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확 진술조서 "김정렬 씨가 최규하 대통령 하야 적극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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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12.06 09:52:20
  • 최종수정 2018.12.1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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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군부, 비상계엄 전국확대 후 국회해산, 국보위 설치 등 정권찬탈 의도 가속화”
“최규하, 행정권 사실상 박탈된 상황에서 신군부 꼭두각시로 전락”
"최규하, 10.26 당시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장시간 애매한 태도 취한 부분 합수부가 조사"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2․12, 5․18 재판 당시 1979년~1980년 격동기에 국무총리를 지냈던 신현확 씨의 검찰 진술서 중 일부다. 신현확 전 총리는 검찰에서 "최 대통령은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해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는가' 하며 대단히 불쾌하고 노한 표정으로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이 나타났을 때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사후 재가를 한다는 뜻에서 결재 시간을 명기했다는 것이다. 신 총리는 신군부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 건의에 대해 결정권자인 최 대통령이 단호히 거부할 것을 기대했는데, 이것을 재가하는 것을 보고 매우 섭섭했으며, 국가의 장래가 걱정됐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에게 하야를 설득한 사람은 김정렬 씨며, 그가 최 대통령에게 하야를 적극 권유했다고 증언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현확 총리. 신 총리는 신군부의 집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내각 총사퇴로 물러났다.(출처 : e영상역사관 국가기록사진)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신현확 총리. 신 총리는 신군부의 집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내각 총사퇴로 물러났다.(출처 : e영상역사관 국가기록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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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 진술조서 1995년 12월16일 서울지방검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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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의 각료라서…

 

"본인은 경북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9년 12월10일부터 1980년 5월20일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하고, 1981년 4월부터 1985년까지 국정자문위원으로 재직한 신현확입니다. 본인이 국무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발생한 12․12 사건 및 5․18 사건과 관련해 우편진술서 형식으로 제출하거나 직접 출두해 진술한 바가 있는데, 그에 대해 다시 물으시면 사실대로 진술하겠습니다."
-진술인이 신현확인가요.
"예. 제가 신현확입니다."
-국무총리를 역임하기 전에는 무슨 직에 종사했나요.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부흥부장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국회의원, 1975년부터 1978년 12월까지 보사부장관, 1978년 12월부터 1979년 12월까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역임했습니다."
-진술인에 대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은 언제 국회에 제출되었는가요.
"1979년 12월11일 제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임명동의안은 언제 의결되었나요.
"다음날인 1979년 12월12일 의결됐습니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야당인 신민당 의원들은 표결에 불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신민당 의원들은 본인이 유신체제하의 각료였다는 이유로 표결에 불참해 여당인 민주공화당 의원들만 표결에 참여했습니다."
-10․26 사건 직후인 1979년 11월2일 뉴욕타임스에 '한국 군부의 고위 장성들이 10월29일과 30일 양일간 국방부 내에서 비밀모임을 열어 유신헌법을 폐기하기로 비공식 결정을 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에 충성심이 강한 전 장군(전두환) 등 일부 장성들이 유신헌법의 조기 폐기에 반대해 폐기 시기를 둘러싸고 약간의 대립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렸는데요. 그러한 기사를 읽거나 군부에서 이와 같은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나요.
"그런 기사를 보거나 논의를 들은 사실이 없습니다."
-1979년 11월10일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시국담화문을 발표하면서 현행 유신헌법에 따라 제10대 대통령을 선출하고, 새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전 빠른 시일 내에 헌법을 개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사실을 기억하고 있나요.
"예. 당시는 본인이 부총리를 맡고 있을 때인데 국민들은 박 대통령 사망으로 유신이 끝난 것으로 이해하고 하루 빨리 헌법을 제정해 새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기간 대통령을 선출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므로 본인이 최 대통령과 상의해 일단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선출하되, 가급적 빨리 새 헌법을 제정해 정권을 이양한다는 방침을 밝히게 된 것입니다."
-그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어땠나요.
"당시 여야 정당이나 국민들이 환영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술인은 10․26 사건 이후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으로 활동한 전두환과 어떤 사이였나요.
"10․26 이전에는 전혀 몰랐는데, 그 후 주요사항이 있을 때마가 개최되었던 국가안보회의에서 전두환이 가끔 보안사령관 자격으로 10․26 사건에 대한 보고를 하여 알게 됐습니다."
-당시 9사단장이었던 노태우와는 어떤 사이였나요.
"10․26 이전까지는 전혀 몰랐는데, 1980년 봄 무렵 수경사령관이라고 하면서 저의 사무실로 인사 왔기에 처음 봤습니다."
-진술인이 국무총리로 취임할 당시 10․26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있었나요.
"1979년 10월26일 22시30분경 국방부장관실로 급히 오라는 비상연락이 있어 가 보았더니 최규하 국무총리, 국무위원 2~3명과 김재규 중정부장 등이 있었습니다. 김재규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내용은 말할 수 없고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선포를 의결해달라'고 했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어떻게 비상계엄을 선포하느냐면서 이유를 물었더니 '말할 수 없다'고 하여,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면서 두 시간 정도 언쟁했습니다. 김재규는 결국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이 유고'라고 말해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됐습니다."
-진술인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10․26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연행․조사하겠다는 보고를 사전에 받은 사실이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진술인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연행된 사실을 언제,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1979년 12월12일 19시 제가 국무위원에 대한 인사를 대통령과 상의하기 위해 총리 공관으로 혼자 갔는데, 전두환 장군이 최 대통령에게 보고 중이어서 약 1시간 정도 기다린 후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당시 최 대통령이 '조금 전에 전두환 장군이 다녀갔는데, 10․26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해 조사하겠다면서 재가해 달라 하기에 국방부장관 결재 없이는 재가할 수 없으니 절차를 밟아 오라고 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0~40분 정도 지난 다음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통령 비서실 관계자가 외부로부터 연락받아 정 총장이 연행되었다는 보고를 해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는가!"

