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스 에세이32편]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사회주의를 실현할 인물이 아니다
[미제스 에세이32편]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사회주의를 실현할 인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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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의 참상도 사회주의의 실패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강성 좌파 출판물인 『더 네이션』(The Nation)으로부터 거의 날마다 이메일을 받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그 편집자들은 완전히 들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떠오르는 중이며 나이 많은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가 한 쪽 끝에 그리고 사진발 잘 받는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lexandria Ocasio-Cortez, 역주: 지난 11월 6일 미국 중간선거에서 미국 역사상 최연소 하원의원으로 당선)가 다른 끝에 있고, 이 둘이 자본주의의 쇠사슬이라는 것을 뒤엎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새로운 민중 세대에게 사회주의를 북돋워 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버니 샌더스에 관해 내가 썼던 많은 글들에 새로 더 보탤 것은 없다. 그가 과거에 살인 및 폭력을 저지른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와 체 게바라(Che Guevara)를 지지하는 집단들과 연계를 맺었다는 점이 오늘날의 미디어들에 의해 그의 평판을 떨어지지 못한다면 앞으로 그 무엇도 그의 평판을 떨어뜨리지 못할 것이며, 결점으로 가득 찬 그의 세계관을 더 드러내 봐야 어떠한 생각들을 바꾸거나 전체주의의 해악을 깨닫기를 거부하는 찬양 일변도의 미디어에게 가르침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이와는 다른 도전을 준다. 첫번째 그리고 미디어의 시대에 아주 중요한 점은 그녀가 사진발을 잘 받는데 그게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두번째 점은 그녀가 사진발을 발 받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좌파라는 점인데, 그것은 오카시오-코르테스와 새러 페일린(Sarah Palin)이란 두 여자가 다 미인이고 유별난 사람들이지만 실업률이 낮은 것은 “모든 사람이 투 잡(two jobs)을 뛰기 때문”이라는 주장(그렇다. 오카시오-코르테스는 그렇게 말했다)을 할 때조차도 미디어들이 오카시오-코르테스에게 새러 페일린과 같은 대접을 하지는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역주: 과거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더불어 공화당 대통령선거에 러닝메이트로 나왔던 알래스카 주지사 새러 페일린은 좌파에 기울어진 주류 언론으로부터 언행 하나하나에 대해 혹독한 공격을 받았었다).

다 기억하다시피 페일린은 존 매케인의 “샤크 탱크”(Shark Tank. 역주: 미국을 대표하는 부호들이 초보사업가들의 아이디어를 듣고 투자를 결정하는 리얼리티 쇼. 여기서는 신진 정치인 새러 페일린이 대선 마당에 뛰어들어 정치 역량을 평가받는 국면을 비유)에 운명적으로 뛰어들기 전까지 알래스카의 인기있는 주지사였는데, 그것은 그녀가 정치 신출내기에 불과한 오카시오-코르테스와는 달리 정치에서 이미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스티븐 콜베어(Stephen Colbert)와 함께 “레이트 쇼”(Late Show. 역주: 인기 방송인 스티븐 콜베어가 진행하는 미국 CBS 방송의 심야 토크 쇼)에 나타나 완전히 터무니없는 말을 할 수 있으며 그러고도 갈채를 받고 미디어가 그녀의 말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드는 일을 겪지 않아도 됨을 의미한다. 페일린은 그런 호사를 결코 받지 못했다.

오카시오-코르테스에 대해 언론이 책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미국 언론인들이 현재 기억상실증(amnesia)이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니다: 미국 언론인들은 사회주의에 대한, 특히 그 정치적 사촌격인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한 ‘진정한 신봉자’이다. 내가 전에 썼듯이, 과반수 투표를 통해 경제 “계획가”를 선출하는 것으로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가 약 백 년 전에 지적한 경제계산이라는 처리하기 힘든 문제들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다. “민주적”이라는 말이 죽어가는 사회주의 교의가 갑자기 살아나 실제로 타당한 것이 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언론인들에게는 “민주적”이란 것은 수많은 오류들을 덮어주고 사회주의로 하여금 그것이 과거에 되어본 적이 없는 그 무엇으로 마법처럼 바뀌게 만드는 것이 되어 있다.

한 걸음 물러나 오카시오-코르테스 현상, 곧 한 정치 신인이 실패와 억압으로 알려진 체제인 사회주의를 오직 그녀의 존재 힘만으로 낙원으로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보다 거시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진보주의자들이 만들어 온 현재의 지적 조망을 틀림없이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면전에서 보는 것(혹은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더해 관점과 세계관의 거대한 충돌을 보고 있는 것이다.

