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칼럼] 베르사유조약과 한반도 종전선언
[김태우 칼럼] 베르사유조약과 한반도 종전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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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과 평화협정...한국사회 분열과 동맹해체로 향하는 지옥문
베르사유 조약 등 수많은 평화협정, 상대방 안보태세 이완을 위한 선전도구로 악용돼
진정한 한반도 평화정착은 북핵 폐기를 통해서만 가능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지난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1918년 11월 11일 파리 근교의 콩피에뉴 숲에 있는 열차의 객차 안에서 독일은 페르디낭 포슈 연합군 총사령관에게 무조건 항복했고, 그리하여 1천만 명의 희생자를 기록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대전의 포성이 멈추었던 시간이었던 오전 11시, 파리의 개선문에서는 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기념식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을 위시한 70여 명의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하여 개선문 아래 무명용사의 묘에서 ‘꺼지지 않는 불’을 점화했다.

콩피에뉴에서 손을 맞잡은 메르켈과 마크롱

그럼에도 기념행사의 압권은 하루 전인 11월 10일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독일이 1차 세계대전 종전에 서명했던 콩피에뉴에서 손을 맞잡은 것이다. 1세기 전 적국이었던 두 나라의 정상들은 손을 맞잡고 전사자들을 추모했다. 이 자리에서 메르켈 독일총리는 "세계가 더 평화로울 수 있다면 독일은 어떤 일이라도 할 것임을 확실하게 밝힌다"고 말했고,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우리 유럽은 독일과 프랑스가 평화를 원하기 때문에 지난 73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는 말을 남겼다.

콩피에뉴에서 기념식이 열리는 동안 두 정상은 많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독일에게 있어 콩피에뉴는 1차 대전의 패배를 상기시키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프랑스에게도 2차 대전 초기 독일에게 항복했던 뼈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장소다. 전격전을 앞세우고 프랑스를 무너뜨린 히틀러는 1940년 6월 22일 이곳 콩피에뉴에서 22년전 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그 열차 안에서 프랑스의 항복을 받겠다고 고집했고, 프랑스는 그의 요구대로 해야만 했다. 이를 통해 히틀러는 1차대전 패전의 치욕을 씻으려 한 것이다. 바로 그 장소를 핵심 교전국들의 정상들이 다시 찾은 것이니 감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차 대전이 끝나면서 교전국들이 베르사유조약을 체결하고 평화를 다짐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세계를 한번 더 잿더미로 만든 2차대전이 터진 역사를 회상하면서 진정한 평화를 되짚어 보았을 것이다.

베르사유조약의 교훈

베르사유조약은 1차 대전을 마감하는 평화협정으로서 1919년 6월 28일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서명되어 1920년 1월 10일 공표되었다. 베르사유조약은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터키 등에게 1차 대전 발발에 대한 책임을 묻고 엄청난 배상과 가혹한 조치들을 강요했다. 독일은 영토의 상당부분과 모든 해외 식민지를 상실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오스만터키는 여러 개의 나라로 분할되었다.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帝國) 체제도 사라졌다. 특히 독일에 대한 조치들은 매우 가혹했다. 독일은 전쟁배상금 1,320억 마르크를 10년 안에 지불하고, 공군과 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으며, 총병력을 10만 명이내로 제한했다. 징병제는 금지되었으며, 해군의 총톤수도 10만 톤 미만으로 제한되었다. 하지만, 베르사유조약은 그 어떤 평화조약도 흑심을 품은 일방이 존재하거나 상호 상충적인 목표를 가진 국가들이 존재할 때에는 반드시 깨진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었다.