 

-진술인은 개각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최대통령을 만났다고 했는데 그와 관련하여 어떤 의견을 보고했나요.
"제가 개각 명단을 가지고 갔으나,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해 개각을 협의할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따라서 개각이 이틀 정도 지난 다음 이루어졌습니다."
-진술인이 최 대통령에게 위와 같은 말을 들을 당시의 대통령 표정이 어땠나요.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과 사전 협의 없이 계엄사령관을 연행해 조사하겠다는 말을 들은 후라 그런지 전 장군에 대해 매우 화를 내고 힐책하는 듯한 언동을 하셨습니다."
-당시 최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나요.
"'무슨 일을 이 따위로 처리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진술인은 최 대통령으로부터 위와 같은 말을 듣고 어떻게 했나요.
"저도 전두환의 처신을 의아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잘 하셨습니다. 그처럼 중요한 일은 국방부장관 등의 의견을 들으시고 정식 절차를 밟아 신중하게 처리하셔야 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진술인은 당시 전두환 합수부장이 최 대통령의 재가를 거부당하고 나가는 것을 보았나요.
"총리 공관의 안쪽 방에서 전두환이 보고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가 보고를 마치고 간 다음 최 대통령을 만났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전두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당시 최 대통령이 전 장군으로부터 폭행이나 협박을 당한 사실은 없었다고 하던가요.
"그런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 때 보안사의 이학봉 중령을 본 사실이 있나요.
"못 봤습니다."
-당시 총리 공관의 경비 상태는 어땠나요.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다.:
-피의자 전두환의 진술에 의하면 비서실로부터 메모가 전해져 와서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던 중 나가보니 비서실에서 이학봉 중령이 정 총장 연행사실과 그 과정에서의 총격전으로 우경윤 대령이 다쳤다는 사실을 보고했으며, 그 후 다시 대통령에게 정 총장 연행사실만 보고했다고 하는데요.
"제가 최 대통령을 만났을 때는, 저는 물론 대통령께서도 정 총장 연행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전두환이 최 대통령께 위와 같이 보고했다는 것은 거짓 진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술인이 개각문제 협의를 위해 최 대통령을 만나게 된 것은 몇 시경인가요.
"20시가 조금 안 되었을 것으로 기억합니다."

 

"법을 무시하면 나라가 안된다"

 

-피의자 전두환의 진술에 의하면 최광수 비서실장, 정동렬 의전수석비서관도 12월12일 18시30분경 30경비단장실에 모여 정 총장 연행건에 대한 사전 브리핑을 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통령 재가시간이 30분 앞당겨져 오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최 대통령께 보고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서실장 등이 전두환의 브리핑을 군부대 내에서 듣기로 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신이며, 아주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술인은 12월12일 21시30분경 피의자 전두환이 유학성, 황영시, 차규헌, 박희도, 백운택 장군 등과 함께 정 총장 연행에 관한 재가를 다시 받으러 온 사실을 알고 있지요.
"최 대통령은 비서실 관계자로부터 정 총장 연행 사실을 보고 받았는데, 이에 대통령은 비서실 관계관들에게 그 경위를 빨리 알아보라고 지시해 여러 루트를 통해 정 총장의 연행 경위, 그 과정에서의 총격전 발생 사실 등을 보고받고 계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5~6명의 장군들이 정 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청하기 위해 대통령을 찾아왔습니다. 최 대통령께서 노재현 국방장관을 찾아오라면서 여전히 재가해주지 않자 20~30분 정도 계속 재가를 요청하다 돌아간 사실이 있습니다."
-당시 최 대통령에게 재가를 요청하러 온 장군들의 복장은 어땠나요.
"모두 전투복 차림이었습니다."
-그들이 권총을 휴대하지 않았던가요.
"몸 속에 휴대했는지는 몰라도 외관상으로는 권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 최 대통령의 표정은 어땠나요.
"대단히 불쾌하고 노여운 표정을 지었으며, 그들을 심하게 힐책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장군들을 어떻게 힐책하던가요.
"장군들이 최 대통령에게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재가를 해 달라'고 계속 요청하자, 최 대통령은 '왜 절차를 무시하고 연행부터 했느냐, 국방부장관을 데려와라'고 소리치면서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장군들이 돌아간 뒤 최 대통령이 진술인에게 뭐라고 하던가요.
"최규하 대통령은 매우 불쾌하고 노여운 표정을 계속 지으시면서 '이 친구들이 무슨 일을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앞뒤가 전도된 것이 아니냐, 법을 무시하고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면 나라가 안된다'라고 걱정하셨습니다."
-최 대통령이 끝내 재가하지 않자, 장군들이 최 대통령을 권총 등으로 협박한 사실은 없는가요.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려면 사전에 대통령 재가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연하지요. 정 총장은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비상시국에 막중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범죄에 연루되었다 해도 대통령 재가없이 연행한다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재현 데리러 국방부로 가다

 

-피의자 전두환은 10․26 사건과 관련해 혐의가 있던 정승화 총장 연행은 정당한 수사권 발동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사전 재가는 필요없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법치국가에는 엄연히 법적 절차가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국가원수이자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마구잡이로 계엄사령관을 구속한다면 법의 존재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직속상관이었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그를 연행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렵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은 정 총장이 합수부에 의해 불법적으로 연행된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이에 대처하기 위한 병력동원 등의 지휘를 받기 위해 최광수 비서실장에게 전화했더니 대통령을 바꾸어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저는 당시 총리 공관의 응접실에서 최 대통령과 계속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당시 최광수 비서실장은 비서실과 응접실을 오갔는데, 그 과정에서 그런 통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윤성민 참모총장의 진술에 의하면, 최광수 비서실장과 위와 같이 통화한 후 조금 있다 진술인에게 전화해 상황을 보고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전혀 모릅니다. 만약 제가 그 전화를 받았다면 바로 옆에 앉아 계시던 최 대통령에게 왜 전화를 바꿔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유학성 등 장군들이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를 요청하기 위해 총리 공관에 오기 전에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부터 그들이 대통령께 찾아온다는 사실을 보고받은 사실이 있나요.
"저는 물론 최 대통령도 보고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정동렬 대통령 의전수석의 진술에 의하면 최광수 비서실장이 어디로부터인가 전화 연락을 받고 자신에게 장군들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최광수 비서실장이 왜 최 대통령께 그러한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을까요.
"그 점은 저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진술인은 그곳에서 노재현 장관과 전화 통화를 한 사실이 있지요.
"예. 12월13일 02시30분에서 03시경 사이에 노 국방이 전화를 해 제가 받아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국방부에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총리 공관으로 빨리 오라'고 했더니 총격전이 벌어지기 때문에 못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최 대통령에게 노 국방의 전화를 바꿔주었는데 최 대통령께서도 저와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당시 그곳에는 이희성 중정부장 서리도 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희성 중정부장 서리는 12월12일 24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왔는데, 최 대통령에게 당시까지의 상황을 보고드리러 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진술인은 12월13일 03시30분경 이희성 중정부장 서리와 함께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데리러 국방부로 갔나요.
"예."

