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격 진압 삼가라는 말은 돌에 맞아죽으라는 뜻이나 마찬가지”
3공수 16대대 운전병 돌진 차량 피하지 못해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사망
5월 20일 밤 내내 광주역 앞에서 공수부대, 차량 돌진공격 받아

[편집자 주] 이 글은 1980년 5월 봄 광주사태 당시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박종규 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의 체험기다. 광주사태가 진압되고 한참 후인 1988년 육군본부는 진압에 투입됐던 계엄군의 지휘관들의 체험기를 요청했고, 육군본부는 이들의 체험기를 묶어 ‘역사자료’로 보관하고 있었다. 김영삼 정부의 5.18 특별법으로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육군본부는 ‘역사자료’를 참고자료로 검찰에 제출했다. 박정규 대대장은 자신이 광주 시내 일원에서 체험했던 내용을 군인 입장에서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 글을 통해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어떤 방식으로 시위를 진압했는지,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어떻게 저항했는지, 광주교도소로의 철수, 이후의 진압작전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희귀자료다. 전체 내용을 상·하 두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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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규당시 3공수여단 15대대장(육군 중령)

작성일시 : 1988년 2월 10~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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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되었던 3공수 15대대는 6개월 전 부마사태 당시 부산 마산에 출동하여 시위진압 경험이 있는 부대였다. 사진은 부마사태 당시 부산에 출동한 군인들.(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되었던 3공수 15대대는 6개월 전 부마사태 당시 부산 마산에 출동하여 시위진압 경험이 있는 부대였다. 사진은 부마사태 당시 부산에 출동한 군인들.(연합뉴스 제공)

 

5월 20일 광주로 출동

 

나는 광주사태의 해결이 가장 큰 정치적 이슈가 되었던 지난해(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극도의 지역감정을 보고, 내 고향이 충청도인 것이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나는 1979년 10월 17일, 부마사태에 진압부대로 참가한 바 있어, 영남과 호남의 문제로 오해되기 쉬운 광주사태의 진술에 객관성을 높여주는 입장에 있다.

나는 광주사태에서 두 번이나 결정적인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부여된 임무를 완수했다. 그러나 군으로부터 받은 혜택이 전무한 지금의 이 시점에, 광주사태에 대한 자료를 작성하는 것은 이 진술의 객관성을 높여 주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될 수 있다.

나는 광주사태에 대한 왜곡된 보도와 추측이 난무하던 1985년 2월 이후,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광주사태에 대한 공개적인 설명을 자제해 왔다. 망각 속에 덮어두자는 생각에서였으나 오늘 육군의 권유로 이제 그 사태의 전부를 진술하게 됐다. 진술상 고지식한 표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하려는 의도이지 결단코 과시가 아님이 전제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5월 17일 저녁에 계엄확대가 발표되고 각 여단의 각 대대가 대학교 하나씩을 맡아서 수색을 했다. 우리 여단은 육군 기동타격대로 현 주둔지에서 출동준비만 해놓고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통상 군사작전에서 중앙대비(기동타격대)가 임무에 투입된 일이 없어서 ‘이번에도 영내에서 대기만 하다가 해체되겠거니’ 하고 좋아했다. 출동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잠자리며 먹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5월 19일 점심시간도 잔디밭에서 잡담하기 좋을 만큼 따뜻했다. 광주에 내려간 7여단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사령부에서는 “시위진압 경험이 많고 지난해 10월 부마사태에 출동하여 깨끗하게 임무를 완수한 3여단을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별다른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5월 20일 광주로의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도대체 시위진압에 육군의 기동타격대가 가야 할 만큼 다급한 상황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공수단의 출동 비상은 빠르면 20분, 늦어도 1시간이면 완료된다. 전투복에서 얼룩무늬복으로 갈아입고 총과 탄띠와 실탄에 철모를 착용하면 준비완료다. 특별히 시위진압 출동이라 하여 장비가 달라지지 않는다. 적 지역에 침투하는 장비로 출동하는 것이 규정이다.

비상벨이 울리면 공사단 배낭(륙색) 속에 내의 2벌, 예비 전투화, 치약·칫솔, 양말, 모포를 넣어서 꾸리고 단독 군장으로 차량에 탑승하는 게 전부다. 대검은 개인지급하면 분실과 사고의 우려가 있어 지역대별로 창고에 보관하여 출동장비에는 빠져 있는 게 상례였고, 내가 공수단 10년 근무 중 대검을 지급받아 본 기억이 없다.

