지는 그 산악 지역의 남동쪽 모서리인데다 역곡천이 감돌아서 전술적으로 중요했습니다. 백마고지의 서쪽에 있는 281미터 화살머리고지는 전술적 중요성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움직인 중공군은 늘 백마고지를 목표로 삼았고 화살머리고지는 견제공격(diversionary attack)의 대상으로 삼아서 아군 병력을 묶어두려 했습니다.

1952년 10월 한국군 9사단이 중공군 38군 예하 병력과 싸웠던 ‘백마고지 싸움’은 전형적입니다. 중공군의 28회 공격과 한국군의 9회 공격이 이어진 이 처절한 싸움은 끝내 한국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한국군 사상자들은 3,500이었고 중공군 사상자들은 1만 가량으로 추산됩니다.

백마고지를 공격하기 전에, 중공군은 3개 대대의 병력으로 화살머리고지를 공격했습니다. 백마고지를 지키는 한국군 9사단을 바로 서쪽의 미군 2사단이 돕지 못하게 묶어두려는 의도였습니다. 당시 화살머리고지는 프랑스군 대대가 지켰습니다. 바로 ‘지평리 싸움’에서 미군 2사단 23연대에 배속되어 중공군을 물리친 부대죠.

전설적 인물인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 중령이 이끈 이 대대는 외인부대들에서 지원한 장병들로 편성되었습니다. 뛰어난 지휘관과 한국 파견을 지원한 외인부대 병사들로 이루어졌으니, 전투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죠. 프랑스 대대는 흔들림 없이 중공군 공격을 막아내면서 적군에게 큰 손실을 입혔습니다.

단 한 번 화살머리고지가 주 목표였던 적이 있습니다. 휴전 협정이 발효되기 직전인 1953년 7월 6일 중공군 73사단 병력이 한국군 2사단이 지키던 화살머리고지의 전초 두 곳을 공격했습니다. 6일 동안 이어진 이 싸움에서 한국군은 빼앗겼던 고지들을 끝내 되찾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한국군은 500명이 넘는 사상자들을 냈고, 중공군은 750명이 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이런 내력을 고려하면, 이 지역의 유해 발굴은 백마고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합리적입니다. 화살머리고지의 발굴은 그런 계획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죠.

하긴 중공군이 싸운 이 지역에서 유해 발굴 사업이 시작된다는 것도 적잖이 어색합니다. 유해 발굴이 진정한 목적이었다면, 북한군이 싸운 동부의 격전지를 먼저 발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왕 중공군이 싸운 지역에서 유해를 발굴하기로 했다면, 중국에 생색을 낼 수 있는 일이니, 중국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어디를 파든 중공군의 유해가 가장 많이 나올 터인데, 중국 사람들은 이번 일에 초청받지 못한 모양입니다. 도로를 내는 일에만 마음을 쓰다가, 벌어진 일로 보입니다.

도로는 지형이 결정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낸 도로도 이미 있던 도로를 따라서 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도로의 위치가 결정된 뒤에 가장 가까운 격전지를 찾으니, 화살머리고지가 나왔다고 보는 것이 현실적 추론일 터입니다.

그리고 두 달 뒤에 비무장지대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개통되었습니다. 국방부는 “한반도의 정중앙인 철원 지역에 남북을 잇는 연결 도로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의 정중앙”에 만들어졌다고 그 도로가 큰 의미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기여해야 도로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로는 배후에 도시도 산업 시설도 문화 시설도 없습니다. 이용할 사람들도 물론 없습니다. 즉 가치가 없습니다.

다만 그 도로는 군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습니다. 12미터 도로면 전차 부대가 아주 빠르게 기동할 수 있습니다. 남북한군 가운데 어느 쪽이든 그 도로를 이용해서 기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국군이 북한을 침공할 일은 없을 터이니, 그 도로는 북한군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것이죠.

‘도로 하나 가지고 무얼 그러나?’ 하는 얘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만, 도로의 위치가 문제입니다. 그 도로는 옛 철원읍으로 연결되는데, 거기서 북한군 전차부대는 곧바로 서울로 진격할 수 있습니다. 서쪽 길을 고르면, 철원-연천-의정부-서울의 경로고 동쪽 길을 고르면 철원-포천-의정부-서울의 경로입니다.