 

노재현 국방, 보안사로 가서 정 총장 연행서류에 재가

 

-그 경위는 어떤가요.
"노재현 장관이 국방부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어 혼자서는 도저히 총리 공관으로 올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제가 대통령에게 노 장관을 데려오겠다고 했더니 승낙했습니다. 이희성 중정부장 서리도 함께 가겠다고 하여 국방부로 가게 된 것입니다."
-진술인 등이 국방부에 도착해 어떻게 노 장관을 만나게 되었나요.
"장관실로 갔더니 그곳에 노 장관이 있어 만나게 됐습니다."
-당시 국방부장관실 상황은 어땠나요.
"무장병력들이 장관실 안팎에서 서성거리면서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노재현 장관의 언동은 어땠나요.
"상당히 당황하고 겁먹은 표정이었습니다. 제가 빨리 총리 공관으로 가자고 하니 아무 말 없이 따라 나섰습니다."
-당시 국방부의 주변 상황은 어땠나요.
"제가 도착했을 당시에는 총격전이 이미 끝난 상황이었지만 국방부 건물의 현관 유리창 등이 깨어져 있는 등 총격전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진술인이 총리 공관을 출발해 국방부로 향할 때 심정은 어땠나요.
"중앙청 옆의 비각을 통과할 무렵 전차 3대가 도로를 봉쇄하고 있어 정차했습니다. 그 순간 사병들이 문을 갑자기 열고 착검한 총을 저의 옆구리에 들이대면서 '누구냐' 하기에 제가 장교를 불러 '총리다, 국방부장관에게 가는 길이다. 길을 비켜라'라고 소리치자 비로소 보내주었습니다."
-진술인이 노 장관을 국방부장관실에서 만나 총리 공관으로 함께 가게 된 경위는 구체적으로 어떠한가요.
"제가 먼저 '어떻게 되었느냐'고 노 장관에게 물었더니 겁먹은 표정으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 '대통령이 급히 찾고 있는데 이렇게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소리쳤습니다. 바로 국방부장관실을 나와 총리 공관으로 출발했습니다. 이희성 중정부장 서리와 저는 같은 차량을 타고, 노 장관은 자신의 차량으로 뒤따라 왔습니다."

 

더 큰 혼란 예방 위해…

 

-진술인과 이희성 중정부장 서리가 총리 공관으로 돌아온 시각은 04시경이지요.
"예."
-진술인이 국방부장관으로부터 총리 공관으로 돌아오던 도중 보안사 앞길에서 보안사 직원들이 앞을 가로막고 노 장관을 강제 하차시킨 후 보안사로 데리고 들어갔다는데, 그 사실을 알았는가요.
"저는 그 상황을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먼저 출발한 저의 차량이 총리 공관에 먼저 도착했는데 노재현 장관이 타고 있던 차가 도착하지 않아 화장실에 갔다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노 장관이 도착했는데, 보안사에 들러 정 총장 연행 재가 서류에 자신이 재가한 후 그 서류를 들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늦게 도착한 노재현 장관에게 최 대통령이 '당신을 그렇게 찾았는데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나무라며 정 총장 연행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노 장관이 '이것은 대통령께서 재가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미 끝난 일이니 더 큰 혼란을 예방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재가를 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최 대통령은 한참 생각하시다가 재가해 주었습니다."
-진술인은 1988년 국회청문회에서 군 장성들이 정 총장 연행 재가를 최 대통령에게 재차 요청하자 최 대통령이 그들에게 "재가를 받기 전에 행동을 일으킨 것(총장 연행)은 위법이다. 이 자리에서 얘기만 듣고 재가해 줄 수 없다. 사건경위를 다 들어보고 판단해 보고, 또 책임자의 이야기를 듣는 등의 절차를 밟지 않으면 결재를 못하겠다"면서 재가를 거부했다고 증언했는데 사실인가요.
"사실대로 증언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몇 시간 후에 최 대통령이 재가했다는 말인가요.
"비록 최 대통령께서는 재가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셨겠지만 당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노재현 장관이 재가서류를 가져왔나요.
"예."
-그 재가서류는 보안사에서 가져온 것인가요.
"그 당시에는 어디서 서류를 만들어 왔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노재현 장관이 보안사에 들러 전 장군으로부터 재가서류를 받아 먼저 결재하고, 그 서류를 가져와 대통령 재가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진술인도 국무총리로서 재가서류에 결재를 했나요.
"당시에 최 대통령이 재가를 하시기 전에 저에게 주면서 '서류를 보시지요'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 서류가 국무총리가 결재할 성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읽어보지도 않은 채 대통령께 즉시 돌려 드렸습니다."
-그러면 최 대통령이 어떻게 재가했나요.
"노재현 장관이 이미 결재하여 가져온 재가서류 내용을 대략 검토하신 후 일자와 시간을 기입하고 사인을 했습니다."
-진술인은 최 대통령이 왜 일자와 시간을 기입했다고 생각하나요.
"그 이유는 제가 국무총리 재직시에는 물론이고 12․12 사건 이후 여러 해가 지난 뒤 여러 차례 최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 최 대통령께서는 그 당시 사전 재가 없이 정 총장을 연행한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했고, 12월13일 새벽에 더 큰 혼란과 희생을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재가했지만, 사후에 재가를 했다는 점, 국방부장관의 결재 등 정식결재 절차를 거쳤다는 점, 장시간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결재했다는 점 등을 서류상 명백히 하기 위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재가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최 대통령, 불쾌하고 노한 표정

 

-당시 노재현 장관과 전두환 장군이 함께 왔나요.
"정확한 기억이 없습니다."
-대통령이 재가한 시간이 1979년 12월13일 05시10분이 맞는가요.
"예."
-재가 당시 최 대통령 표정은 어땠나요.
"대통령은 매우 지친 상태였으며, 불쾌하고 노한 표정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진술인 등의 진술내용을 종합하면, 최 대통령께서 정 총장 연행을 내심 반대하면서도 사후 재가를 할 수 없이 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당시로서는 12․12 사건 당일의 군부 동향 즉, 육본 및 국방부가 점거되고, 노 국방, 윤성민 참모차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육군 정식 지휘계통이 와해됐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노재현 장관이 '재가해 주시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씀드리자 할 수 없이 사후 재가를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약 저와 최 대통령께서 당시의 군부 동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보고를 받았다면 다른 판단을 하셨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최광수 비서실장은 12월13일 아침 귀가길에 보안사령관실에 들러 군내 인사문제 등을 전 장군, 유학성, 황영시 장군 등과 협의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있을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술인은 피의자 전두환이 1979년 12월4일경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10․26 사건과 관련해 조사한 사실을 아는가요.
"당시에는 몰랐는데, 1980년 3월경 전 장군이 총리실로 찾아와 '제가 최 대통령도 10․26 사건과 관련하여 조사한 사실이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여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이에 대해 진술인은 어떻게 했나요.
"저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당신이 대통령을 조사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대통령은 당신의 임명권자인데 무슨 권한으로 대통령을 함부로 조사하느냐'라고 화를 냈습니다."
-진술인은 전두환의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나요.
"제가 전두환에게 화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성하는 기색도 없이 당당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저는 전두환이 10․26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명목으로 누구든지 연행해 조사할 수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이러한 대한민국의 현실에 국무총리로서 매우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진술인은 전두환 장군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겁도 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취임 반대