계엄업무로 출동을 많이 했지만 공수단의 얼룩무늬복만 봐도 조용해지기 때문에 장비는 될수록 가볍게 가져가는 것이 고참돌의 소위 요령이었다. 다만 이날 출동 때는 ‘만반의 준비’를 위해 개인당(장교는 제외) 가스탄 1발과 지역대당 미제 E-8 발사탄 1세트씩을 지급받고, 진압봉 1기씩을 추가 지급했다.

광주에 도착하니 광주역에는 31사단장(정웅)이 역장실에 나와 있었다. 정웅 사단장은 패퇴한 장수처럼 초라하고 질린 표정으로 “공수단이 학생들을 마구 때린다”고 모기소리만 한 소리로 여단장에게 하소연했다. 여단장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묵묵부담이었다. 나는 두 지휘관의 대화를 더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와 7여단 권승만 중령을 만났다.

피로에 지친 권 중령은 말도 말라고 하며 겁이 난다는 것이었다. 오전에는 좀 나은 편인데 조금 있으면 시위 군중이 갈쿠리(갈고리), 쇠파이프, 몽둥이, 돌 등으로 공격을 한다는 것이었다. 공수단의 얼룩무늬복만 봐도 도망가기가 바쁜 게 이제까지의 시위 군중이었는데 도망은커녕 공격을 한다닌 이해할 수 없는 조짐이었다.

 

고립된 공수부대

 

식사를 어떻게 했는지 지금 기억이 없다. 아마도 열차 안에서 건빵 1봉지와 별사탕 댓 개를 먹은 게 전부였을 것이다. 그게 소위 비상식량이었으니까. 전남대학에 투입하기로 되어 있던 우리는 곧 광주시내에 배치됐다. 우리 대대가 맡은 지역은 양동다리에서부터 광주고속에 이르는 광주의 남쪽 주요 도로였다.

비가 오고 있었다. 장비가 젖고 추워서 무작정 도로에 서 있기는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병력을 팀 단위로 주요 교차점에 배치하고 양동교에 서 있었다. 저녁이 되면서 도청 쪽과 양림교, 충장로 지역에 배치된 11. 12, 13대대 지역에서 시민·학생들과의 잦은 충돌이 있다는 보고가 무전기에 들려왔다.

나는 우리 대대지역에 별일이 없는가 하여 몇 개 교차지점을 순찰했다. 중간중간에 우리 병력 하나둘을 10여 명의 시민이 에워싸고 욕을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부끄러운 일이었다. 도대체 세계 최강을 자랑한다는 무적의 공수단이 시민에 포위되어 욕을 듣는다니….

나 자신도 무전병과 둘이 순찰하기는 겁이 났다. 병력이 너무 분산배치되어 힘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대대는 다른 대대에 비하면 훨씬 나은 편이었다. 다른 대대는 많은 공격을 당했는지 배치고 뭐고 집어치우고 대대 전체가 집결해 있었다. 그래도 자기 보호가 어려운 상태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여단장은 분산배치에서 자기방호로 대대가 집결하도록 하는 동시에, 대대 자체가 위협을 받자 여단을 집결시키기 위해 11, 12, 13, 15대대를 광주역 앞으로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19시쯤 비가 그쳤다. 악몽의 5월 20일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점심을 부실하게 먹은 우리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허기가 지고 입에서 냄새가 났다. 나는 대대 장병을 믿고 대대 장병은 나를 믿으며 버텨 나갔다. 이때 “라면을 끓여 달라고 어느 식당에 들어갔더니 공수부대에게는 안끓여 주겠다고 하더라”, “병력이 쉴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게 성당 마당에 좀 들어가겠다고 하니까 신부가 안 된다고 거절하더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 군인은 광주에서 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위 시절 유격훈련을 받을 때 전라도 화순 어디에선가 농부에게 얻어먹은 보리밥과 고추장 맛을 잊을 수 없다. 군 생활 15년간 얼마나 많은 훈련을 다녔는가. 얼마나 많은 지역을 다녔는가. 김치·고추장·된장은 말할 것도 없고 힘들고 지칠 때면 주민의 도움을 받고 군인인 것을 보람으로 살아왔는데….