전쟁 후 패전국 독일에서는 게르만 민족의 재부상을 꿈꾸는 국가사회주의자 아돌프 히틀러가 정치지도자로 부상했는데, 그때부터 베르사유조약의 파기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베르사유조약의 불평등성을 독일 국민들의 수치심을 자극하는데 적극 활용했고, 선전선동을 앞세워 집권에 성공했다. 독일 유권자들은 영토 회복, 치욕적인 패배에 대한 설욕, 강대국 명성 회복 등을 내세우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로 돌변했고,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재무장에 박차를 가했다. 히틀러는 1935년 3월 드디어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언했고, 1936년 나치군의 라인란트 진주로 베르사유조약은 종말을 고했다.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돌려주면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뮌헨조약에 서명했지만, 1년 후인 1939년 나치군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고 폴란드를 점령했으며, 이어서 롬멜 장군의 독일 전차부대는 벨기에와 프랑스를 유린했다. 2차 세계대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종전선언, 평화로 가는 대로(大路)인가 지옥문인가

2018년 북한의 평화공세 이후 한반도에서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2018년 4월 27일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선언을 통해 ‘금년 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북한은 줄기차게 종전선언을 요구했고, 한국 정부는 북한의 요구에 부응하여 미국과 국제사회에 종전선언을 재촉하는 외교를 펼쳤다. 당연히, 북한이 종전선언을 요구하는 것은 평화협정으로 가는 입구를 열기 위한 것이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북한의 진정성이 실린 항구적 평화로 가는 길이라면 한반도 종전선언은 ‘평화로 가는 대로(大路)’를 여는 것이 되겠지만, 반대로 그것이 북한의 대남전략 노림수라면 종전선언은 ‘한국사회 분열과 동맹해체’로 가는 ‘지옥문’을 여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을 위시한 수많은 평화협정들이 증명하듯, 평화협정 때문에 평화가 유지된 적은 없으며, 반대로 평화협정이 상대방의 안보태세 이완을 위한 선전도구로 악용된 적은 무수히 많다. 베르사유조약은 그 조약이 수립한 새로운 질서를 수용하지 않는 독일이라는 현상타파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파기되었고,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 역시 2년 후인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침공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개시함으로써 여지없이 폐기되었다. 일본과 소련 간에도 1941년에 체결한 평화협정인 일소 중립조약이 있었지만, 일본이 히로시마와 나카사키에 원폭을 맞은 다음날 소련군은 조약을 파기하고 만주로 진주하여 그 길로 한반도의 38선까지 내려왔다. 베트남 전쟁은 1973년 1월 27일에 체결된 역사적인 파리평화협정으로 종전되었지만 2년 후인 1975년에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혼란을 틈타 남침을 재개했고, 남베트남은 56일만인 1975년 4월 30일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통일 후 베트남에서는 6백만 명이 처형되거나 재교육 캠프에 보내졌고, 백만 명이 보트피플이 되어 바다를 떠돌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적화통일에 성공한 후 통일베트남 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남베트남에서 자신들의 통일전쟁을 도왔던 베트콩과 남베트남에서 반정부·반미 시위를 주도했던 좌익과 성직자들을 숙청한 것이었다.

북한의 핵포기와 변화만이 평화로 가는 길

자고로, 전쟁을 도발할 동기와 이유가 없는 나라들 간에는 평화협정이 필요하지 않으며, 악의를 품은 일방이 있거나 상충적인 목표를 가진 나라들 사이에는 평화협정이 있어도 평화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 평화협정이 없어도 미국과 캐나다 또는 호주와 뉴질랜드는 전쟁을 하지 않으며, 독일과 소련 또는 소련과 일본은 평화협정이 있었지만 전쟁을 했다. 북한도 그렇다.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거나 긴장을 조성할 이유가 없는 나라가 된다면 그것으로 평화는 정착되는 것이며, 평화협정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이벤트에 지나지 않는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보다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질적인 변화하는 것이 평화정착의 길이라는 뜻이다. 핵포기와 질적 변화를 진전시키지 않으면서 종전선언을 요구하는 평양정권이나 이에 부응하여 국제사회에 종전선언을 재촉하는 서울정부가 평화협정의 역사를 기억하는 세계인의 눈에 어떻게 비쳐질 것인지는 명백하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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