 

-진술인은 피의자 전두환 등이 대통령 재가도 없이 직속상관인 정 총장을 불법연행해 구속하고 군권을 찬탈한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나라의 장래가 매우 걱정됐습니다."
-전두환 장군이 1980년 4월14일 중정부장 서리에 임명되었지요.
"예."
-피의자 전두환은 진술인에게 자신이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 진술인은 어떻게 생각했나요.
"저는 10․26 사건 이후 중정부장 자리가 장기간 공석 중에 있어 중정의 업무수행에 막대한 차질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1980년 2월경 민간인 출신을 중정부장으로 임명하여 하루속히 중정 기능을 원상회복시켜 보안사의 정보 독점을 지양하는 것이 국정운영에 바람직하다고 최 대통령에게 건의했습니다. 최 대통령도 전적으로 동감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전 장군이 저를 찾아와 중정부장을 겸직해 중정의 기능을 정상화시켰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국가의 중요정보를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최 대통령도 저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때 진술인은 전두환이 정 총장을 법절차까지 무시하면서 불법으로 구속하고, 심지어 대통령까지 조사하는 등 불법적인 행위를 마구 저질러, 그런 사람을 중정부장에 임명하면 신군부의 본격적인 정치개입의 발판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것은 아닌가요.
"제일 큰 이유는 정보를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그 후 피의자 전두환이 진술인에게 좋은 감정을 갖지 않게 되었겠군요.
"당연히 그랬을 것입니다."
-피의자 전두환은 진술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영복 국방부장관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해 중정부장 서리가 되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할 당시 민간인을 중정부장으로 임명해 보안사와 중정기능을 양립시켜야 한다는 데 최 대통령이 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에, 그 후 전두환이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하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떤 경위로 전두환이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주영복 장관의 실질적인 위상을 고려할 때 전두환이 직접 최 대통령에게 자신을 중정부장 서리로 임명토록 했다면 몰라도 주 장관이 건의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피의자 전두환이 진술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자신의 권한을 확대해 정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중앙정보부장 겸직이 정권 장악의 계기

 

-전두환이 합수본부장 자격으로 각료급 간담회에 가끔 참석해 김재규에 대한 재판진행 상황이나 국내외 정세를 보고해 왔으나 이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주요 각료급의 일환으로 간담회에 상시 참석해 내각의 정책방향을 통제할 목적으로 중정부장 서리를 겸직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한 진술인의 견해는 어떠한가요.
"전두환이 자신의 권한을 더욱 넓히기 위해 그런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런 주장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승화 총장 연행에 대한 사후 재가시 최 대통령의 태도, 중정부장 서리 겸직에 대한 최 대통령의 반대의사, 10․26 사건과 관련한 최 대통령에 대한 조사 등을 고려할 때 전두환이 최 대통령과 진술인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이 최 대통령에게 자신을 중정부장 서리로 임명토록 한 것은 결국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12․12 사건을 일으켜 군권을 탈취하고 이를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세하면서 최 대통령에게조차 겁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진술인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전두환의 막강한 위상과, 이를 바탕으로 조성된 사회 전체의 공포 분위기를 고려할 때 그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중정부장 서리 임명은 대통령의 전권에 속하기 때문에 저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습니다."
-세간에는 전두환이 보안사령관 이외에 국내외 정보를 장악할 수 있는 중정부장 서리까지 겸직하게 됨으로써 국가의 중요정보를 혼자 독점하게 됨은 물론 중앙정보부의 막대한 예산까지 거머쥐어 정권을 찬탈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요.
"결과적으로 볼 때 전두환이 중정부장 서리까지 겸직한 것이 그 후 정권을 잡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 4월23일 국회 개헌특위에서 정치일정과 개헌 구상에 대한 정부측 입장을 듣기 위해 국무총리인 진술인의 출석을 요구한 사실이 있지요.
"예. 출석요구는 받았으나 국무총리가 개헌특위에 출석한 전례가 없어 출석을 거부했습니다."
-1980년 5월14일~15일 이틀에 걸쳐 서울의 35개 대학, 지방의 24개 대학으로부터 가두로 몰려나온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특히 서울역 앞에서 시위하던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진압경찰에 대항해 가스차를 불태우는 등 격렬한 시위를 했습니다. 급기야 20대 청년이 경찰 쪽으로 버스를 돌진시켜 전경대원 1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는데, 진술인은 그러한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나요.
"예."
-누구로부터 그러한 보고를 받았나요.
"내무부장관으로부터 보고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진술인은 김종환 내무부장관으로부터 경찰만으로는 시위진압이 불가능하니 군 투입을 요청해야겠다는 건의를 받았다는데 사실인가요.
"그런 보고를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시위진압에 군 투입 결사반대

 

-보고를 받고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당시가 비상계엄 하이기는 했지만 군을 시위진압에 투입할 경우 시위대와 군의 충돌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우려되어 군의 투입을 극구 반대했습니다. 군은 국방에만 전념하고 경찰만으로 시위진압을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시위가 대규모화하고 과격화됨으로써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이 곤란한 상황에서도 그렇게 하라고 지시했나요.
"그렇습니다. 다만 주요시설 경비에는 군을 투입하고, 그곳 경비를 담당하던 경찰력을 시위진압에 투입하여 부족한 경찰력을 보충토록 지시했습니다."
-최 대통령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즉 최 대통령도 군이 시위진압에 투입되는 것은 결사코 반대했습니다."
-1980년 5월10일부터 5월17일까지 최 대통령이 사우디와 쿠웨이트를 방문한 사실이 있나요.
"예."
-진술인은 1980년 5월15일 19시50분 특별담화를 발표한 사실이 있나요.
"예."
-특별담화내용이 무엇이었나요.
"국민이 바라는 민주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늦어도 연말(1980)까지는 개헌안을 확정하고, 내년(1981) 상반기에 양대선거를 실시해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당초의 정부 약속에 추호도 변함이 없으며, 가능하다면 일정을 최대한 단축하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특별담화를 발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학생이나 정치인들이 정치일정을 단축하라고 계속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1980년 5월16일 최 대통령이 일정을 앞당겨 귀국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국내 상황이 혼란스럽다는 보고가 계속되니까 콸라룸푸르(편집자 주: 다른 사람들의 진술에 의하면 말레이시아의 페낭)에서 하루 휴식하도록 되어 있던 원래 일정을 취소하고 하루 앞당겨 귀국한 것입니다."
-최 대통령의 귀국 후 시국 전반에 대해 보고했나요.
"그날 저녁 23시~자정까지 본인, 김종환 내무, 주영복 국방, 전두환 중정부장 서리, 이희성 계엄사령관 등이 대통령을 찾아가 시국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5월17일 아침에는 조찬을 겸해 본인 혼자 대통령을 만나 시국 대책을 논의했습니다."
-이틀간에 걸친 시국대책 모임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나요.
"대통령 부재 중에 일어난 국내정세를 보고했습니다."
-당시 최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으며, 지시 내용은 무엇이었나요.
"보고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돼 대책 논의도 하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1980년 5월17일 개최됐던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관해서도 보고되었나요.
"그런 보고는 없었습니다."