적군도 다치면 치료를 해주고 밥을 주는데, 지친 병사가 가져간 라면을 끓여 달라는데 어떻게 거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직자의 덕목은 어디로 가고 철문을 굳게 잠근 채 안 된다고 돌아설 수 있는가? 비 맞고 지친 이 이방의 군인, 집안이 어려워 특전하사로 자원입대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배고파 지친 모습을 보고서 어떻게 식당의 미닫이문을 닫아 버린단 말인가?

나는 양동교에서 팀 단위 철수를 지시했다. 집결하여 이동하는 것보다는, 그저 지나가는 행인처럼 7~8명씩 열 지어 무표정하고 아무 일 없는 듯 하되 발걸음은 빠르게 하여 광주역으로 모여들었다.

11, 12, 13대대가 광주역에 무사히 도착하는 데는 엄청난 위험이 있었다. 대대가 완전히 포위되어 시위 군중의 돌과 몽둥이에 대대가 해체 직전의 위험까지 갔다고 한다. 화염방사기, 가스분출기로 겨우 통로를 열어 쫓기듯 돌아왔다고 한다.

21시가 되면서 어느 정도 대형을 갖춘 상태에서 광주역에 집결이 완료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심한 공복감을 느꼈다. 힘이 없어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문득 내 병사들이 생각났다. 중령인 대대장이 이렇게 배가 고프다면 말단의 병사들은 얼마나 배가 고플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이 지역의 방어에도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방어지역의 제일 선두에 있기로 했다.

 

허기진 공수부대를 괴롭힌 무인 돌진 차량

 

광주사태의 시작은 지금부터다. 내가 부여받은 3개 방어지역 중 제일 위험한 통로인 광주고속과 광주역을 잇는 도로 상을 방어하고 있는데, 깜깜한 밤 느닷없이 도청 쪽 12대대 담당지역에서 버스 한 대가 터덜터덜 굴러 와서는 광주역 앞 분수대를 들이받고 넘어졌다.

광주의 시위는 공수단의 엄청난 착각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얼룩무늬복에 베레모만 쓰고 차려 자세로 투입되기만 하면 시위가 끝나는 것으로 통념화되어 있던 시위가 공수단의 패퇴, 공수단에 대한 공격, 부대의 와해, 사단장 차량의 피탈, 공수단의 무등산으로의 도주 등 실로 6·25 전사(戰史)의 3군단 패퇴에 못지않은 치욕의 전사가 기록되고 말았다.

무인 돌진 차량(액셀러레이터와 운전대를 일정 속도와 방향에 묶어놓고 기어를 1단에 넣은 후 클러치를 떼면서 사람이 뛰어내리고 돌진케 하는 차량)공격이 시작되면서 우리 대대 앞에도 5대 가량의 무인 돌진 차량이 간헐적 공격을 감행했다. 찾아서 공격을 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고 허기져 있었다. 방향과 속도가 일정하니까 돌진 차량을 피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배치된 대형에서 차량의 통로만큼만 열어 주면 되는 것이니까.

그러나 그것도 배부르고 편안할 때의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간헐적 공격과 어느 방향에서 올지 모르는 불안 때문에 늘 주의와 신경을 곤두세워 피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이때부터 “차 온다!”는 고함소리가 우리를 놀라게 했다. 광주사태가 끝나고 귀대하여 몇 달이 지나도록 우리 3여단 장병에게 “차 온다!”는 고함경고는 잠을 못 이루게 하는 악몽의 함성으로 잔영되었다.

간헐적 무인 차량 공격과 더불어 각 방면에서 폭도의 몽둥이 공격, 투석 공격은 파상적으로 계속되었다. 적은 우리를 제압하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전진했고, 우리는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 부대 건재를 파괴당하지 않기 위해 필사의 대항을 지속했다.

 

수십 차례 파상공격

 

출동 당시에 1인당 1발씩 지급된 최루탄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배고파 지친 150여 명(1개 팀 평균 8명×20개 팀=160명-전남대 잔류인원)은 수백여 명의 파상공격 앞에 너무도 허약한 방어병력이었다. 우리와 근접한 폭도 대열의 유난히 공격적인 수 명은 몽둥이 몇 개로 제압하기에는 너무 힘들게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설사 폭도들을 체포한다 하더라도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수십 명이 필요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상황을 예상치 못하고 변변한 포승줄 하나 없이, 인계해 줄 경찰관도, 싣고 갈 차량도 없이 몽둥이만을 방향 없이 휘저어대고 있었다.