이곳의 지형이 워낙 북한군 전차 부대의 공격에 좋아서, 제가 복무할 때 아군의 작전 계획엔, 전쟁이 일어나면, 아군은 일단 후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 작전 계획이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북한군 전차 부대의 위협이 큰 곳이라는 사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국군은 1960년대 말엽에 부지런히 대전차 장벽들을 만들었습니다. 동 트기 전에 병사들을 깨워서 급히 밥 먹여 작업장으로 보내면, 깜깜할 때 돌아와서, 발 씻기고 밥 먹이기 바빴습니다. 그렇게 힘들여 만든 대전차 장벽들을 근자에 많이 허물었다고 들었습니다.

12미터 도로보다 더 큰 문제는 남북한이 비무장지대의 경계 초소(GP)들을 11곳씩 허물기로 한 일입니다. 국방부는 GP들을 철거하는 것이 긴장을 완화시켜서 평화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로 감시해야, 기습을 막아서 긴장 완화와 평화에 도움이 됩니다.

국방부는 11곳씩 공평하게 철거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북한을 침공하려 한다면, 그런 숫자는 뜻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을 침공할 뜻이 없으니, 철거되는 북한군 GP가 11곳이든 99곳이든 뜻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GP 11곳이 철거된 것만이 뜻을 지닙니다.

GP들은 가장 높은 고지들에 촘촘히 설치되어서, 비무장지대의 우리 구역엔 사각(死角) 지역이 없습니다. GP 하나가 철거되면, 갑자기 사각 지역이 많이 생깁니다. 그래서 적군의 침투를 막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GP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북한 지역의 관찰입니다. 지형에 따라 다르지만, 6킬로미터에서 10킬로미터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습니다. 저는 웅장한 오성산이 앞에 솟았고 거기서 내려온 저격능선이 바로 눈앞에 있는 금화의 GP에서 근무했는데, 거기서도 한탄강 계곡 따라 6킬로미터까지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9.19 남북 군사합의’의 ‘비무장지대 비행금지 구역 설정’입니다. 상대의 움직임을 감시할 수 있어야 평화에 도움이 된다는 원리를 어긴 이 합의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침공할 뜻이 없으므로, 이 조치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합니다.

게다가 북한은 비행 정찰 능력이 아주 작습니다. 현대적 정찰기도 장비도 없습니다. 연료도 부족해서, 정찰기를 띄울 형편이 못됩니다. 남북한이 똑같이 전방 지역을 정찰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얼핏 보면 공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만 제약하는 조치입니다.

비무장지대에서 지뢰를 제거하는 일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닙니다. 지뢰는 위험하니, 그것을 제거하는 일은 당연하다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지뢰는 가장 방어적인 무기입니다. 자기 땅을 지키는 군인들은 지뢰를 무서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남의 땅을 공격하려는 군인들에게 지뢰는 작동합니다.

비무장지대의 지뢰들은 거기 묻혀야 할 이유들을 지녔습니다. 애초에 고지를 보호하기 위해 묻혔고, 그런 사정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북한 땅을 침공할 생각이 없는 우리에게 비무장지대의 지뢰들은 우리의 안전을 가장 값싸고 충실하게 보장하는 무기입니다.

하나씩 보면, 이런 일들은 그리 중대한 사건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데 모이면, 그것들은 비무장지대의 근본적 훼손을 뜻합니다. 그리고 비무장지대의 훼손은 평화를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1953년 7월에 설치된 뒤, 비무장지대는 한반도의 전쟁을 막아온 가장 중요한 장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우리 시민들은 비무장지대가 평화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비무장지대를 가로질러 철길과 도로가 생갈 때마다, 평화가 가까워지는 것처럼 여깁니다.

마음을 더욱 울적하게 만드는 것은 비무장지대를 없애야 진정한 평화가 온다고 선전하기 시작한 것이 우파 정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노태우 정권은 비무장지대에 ‘평화시’를 설치하자고 제안했고, 박근혜 정권은 그곳에 ‘세계평화 공원’을 만들자고 역설했습니다.