 

시국수습방안 재가해 달라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요구

 

-진술인은 1980년 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사전에 전혀 몰랐다는 말인가요.
"사전에 전혀 몰랐습니다."
-주영복 장관은 1980년 5월16일 오후, 이미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토록 지시했음에도 5월16일 밤에 국무총리나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린 후 그 결과는 언제 보고받았나요.
"1980년 5월17일 17시30분경 주영복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총리 공관으로 와서 보고했습니다."
-그 때 피의자 전두환도 함께 오지 않았나요.
"당시 전 장군이 청와대에 같이 가서 최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것이 분명한데, 주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저에게 보고하러 왔을 때 전두환 보안사령관도 함께 왔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습니다."(편집자 주: 주영복, 이희성씨는 신현확 총리,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갈 때 전두환 장군은 함께 가지 않았다고 검찰에서 진술함)
-그들이 진술인을 찾아와 어떻게 보고했나요.
"주영복 장관이 '오늘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한 결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의했고, 아울러 국가 보위 비상기구 설치문제와 국회 해산 문제도 함께 논의했으니 이 세 가지 시국수습방안을 결재해 주십시오. 여기 전군 지휘관들의 연서명 문서도 있습니다'라면서 갑자기 관련 서류를 테이블 위에 꺼내어 놓았습니다. 저는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면 중요정책 결정과정에서 국무총리가 완전히 배제되고 군부가 전면에 등장하여 명실공히 정국을 장악하게 되는 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매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국가보위 비상기구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주영복 장관은 비상계엄 하에서 대통령을 보좌하여 행정권을 실시하는 비상기구라고 답변했습니다. 저는 '현재의 기구로도 충분한데 뭐하러 그런 것을 설치하느냐, 국회 해산은 위헌의 소지도 있고 고도의 정치적인 문제이므로 우리가 논의할 성질이 아니다'라면서 국회 해산 문제와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문제에 대하여는 명백히 결재를 거절했습니다.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전부 거절할 수는 없어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는 대통령에게 상의해 보자고 했습니다."
-결재서류는 누구의 명의로 되어 있었나요.
"그 당시 전두환 등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 고도의 정치적 문제들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의결한 후 결재를 저에게 갑자기 요구한 것은 실세였던 전두환 등 신군부가 드디어 정권 장악의 마각을 본격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주영복 장관이 저에게 제시하려던 연서명 문서 등 관련서류 일체를 볼 필요가 없다면서 구두로 보고하라고 했기 때문에 누구 명의였는지는 모릅니다."

 

정권찬탈의 마각 드러나다

 

-전두환 장군이 권정달 정보처장, 이학봉 대공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등 보안사 심복들을 시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의결할 시국수습방안 문서를 작성토록 했고,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의결 후 그 의결이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집약된 의사라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연서명 문서까지 작성토록 했다는데 이에 대해 알고 있나요.
"전두환 장군 등 보안사의 주도로 이런 서류가 작성된 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시국수습방안이 의결되었다고 생각하나, 관련 서류들이 어떤 경위로 작성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주영복 장관 진술에 의하면 5월17일 09시30분경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문제 등 세 가지 안건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상정하여 대통령 재가를 받아달라는 전두환 장군의 메시지를 권정달 정보처장으로부터 받고 유병현 합참의장 등 수뇌부와 상의하니, 국가보위 비상기구설치와 국회 해산 문제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 상정하는 것이 부적합하고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만 상정하여 의결한 후 진술인에게 보고했다는데요. 주영복 장관이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문제와 국회 해산 문제도 진술인에게 보고하면서 결재를 요구하던가요.
"예, 당시 주영복 장관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 이외에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문제도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의결된 사항이라면서 분명히 저에게 결재를 요구했습니다."
-주영복 장관이 이와 같은 안건을 결재 요구했을 때 누가 실질적으로 그런 일을 꾸몄다고 생각했나요.
"전 장군은 12․12 사건 이후 신군부 세력들을 육군의 주요보직에 중용함으로써 군부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당시는 주영복 장관이 장관직에 있기는 했지만 전두환이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 장관 등이 저를 찾아와 시국수습방안을 결재해 달라고 요구하기에 저는 전두환 장군이 이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를 통해 행정부, 국회 등 주요 헌법기관을 장악하여 국정을 주도하고 정권까지 찬탈하려는 마각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술인은 전 장군의 배후조종에 따라 주영복 장관이 이와 같은 시국수습방안의 결재를 요구했다고 생각했나요.
"예.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술인은 내각의 책임자로서 주영복 장관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요청도 결재를 거절했어야 하지 않나요.
"제 입장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 요청만은 거절할 형편이 못됐습니다."
-왜 그랬나요.
"주영복 장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는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일치된 의지라고 말했는데, 당시에는 전두환 장군이 군부 실세로 군림하면서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주 장관의 이 말이 약간 신경 쓰였습니다. 또 비상계엄 전국확대는 내각의 배제를 수반하는 것으로서 국무총리인 저의 입지와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아 보자고 했던 것일 뿐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찬성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가서 재가를 받았나요.
"주영복 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장군 등과 함께 최 대통령을 찾아가 제가 먼저 이 분들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국회 해산 문제 등 세 가지 안건을 저에게 가져와 대통령 재가를 받아 달라고 하여 왔습니다. 그중 국회 해산은 위헌이므로 안되고,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는 현재 정부기구만으로도 얼마든지 충분하므로 불필요하며, 비상계엄 전국확대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사항이므로 대통령께서 검토하시어 결정해 주십시오라고 보고했습니다. 이어 함께 간 주 장관이 보충 설명을 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저에게 임시 국무회의를 오늘 소집하여 비상계엄 전국확대 안건만 상정하여 의결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저는 그날 21시45분경 제42회 임시 국무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청와대에서 최 대통령에게 보고한 시간은 얼마 정도 되었나요.
"한 시간 조금 넘게 논의했습니다."
-최 대통령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승인할 당시의 태도는 어땠나요.
"주 장관에게 보고를 들으시고, 그와 같은 조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최 대통령은 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승인했다고 생각하나요.
"주 장관은 혼란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필요하다가 계속 설명했고, 이에 대통령께서는 다시 본인에게 의견을 물어 와 제가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나 국회 해산에 대해선 분명한 반대의견을 표명했고, '비상계엄 전국확대 문제는 사회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대통령께서 판단하셔야 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계엄확대 조치에 관해 오랜 시간 논의한 끝에 대통령께서 최종적으로 군의 확대 건의를 수용한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건의가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전두환 장군 등 군부 실세들의 집약된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 최 대통령에게도 심적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그 건의를 수용한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진술인은 최 대통령의 이런 결정을 어떻게 생각했나요.
"저는 내심 결정권자인 최 대통령께서 단호히 거부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이를 재가하는 것을 보고 매우 섭섭했으며, 국가의 장래가 걱정됐습니다."
-국방부장관과 계엄사령관이 국회를 왜 해산해야 한다고 하던가요.
"정계를 정화할 필요성이 있어 국회를 해산해야겠다고 막연히 말했습니다. 본인이 그런 조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호히 반대의사를 표시했더니 더 이상 구체적인 해산 방법이나 계획 등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 5월18일 0시 계엄 당국이 포고령 10호라는 것을 발령하여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위헌적 조치를 취하고 김대중씨 등 중요 정치인들을 붙잡아 가고, 국회를 봉쇄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되고는 국방부장관 등이 말한 국회 해산은 이런 조치들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는 반대