“폭도도 우리 동포다. 허벅지 아래만 때려라” “머리를 때리지 말라” “과격한 진압을 삼가라”는 말은 폭도의 돌멩이에 맞아 죽으라는 지시나 다름없었다. 계엄군과 민주시민 항쟁의 차원이 아니라 죽이고 죽이려는 감정의 대립이었다.

영남과 호남의 대립이 아니라 20대 젊은이들의 난투극이었다. 집권층과 피지배층의 대립이 아니라 군대 간 자식과 버스 조수의 감정 대립이었다.

견디다 못한 2개 팀 정도가 배고픔과 지친 가운데서, 폭도에 대항하여 정면 돌파를 감행하면서 함성으로 마지막 기세를 올리자 그들은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최루탄 공격을 위해 방독면 착용을 구령했으나, 방독면을 착용할 힘마저 없어 가스탄 몇 개를 힘껏 던져봐야 폭도와 함께 가스 속에 눈물만 흘렸다. 오히려 폭도가 가스탄을 주워서 다시 우리 진영에 던지면 발로 차서 겨우 풀밭으로 던져두는 정도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수십 차례의 파상공격(돌, 몽둥이)이 지나고, 그 사이사이에 간헐적 차량공격도 피하거나 물리치고 한동안 적막이 있었다. 언제쯤 돌아가 라면을 먹게 될지 기약 없이 대기하는 사이에, 나는 공격이 뜸한 지역을 돌아봤다. 차량 안에서 졸고 있는 병사, 담배만 뻐끔대는 병사, 위엄 있던 대대장이 지치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타나자 저녁 걱정을 해주던 연락병…. 그리고 유일한 대대장의 기동수단인 지프차가 언제 또 폭도에 의해 불 질러질지 모르는 듯 길 옆에 대어 있었다. 공수단의 위엄과 자부심은 너나없이 그 실체가 드러나고 초라해진 지 오래였다.

밤 10시가 훨씬 넘었다. 그러나 그런 적막도 잠시였다. 저 멀리 양동교 방향에서 함성과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함성이 가까워지더니 갑자기 “차 온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12대대 쪽에서 굉장한 속도로 라이트를 켠 화물차가 질주하여 분수대를 돌아 달아났다. 엄청난 속도였다.

얼마 있다가 16대대 운전병이 돌진 차량을 피하지 못해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죽었다는 최초의 피해보고가 구전되어 왔다. 그는 내가 16대대에 있을 때 운전병으로 선발되어, 제대를 며칠 남기고 광주에 출동했다. 자세한 상황은 보지 못했고, 상황이 끝난 후에도 그것을 물어볼 만큼 여유가 있지도 않았다.

서울에 복귀한 후에는 광주에서의 희생자가 많아서 군인의 죽음 정도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아 지금도 나는 자세한 상황은 모른다. 다만 16대대가 광주역 좌측 방향에서 반대 방향으로 포진하고 있는 사이에 돌진 차량이 시속 100km로 달려들어 하늘이 돕지 않았다면 30명 정도 죽었을 사고였으나, 대대장 운전병만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들었다.

 

쏠 것인가, 말 것인가!

 

이제 무인 돌진 차량이 유인 돌진 차량으로 바뀌어 속도도 엄청났지만, 방향이 일정치 않고 오히려 우리 대형을 찾아서 돌진하는 공격이기 때문에 우리의 위험성은 훨씬 높아졌다. 드디어 우리 대대 앞에 유인 돌진 차량이 공격을 감행했다. “차 온다!”는 고함소리에 눈을 돌리니, 과연 화물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직진하고 있었다.

이제 유인 돌격 차량의 출연으로 가스탄도, 곤봉도, 포승줄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마치 소총 앞에 탱크가 출현한 미아리 전투와도 같았다. 최선의 공격이라고 떠오른 대대장의 전략(?)이라는 게 차량의 바퀴를 펑크 내는 일이었다. 얼마나 비폭력적인 방어대책인가? 또 그와 같은 생각이 순간적 발상이라는 면에서 얼마나 순수했던가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대대원은 실탄을 휴대하지 않았다. 포승줄과 최루탄도 과잉장비라고 투덜댔던 우리가 실탄이 소요될 상황을 예견이나 했겠는가? 총은 다만 군인과 떨어질 수 없는 분신의 개념으로 휴대한 것이었지, 쏘려고 휴대한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공수대가 출동명령만 받으면 반사적으로 들고 나서는 약간의 탄약은 전남대학에 남겨놓은 상태였다. 유일한 총기는 대대장인 나의 45구경 권총과 실탄 14발 뿐이었다.