거의 사십년 동안 자유지상주의 및 자유 시장의 세계의 일부였던 사람으로서(내가 『Freeman』에 처음 게재한 논문은 1981년에 나왔다), 나는 수백만의 사람들과,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우리의 삶을 더 좋게 만드는 재화를 생산하는 수십억 개의 가격들을 연관시켜주는 상호의존적인 행동들의 경이로움이 시장경제라는 경제적 관점을 채택해 왔다. 이윤의 추구를 통해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데, 그 결과 중 하나인 수십억의 사람들을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점은 거기에 참여한 어느 누구도 그 일이 일어나기를 의도하지 않았던 성취이다. 나는 가격기구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이해하고서 하이에크(F. A. Hayek)에 동의하는데, 그는 그것이 “의도적인 인간 설계”의 결과가 아니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이익을 증진하고자 노력하는 동안에 문명이 진보해 가도록 해 준다고 했다.

마지막 부분을 진보주의자들은 완전히 모순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그들은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처럼 인간 이익들 간에 “자연적”인 조화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진보는 ‘진정 똑똑한 사람들’(이들은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폴 크루그만 같은 사람들인데 이 두 사람은 벤담식 패러다임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다)이 우리 앞에 설정해 준 “인위적”(artificial) 구성물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문명은 선하든 악하든 지도자들이 가져오는 급격한 변화를 통해 진보되고 또 퇴보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예컨대, 스티글리츠와 크루그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을 통해 “중산층을 창조했고”, 경제불평등(이것이 호황과 불황의 “원인”이라고 주장되어졌다)을 줄였으며, 전반적인 생활수준을 높여준 거의 마법적인 경제체제를 고안해 내었다고 믿는다. 놀랄 것도 없이, 스티글리츠는 여러 해를 컬럼비아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그 대학은 또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진정 똑똑한 사람들’의 “두뇌 트러스트”(Brain Trust) 멤버들을 많이 채용했었는데 그들은 세계를 어떻게 조직할지에 관해 모든 것을(혹은 대부분을) 잘 안다고 알려진 사람들이다(역주: Brain Trust 두뇌 트러스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자문을 위해 구성한 전문지식인들 모임).

진보주의자들에 의하면 뉴딜은, 경제의 많은 부분을 일련의 규제를 받는 카르텔로 조직하고 노동의 조직화를 강조함으로써, 나라가 계속 번영하는 순환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는 것이다(그들은 실업률이 1930년대 내내 두 자리 수였다는 것에는 개의치 않는다).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만들었다는 경제적 성공은 1970년대 내내 거의 약화되지 않은 채 이어졌다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에 의하면, 그러다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갑자기 툭 튀어 나와 번영의 순환을 박살내어 버렸고 효력이 전혀 없는 “자유 시장”이란 가짜 약을 팔아먹기 시작했다. 대중은 (적어도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미국 및 영국의 경제가 당시 아주 좋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넌센스를 믿었고, 당시 전적으로 구속없는 자유로운 기업과 모든 규제적인 구조 제거를 요구하는 이 협잡꾼들을 선출했다는 것이다. 스티글리츠와 크루그만에 의하면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고 한다. 곧 경제 불평등, 생활수준의 하락 및 자본 축적으로부터 실제로 이득을 얻는 1퍼센트의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의 전반적인 삶의 악화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설명을 해 주는 통계를 제시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소용이 없다. 즉, 이 나라의 생활수준이 과거 40년 동안 크게 증진되어 왔다는 점, 소비자의 선택권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었다는 점, 세계의 수십억 사람들이 사기업의 성장으로 인해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 말이다. 말 재주는 말 재주일 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진보가 있었음을 부인하거나, 모든 진보는 사회주의의 요소 및 정부 계획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티글리츠에 따르면 가격기구는 “완전경쟁” 하에서만 작동하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완전 경쟁과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개념 정의 자체가 자명하게 알려주듯이, 오직 정부만이 진정 똑똑한 사람들 및 강제력을 통해 경제가 바로 작동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이 오카시오-코르테스를 지지하는 진보주의 세계이다. 그 세계는 말 재주 속에서나 작동되는 세계인데 거기서는 권력을 잡은 자들이 충분한 정치 의지를 행사한다면 사회주의 체제를 강행할 수 있으며, 그 체제는 우리가 쿠바, 북한 혹은 베네수엘라(또한 나는 진보주의자들이 닮아가야 할 체제로서 바로 이곳들을 여러 해 동안 내세워 왔다는 점을 지적해야하겠다)와 같은 곳에서 보는 것보다 더 나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경제 계산을 위해 이윤과 손실, 자유로운 가격, 사유재산권이 필요하다는 것을 거론한다면, 그들은 그보다 더 나은 길이 있으며 그것은 민주적 선거에 의존하는 것이며 ‘진정 똑똑한 사람들’이 권력을 잡게 하여 그들이 “사회의 필요”(needs of society)를 결정하게 하며 그리고는 긍정적 및 부정적 “유인”을 사용하여 ‘진정 똑똑한 사람들’이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여기는 행동들로 사람들을 명령해 가는 것이라고 대답할 뿐이다. 사회적 가치가 가장 높은 곳(‘진정 똑똑한 사람들’이 정하는 대로)으로 자원이 돌아가도록 지시하는 과정에서 모든 노동자들은 제대로 보상을 받고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노동에 고용이 되는데 그 노동은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착취가 없는 것이다. 결국, 낙원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오카시오-코르테스는 사회주의에 몰입해 있을 뿐 아니라 비교적 젊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그녀는 버니 샌더스와 팀을 이루고 자유의 손실을 초래하지 않는 사회주의를 가져다 줄 역량이 있거나 혹은 전체 사회를 빈곤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혹은 최소한 진보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라는 것이 그녀가 젊고 매력적이며, 그녀의 청중들과 잘 소통하며, 사회주의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란다. 실업이 낮은 이유에 관해 행한 터무니없는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참으로 ‘진정 똑똑한 사람’인데 그것은 그녀가 젊고 사진발 잘 받고 사회주의 교의에 몰두해 있다는 것으로 확실해진 사실이라는 것이다.