 

-전두환 장군이 총리실에서부터 진술인을 동행한 것인가요, 아니면 청와대에서 만나게 된 것인가요.
"주영복 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분명히 총리 공관에 와서 보고했던 것이 기억나지만 전 장군도 함께 왔는지는 기억이 흐리며, 어쨌든 청와대에서는 전 장군도 대통령에게 함께 들어가 보고한 것은 분명히 기억합니다."(편집자 주: 주영복, 이희성 두 사람은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 전두환 장군이 없었다고 진술함)
-어떤 자료에 의하면 당시 김 모 변호사가 전 장군과 동행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변호사는 동행한 일이 없습니다."
-피의자 전두환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등 시국수습방안에 관해 최 대통령과 논의할 당시 뭐라고 하던가요.
"주영복 장관이 주로 설명했고,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보충 설명했는데, 전 장군은 말을 많이 아낀 것으로 기억됩니다. 물론 전 장군도 주영복, 이희성과 같은 의견을 개진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전 장군은 왜 말을 아꼈다고 생각하나요.
"형식적으로는 국방부장관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결과를 보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전두환이 적극 나서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합니다."
-진술인 등이 시국수습방안에 관해 최 대통령과 논의할 당시, 최 대통령이 그 내용을 이미 보고받아 알고 있는 것 같았나요.
"제 기억으로는 처음 보고받으신 것 같은 태도로 보였습니다."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은 전 장군이 1980년 5월17일 오전 시국수습방안을 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면서 그 내용은 비상계엄 전국확대, 비상기구 설치, 정치활동 규제였다고 하는데 맞는가요.
"최 대통령이 위와 같은 시국수습방안을 저희들과 논의하기 전에 보고받았던 것 같지는 않았고, 그 내용 중 정치활동 규제는 없었던 대신 국회 해산이 있었으며, 나머지 두 가지 문제는 그 사람의 진술대로 입니다."
-1980년 5월17일 저녁 최 대통령과 시국수습방안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피의자 전두환과 함께 청와대를 나왔나요.
"본인은 계엄확대를 위한 국무회의 소집을 위해 참석자 가운데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5․18 사건과 관련한 최광수 비서실장의 답변 내용에 의하면 1980년 5월17일 진술인, 주 장관, 전 장군 등이 최 대통령과 '시국수습방안'에 관해 논의할 당시,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외에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문제도 함께 논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최광수 비서실장 자신도 함께 배석해 있었고, 당시 논의된 사항들이 보통문제가 아닌, 헌정중단이 초래될 수도 있는 국가 중대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사항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변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답변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공포 분위기의 임시 국무회의

 

-최광수 비서실장의 진술에 의하면 진술인 등이 나온 다음 피의자 전두환이 혼자 남아 30~40분 정도 최 대통령에게 권력형 부정축재자와 소요 배후조종자들에 대한 조치계획을 보고했다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전혀 모르는 사실입니다."
-임시 국무회의가 개최되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실시가 의결되었나요.
"예. 1980년 5월17일 21시45분에 총리인 본인 주재로 임시 국무회의가 열렸습니다. 주 장관의 제안설명에 따라 5월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기로 만장일치로 의결해 시행한 것입니다."
-당시 중앙청 국무회의장 주변에는 집총을 한 군인들이 1m 간격으로 건물 외곽에서부터 회의장 출입문 바로 앞 계단에까지 도열해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예."
-이런 광경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이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는 불쾌한 마음과 함께 두려운 마음도 조금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국무회의를 주재할 진술인으로서는 국무회의장 주변의 집총한 병력들을 철수하도록 지시할 수도 있지 않았나요.
"당시 상황은 제가 그런 지시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 어차피 군이 전면에 등장할 것이고, 이미 저는 총리직 사퇴를 결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놔둔 것입니다."
-중앙청에서 야간근무 중이던 공무원들이 무장군인들에 의해 별관으로 쫓겨났고 외부와의 전화선도 단절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당시에는 몰랐지만 다른 장관들과 행정부 직원들로부터 그 사실을 듣고 알았습니다. 제가 확인해 본 바에 의하면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진술인은 군인들이 집총을 하고 불과 1m 간격으로 회의장 출입문 바로 앞까지 도열해 있는 것을 보고 공포심을 느끼지 않았나요.
"매우 불쾌하고 조금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주영복 장관의 진술에 의하면 군인들이 2층 회의실에 올라가는 계단까지 집총하고 서 있는 것을 보고, 국방부장관인 자신도 심적으로 좀 겁을 먹었으며, 다른 국무위원들은 자기보다 훨씬 겁을 먹고 회의에 임했을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가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늦은 시각에 임시 국무회의가 갑자기 소집되었고, 전례없이 국무회의장 주변에 집총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으므로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국무위원들 모두가 기분이 매우 상했을 것입니다."
-임시 국무회의는 아무런 토론절차나 반대의견 개진없이 불과 8분만에 비상계엄 전국확대 안건을 의결했는데, 이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당시 임시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들이 매우 위축되고 긴장했던 것이 아닌가요.
"비상계엄 전국확대라는 것은 결국 내각이 시국수습에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계엄확대시에는 내각이 국정에서 안전히 배제되고 군부가 전면에 나서 정국을 주도하게 되기 때문에 당시 국무회의 분위기는 극히 침울하고 어두웠습니다."