순간 나의 병력을 뚫고 화물차가 돌진하고 있었다. 총을 꺼냈다. 탄창을 장진하고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타이어를 조준하는 순간 차는 이미 분수대에 가까워져 명중되어 봐야 목적지까지는 쇠바퀴만으로도 굴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준점을 차량의 연료탱크로 바꿨다.

차를 세우는 것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우리 병력 사이를 이미 뚫고 지나간 다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원한 보복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에 연료탱크를 폭파시켜 차량이 뒤집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연료탱크를 조준했다. 제1차적 안전은 연료탱크와 내 총구 앞에 내 병력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다음은 실탄이 빗나가서 맞은편 가게나 민가에 피탄되었을 경우의 안전을 고려하여, 차량이 만가 지역을 통과한 후 조용히 방아쇠를 당겼다.

권총사격의 요령은 조용히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다. 게리쿠퍼식의 기분을 내면서 방아쇠를 당기면, 영화에서는 잘 맞아도 실제는 전혀 명중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또 하나의 문제가 떠올랐다. 만약 차량이 폭파하는 순간 운전을 하고 있는 저 폭도가 불에 타거나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총을 거두기는 이미 늦었다. ‘탕’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제발 명중하지 말아라“ 하고 기도했다. 명중하라고 쏘면서 명중하지 말아라? 광주사태 해결이 운위되고 있는 차제에 있어서 왜 그것이 그냥 잊혀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가 하는 가장 철학적 상황의 표현이다.

사실이 규명되기를 바라지만, 또 한편은 그대로 묻혀지기를 바라는 심정은 폭도의 차량에 조준해 발사하면서 명중되지 않기를 바라는 이중적 심정이 그것이다. 다행히(?) 차에 명중되지 않고 적은 피해 없이 통과했다. 그 돌진 차량 운전사는 분수대를 들이받고 정지되어 12대대 병력에 체포되었다고 전해 들었다.

 

‘고양이 앞의 쥐’ 신세

 

수차례의 폭도 공격이 있었고 시간은 밤 11시가 지난 듯 싶었다. 이제 또 한 번의 차량공격이 예고되었다. 병력의 선두에 서 있는 내 앞 저 멀리 군중 속에 헤드라이트를 켠 2t 트럭이 돌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부 병력이 “차 온다”고 예고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기억을 더듬는 지금 또 가슴이 뛰고 있다. 방법은 없었다. 총은 실탄을 제거하고 안전검사를 하여 돌 집어넣어두었다. 총을 꺼내 이번에는 틀림없이 명중시키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총은 아직 잡지 않았다.

차가 돌진을 시작했다. 아까와는 달리 직진이 아니고 병력이 피하는 쪽으로 향하면서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돌진해 오고 있었다. 정확히 내 정면이었다. 100m, 50m, 30m… 명중시킬 곳이 없었다. 라디에이터에 명중시켜 봐야 돌진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바퀴는 잘 보이지도 않고 크기도 너무 작았다. 나는 여기서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 선택형 문제 하나를 출제하고 싶다.

쥐가 고양이를 정면으로만났을 때 왜 꼼짝하지 못하는가?

가. 공포에 질려서 심리적으로 두 발이 안 떨어진다.

나. 고양이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기 위해서 서 있는다.

다. 움직임으로써 공연히 고양이의 마음만 공격적으로 만들면 안 되기 때문에 고양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라. 고양이와 쥐의 달리는 속도가 절대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도망가기를 포기한 것이다.

나는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적은 이미 나를 발견하고 나를 목표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리가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는 간단하다. 내가 차량 앞으로 돌진하면 그대로 부딪쳐 죽게 되어 있었고, 왼쪽으로 도망가면 운전사의 간단한 핸들 조작만으로 나는 치어죽게 되어 있었다. 오른쪽으로 도망가도 조건은 마찬가지이며, 뒤로 도망가도 절대속도가 워낙 차이 나기 때문에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발이 아스팔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는 이미 맹렬한 속도로 3m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그 짧은 0.1초 동안 나는 부모님 생각이 났다. 집안 생각도 났다. 그러나 가장 끝까지, 죽음 앞에서 생각한 것은 배고파 지친 우리 대대 병력이 내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이 난국을 정리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제 죽음은 나의 행동에 달려 있거나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게 아니고, 나의 운명에 달려 있었다. 앞뒤의 선택은 이미 늦었고, 내가 살기 위한 선택은 좌나 우 둘 중의 하나였다.