점점 많은 시민들이 비무장지대를 ‘평화를 위해 철거되어야 할 무엇’으로 인식하는 것은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입니다. 비무장지대의 내력과 성격이 잘 알려지도록 해서, 비무장지대를 지켜야 합니다.

밈 복합체 (Memeplex)

문화가 복잡한 현상이므로, 문화의 기본적 단위인 밈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적이 드물다. 거의 언제나 밈은 관련되었거나 보완적인 밈들과 결합하여 유기적 복합체를 이룬다. 예컨대, 이념은 많은 아이디어들과 신조들과 정책들이 결합해서 나온 거대한 복합체다.

이런 복합체는 흔히 함께 복제된다. 도킨스는 그런 복합체를 “공적응된 밈 복합체(coadapted meme complex)”라 불렀다. 이 말은 뒤에 ‘밈 복합체(memeplex)’로 생략되었다.

밈들의 환경이 동물들의 뇌이므로, 밈들은 더 많은 뇌들에 자리잡으려고 서로 경쟁한다. 그리고 뇌들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것들이 선택되어 널리 퍼진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들에 자리잡은 밈들이 실제로 합리적인지 미리 알기는 어렵다. 사람의 천성이나 직관에 맞는 밈들이 사람의 뇌에 자리잡을 터이므로, 합리적이지만 사람의 천성이나 직관에 어긋나는 밈들은 널리 퍼질 수 없다.

자유주의는 사람들의 천성이나 직관에 잘 맞지 아니한다. 사람은 오랜 세월 엄격한 위계 질서를 갖춘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개인을 앞세우는 일에 거부감을 품게 된다. 개인이 가치의 궁극적 귀속처라 여기는 자유주의자들은 늘 소수에 머문다.

그래서 개인들이 주도하는 시장경제를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시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리도 이해하기 어렵다. 시장경제를 고마워하고 옹호하는 사람들이 드문 것은 어쩔 수 없다.

반면에, 사람들의 천성이나 직관에 맞는 밈들은 비합리적이라도 사람들의 뇌들에 쉽게 자리잡는다. 민중주의(populism)라 불리는 주장들은 바로 사람의 천성과 직관에 맞지만 실제로는 비합리적인 밈 복합체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지식들을 따라 행동한다. 그런 지식들은 모두 밈 복합체들이다. 따라서 우리를 이끄는 것은 밈 복합체들이다. 자신의 믿음을 따라 인륜에 어긋나는 테러를 태연히 저지르는 광신자들을 보면, 우리는 그들의 어리석음에 고개를 젓는다. 그러나 테러리스트 자신은 견해가 다르다. 누구도 자신의 밈 복합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를 움직이는 근본적 힘들은 모두 본능이다. 본능은 일시적으로도 억제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 몸의 주인은 우리의 본능을 만든 유전자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밈 복합체들이다.

“경제학자들과 정치철학자들의 아이디어들은, 그것들이 옳을 때나 그를 때나,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것보다 힘이 크다. 실로 세상은 다른 것들에 의해선 거의 지배되지 않는다. 자신들이 어떤 지적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믿는 실천가들은 대개 어떤 죽은 경제학자의 노예다.” 1936년에 케인즈가 한 이 얘기는 해가 갈수록 오히려 절절하게 다가온다.

어떤 밈 복합체들이 합리적인지 가려내는 길은 그것들을 실제로 실행해보는 길뿐이다. 그것들이 현실에서 경쟁한 뒤에야 비로소 가장 나은 것이 가려진다. 하이에크가 경쟁을 “발견 절차(discovery procedure)”라 부른 것은 바로 이런 사정을 가리킨 것이다.

이미 현실에서의 경쟁을 통해서 열등하다는 판정을 받은 밈 복합체들이 근년에 우리 사회에서 되살아났다. 케인즈의 얘기대로, 밈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어디엔가 잠복했다가 어리석은 뇌들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릴 따름이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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