 

군부가 이제 행정권까지…

 

-당시 제주도에 군을 투입해야 할 만한 비상사태나 사회질서 교란 행위가 있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서울과 일부 지역에서 학생들의 소요사태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겠다고 군부에서 건의를 했을 때 진술인은 어떤 생각을 했나요.
"전두환 등 군부 실세들이 이제 행정권까지 빼앗아 가려고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결국 정권찬탈의 전주곡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박동헌(편집자 주:'5공전사(5共前史)’에는 박동원으로 되어 있음) 수경사 작전참모, 이현우 30경비단장, 성환옥 수경사 헌병단장 등의 진술에 의하면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끝나고 귀대한 직후 수경사 헌병단 병력은 중앙청 건물 내 국무회의장 통로에, 30경비단 병력은 중앙청 외곽에 늦어도 18시까지 배치토록 지시했다는데 알고 있나요.
"전혀 몰랐습니다."
-노태우 당시 수경사령관은 최 대통령의 재가도 있기 전에 이미 임시 국무회의가 소집될 것으로 예상하고, 국무위원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어 비상계엄 전국확대 안건에 반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집총병력의 배치를 지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만약 노태우가 대통령 재가도 있기 전에 국무회의장 주변에 병력배치를 지시했다면, 그와 같은 의도가 충분히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1980년 5월17일 당시 진술인과 최 대통령이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끝까지 반대했다면 그 후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최 대통령은 관리정부로서의 민주발전 추진일정을 계획대로 추진해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전두환 등 당시 군부 실세의 움직임으로 보아 그러한 민주발전 추진 일정이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심상치 않은 군부 동향을 감안할 때 순탄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술인은 1980년 5월17일~21일 사이에 최 대통령에게 역부족이다, 함께 물러나자라면서 진술인의 총리사퇴와 동시에 최 대통령 하야를 건의한 사실이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1980년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동시에 모든 정치활동 중지와 휴교령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령 10호가 계엄사령관 명의로 발령되었습니다. 진술인은 위와 같은 내용의 포고령이 발령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나요.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국회 해산이나 다름없어

 

-계엄포고령 10호와 같은 중요 사항은 당연히 국방부장관을 경유하여 국무총리를 통해 대통령 재가를 받아 시행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 당시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상황이므로 국무총리 이하 각료들은 계엄업무에 관한 일체의 권한이 없고 계엄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계엄업무를 집행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계엄포고령 10호에 의해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킬 수 있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전두환이 국회의원의 정치활동까지 금지시킨 사실이 있는가요.
"당시에는 전혀 몰랐으며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계엄포고령 10호가 발령되기 전인 1980년 5월17일 22시를 전후해 김대중 등 수십 명의 주요인사들이 연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보고받은 바가 없어 몰랐습니다."
-그런 조치는 전두환 등 군부 실세들이 정권 장악에 장애가 된다고 판단한 정치인 등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요.
"동의합니다."
-전 장군은 국회의사당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1980년 5월20일 10시로 소집 공고된 제104회 임시국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5월18일 01시45분경 수도군단 33사단 101연대병력으로 국회의사당을 봉쇄하고, 5월20일 09시경 의원들의 국회 등원을 폭력으로 저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헌법상 계엄해제 의결 권한을 가진 국회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의원들의 등원을 무력으로 저지하는 과정에서 신민당 원내총무인 황낙주가 군인들의 총검으로 귀를 다쳤다는데 이런 사실이 국무총리에게 보고되었나요.
"국회에 군 병력을 투입하는 문제는 사회적으로 이목을 끌 만한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서 국무총리에게 보고되어야 하는데 저에게 전혀 보고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 장군은 직급 상급기관인 국방부장관을 거쳐 국무총리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병력을 투입해 국회 기능을 마비시켰더군요."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민관식 국회의장 서리가 국무총리인 진술인을 방문한 일이 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오래 되어서 기억이 없습니다."
-1980년 5월17일 체포되어 연행된 김종필, 김대중씨에 대한 수사경과에 대해 보고 받았나요.
"보고 받은 바 없습니다."
-1980년 5월20일부터 시작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가택연금 사실을 보고 받았나요.
"보고받지 못했습니다."
-1980년 5월18일부터 광주에서 일어난 소요사태가 3일이 지난 5월21일에야 신문이나 방송 등에 뒤늦게 보도되게 된 이유에 대해 아는가요.
"저는 보고 받은 바 없어 잘 몰랐고, 나중에 언론매체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됐습니다."
-진술인이 광주사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언제인가요.
"정식 보고를 받아 안 것은 아니고 언론매체를 통해 나중에 알았습니다."
-1980년 5월20일 광주 상황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았나요.
"저는 누구로부터 보고받은 바 없으며 나중에 언론매체를 통해 알았을 뿐입니다."
-광주에 군 병력을 투입하는 문제와 관련해 국무총리인 진술인에게 국방부장관 등 주무 부서에서 결재를 받은 사실이 있는가요.
"저는 주무부서로부터 군 투입에 대한 보고를 받은 적도 없고, 투입을 허용하는 결재를 한 사실도 없습니다."
-1980년 5월20일 23시경 광주역에서 계엄군이 시위군중에게 발포했다는 보고를 받았나요.
"보고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1980년 5월21일 광주 상황에 대해서는 보고 받았나요.
"보고 받은 바 없습니다."

 