 

부하를 살리지 못하면 지휘관이 아니다

 

오른쪽으로 뛰어 넘어져 버렸다. 마치 비행기가 미사일을 피하는 방법으로, 권투선수가 스트레이트를 피하는 방식으로 차량은 휠 지나가면서 나를 에워쌌던 부대 4명 중 2명이 차의 뒷바퀴에 끌려가면서 다친 것으로 끝났다. 차가 분수대에 부딪혀 맘추자, 우르르 몰려간 우리 병력에게 운전사가 잡혀 끌려 내려졌다. 감정에 북받친 우리 병력은 진압봉으로 그를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잘못을 안 그 운전사는 말 한마디 못하고 맞고 있었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때리지 마!”

그러나 그것은 전장에서 사격을 중지시키는 것만큼 들리지 않는 대대장의 명령이었다.

“때리지 마! 때리지 마!”

내가 마지막 고함을 지르자 모두들 자기 위치로 갔고, 마지막 병사 하나가 운전사의 머리를 발로 짓이기고 돌아갔다. 그는 축 늘어져 뻗어 있었다. 죽은 것 같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 한동안 쳐다보기만 했다. 병력을 불러 치우게 하면 또 시체라도 짓밟을까 걱정이 되어 가만 놓아 두었다. 시선을 그 운전사에게 둔 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잠시 후 쥐똥나무 밑 아스팔트 위에 뻗어 있던 그가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아무도 못 본 줄 알고 쥐똥나무 뒤로 빠져나갔다. 키는 160cm 정도, 몸무게 50kg 정도의 호리호리한 몸매에 얼굴은 어두워 볼 수 없었지만 20세 전쯤 되는 녀석이었다.

광주사태의 진상을 규명하자면 그 녀석을 내 앞에 잡아와 무릎을 꿇고 사죄하게 해야 한다. 그 차에 치어 광주사태가 끝날 때까지 다리를 절고 다니던 내 부하에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어야 한다.

나를 죽이기 위해 정면으로 달리는 적에게 나는 실탄과 총이 있음에도 사격을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사격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사격을 한다는 생각이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나는 광주사태에 참가한 대대장으로서 이만한 비폭력적 소신을 갖고 있었다고 자부한다. 나의 동료가 만에 하나라도 발포를 했다면,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은 이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3단 논법적 해석이 가능하다.

만약 그 돌진 차량이 나만 죽이고 지나갔다면 별문제지만, 내 부하가 죽었다면 나는 군인으로서의 직무유기다. 나는 군인이 아니며 이미 폭도의 편에 선 기회주의자다. 부하를 살리지 못한 지휘관은 이미 지휘관이 아니다. 하물며, 대대장 혼자 무장을 하고도 부하가 죽어가는 위험에서 이를 사용치 않았다는 것은 전시(戰時)에 총살 당해야 할 비겁자이기 때문이다.

24시가 되어 시위가 뜸해졌다. 16대대가 전남대학 입구를 엄호하는 동안 우리는 전남대학교로 철수를 시작했다. 행군을 하면서 16대대 운전병이 치어죽은 과정의 단편과 차량 돌진 공격의 유형에서 ‘5만원짜리’와 ‘8만원짜리’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5만원짜리는 무인 돌격 차량 조작이고, 8만원짜리는 유인 돌격으로 공수단 대형을 한 바퀴 공격하고 오는 사람에 대한 포상이라고 들었다.

한 녀석을 잡았더니 가슴에 타이어로 몸을 감는 안전장치를 했더라는 얘기며, 차량 돌격조의 출발지를 공격해서 수색해보니, 진짜 조정자는 구망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며 지휘하고 있더라는 얘기도 들었다. 환각제 비슷한 약을 뺏어서 그 당시 군의관에게 확인시켰더니, 환각작용을 하는 약이 맞다고 했다. 따라서 우발적인 시위가 아니고 조직적인 시위라는 것이었다. 어느 덧 전남대학교에 도착했다.

별이 많이 떠 있는 초여름 밤이었다. 전남대학교 숙직실에서 처음 라면을 끓여먹었다. 살 것 같았다. 숙직실 1평 방에 여럿이 다리를 포개고 잠이 들었다. 광주사태의 첫날밤은 그렇게 지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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