희소성, 불완전한 지식, 불확실성 및 기회비용으로 특징 지워지는 다른 세계는 오카시오-코르테스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용어들은 노동자들을 속여 착취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책략들일 뿐이다. 희소성이란 말은 독점자들이 약탈적 자본주의를 부과하여 사람들에게 빈곤을 강요하기 위해 창조해 낸 인공적인 구성 개념(artificial construct)이라고 본다. 진보주의자들은 우리가 자원이나 그것들을 생산적 목적으로 사용할 수단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특히 우리의 정치제도들이 필요한 정치 의지(political will)를 결여하고 있는데, 그것은 금권주의자(金權主義者)를 지지해 온 경제학자들이 경제에 대해 그릇된 그림을 그려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에게 경제학을 설명하려고 함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자들에게 위성의 궤도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다이아몬드-물의 역설(역주: 물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으나 다이아몬드 없이도 살 수 있으므로 물의 사용가치는 다이아몬드의 사용가치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다이아몬드의 교환가치가 물의 교환가치보다 훨씬 크다는 애덤 스미스의 역설이다. 이 역설은 오스트리아 학파의 한계효용이론으로 해결되었다. 즉, 소비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다이아몬드의 한계효용은 소비량이 많은 물에 비해 ‘한계효용’이 훨씬 더 높으므로 다이아몬드 가격이 물 가격보다 당연히 높다)이란 언어적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의료 돌봄, 주거, 음식이나 진보주의자들이 인권이라고 주장하는 그 밖의 모든 것의 생산과 분배에 경제 계산이 담당하는 역할이 있음을 믿지 않을 것이며, 혹은 수도 워싱턴 DC의 한 사무실로부터 전체 경제가 지시될 수 없다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오카시오-코르테스가 보스턴 대학의 경제학 전공자였음은 이중으로 역설적이다. 비록 거기서 가르쳐진 경제학이 대부분의 대학 경제학 프로그램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statism)와 다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말이다. 그녀가 가격이론 비슷한 뭔가를 지적으로 자기 것으로 잘 소화해 내었을까는 의문스러우며, 분명 그녀는 결핍 혹은 잉여 비슷한 뭔가를 분명히 식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가 정부 간섭을 옹호할 것이며 결핍사태를 가져올 게 거의 확실한 프로그램들을 입법화할 것이란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더 네이션』(The Nation) 및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의 편집자들은 잘 생긴 얼굴의 젊은 여자가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중앙계획자들을 백 년 동안 괴롭혀 온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을 스스로 가졌을지 모르지만, 비록 진보주의자들이 경제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지하게 믿을지라도,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진보주의가 또 다른 교만을 부리는 것에 불과하다. 버니 샌더스는 사회주의가 작동하도록 만들 “비결을 지닌 자”가 아니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도 사회주의가 작동하도록 할 “비결을 지닌 자”가 아니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사회주의가 작동하도록 할 “비결을 지닌 자”가 아니다. 폴 크루그만도 사회주의가 작동하도록 할 “비결을 지닌 자”가 아니다. 그런 비결 지닌 자는 없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미국 언론인들이 아무리 떠들든 간에 말이다.


글쓴이) William Anderson

윌리엄 앤더슨은 미제스 연구로 잘 알려진 오번대학교(앨러바마)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매릴랜드의 프로스트버그 주립대 경제학교수로 있으며 미제스 연구소의 협력 학자이기도 하다. ‘민주적 사회주의’란 말에서 핵심어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임을 지적한 “The Key Word in ‘Democratic Socialism’ is ‘Socialism’” 등의 논문을 미제스 연구소에 발표해 왔다.

옮긴이) 김행범 (부산대학교 교수)

▶원문) https://mises.org/wire/alexandria-ocasio-cortez-wont-be-one-finally-make-socialism-work

▶자유와 시장경제에 관한 더 많은 글을 「미제스와이어」(www.mises.kr)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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