내각 총사퇴하자 최규하 대통령이 만류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자위권 행사에 대한 건의를 받은 일이 있는지요.
"그런 사실도 없습니다."
-피의자 전두환, 정호용, 노태우 등이 자위권 행사를 지시했나요.
"저는 전혀 모릅니다."
-광주사태 기간 동안 광주 현지를 방문한 일이 있나요.
"없습니다."
-광주사태 진압과 관련해 현지 31사단장이나 전교사 사령관은 형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고 실질적인 지휘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전 장군, 노태우 수경사령관 등과 협의해 강경진압을 주도한 것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저는 모르는 내용입니다."
-진술인은 1980년 5월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장갑차와 버스를 타고 돌진해오자 계엄군이 장갑차와 버스를 향해 발포했다는 보고를 받았나요.
"보고받은 바가 없어 전혀 모르는 내용입니다."
-진술인은 내각을 책임지고 있는 국무총리로 재직하면서도 위와 같이 중요한 사항들에 대해 전혀 보고조차 받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 이후에는 전두환 등 군부 실세들에 의해 그들 의사대로 정국이 주도되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내각 전체는 무력화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국민들 속에 정국안정을 책임질 수 있는 보다 강력한 정부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켜 이를 기화로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고의로 일으킨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어떤가요.
"초동단계에서 여타 지역으로의 시위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강경한 진압을 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의도적으로 광주사태를 유발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진술인은 국보위에서 공무원 숙청, 과외금지,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로 이른바 삼청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러 가지 조치들을 시행한 사실을 알고 있지요.
"국무총리직을 그만둔 뒤에 일어난 것으로서 언론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진술인은 전 장군이 정권을 넘보고 있다는 낌새를 언제 알게 되었나요.
"1980년 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논의된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 정국수습방안에 관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경위로 보고받을 때 전두환 등 군부 실세들이 정국을 주도함은 물론, 정권을 찬탈하려고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신군부 세력들이 전 장군의 집권을 정당화 하도록 하기 위한 여론조작을 위해 KING의 첫글자를 따서 'K­공작계획'을 수립, 시행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해 들어본 사실이 있는가요.
"1980년 2월부터 보안사 주도로 언론에 대한 강력한 통제가 진행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론조작을 위한 'K­공작계획'이 있었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진술인은 대통령에게 언제 사퇴 의사를 표명했나요.
"1980년 5월18일 바로 청와대로 가서 사퇴 의사를 표명했으나 최 대통령이 간곡히 만류하여 즉각 사퇴하지 못하고 몇 차례 더 말씀을 드려 결국 5월20일 오전 각료회의를 소집, 사퇴를 결의했습니다."
-사퇴를 결심하게 된 배경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함에 따라 군에서 사실상 모든 권한을 행사하게 됨으로써 내각은 할 일이 없게 되었는데 머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내각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퇴를 결심한 것입니다."

 

신군부에 무력감 느껴

 

-1980년 5월20일 국무총리인 진술인 등 내각 전원이 일괄 사표를 제출하면서 이규현 문공부장관이 "대통령의 외국 순방 중 국내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지 못했으며 유례없는 소요사태가 발생한 데 대해 국무위원으로서 국민과 대통령에게 책임을 느끼고 사직원서를 일괄하여 제출하게 된 것"이라고 사퇴서 제출이유를 밝혔다는데 사실인가요.
"그와 같은 책임이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심 반대하고 있던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계엄사령관이 직접 대통령의 지휘, 감독을 받게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내각이 국정운영 과정에서 배제되었으며, 이에 따라 무력감을 느껴 사퇴한 것입니다."
-전두환 등 신군부측으로부터 협박을 당해 총리직을 사퇴한 것은 아닌가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던 전 장군 등 신군부 세력에 대해 무력감을 느꼈던 것은 사실입니다."
-1980년 5월21일 국무총리인 진술인 등 11개 부처 장관을 경질하는 개각이 단행됐는데 광주사태가 진행 중인 동안 개각을 단행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를 비롯한 각료 전체가 사퇴했기 때문에 불가피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 대통령이 1980년 8월16일 하야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비상계엄 전국확대 후에는 최 대통령의 마음도 저와 똑같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즉, 전 장군 등 신군부 세력들이 12․12 사건으로 군부를 장악한 후에 다시 5월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그들이 시국수습방안으로 추진하려 했던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사실상 실행에 옮김으로써 정권찬탈 의도를 가속화해 나갔습니다. 반면에 최 대통령은 행정권이 사실상 박탈된 상황에서 신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해가는 자신을 발견하셨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최 대통령은 엄청난 무력감과 상처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총리직을 사퇴할 때 최 대통령도 하야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 않으셨겠지만 대통령이다보니 저와 같이 쉽게 그만두지 못하고 몇 개월 동안 마음 고생을 하다 도저히 참지 못할 상황에 이르게 되자 하야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 대통령이 전 장군으로부터 어떤 약점이라도 잡힌 것이 있어 하야를 한 것이 아닌가요.
"1980년 3월경 전 장군이 10․26 사건과 관련해 최 대통령을 조사한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최 대통령이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시간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했다고 말했던 점으로 미루어, 전 장군이 그와 같은 사실을 빌미로 최 대통령을 협박하여 하야시켰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세간에는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들이 김정렬 전 총리를 내세워 최 대통령께 사임 압력을 가했다고 하는데 사실인가요.
"저와 김정렬 씨는 오래 전부터 친분관계가 있어, 최 대통령 하야 이후 여러 차례 개인적으로 만난 사실이 있습니다. 1981년 가을 김정렬 씨에게 '시중에 김 장관(김정렬 씨는 자유당 시절 국방부장관 역임)이 최 대통령의 하야를 권유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사실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김정렬 씨가 최 대통령에게 하야를 적극 권유한 사실이 있었다고 명확히 저에게 말한 사실이 있습니다."

 

김정렬이 최규하 대통령 하야 설득

 

-평소 최 대통령은 어려운 중요 정책사항을 결정할 때 진술인과 항상 협의했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물론이지요. 최 대통령은 항상 어려운 정책을 결정할 때 저와 상의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진술인은 피의자 전두환이 12․12 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하고,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통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정국수습방안, 'K­공작계획' 등을 단계적으로 실행에 옮겨 급기야 정권까지 장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요.
"저는 국무총리로 있는 동안 12․12 사건을 겪었는데 그 당시에는 전 장군 등 신군부가 군 내의 실권을 잡았다고 생각했을 뿐, 그들이 정권찬탈 의도까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17일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집약된 의지라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시국수습방안이라는 명목하에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요구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이들이 정권찬탈의 전주곡을 울리기 시작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는 국무총리직을 즉각 사퇴했지만, 그후 그들이 비상계엄 상황을 교묘히 악용해 국회봉쇄 등 사실상 국회 해산과 동일한 조치를 취해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행사가 불가능했습니다. 또 국보위라는 비상기구를 설치하여 내각을 무력화시키고, 김대중씨 등 중요 정치인 연행, 김영삼씨 강제연금 등으로 정당 활동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고, 나아가 최 대통령까지 하야시켰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것은 사전에 준비된 완벽한 정권찬탈 계획의 실행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5년이 지난 현재 12․12부터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의 과정을 돌이켜 보면,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12․12 사건 당시, 또는 적어도 그 후부터 정권찬탈 준비작업을 은밀하고도 치밀하게 진행시켜 이를 성공적으로 실행했다고 확신합니다."

-진술인은 12․12 사건 및 5․18 사건과 관련한 최 대통령의 조사불응 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전직 국가원수가 재임기간 중의 통치행위에 대해 발설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점은 저도 원칙적으로 최 대통령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전직 대통령이 두 명씩이나 군사반란 등 혐의로 구속되어 있고, 최 대통령이 그 사건의 중요 증인으로서 당시의 진실된 상황을 명백히 밝히지 않으면 더욱 큰 국가적 혼란이 초래될 수 있는 비상상황입니다. 때문에 최 대통령께서 하루 빨리 검찰조사에 응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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